46. 광복군과 김구 6
앞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함수관계를 정리했지만, 그것은 김구가 체험한 내용이고, 좀더 개관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논할 필요가 있어서 다소 중복되지만 이들의 관계를 소상히 밝혀 보려고 한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대회에서 낭독된 선언문은 아래와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자(茲)에 선포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통치하는 동안 누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자비한 압박 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갖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와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방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 자 왜적에 대한 무장 항전의 준비는 그의 도의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연합전선에서 우리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제의 공격 앞에서 장개석의 군대는 패퇴를 계속했다. 1939년 국민당 정부는 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따라서 김구가 주도하고 있던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도 중경으로 옮겨갔다. 중경은 양자강과 가릉 강이 만나는 삼각주에 제일 작은 도시였다.
그 무렵 김구가 이끄는 광복단체연합회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이청천), 하와이에 있는 6개 단체가 모인 우파 연합체이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상숙), 조선혁명자 연맹(유자명, 유림)등의 좌파연합체이다.
한국광복단체 연합회는 조선민족전날 연맹이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에 대항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관 지청천, 30여명이 소규모 부대로 출발했다. 조선의용대를 북상 시킨 후 남아 있던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여를 원했지만 김구는 그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기에 반대했다.
이즈음 1937년 6월 동북항일연합군이 국내 진공작전의 하나로 함남 갑산군 보천보를 공격한 전투는 승리로 끝났고 이는 침체에 빠진 우리 독립투쟁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보천보는 면소재지로서 일제의 각종관청과 산림경영소가 있고, 항일유격대의 국내진출을 막는 군사요충지였다.
6월 4일 밤 동북항일연합군 제26사는 보천보를 급습하여 군사시설, 경찰, 통신기관을 파괴하고 다수의 군수품을 빼앗은 다음, ‘포고’와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가자’는 격문을 살포한 후 압록강을 넘어 철수했다.
일제는 혜산과 장백 일대의 국경경비 병력을 총동원하여 추격전울 벌였으나, 이들 역시 독립군에 의해 전멸되었다. 일제는 연속적인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조선 주둔군 제19사단 74연대를 국경 일대의 유격대 토벌을 위해 동원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소식이 조선의 고을마다 전해지자 조선민중들은 감격과 흥분으로 들끓었다.
보천보 마을에 살포된 포고문과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이 포고문과 격문은 항일독립운동의 진면모를 확연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포고
간악무도한 강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고, 20여 년 동안 총독정치라는 식민지 통치로써 조선동포들을 유린, 학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조선동포들은 놈들에게 피와 땀으로 된 재산을 모조리 약탈당하고, 비참한 식민지 노예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분만 아니라 놈들은 우리 민족을 제2차 대전에 선봉대로 하여 중국을 침략하는 전쟁의 도구로 내몰았다. 우리 조선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리들은 자기 민족의 출로를 개척하고, 자기 살 길을 타개하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우리들이 6~7년간 만주광야에서 필사적인 투쟁으로 일본제국주의 약탈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중 것은 세인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본군은 조선에 잇는 애국지사와 열혈적인 본군 용사들의 강력한 단결에 기초하여,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흡혈귀 조선총독부와 싸울 목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남 북 일대에 원정하게 되었다.
가련한 조선동포 형제여! 속히 출동하여 반일 민족통일 전선에 단결하여 각종 투쟁으로써 본군의 유격전쟁에 호응하라.
하루속히 일제통치를 분쇄하고 진정한 조선민중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매진하자!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 나가자
동포형제들!
우리들은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우리는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눕힌 승리의 결전장에서 그립던 조국동포들과 이처럼 뜻 깊은 상봉을 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대표하여 우리 혁명군을 물심양면으로 적극지지, 성원하여 준 여러분과 국내 애국적 인사들에게 뜨거운 가마를 드립니다.
여러분!
