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리운 사람들 8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감격의 귀환을 했다.
그는 11월 24일 귀환에 즈음하여 자신의 귀한 심경과 앞으로의 할 일을
거시적(巨視的)인 입장에서 발표했다.
이 성명은 23일 오후 8시, 엄항섭, 선전부장이 미리 프린트 된 것을 낭독한 것이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1945년 11월 24일,<자유신문>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조국 독립을 전취(戰取)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유명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아울러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연합국 용사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다음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삼천만 부모형제자매 및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소등 우방군에게 위로의 뜻을 보냅니다.
나와 나의 동사(同事)들은 과거 이 2,30년간을 중국의 원조 하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 왔습니다.
더욱이 이번 귀국에는 장개석 장국이하 각계각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에 있는 미군 당국의 융숭한 성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나의 동료는 중·미 양국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북부를 해방해준 소련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전쟁은 민주를 옹호하기 위하여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승리의 유일한 원인은 동맹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상호 단결 협조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번 전쟁을 영도하였으며 따라서 큰 전공을 세운 미국으로도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맹국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동심협력한 동맹국에 대하여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풍은 다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일개의 시민이 자격으로 귀국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노력한 결과에 이와 같이 여려분과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해 주시니
감격한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지는 오직 통일된 독립 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수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조금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속이나 물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기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구(未久)에는 또 소비에트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북쪽의 동포도
기쁘게 대면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이날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안전히 독립자주 하는 통일된 신민주 국가를 건설하기위하여 공동분투 합시다.
김구는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중경에서 길을 떠나 상해 비행장으로,
상해에서 비행기를 타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김구는 비행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하나는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기쁨이요,
또 하나는 왜놈의 악정에 시달리다가 고혼이 된 수많은 사람들의 영령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책보를 메고 발길을 가볍게 학교로 향하는 모습에서
김구는 우리 민족이 장래가 밝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김구에겐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동포들의 가옥들이 납작한 게딱지같아서,
그 가난과 빈궁을 보는 것 같아 김구는 마음이 아팠다.
일제 통치 기간 중 왜놈들이 수탈해간 나머지로 간신히 연명을 했으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동포들이 김구를 환영하기를 기대했는데 막상 차를 타고 연도를 지나치자
환영 나온 인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모든 소식은 미군을 경유하기 때문에 통신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70이 넘은 노구를 자동차에 의지하고, 김구는 차창으로 좌우를 바라보았다.
비록 보이는 정경이 가난과 빈궁 때문에 초라했지만,
의구한 산천이 김구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김구는 숙소인 죽첨정(竹添町)주인 최창학(崔昌學)의 사택으로 향했다.
죽첨정, 또는 죽첨장은 일제 때 광산업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의 별장이었다.
한편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수행원들은 한미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김구는 윤봉길과 김경득(金卿得)의 유족을 꼭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이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윤봉길은 4·29폭탄 의거에 한 몸을 불살랐고,
김경득은 40여 년 전 김구가 인천옥에 수감돼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전 재산을 팔아서
김구를 구출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김구는 이 세 사람의 유가족을 찾기로 하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
그 결과 윤봉길 의사의 자제는 덕산(德山)에서 찾아왔고,
김경득의 아들 윤태는 이북에 있어서 못 오고, 그 친딸과 친척 등이 강화, 김포에서
찾아와 반가운 해후를 했다.
김구는 고향인 해주에 가보고 싶었으나 3·8선이란 장벽 때문에 갈수가 없었다.
다만 남한에 있는 재종형제들과 사촌누이들만이 상경, 기쁨을 갖고 만났을 뿐이다.
김구의 환국은 전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오로지 평생 동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한 김구를 환영하기위해 거의 모든 단체가 나섰다.
「임시정부환영회」라고 크게 쓴 글씨를 태극기와 함께 창공에 휘날리고,
수십만 겨레가 총출동하여 서울뿐만이 아니었다.
인천, 개성등 각 지방에서도 임시정부 환영회를 일제히 거행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는 환영회대신 욕설과 독기어린 말로써 김구 일행을 중상모략 했다.
