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44. 중경(重慶)으로 4

오늘의 쉼터 2013. 3. 17. 09:03

44. 중경(重慶)으로 4 

 

 

  중일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점차 중국의 배색이 짙어지자 장사(長沙)에 있던 김구 일행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장사에는 왜놈들의 공습이 심했다.

  밤하늘에 날아드는 왜놈들의 전투기는 도시 곳곳에 기관총 세례를 내렸다. 건물이 하나도 성한 것이 없는 지경으로 불에 타버렸거나 불에 타고 있었다. 따라서 장사의 중국 기관들로 피난을 하는 중이었다.

  3당 간부들이 회의를 한 결과 광동으로 가서 남녕(南寧)이나 운남(雲南)방면으로 진출해 해외와 연락망을 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피난민이 들끓어서 1백여 가족의 대식구를 이끌고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는 처지였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짐이 산같이 많아서 도저히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김구는 절룩거리는 다리는 이끌고 성 정부(省政府)의 장 주석을 찾아갔다. 장 주석은 김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쩐 일이시오?」

「광동으로 이사를 갈까 합니다.」


  장 주석은 머리를 끄덕였다.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장 주석은 김구가 지금은 비록 초라한 망명객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의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장 주석은 기차 한 칸을 독채로 김구 일행에게 내주었다. 또 광동성의 주석 오철성(吳鐵城)에게 친필 소개장을 작성해주니 큰 문제는 해결되었다.

  김구는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저 출발해 광주(廣州)에 도착했다. 이전부터 중국 군사방면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이준식, 채원개 두 사람의 주선으로 동산백원(東山栢遠)을 임시정부 청사로 쓰고, 그곳의 아세아 여관에 대가족 전부를 수용했다.

  여기서 대가족이라 함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비롯한 사무원등의 일가권속을 말한다. 중국에 망명했을 때는 홀몸이었지만, 고국과 떨어져있는 시간이 길고, 또 어느 때 귀국할지 몰라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 함께 살다보니 가족이 점차 불어났던 것이다.

  김구는 안심하고 거기서 다시 홍콩으로 출발했다. 홍콩으로 간 것은 안정근, 안공근 두 사람에게 부족한 일, 즉 그들 형수인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상해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상해는 이미 왜놈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적 점령지가 돼버렸던 것이다.

  김구는 남경(南京)에서 대가족을 장사로 옮기기로 했을 때 안공근에게 형수 댁의 식구를 데려오라고 했는데 공근은 무슨 영문인지 데려오지를 않았다. 이것이 김구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김구는 안중근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었다. 청계동에서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진사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정의가 있었고, 또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히로부미를 격살한 그 의기남아 기질을 존경했던 탓이기도 했다. 영웅이 영웅을 안다고 김구는 이런 안중근의 가족을 특별히 배려해주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것이다.


  김구는 다시 한번 안공근에게 형수를 모셔오라고 했다. 마침 홍콩에서 비밀공작 임무를 띠고 상해로 왔던 유서(柳絮)와 안공근 형제가 밀담을 할 때 김구는 안 의사 부인을 적의 점령구역인 상해에서 모셔올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얼굴빛을 했다.

「지금 상해는 왜놈들에게 함락됐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양반의 집에서 불이 나면 신주부터 모셔온다는 말이 있네. 자네 형님은 혁명가이네. 여순 감옥에서 왜놈들에게 사형 당했는데, 그 부인을 왜놈들의 점령지에 그대로 놔둔다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네. 자네들은 혁명가로 자처하지 않나?」

  그러나 당시 상해로 들어가는 것은 화약을 싸들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김구는 여간 마음이 쓰라린 것이 아니었다. 저 세상에 가서 안중근 의사를 만났을 때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할까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김구에게 또 한 가지 섭섭한 일은 양기탁 선생의 소식이었다. 남경에서 가족들을 장사로 옮겨올 때 양기탁 동지는 선도(仙道)를 연구하기위해 율양(지명) 대부진 고당암에서 중국인 스승 임한정(任漢廷)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김구는 사람 편에 양기탁에게 여비까지 주었었다.

「남경에서 같이 장사로 출발하자.」고 했으나 약속된 날짜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그냥 떠난 것이다.