오늘 강도 일제는 온 삼천리강토를 군대와 헌병, 경찰 망으로 뒤덮고 있으며 각종 악법을 조작하고, 수많은 애국자들은 야수적으로 검거·투옥·학살하며, 우리 인민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거세하려고 내선일체니, 동조동근이니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황도정신을 강제로 불어넣으려 하며, 심지어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의 민족문화와 아름다운 우리말 까지 유린, 말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강도 일제는 우리 민중에 대한 착취와 약탈을 강화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귀중한 재부
(財富)를 깡그리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일제 놈들은 이곳 산간벽촌에까지 약탈의 마수를 뻗치고 우리의 귀중한 산림자원을 모조리 약탈해 가고 있습니다.
일제 놈들은 여러분을 마소와 같이 온갖 고역에 내몰면서 피땀을 여지없이 짜내고 있으며, 화전농사 마저 제대로 짓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해 가고 있으며, 허드레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오막살이에서 눈물겨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강도 일제는 최근에 이르러 중국대륙 침략책동을 더욱 강화 하면서 우리 인민에 대한 파쇼적 탄압과 강도 적 약탈을 미친 듯이 감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 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온 나라는 황폐화되어 암흑천지로, 인간 생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여러분!
압제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투쟁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우리나라의 열혈청년들과 애국인사들은 일제의 폭압정책을 짓부수기 위한 반일 성전에 분연히 떨쳐나섰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우리 민족의 출로를 개척하고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손에 무장을 잡고 6~7년간 조선과 만주광야에서 일제침략자들과 영웅 무쌍히 싸워 왔습니다. 우리 혁명군은 도처의 적들을 족치고 심대한 정치, 군사적 타격을 주었으며, 망국의 설움을 안고 짓밟혀 사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서광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도 강화되고 세계혁명 역량도 강대해지고 있으며, 우리의 투쟁에 대한 전세께 인민들의 지지도 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달성할 것이며,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고야 말 것입니다.
혈로를 뚫고 나아가는 우리 혁명군 용사들의 대담무쌍한 활동과 혁혁한 전과에 당황망조한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갖은 발악을 다하고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어리석게도 우리 혁명군의 진출을 막아보려고 국경 강화에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습니다. 심지어 놈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완전 토벌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 선전놀음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일제 놈들이 이처럼 발악적으로 책동하여도 조선인미군혁명군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 위용을 만천하에 시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가 철벽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국경경비진을 뚫고 국내에 진격하며, 며칠 전에는 무산 방면에서 종횡무진의 활동으로 원수들에게 복수의 물벼락을 안기었으며, 오늘은 여기 보천보에서 우리 민족의 불굴의 투지와 숭고한 기개를 유감없이 시위하였습니다.
우리 혁면군은 방금 경찰관 주재소, 면소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폭압기구와 통치기관들을 짓부수고, 거기에 도사리고 앉아 여러분들에게 온갖 불행과 고역을 들씌우던 우리민족의 피맺힌 원수 일제침략자들을 소탕하여 버렸습니다.
여러분!
저 불길을 보십시오. 거세차게 타 번지는 저 불길을 놈들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불길은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날강도 일제 놈들과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불길은 학대와 굶주림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희망의 서광으로 빛날 것이며, 투쟁의 불씨로 되어 온 삼천리강토에 퍼지게 될 것입니다.
조선민족은 일제 놈들과 동조동근도 아니며. 우리는 놈들의 떠드는 내선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조선인민혁명군은 복수의 총검을 더욱 억세게 틀어잡고 기아와 빈궁,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는 2천 300만 겨레를 해방하고 기어이 조국을 광복하고야 말 것이며, 독립된 조국땅위에 착취 없고, 압박 없는 인민의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여러분!
조국을 광복하는 것은 오늘 조선민족의 사활적요구입니다. 우리 모두 일제식민지 통치 밑에서 억울하고 비통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앉아서 한탄만 하지 말고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 아래 더욱 굳게 뭉쳐 침략자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광복의 대업을 실현하기 위한 성전에 한 사람 같이 떨쳐나섭시다.
투쟁만이 살 길이며, 민족재생의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은 만남을 극복하고 온갖 성의와 열의를 다해서 합심협력 하여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조선독립을 위한 반일성전에 총궐기 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종 투쟁으로 우리 민족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는 흡혈귀 조선총독부의 온갖 반인민적 책동을 철저히 파탄시켜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일제침략자들의 허위선전을 짓부수고, 우리말과 글, 우리의 민족적 정신을 끝까지 고수함으로서 조선민족으로 불굴의 기재를 떨쳐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백전백승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반드시 독립된다는 확고한 신념과 민족적 자부심을 굳게 가지고 조선인민혁명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억세게 싸워 나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저 불길이 온 삼천리강토에 활활 타 번지게 합시다.
