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45. 아, 이 참상들! 5

오늘의 쉼터 2013. 3. 17. 09:07

45. 아, 이 참상들! 5

  

 

 

 

  일찍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에게 종살이하던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탈출시킨 모세야말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고난 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이끌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떠난 지도자들의 이야기는 역사책 여러 곳에 등장한다.

  김구가 이야기하는 대가족이 이런 류(類)의 이야기에 속할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대가족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가족의 의미를 크게 정리한다면 1919 기미년 3·1운동으로 고국을 떠나 상해로 와서 살던 동포 5백 여인이 속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대가족은 조금 다르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의거 사건으로 상해에서는 더 이상 왜경의 감시 때문에 버틸 수 없어서 김구를 시작으로 상해를 탈출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말한다. 손일민, 이광 등 북경방면에서 여러 해 거주하다가, 노구교사건을 일으킨 왜놈들의 감시에 못 이겨 이들은 남경에서 합류했다. 대부분 상해를 빠져나온 가족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남경에서 두 파로 갈라져 빠져나왔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민족 혁명당이 한 파이고 김구가 거느리던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 3당이었다. 김원봉은 동지들과 가족들을 거느리고 남경을 빠져나와 한구를 경유해서 중경으로 옮겼다. 김구는 동지들과 함께 그 권속들을 이끌고 장사로 가서 8개월, 광주로 가서 8개월, 유주에서 몇 개월, 기강으로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토교동감으로 갔다. 이곳에서 새로 지은 가옥 4동에 1백여 가족이 집단생활을 했다. 집단생활이지만 가족끼리 따로 살았다. 또 그 외에 당부, 장부, 군부의 기관에 복무하는 동지들과 가족들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함께 거주하며 살다보니 친척이나 피붙이보다 더 가깝게 지냈고 그들의 생각이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알 수가 있었다. 또한 이들의 그 후 일로 김구는 여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행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씻지 못한 불행을 겪으며 죽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김구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김구는 비록 자신은 중국의 장사에서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동지들과 사무원의 가족을 친척보다 더 아끼며 보살폈다. 가족들 역시 연장자이며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런데 미처 상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가족들이 있어서 김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상해의 오영선과 이의순(이동휘의 딸) 내외와 그 자녀들이다. 오영선은 신체장애자로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가족에 편입시킬 수가 없었다.

  오영선은 그 후에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해가 완전히 왜놈들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김구로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명옥의 가족역시 그렇다.


  이명옥은 금천(金川) 출신으로 일찍이 3·1운동에 참가하여 일본의 정탐꾼을 암살하고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사무원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처자들이 본국에서 상해로 그를 찾아왔다. 이명옥은 임시정부에서 이렇다 할 생활비가 나오지 않자 생계를 위해 영국 상인이 운영하는 전차 검표원이 되었다.

  그 후 이명옥은 김구가 남경으로 이주한 뒤에도 비밀공작 임무를 수행했는데 왜구에게 체포되어 본국에 가서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이명옥의 부인 이정숙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녀들을 데리고 상해생활을 계속했다.

  김구는 남경에 거주할 때 생활비를 틈틈이 보조해줬다. 그러다가 김구는 고생하지 말고 대가족에 편입할 것을 권했다. 이정숙은 김구에게

「두 달에 한번 씩 본국의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서신을 보내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상해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며 김구의 호의를 사양했다.

  이렇게 지내던 중 큰 아들 이호상이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절강성 동부 일대에서 공작하다 가족들이 그리웠던지 상해로 돌아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왜놈들에게 발각되어 어머니인 이정숙이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은 이정숙에게 아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고문까지 하는 등 악형을 가했으나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이정숙을 타살했고, 큰 아들 호상은 동지 3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탈출하다가 4명 모두 왜구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호송되는 중 호상은 배안에서 작은 누이를 만났다. 작은 누이는 이호상에게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 어머니와 어린 동생은 왜놈에게 고문 받다가 살해당했어요. 저 역시 압송당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듣자 호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발작으로 기절했고,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쇼크 사(死)한 것이다.

  김구는 이런 사실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옛 말에 순천자(順天子)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子)는 망(亡)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도 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어린자녀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하늘은 이들을 보호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 뒀는가.