  왜놈들의 공습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대가족과 김구의 어머니를 불산(佛山)으로 이주시켰다.


  중국정부는 전시(戰時) 수도를 중경으로 정했다. 그래서 김구는 장개석 장군에게 전보를 보내 대가족을 중경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좋다는 회신이 왔다. 조성환, 나태섭 두 동지와 철도로 장사에 도착한 김구는 장치중 주석을 만나 중경행의 편의를 봐달라고 했다.

  장 주석은 김구에게 공로(公路) 차표 3장과 귀주성(貴州省)의 주석 오정창(吳鼎昌) 앞으로 보내는 소개편지를 써주었다. 중국인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을 남에게 소개할 때, 소개한 사람과 똑같이 대해 달라는 뜻으로 편지를 써주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잘 써주지 않는데 장치중 주석은 김구를 혁명가로서 존경하며 신뢰하기 때문에 직접 소개편지를 써준 것이다.

김구 일행은 중경으로 출발하여 10여일 후 귀양(貴陽)에 도착했다. 그러나 귀양이란 곳은 중국의 여러 도시 가운데 가장 피폐한 곳 같았다.

  김구는 그 동안 장사를 비롯해 남경, 가흥, 광동등지의 주로 남쪽 도시를 돌아다녔다. 김구가 돌아다닌 도시들은 대부분 천년의 혜택을 받아선지 물질이 풍부했고 그래서 인심들이 유순했다. 그러다가 귀양 시에 와보니 시내에 왕래하는 사람들도 드물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란 것이 누더기를 방불 하는 것 같아 거지들처럼 보였다. 또 얼굴색도 오랫동안 먹지 못해선지 가죽들만 남았고 누런 얼굴들이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귀양은 온 시가지가 돌투성이였다. 길에 채이는 것이 돌무더기이고, 흙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돌이 많기 때문에 농사가 될 턱이 없었다. 농가에서는 길거리의 돌을 젖히고 그 아래 흙을 떠다가 논이나 밭에 부었다. 대토를 하는 것 같았는데 워낙 돌이 많기 때문에 농산물이 자라다가 죽어버려 늘 식량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한족(漢族)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한족은 원래부터 살던 중국민족이라선지 이곳에서도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족보다 묘족(苗族)의 생김새는 몹시 궁핍하고 행동이 급해 야만스러웠다. 묘족이란 중국의 귀주성(貴州省)을 중심으로 운남성, 호남성 등지에 사는 만족(蠻族)으로 남방계통의 뒤떨어진 문화를 갖고 사는 종속들이었다. 중국말을 잘 모르는 김구가 한족과 묘족을 구별하기는 힘들었지만 묘족의 여자는 의복으로 알아보았다.

대체로 묘족의 여자는 원색을 좋아해서 의복이 온통 울긋불긋했고 묘족의 남자는 눈빛이 얼른 보아도 야만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묘족들 가운데는 혼인을 통해 피가 섞여 한족 화 된 사람들도 많았다. 살갗이 한 결 같이 누렇고 키가 왜소하고 성질이 급해서 화가 날 일도 아닌데 발끈하는 성미를 갖고 있었다.

  묘족은 4천여 년 전 삼묘(三苗) 내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그동안에 특출한 인물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묘족이란 족속이 그리 신통한 민족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묘족도 오랜 기간에 걸쳐 수십, 수백 종류의 종족으로 바뀌어서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로 널리 퍼져있었다.

  한족화한 묘족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김구가 들은 말에 의하면 광서의 백숭희 장군과 운남 주석 용운(龍雲) 등이 묘족이라고 했다.

  김구는 귀양(貴陽)에서 열흘정도를 보내고 중경까지 무사히 왔다. 그동안 광주가 왜놈이 치하에 들어갔다. 대식구는 고요(지명) 계평을 거쳐서 유주(柳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중경 가까운 곳으로 이사시키는 것이 큰 문제였다.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의 중앙정부로 군수품 수송에 필요한 차량으로 여간 곤란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군수품을 운반하는데 드는 차량은 1천여 대가 필요한데 1백량밖에 없으니 김구의 대식구 수송을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준다는 것이다. 김구는 정부요도에 부탁을 해서 간신히 자동차 여섯 대를 확보, 식구와 짐을 운반했고 여비까지 챙겨서 보냈다.