김구는 이 소식을 듣고 씁쓸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시위행진을 마친 뒤 덕수궁에서 열린 환영연회는 김구 생애의 큰 영광으로 기록되었다.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정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고,
서울의 모든 기생들이 나와 춤과 노래로 노 애국자 귀국을 환영했다.
식탁이 4~5백 개나 되고, 음식이 산을 이룰 정도로 그 연회규모가 엄청나서
김구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김구는 귀국한 후부터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46년을 맞이하자 김구는 생애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행을 시작했다.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슬픔과 기쁨을 안겨준 장소와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김구가 제일먼저 찾은 곳은 인천이었다.
22세 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고종황제로부터 형 집행을 정지 받고
복역하던 중 23세 때 탈옥, 도주했다.
그리고 18년 후인 46세 때 15년 징역을 선고받고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 감옥을 김구는 다시 한번 가보았다.
김구가 있던 자리는 그대로 있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아는 얼굴이란 한명도 없었다.
그때 김구는 축항공사(인천항신축공사)를 위해 힘든 노역을 했다.
인천항에 들러서 자신이 노역했던 현장을 가보니 감개무량했다.
그때 김구를 면회하기 위해 김구의 부모님은 거의 매일 내왕했고,
그 감옥 앞의 박영문씨와 안호연씨 등은 벌써 오래전에 타계를 했다.
모두가 김구에게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김구의 인천 순시는 그곳 주민들의 환영과 잦은 연회로 성황리에 끝났다.
김구가 두 번째로 들른 곳은 공주의 마곡사였다.
탈옥하여 유랑하던 중 이 서방이란 사람과 함께 찾아간 곳이 마곡사였다.
이서방의 권유로 그는 하은당 스님의 상좌승이 되어 중노릇했다.
그러나 중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은당 스님의 후계자를 마다하고 다시 상경,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기도 하다.
김구는 70이 넘은 나이에 다시 마곡사를 찾아와 자신의 젊은 시절의 훈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구의 마곡사 방문소식이 전해지자,
충남북의 10여만 동포들이 운집해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환영회가 끝나고 공주를 떠나 김복한(金福漢) 선생의 영정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영정을 심방, 배알하고 그들 유족을 위로했다.
김복한 선생과 최익현 선생은 모두가 훌륭한 항일 구국지사였고 선비였다.
마곡사를 향하는 김구의 행도에는 각 군의 유지,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자만 350여명이 넘었다.
마곡사 입구에는 승려들이 도열하여 지성껏 환영을 해주었다.
일개 승려의 몸으로 수행자 노릇을 하던 사람이 몇 십 년 후 국가의 주석이 되어 온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바로 48년 전 그는 중이 되어 큰 갓을 쓰고 염주를 목에 걸고, 바랑을 지고 다녔다.
출입하던 길의 좌우를 살펴보니,
산천은 변함이 없지만 사람들은 세월 따라 모두 사라져 버려 새삼 인생무상을 느꼈다.
대웅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柱聯)은 그대로 있어 김구를 알아보는 듯했다.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去來觀世問)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猶如夢中事)
김구는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보니 주련의 글귀처럼 정말 한갓 꿈만 같았다.
옛날 용감스님에게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날 밤 마곡사의 승려들은 김구를 위해 정성껏 불공을 올려주었다.
그러나 48년 전의 승려들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
극락세계 가 있음이 분명했다.
혜명스님도, 호덕삼(扈德三) 스님도 지금은 모두 열반했으리라.
긴 세월에 비하면 인생의 사람이란 눈 깜짝 하는 사이인데,
그 동안에 영욕을 견디지 못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다음날 아침 김구는 영원히 마곡사를 잊지 않겠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포기와 향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이때 김구가 심은 향나무는 지금도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남아있다.
세 번째로 김구가 찾아 간 곳은 예산 시량리 윤봉길 의사의 본댁이었다.
4월 29일, 일찍이 윤의사가 홍구공원에 시라까와(白川) 대장을 향해 폭탄을 던진 날이었다.
거기서 윤 의사 기념제를 거행하고 상경했다.
김구는 서울에 온 즉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열(朴烈)에게 부탁해,
자기 한 몸을 던져 조국 광복에 이바지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케 하고
국내에서 장례준비를 진행했다.