  김구는 그의「백범일지」에 비통한 심정을 읊었다.


 

  이러고도 인간이란 말인가? 나라를 잃은 지금까지 왜구에게 일가족이 도륙됨이 무릇 몇 백, 몇 천 이랴만, 기미 3 ·1운동 이래 상해 독립 운동가들이 당한 것에는 이명옥 군이 당한 비극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가 있다. 무릇 우리 동포들 자손들에게 한마디 남기노니, 광복완성 후 이명옥 일가를 위해 충렬문을 수안(遂安) 고향에 세워서 영구히 기념하기를 부탁하며 두노라.」


  

   대가족의 한 사람으로 목관(黙觀) 현익철 동지가 있었다. 현익철은 앞서 김구와 함께 장사의 남목청 연회에 참석했다가, 이운환에게 총을 맞고 순국했다. 그 당시 나이 오십이 채 안되었다.

  현익철이 살아있다면 김구와 함께 많은 일을 했을 텐데, 사람 같지 않은 이운환의 총탄에 맞아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고 김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쉬워했다.

 

  현익철은 평북 박천 출신으로 1926년 만주에서 양기탁 등과 고려 혁명당을 조직했고, 1929년 국민부 중앙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1931년 7년 형으로 신의주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가 만주로 탈출했다. 1937년 한국광복전선에 참여했으며,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 편수위원을 맡았다가 1938년 5월 장사의 남목청에서 이운환의 흉탄에 순국했다.

현익철은 사람이 강직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 쪽으로 기울어서 악을 극히 배척했다. 원래 아는 것이 많아서 만주에서는 정의부 수뇌부로 왜놈들과 공산당, 군벌 장작리의 부하들인 친일 분자들에게 포위된 가운데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싸웠다. 그러다가 결국 왜놈들에게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중징역을 마친 뒤 중국관내로 들어왔다.

  그 후 이청천, 김학규 등 옛 동지들과 조선혁명당을 조직했고. 남경에서 의열단이 주도한 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가 탈퇴하고 광복진선 9개 단체에 참가했다. 그는 남경에서 장사로 대가족에 편입되었다. 대가족에 편입된 사람들은 김구와 출생지와 나이는 달라도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현익철은 부인 방순희와 어린 아들 종화를 데리고 장사에 도착했다. 그 뒤 기구와는 딴 몸이 되어 행동을 같이 했다. 남목청에서의 연회에서 이운환이 쏜 총탄이 하필 현익철에게 관통당할 줄이야.

  김구는 그 후 광주에서 조성환과 나태섭 두 동지와 함께 중경으로 오던 길에 문득 현익철 동지의 생각이 났다. 그때가 바로 추석날이었다. 김구는 장사에 묻혀있는 현익철의 묘소를 찾아 절이나 올리자는 생각에서 두 동지의 의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선생님 안 됩니다.」

하면서 만류를 했다. 그리고 두 동지만 술과 안주로 참배했다.


  그들은 정에 약한 김구가 현익철의 묘소에 가서 그냥 참배만하는 것이 아니라 애절복통 할 것이 우려돼 만류를 한 것이다. 김구는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김구 일행은 장사에서 귀양행차를 타고 갔다. 가는 도중 길가 산 중턱에 서있는 비석을 보고 한 동지가 말했다.

「저것이 현익철의 묘지입니다. 선생님 똑똑히 보십시오.」

  김구는 목례를 보내며 속으로 이렇게 탄식했다.

「그대의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우리 사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겼소. 그러나 어찌하리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의 몫이 되어 버렸으니. 간악한 인간에게 영웅의 한평생이 쓰러지다니, 하늘이 울고 땅도 울었소. 부디 편히 쉬시오. 그대의 부인, 그대의 아들은 내가 안전하게 보호하리다.」

무정한 열차는 비석조차 보여주지 않고 바람과 같이 질주해 버렸다.