동포 여러분!
최후 승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 광복된 조국 땅 위에서 다시 만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은 위해 총 매진합시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이렇게 포고문과 격문이 나붙고 치열한 독립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중국 본토에서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대립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양측의 통합을 적극 추진했다. 국공합작이 이미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국민당 관내에 있는 조선인들이 공산당 측에 넘어가지 않도록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장개석은 남아 있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통합시키는 대신 민족혁명당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도록 종용했다. 그 결과 1942년 5월 잔류 조선의용대 약40여명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이 제1지대장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민족혁명당은 정식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장개석은 임시정부에 광복군의 행동규범 2개항을 통고했다. 광복군의 행동범위를 제한하고 명령권을 중국군사위원회가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와 2개 지대에는 중국인 장교가 다수 들어가 작전, 인사권을 통제 했지만 삼민주의를 교육시켰다. 삼민주의란 손문이 주창한 민생, 민족, 민권을 말한다.
광복군의 옷에도 중국의 청천백일군(靑天白日軍) 휘장을 달게 했다.
광복군의 군사권이 임시정부 휘하로 들어와 명실 공히 임시정부의 무장부대가 된 것은 1945년 5월의 일이다. 그때 군무부장으로서 광복군을 총지휘한 사람은 김원봉이다.
1943년 5월 김원봉과 인도주재 영국군 대표 맥킨시는 조선민족혁명당 인도 연락단 조직계획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영국군은 조선민족 혁명당을 원조하고, 조선민족 혁명당은 영국의 대일 작전을 원조한다는 내용의 12개조로 된 협상이다.
그런데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가 있는데 일개정당이 외국과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중국 국민당도 중국군사위원회 소속 광복군 명의가 아니면 출국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인도파견단의 임무는 광복군 사령부로 이관되었다. 3개월 후 한지성(韓志成)을 비롯해 8명의 광복군이 인도로 파견되었다. 그중 6명이 민족혁명당 당원이었다. 한지성은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안중군의 동생 안정근의 사위이다.
이후 인도파견 전지공작대는 순번제로 교대되면서 1945년 가을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어 정보수집과 선전분야에서 활약, 그 공로로 영국여왕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한편 김구는 1945년 초부터 미국 정보기관 OSS(미군전략정보처)와 협조 하에 비밀리에 서안(西安)에서 광복군 2지대를 특수훈련 시켰다. OSS본부는 중경에, 서안에는 북중국 지부가 있었다.
8월 7일 김구는 서안으로 가서 이청천, 이범석, OSS총책임자 도노반 소령과 국내진입 작전회의를 가졌다. 9일 OSS대원들은 미국이 제공한 무기와 무전기 등 장비 일체를 받았고, 환송회를 열었다. 남은 것은 출발명령뿐이었다.
일제의 항복 선언이 빨랐던 탓일까? 계획했던 국내 진공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김구는 이들을 임시정부의 환국을 위한 선발대로 보내자고 했다. 8월 18일 이범석이 이끄는 OSS대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비행기를 포위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아직 휴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비행기는 다시 성재로 돌아왔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을 허락받은 것은 11월초였다.
미군정은「개인자격으로 입국 한다」는 각서를 받고 23일 수용기 한 대를 상해로 보내주었다. 사실 임시정부는 그때까지도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임시정부의 승인요청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소련은 임시정부를 중국 국민당 반공반소 특수기관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 임시정부 단장 자격으로 이승만이「얄타비밀협약」에 의거하여 소련이 한반도를 적화하려 한다는 전단을 회의장에 뿌린 이른바 반소 소동 때문이다.
한편 장개석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싶어도 미국, 소련과 보조를 맞춰야했으므로 독자행동을 삼가고 있었다.