  식구들의 안전을 묻기에 귀양해서 중경 쪽으로 오다가 기강이란 곳이 살기가 괜찮아 보이므로 그곳으로 정하라고 했다.

  김구는 중경으로 이사했다는 사연을 적어 미국, 하와이로 보냈다. 그리고 답장을 받기위해 날마다 우체국을  들락 거렸다.

  어느 날이었다. 큰 아들 인이가 우체국으로 김구를 찾아왔다.

「아버님, 할머님이 병이 나셨습니다. 중경으로 가시겠다고 해서 신이와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김구가 아들의 뒤를 따라가 보니 어머니는 김구가 묵고 있는 맞은 편 집이었다. 김구는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 홍빈 여관으로 모셨다. 그러나 여관에서 오래 묵을 수가 없어서 김홍서의 집으로 모셨다. 김홍서는 손가화원(孫家花園)에서 살고 있었는데 집이 제법 넓고 깨끗했다.

  김구의 어머니는 풍토병(風土病)을 앓고 있었다.

「물을 갈아 마셔서 생긴 병입니다. 고령만 아니면 간단한 수술로도 치유가 되는데 워낙 고령이라서....」

  의사는 어머니의 나이가 고령이라서 몸조리를 잘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 당시 김구의 어머니 병을 수발하기 위해 중경으로 온 일가족이 있었다.

유진동과 그 부인 강영파가 그 사람들이었다. 유진동은 상해에서 동제대학(同齊大學)의과를

졸업하고 고령의 폐 병원 원장으로 있다가 고령이 전화에 휩싸이자 중경으로 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학생시절부터 김구를 스승처럼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선생님, 어머니의 병은 저희들이 치료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그러나 김구 어머니의 병은 점점 위중해졌다. 인제의원(仁齊醫院)에서도 머리를 흔들었다. 퇴원하면 생명이 떠날 날만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김구는 어머니를 찾아뵙고 지난날을 다시 한 번 회상해보았다. 칠순이 넘어 이제는 옛날의 기력이 모두 쇠진해 평범한 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얼마나 장한 어머니였던가. 생전에 불효만 하는 아들을 중국까지 찾아와 마침내 세상을 뜨게 됐으니 누구보다 김구의 응어리진 한이 풀리질 않았다. 어머니의 생명의 시간이 좀 더 남았더라면 효도도하고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는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부모는 아들이 효도할 틈새를 주지 않는다.」란 말이 귀에 들어왔다.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았더라면 충분히 효도를 할 수도 있으련만 잦은 투옥과, 갖가지 인생의 먹구름 때문에 고생만 시켜드린 것이다. 김구는 어머니의 뼈 가죽만 남은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자네가 무슨 죄? 나는 자네 같은 아들을 둔 것만으로도 상제(上帝)님께 고맙게 생각하네. 시골 농투산이의 딸로 태어나 흙 속에 파묻혀 살다죽는 것이 정해진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자네 같은 아들을 두어서 나라 일에 간섭도 해보고, 낯선 곳까지와 자네 친구들같이 좋은 사람들에게 어미 대접도 받아보니 이게 얼마나 좋은 일이요.」


  김구의 어머니는 이 말씀을 하는 도중에 눈물을 흘렸다. 생전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김구가 생각해도 기쁨의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경성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 김구를 면회 왔어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김구의 의지가 약해질까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병석에 누워서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틀림없었다. 환갑이 지난 늙은 아들을 앉혀두고, 또 그 아들이 생전에 한번 효도다운 효도를 하지 못한 것을 책하는 그런 쩨쩨한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라 좀 더 큰 것을 생각하는 조선의 어머니 그 자체였다.

김구는 어머니를 업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 제 등에 한번 업혀보세요.」

  김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눈물을 거두고 빙긋이 웃었다.

「자네 마음 내가 다 아네. 남들이 보면 흉하다고 생각하네. 업혔다고 생각하겠네.」

어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평생 동안 김구의 어머니는 생일다운 생일 한번을 아들로부터 얻어 잡순 적이 없었다. 그럴 틈도 없었거니와, 독립운동이란 돈이 생기는 활동이 아니라 굶고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구는 자신의 가난을 한 번도 탓하거나 부자를 부러워한 적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그 날로 자신보다 더 없는 사람에게 나눠줬고, 자신은 굶었던 것이다. 이런 아들이 성정(誠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어머니였다.