얼마 후 비서들이 「유골이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라고 전하자,
김구는 특별열차 편으로 부산에 내려갔다.
김구는 부산에서 3 열사의 유골을 받아들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3열사의 말없는 환국과 유골 봉환식을 거행하고, 영구를 서울로 봉환하기위해 부산역을 출발했다.
아마도 유골도 생각이 있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부산역 앞에서 서울역까지, 각 역전마다,
사회단체와 교육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인사들까지 운집, 도열하여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 날 따라 산천초목도 슬피 우는 듯 하늘을 찌푸렸고 가끔씩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다.
서울에 와서 유골은 태고사(太古寺)에 봉안하고, 동포들 누가 할 것 없이 경의를 표하게 했다.
장지는 김구가 직접 나서서 골랐다.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위원들이 장지를 물색했으나,
여의치 못해 김구는 장지를 용산 효창원으로 정했다,
장례식은 사람들의 물결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군정청 간부들을 비롯해, 조선인 경관, 육해군 경비대까지 집합하고,
각 정당단체, 교육기관 일반인사까지 모두 참석했다.
이날, 전차, 자동차등 각종 차량과 일반 보행자까지 잠시 정지한 채 엄숙해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조가(弔歌)가 울리고, 사진기자들이 여기저기서 불빛을 터트렸다,
여학생들이 3의사의 상여를 모시니,
국왕의 인산(因山)때 이상으로 장례식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장지에는 제일 앞머리에 안 의사(안중근)의 유골을 모실 자리를 비워 두고,
그 아래쪽으로 3의사의 유골을 차례로 모셨다.
그날 임석한 유가족이 애도와 사회단체장들이 추도문 낭독으로 인해 찬란한 태양도 잠시
빛을 잃은 듯 했다.
김구는 얼마 후 삼남(三南)지방을 순회하였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김구는 그리 인연이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주도역시 대한민국의 국토이고, 같은 민족으로서, 호흡을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로 김포를 출발해서 제주도에 착륙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각 정당단체와 교육, 교회
각 공장 부문에서 노(老)애국자의 방문을 맞이해서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어주었다.
그런 뒤 고(高), 부(夫), 양(梁)씨의 시조를 모신 삼성전(三聖展)에 참배한 후,
그 아래 삼성혈(三聖穴)을 시찰했다. 삼성혈은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양을나(梁乙那)의 신(神)이 나왔다는 굴이었다. 굴을 나와서 제주도의 해녀들의 작업광경을 관람했다.
먹고 살기위해 열심히 일하는 해녀들의 건강한 삶이 인상적이었다.
한라산에 등정하기로 했으나 날씨 때문에 오르지 못하고 부산을 거처 진해로 갔다.
진해에서는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안내로 해안 경비대의 열병식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던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을 방문하고
충무공의 영정에 참배했다.
제승당은 경남 통영군 한산면 한산도에 있는 옛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였다.
참배 후 김구가 좌우를 살펴보니 제승당이라고 쓰인 현판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김구가 담당자에게 물었다.
「이 현판은 왜 제자리에 붙어있지 않소?」
「예, 왜정시대 때 떼고 그동안 방치해 두었습니다.」
「다시 붙여놓아야 하오. 그동안 보관한 것도 다행이긴 하지만.」
김구는 관리인이 제승당 현판을 거는 것을 확인한 후 진해를 시찰했다.
진해는 조선시대의 요새지로 해군의 기지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경비함을 타고 통영에 상륙, 여수와 순천을 시찰했다.
가는 곳마다 김구 일행을 환영하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득량리는 김구가 48년 전 망명할 때 몇 개월 동안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곳은 김구와 본(本)이 같은 안동 김씨들이 모여 사는 동족부락이었다.
동족들은 물론이고 인근 지방의 동포들이 환영 나와서 성황을 이루었다.
입구의 도로를 수리하고 송문(松門)을 세웠는데 김구는 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갔다.
48년 전 김광언(金廣彦)의 가옥은 그대로였다.
김구는 그 옛날 자신이 식사하던 자리에서 다시 앉아서 식사를 하니 감회가 깊었다.