수송기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은 15명 정도,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 선전부장 엄항섭, 그 밖의 수행원들이 1진으로 출발 했다. 김원봉 이하 민족혁명당을 제2진으로 배정되었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들은 「임시정부, 곧 김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광복군이 조국 땅을 밟은 것은 1946년 6월 5일이다. 광복군은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과 함께 해방 전야의 주요 항일투쟁세력이었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들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과정에서 주역이 되지 못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독립군을 능멸하던 만주사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 출신들이었다.
김구는 광복군을 창설하긴 했지만 연합국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구가 상주하고 있는 임시정부 청전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인 일단의 청년들이 애국가를 소리높이 부르며 들어왔다.
「저희들은 화북 각지의 왜놈부대를 탈출한 한국인 학병들입니다. 부양으로 탈출하여 오는 것을 김학규 장군이 저희를 데려왔습니다.」
이 가운데는 장준하와 김준엽, 윤경빈, 김유깅, 석근영 등도 끼어 있었다. 청년들의 수는 50여명 되었다. 이것이 중경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각계의 인사들이 중한문화협회에서 50여명의 청년환영회를 열어주었다.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은 어릴 때부터 왜놈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역사는 물론이고 우리의 말과 글도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유학중에 일본군에게 징집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출전키 위해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만나 이별하기에 앞서 부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놈들에게 끌려가 개죽음 당하지 말고 죽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죽어라. 그러기 위해서는 중경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주석을 만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탈출하다가 많이 죽거나 다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서 우리 정부를 찾아 온 것입니다.」
이들의 말에 한인 동포는 물론, 이 자리에 참석한 연합국 사람들까지 그들의 조국애에 감동돼 눈물을 흘렸다.
OSS와 김구의 관계는 이렇다. OSS는 미국전략사무국의 약자(Office Of Strategic Service)로서 미국은 2차 대전 중 해외전략기구로서 정부활동과 유격활동을 병행하여 적 후방지역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1942년 창건했다.
당시 OSS주관자 서전트 박사와 이범석 지대장이 합작하여 서안에서 비밀훈련을 시켰다. 우리말에 능숙한 윔스 중위는 부양에서 김학규 지대장과 합작해서 비밀훈련을 시켰다. 이들은 모두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한국으로 밀파하여 파괴, 정탐 등의 공작을 개시할 준비를 끝냈다. 이때 김구는 미국 작전부장 도노반 장군과 대일 공작을 협의하기 위해 미국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가서 긴급회담을 가졌다. 도노반 앞에는 미국훈련관들, 김구 앞에는 제2재대 간부들이 앉았다. 도노반 장군이 선언을 했다.
「이 시간부터 미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작으로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되었다.」
김구와 도노반이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사진촬영, 이것으로 의식을 마쳤다.
그 이튿날부터 비밀훈련을 받은 학생들의 실전실험이 시작되었다. 김구 일행이 도착한 곳은 종남산(終南山)의 옛 사찰에 있는 비밀훈련소였다. 산 입구까지 가서 차를 버리고 다시 걸어서 5리쯤 들어가니 시간이 점심때라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들었다. 김구는 이런 음식을 생전 처음 먹어보았다. 대체로 한국 군대는 물에 내용물을 집어넣고 끓인 국이 빠져서는 안 되는데 이 국이란 것이 전투 시에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국을 끓이기 위해서는 불을 피워야 하는데 야간에는 적에게 위치를 발각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 징키스칸이 서양정벌에 나설 때는 쇠고기를 말려 전투식량으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여송의 부대가 물에 타서 먹는 장, 즉 청국장이 알고 보면 전투식량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냉수 여러 통을 마당에 놓고, 군대용 국과 물그릇으로 병용하는 철기를 1인당 1개씩 나누어 준 후, 종이 갑도 한 개씩 나눠주었다. 종이갑을 헤치니 통조림 깡통, 담배 4개, 그리고 휴지까지 들어있었다. 종이로 싼 가루 한 봉지를 냉수에 섞어보니 훌륭한 고깃국이 되었다. 김구가 먹은 것은 요즘으로 치면 전투식량이었던 것이다. 간단한 요리 같았지만 양이 충분해 한 끼만 먹어도 힘이 절로 솟는 것 같았다. 왜병의 음식과 비교해서 월등히 나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서 왜병이 패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같았다.