  김구의 어머니는 아들이 병상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 듯 말했다.

「나는 괜찮네. 그대로 놔두고 나가서 자네 일을 보게.」

  김구는 어머니의 병실을 물러나왔다. 어머니이 이야기대로 오랜 시간을 병 수발 들 수 없었다. 김구의 짜여 진 시간이 더 급박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이곳 중경에 오고 나서 추진한 일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중국 당국과 교섭해서 차량을 구해 이사비용을 마련해서 유주로 보내는 것이었고, 둘째는 미주, 하와이의 각 단체에 임시정부와 가족을 중경으로 이주시킨 것을 통지하고 원조를 요청하는 일이고, 마지막으로 각 단체의 통일문제를 매듭짓는 것이었다.

  김구는 통일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조선 의용대와 민족혁명당 본부의 간부들과 상의를 했다. 김원봉은 계림에 있어서 참석치 못했고 민족혁명당 간부인 윤기섭, 성중용, 김홍서, 석정, 최석순, 김상덕 등이 김구를 극진히 맞이했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민족주의의 통합을 강조했더니 모두 찬성했다. 김구는 이 사실을 유주에 있는 동지와 미주, 하와이의 동포들에게도 의견의 일치를 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 미주, 하와이에서 답신이 왔는데 뜻밖이었다.


 

  「우리들은 통일은 찬성하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통일은 반대합니다. 김원봉은 공산주의자입니다. 선생님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을 하는 날 우리와는 단절이 되는 줄 아십시오.」


 

  김구는 김원봉과 상의를 했다. 그 결과 연명 선언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민족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백여 식구들은 중경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위중해갔다. 김구의 어머니는 당신이 이미 회복치 못할 것을 알고 유언처럼 말씀했다.

「빨리 독립이 되도록 노력하자. 자네가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내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져가 고향에 묻게.」

  마침내 김구의 어머니는 50여 년간 아들의 뒷바라지만 하다가 돌아갔다. 대한민국 21년, 1939년 4월 26일 손가화원 안에서 영면했다. 동지들은 그곳에서 5리 가량 되는 화상산(和尙山) 공동묘지에 석실(石室)을 만들어 모셨다. 석실은 묘지를 조성할 때 그 안에 돌로 짜 맞추어 시신을 안치하는 것이다.

  김구의 어머니는 생전에도 대가족 가운데 제일 연장자였다. 팔순 고령이었기 때문에 동지들로부터 존장(尊丈)대접을 받았다.

  김구 어머니는 앞서도 기록했듯이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아들 김구가 평범한 농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면 아들에게 업혀 가끔씩 효도를 받고 기름진 음식도 심심치 않게 들면서, 가족이 아늑함을 느끼면서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텐데 아들 김구의 일생이 평탄지 않아선지 오히려 김 구보다 더 많은 고산을 겪으면서 한세상을 살았다. 남편 김순영은 먼저 떠나보내고, 또 시동생 준영도 먼저 세상을 뜨자 남은 것은 김구와 며느리, 두 아들이었다. 그러나 며느리도 일찍 죽고, 자신의 집에서 의지하던 사돈 역시 세상을 뜨자 철저히 외로운 삶을 산 것이다.

  김구의 어머니는 비록 시골에서 배운 것이 없었지만 남을 구속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취하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남의 고생을 보면 내 고생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자유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또 남자로 태어나 헛된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을 경멸했다. 언젠가 김구가 감옥에 풀려나서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연회를 베풀어 줄 때 기생을 데려다 풍악을 울렸었다. 이때 어머니는 사람을 보내 아들 김구를 데려와 엄한 문책을 했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겨우 이거더냐?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꼴을 보려고 그랬느냐?」

  김구의 어머니는 김구가 오직 한 가지 일, 독립운동을 하는 일 이외의 사사로운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름진 음식도 마다하고, 거친 음식을 달게 여기면서도 아들의「호연지기」와「이상」을 부추겨주던 어머니였던 것이다.