마루 위에 병풍을 두르고 정결한 자리에 앉으니 눈앞에 보이는 산천은 그대로였으나
사람들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김구는 옛 사람을 하나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김구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이 있소?」
그러자 동네 할머니 한 사람이 대답했다.
「제가 일곱 살 때였죠. 선생님이 글공부하시던 곳에서 놀던 생각이 나는 군요.」
이어서 동족(同族)가운데 한 사람인 김판남(金判男)이란 사람이 나서서.
48년 전 김구의 필적이 분명한 책 한권을 내보였다.
「이 책 기억나시는가요?」
「글쎄요. 어디 봅시다.」
김씨가 내민 책을 보자 동국사기(東國史記)였다.
동국사기 필사본으로서 김구의 글씨체가 첫눈에 보아도 역력했다.
김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타계했음이 틀림없었다.
김구는 불현 듯 한사람이 떠올랐다,
48년 전 김구와 동갑되는 선(宣)씨라는 사람이었다.
선씨는 배움은 깊지 못했으나 공부를 해보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김구와는 격의 없이 친구로서 지냈다.
김구가 동네를 떠날 때 선씨의 부인이 직접 손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붓주머니 하나를
작별의 기념으로 준적이 있었다.
김구는 바로 그 선씨에 대해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다.
「선씨는 세상을 떠났고, 부인과 가족이 보성읍내에 살고 있습니다.
노부인 역시 그때 일을 잊지 않고 늘 이야기 하더군요.
선생님이 보성으로 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김구 일행이 그 동네를 떠나 보성읍에 도착하니 노부인이 나와서 김구를 맞이했다.
「선생님 옛날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기억이 나는군요.」
김구는 그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48년 전, 젊은 시절 유랑걸식을 하면서 전국을 방랑할 때 선(宣)씨 집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부인은 얼굴이 곱고 행실이 반듯했다. 김구는 부인에게 물었다.
「춘추가 어찌 되었소?」
「칠순이 넘었지요.」
나이를 맞춰보니 김구와 동갑이었다.
김구는 모처럼 동갑내기와 옛일을 회상하며 잠깐 동안이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보성에서 강연을 마치고 광주로 가는 동안에도 연도에는, 흰옷 입은 백성들이 수없이 많이
몰려나와 김구를 환영했다.
백성들은 저마다 김구에게 해산물, 금품, 육산물(肉産物) 등을 건넸다.
모두가 성의를 표시하는 따뜻한 마음의 전달이었다.
김구는 이 물건들을 모두 차에 싣고 가다가 광주에 전재민(戰災民)들이 많다는 것을 듣고
시장을 불러, 전재민을 도와주는데 쓰라고 물건들을 전했다.
김구의 다음 행선지는 나주였다.
함평읍에서 잠시 들러 동포를 상대로 강연을 했고, 저녁나절 나주읍에 도착했다.
48년 전 김구가 유랑생활을 할 때 이진사의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아까 함평읍에서 김구를 맞이해 우렁차게 만세선창을 한 사람이 바로 이진사의
둘째 아들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의 이재혁과 이재승은 바로 이진사의 손자들이었다.
나주를 떠나 김해로 가니 마침 김수로왕들이 추향(秋享)이었다.
추향이란 초가을에 종묘사직에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김해 김씨와 허씨가 모인 자리에서 김구에게 사모각대를 갖추어 주어,
조상제사에 한몫 거들었다.
본(本)은 틀리지만 우리 민족은 한 뿌리란 것을 김구는 인식하고 있기에 남의 제사 같지가 않았다.
그 다음 창원과 진전(鎭田)을 가서, 과거 상해 체류시 김구가 본국으로 파견해 독립운동을 시킨
이교재는 옥중에서 왜놈들의 고문을 받고 순국했다.
진주에 가서는 논개(論介)의 사당이 모셔져 있는 촉석루에 올라 논개의 영혼을 위로했다.
전주에서 김구는 모처럼 옛 사람의 뿌리를 만났다.
김맹문(金孟文)씨와 사촌동생 김맹열, 그리고 고종사촌 최경열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김구가 21세 때 신천의 청계동 안태훈 지사집에 유숙할 때 만났던 참빗장수 김형진의 아들과
조카들이었다.