김구는 기분 좋게 점심을 마치고 후식으로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그리고 미국 교관들의 실습 훈련 모습을 참관했다. 이에 앞서서 교관이 설명을 했다. 교관은 미국에서 심리학 박사를 딴 엘리트청년이었다.
「사람마다 각기 특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 특기를 잘 살리는 것이야말로 전쟁에 이기는 비결입니다. 즉 모험성과 창의성이 있는 자는 파괴술을, 지적능력이 강한 자는 정보원으로 정탐을, 눈 밝고 손재주 있는 자는 무전기 사용법을 훈련시킵니다.」
김구가 질문했다.
「한국학생들은 어떤가요?」
「아주 총명하고 창의성이 대단해 장래가 촉망됩니다. 앞으로 이 학생들이 귀국해서 큰일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다음은 실습이었다. 청년 7명을 종남산의 정상으로 데려가 수백 길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적의 군사기지를 탐지하고 오는 훈련이었다. 이른바 요즘의 유격훈련과 비슷한 것이었다.
소지품이라야 밧줄 하나가 전부였다. 청년 7명이 회의한 결과 수백 길 되는 밧줄을 끊어지지 않게 여러 번 매듭지은 후, 한끝은 상봉의 바위위에 매고, 다른 끝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후 그 줄을 타고 내려갔다. 마치 공중에서 곡예를 하는 것 같아 김구는 마음을 졸였다. 상봉에서 줄을 타고 내려간 학생은 아래쪽에 닿아서 증거물로 나뭇가지 하나씩을 꺾어 입에 물고 다시 올라왔다.
「좋았습니다.」
이 훈련은 담력과 기술이 있어야만했다. 이를 지켜본 교관은 희색이 만만해서 원더풀을 연발했다.
「얼마 전 중국학생 4백여 명을 모집해 이 훈련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데 누구하나 엄두도 못 내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국학생 7명은 훌륭하게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김구 역시 마음이 흡족했다. 이 학생들이야말로 독립국가가 된 후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곡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김구는 모처럼 중국 친구들을 방문했다. 김구는 중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중국 친구들이 많았다. 서안(西安)에 들어가서 호종남(胡宗南)장군을 만나려 했으나, 호장군은 출장 중이었다.
성정부 성주석 축소주(祝紹周) 선생은 다음날 자기 사랑에서 식사나 나누자고 했다. 중국에서는 대인(大人)이란 칭호를 즐겨 쓴다. 대인이란 그릇이 큰 사람을 일컫는데, 중국시골의 촌장이나 그 외에 어른으로 존경받는 사람을 대인이라고 한다. 대인은 소인배와 틀려서 도량이 넓고 호연지기가 있고, 쩨쩨한 인간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의(義)를 중히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또 대인은 국적을 초월해서 그 사람이 추구하는 일이 의로운 것인가, 자기네 동포를 위해 훌륭한 일이 의로운 것인가, 자기네 동포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는가를 판단해서 수긍이 가면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기도 한다. 어떤 보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선을 위하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질보다는 좋은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은 것이 중국 사람들의 성품, 즉 이들 대륙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는 중국에서 대인들을 많이 알고 지냈다. 그 사람들 역시 김구가 국적은 달랐지만 대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그날 한인 김종만씨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서안의 명소를 관람했다. 축(祝) 주석사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객실로 가 수박을 먹던 중 전화벨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구식전화기라서 벨 소리가 벼락을 치는 듯 요란하게 들렸다.
축 주석이 김구에게 양해를 구했다.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축주석은 옆방으로 가서 전화를 받더니 다시 김구에게 왔다.
「왜놈들이 항복한답니다.」
축 주석의 이 말은 김구에게는 기쁨이라기보다는 절망 비슷한 소리로 들렸다.
“왜놈들이 항복?”
“그렇습니다.”
축 주석이 답하자, 김구는 들고 있던 찻잔을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큰일 났소.”
“큰일?”
축 주석은 김구의 근심어린 얼굴을 처음 대했다. 일본이 항복한다는 말에 큰 기쁨을 갖고 화답(和答)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찻잔까지 떨어뜨리는 김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투시켜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놈들이 항복하다니,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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