  옛날에는 대갓집에서 노복(奴僕)을 썼으나 나라가 왜놈의 압제 밑에 들자, 「국가가 왜놈의 종살이를 하는데 어찌 내가 같은 민족을 옥살이 시킬 수가 있느냐.」

하며 노복제를 반대하기로 했다.

「사람이 사람을 부린다니 이런 법은 없는 일이오. 누구나 한평생을 귀하게 날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오. 남을 부려서 제 기쁨을 찾으려하는 이런 제도가 과연 합당한 일이오.」김구의 어머니는 팔십 평생 동안「고용」이라는 두 글자와 무관하게 살았다. 돌아갈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 입었고, 밥을 지었으며,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당신 일을 거들지 않게 했다. 며느리가 살았을 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들 김구가 물질과는 무관한「사업」을 하다 보니 생활은 늘 궁핍했었다. 때로는 밥을 굶을 때도 있었고, 잠자리가  없어서 이집 저 집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별 흉이 되질 않았으나 며느리가 늘 걱정이었다. 남의 귀한 딸을 데려다가 가족의 울타리 안에 먹고 호강한번 못시키는 자신이 항상 죄송했다. 며느리야 무슨 죄가 있는가. 며느리도 여성이고, 남들처럼 호의호식해보고 싶고 돈 걱정 없이 살아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일 텐데 허구헌 날 남편의 옥바라지와 사식차입에 신경을 쓰는 며느리의 입장을 그녀는 동정했다. 그래서 아들보다 며느리를 옹호하고, 간혹 며느리의 심기가 불편할 때는 며느리 편에 서서 아들을 질책했다.

  이렇게 넉넉하고 심지가 깊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김구는 집안의 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처럼 허탈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한편 대가족이 기강에 무사히 도착한 후, 김구는 조완구, 엄항섭 등 국민당 간부를 불러서 통일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간부들은 물론이고 국민당 전체 당원뿐만이 아니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양당도 모두 연합통일을 주장했다.

「선생님, 주의가 같지 않은 단체와 단일조직은 불가능합니다.」

  김구의 생각을 이랬다. 각 당이 본체를 그대로 두고 연합조직을 만든다면 통일기구 안에서 자기 단체이 발전만 도모할 터이니. 도리어 마찰이 더 심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이 그 전에는 민족운동에 반대했으나, 사회운동은 독립 완성 후 본국에 가서하고 지금 해외 운동은 순전히 민족적으로 국권 완전 회복에만  전력하자고 극력 주장하니, 단일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국민당 간부들은 이렇게 건의했다.

「의견이 그러시다면 속히 기강에 같이 가셔서 우리 국민당 전체 당원들과 두 우당(友黨) 당원들의 의사가 일치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유주에서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당원들까지 연합론이 강합니다.」

  김구는 곧 기강으로 갔다. 기강에 도착한 김구는 국민당 간부와 당원회의로 단일적 통일에 의견이 일치를 보았다.

  마침내 기강에서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7당이란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은 광복진선(광복을 염원하던 계통)소속의 원동지역 3당이며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 정위동맹, 조선혁명자 연맹 등 4개 단체는 민족선 연맹소속이다.

  개회(開會)후 많은 문제가 단일화 되는 것을 간파한 해방, 전위 양 동맹은 자신들의 단체가 해소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퇴장해 버렸다. 양 동맹은 공산주의자들의 단체이기 때문에 김구는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5당만으로 통일의 순서를 밟아, 민족주의적 신당을 구성하기 위해 각 당 수석대표들이 8개조의 협정에 친필 서명하고 며칠 동안 휴식에 들어가려 했는데, 갑자기 민족혁명당 대표 김원봉이 소리를 크게 질렀다.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으나, 자금 민혁당이나 의용대원들까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터에 8개조를 고치지 않고 단일 조직을 결성하면 청년들이 도주케 되니 우리는 탈퇴한다.」

  따라서 결국 통일회의는 좌절되고 말았다.

  김구는 3당 동지들과 미국, 하와이의 여러 단체들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원동지역 3당 통일회의 끝에 한국독립당을 탄생시켰다.