김형진은 큰 뜻을 품고 전국을 돌면서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김구를 만났다.
김형진과는 청국으로 넘어가기 전 헤어져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전주시민들의 성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김구는 이등의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목포에서는 인천 감옥에서 함께 복역하다 양봉구씨를 찾아보았으나 흔적을 발견 못했다.
강경에서는 공종렬씨의 소식을 탐문했다.
그랬더니 안타깝게도 공종열은 젊어서 자살해서 자손도 없다는 것이다.
공종렬씨의 누이가 상노(床奴)와 눈이 맞아 상노의 아이를 낳고 자살해 죽은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여 년이 흘렀다.
김구는 공종렬의 부탁으로 상노를 혼내주었었다.
모든 것이 꿈결과 같은 일이었다.
춘천에서는 의암 유인석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했고 유가족을 위문했다.
그리고 강화에서는 김경득씨의 넷째 동생 진경의 집을 가보았다.
김구는 김경득의 소재를 수소문하기위해 그 집을 찾았으나 김경득은 없었고
동생 진경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김구는 김진경이 아들들을 몇 개월 가르쳤다.
그러나 신분이 탄로나 다시 유완무의 소개로 남도(南道)를 순회했다.
김진경의 후손들과 친척들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고 합일(合一)학교 운동장에서 강연을 했다.
그때 김구는 학생들에게
「옛날에 내게 배운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라.」
했으나 한명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경찰과 함께 중노인이 한명 김구를 찾아왔다.
「바로 제가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나에게 배운 기억이 나는가?」
「생각납니다.」
중노인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데 왜 아까 운동장에서는 대답을 안했는가?」
「선생님이 강연이 너무 감동스러워서 그만 손들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김구는 그 중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한참도안 쓰다듬어 주었다.
김구는 삼남 일대 시찰을 마친 뒤 이번에는 3 · 8선 이남, 개성을 비롯한 서부 조선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선 개성에 도착해서 만월대와 선죽교를 구경했다.
선죽교는 고려 말 정몽주가 이씨조선에 협력하지 않는다고,
이방원이 시킨 조영무란 졸개에게 쇠방망이로 얻어맞고 죽은 곳이다.
정몽주가 흘린 피가 아직도 다리에 남아 있다고 해서 찾아보았다.
과연 그것이 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다리 난간이 검게 얼룩져 있었다.
김구는 정몽주의 신하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다시 한 번 흠모했다.
친일파들이 득실대는 난국에 정몽주야말로 민족이 사표가 될 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김구는 해주 텃골에서 왜경에게 체포당해 인천옥으로 갈대 문득 보았던 이창매의 묘를 참배했다.
이창매의 묘는 49년 전과 다름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김구는 어머니와 함께 인천옥으로 향했었다.
왜경들이 잠시 참외를 사먹으러 갔을 때 김구는 만고의 효자 이창매의 묘앞에서
불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을 원망했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창매이 묘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머니의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
김구의 어머니는 중경(重慶)에서 운명할 때,
「내 원통한 마음을 어찌하면 좋겠냐?」
하시던 최후의 말씀이 생각나서 마음이 울적했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 인이는 먼 이역 중국의 화상산 남쪽 자락에 누워있으니
슬픈 마음만 들었다.
배천(白川)에 들러 40년 전 김구가 교육사업을 하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주었던
군수 전봉훈씨와 최광옥씨 등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최 선생이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읍내의 유지들과 전군수와 협의해서
배천 남산위 운동장 옆에 안장했었다.
이곳을 떠난 지 40년, 그때의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문득 불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연못에 비치는 황홀한 그림자.....」
모두가 한때는 뜻을 크게 품고 이상과 소망을 이야기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부질없는 일만 같아서 김구는 마음이 울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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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해방직후의 사회상 10 (0) | 2013.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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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나의 소원 9 (0) | 2013.03.27 |
47. 잘 있거라 상해여! 7 (0) | 2013.03.17 |
46. 광복군과 김구 6 (0) | 2013.03.17 |
45. 아, 이 참상들! 5 (0) | 2013.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