 

  대가족가운데서 가장 김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이었다. 김구가 이동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을사조약(乙巳條約) 당시 경성의 상동 교회에서였다. 당시 김구는 진사 이석(李石)으로 행세할 때였다. 이동녕 선생과는 함께 상소운동을 펼쳤었다. 그리고 한일 합병 후 경성의 양기탁의 사랑방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에 관한 사무 일체를 이동녕 선생에게 일임했었다. 그 후 이동녕 선생이 대가족을 따라 기강에 도착한지 1년 만에 71세의 고령으로 작고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이동녕 선생은 김구가 친형님이나 부모처럼 모시던 사람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시절, 동지들의 의견이 분분해서 통일이 안됐을 때 김구는 종종 이동녕 선생과 상의를 했고 자문을 구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논할 대상이 있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충고해 주며 때로는 회초리로 질책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인간이란 완벽한 사람이 없을진대 스승이 곁에 있어서 행동거지에 충고를 해주고 조언을 해준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바로 이런 사람이 이동녕 선생이었다.

  세상의 삶이란 한갓 아침 풀잎위의 이슬이라더니 호연지기를 꿈꾸며 국사를 논하던 주위의 동지들이 하나둘씩 타계하는 것을 볼 때마다 김구는 인간적인 진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동녕 선생은 재주와 덕이 출중하고 특히 남의 어려움을 보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 줄줄 아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재물에 인색하고 자신의 영화에 집착해서 동료를 헐뜯는 사람들이 어디 하나둘이던가.

  이동녕 선생이 타계한 후 김구는 큰일을 당할 때마다 선생을 떠올리곤 했다. 이동녕 선생 같은 고문(顧問)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구에게 또 다른 강렬한 인상을 준 동지로 손일민(孫逸民)이 있었다. 그는 몸이 약해 항상 병을 짊어지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굽은 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는 말도 있듯 약한 몸을 안고서도 항상 김구 곁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자문을 했고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기강에서 한줌의 흙이 되어 버렸다.

  손일민은 청년시절부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품고 만주방면에서 여러 해 방랑생활과 함께 운동을 펼쳤고, 북경, 남경, 장사, 광주, 유주로 다니다가 기강에 와서 대가족에 합류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그 나이에 자녀가 없었고, 60이 가까운 미망인만 세상에 홀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기강에서의 두 해 남짓 되는 세월 동안 이상한 장례식도 경험했다.

  당시 조소앙의 부모는 다같이 70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조소앙의 모친이 별세한 뒤, 부친이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모친에 대한 각별한 정 때문이었는지 삶에 대한 비관 때문이었는지, 조소앙 부친의 죽음은 대가족 가운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그만큼 됐으면 인간만사의 정(情)을 가볍게 볼 때도 됐을 텐데, 부인이 죽자 뒤따라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은 아마도 사바세계로 불리 우는 이 세상에 그리 큰 재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하나의 염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밖에도 타계한 몇 사람이 더 있었다. 대가족이 토교로 이사한지 2년이 되는 1942년 2월에 김광요의 모친이 페질환으로 세상을 하직한 뒤 송신암(宋新岩) 병조(秉祚)동지가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60이상이면 세상을 뜰 나이였기 때문에 그리 이상하다 싶지는 않지만 임시정부의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동지들의 타계는 김구에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송병조는 일찍이 임시의정원의장으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과 임시정부 고문 겸 회계검사원원장이었다. 또한 그는 7인의 국무위원들이 직책을 버리고 남경의 의열단이 주창하는 5당 통일에 동조했을 때 와해위기에 봉착한 임시정부를 차이석 위원과 둘이서 끝까지 지킨 수훈자였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만, 조금 더 살아서 훌륭한 일을 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 컸기 때문에 김구는 그를 마음깊이 애도했다.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 받을 시기가 다가오는 이때 그가 천추의 한을 품고 이국의 하늘에서 눈을 감았다는 건, 동지를 잃은 슬픔이라기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더욱 아쉽게 생각했다.

 


'소설방 >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 잘 있거라 상해여! 7   (0) 2013.03.17
46. 광복군과 김구 6   (0) 2013.03.17
44. 중경(重慶)으로 4   (0) 2013.03.17
43. 하늘이 살렸다 3   (0) 2013.03.17
42. 대장부 김좌진(金佐鎭) 2   (0) 201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