  한국독립당의 주요간부는 이렇다. 집행위원장은 김구, 집행위원은 홍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봉준, 양묵, 조성환, 박찬익, 차이석, 이복원 감찰위원장은 이동녕, 감찰위원으로는 감찰위원장은 이동녕, 감찰위원으로는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개선, 국무회의 주석을 돌아가며 하던 윤회 주석제를 폐지하고, 주석에게 회의 주석의 대내외 책임을 지는 권한을 부여했다.

  김구는 이로써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임됐고, 미국의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 취임케 했다.

  김구가 중경에 대식구를 인솔하고 도착한 후에도 중국정부는 계속 호의를 계속 보여주었다.

  전쟁으로 교통기관이 곤란한 때인데도 자동차 5, 6량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또 진제위원회(振齊委員會)에 교섭해서 토교(土橋), 동감(東坎) 폭포 위쪽의 구역을 사들여 기와 3동을 건축했고 맞은편 도로변의 기와집 1동을 사들여 1백여 식구의 숙소를 만들었다.

  진제위원회란 중국국민당에서 설치한 전시구호기관이었다. 1938년 10얼 13일 김구는 진제위원회에 구호요청을 했고, 진제위원회는 김구가 주석으로 있는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구는 중국국민당에 독립운동에 필요한 원조를 요청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자 중앙당부의 당국자 서은증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일 항전이 시작 된지 꽤 오래됐는데 바라던 승전보는 날아들지 않는 것 같소. 입장이 이런 중국에게 원조요청을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줄 믿소. 현재 미국에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는데 미국으로 오라하오. 미국은 아시다시피 부국(富國)이며, 장래 미일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 여비는 있으니 여행수속만 청구하오.」

  그러자 담당자는 김구의 심기가 극히 불편한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기왕에 선생이 중국에 왔으니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난 뒤 해외로 가는 것이 어떻소?」

  김구가 다소 주장을 굽혔다.

「나 역시 중국을 믿고 중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소. 그런데 중국이 여러 개의 도시를 이미 상실하고, 이제는 독자적인 전쟁 수행만으로도 극도로 곤란한 것을 보고 있는 터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하기가 어려워져서 그런 소리요.」

「그럼 선생께서 계획서를 내주시오. 상부에 틀림없이 보고해 선생의 의견을 관철시키겠소.」

  김구는 즉시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래서 장개석 장군에게 편지와 함께 계획서를 보냈다.


  

  존경하는 장개석 장군,

  광복군의 결성을 허락해주는 것이 3천만 한민족의 소망인줄 압니다. 장군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우리는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왜놈들을 반드시 격파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본 장개석은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답신이 왔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李靑天)을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미국, 하와이 동포들이 원조한 3, 4만 원등은 모두 모아서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중국과 서양 인사를 초청하고 우리 한인을 총동원해서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가졌다. 1940년 9월 17일의 일이었다. 이날은 김구의 일생에 가장 감격적인 날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 군대를 창설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김구는 30여명의 간부를 선발하여 서안(西安)으로 보냈다. 그리고 먼저 서안으로 보낸 조성환 일행과 합해 한국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이끌던 나월한등이 광복군으로 편입이 되어 광복군 제5지대(支隊)가 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란 긴 이름의 단체는 1939년 11월 중경에서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서 조직된 군사조직이었다.

  또 이준식을 제 1지대장으로 임명해서 산서성 방면을 맡게 됐고, 고운기를 제2 지대장으로 임명하여, 수원성(綏遠省) 방면을 맡겼다. 김학규를 제3지대장으로 임명하여, 산동성 방면으로 배치시켰다.

  특기할 사람이 한 명 있다. 강남 강서성 상요의 중국제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 근무하던 황해도 해주출신 김문호는 일본 유학생으로 큰 뜻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중국의 각지를 유랑하다가, 절강성 금화 방면에서 정탐혐의로 체포되었다. 신문을 받다가 우연히 중국인으로 일본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를 만나, 그들과 함께 제3전구 사령부로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김구란 이름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그곳 사정을 서신으로 전달하다, 훗날 중경으로 와서 이 사실을 모두 알렸다. 그래서 상해에 한국광복군 징모처(장병모집) 제3분처를 설치하고, 김문호를 주임, 신봉빈은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임명하고, 선전조는 주임 김문호가 겸임하기로 했다. 모든 경비는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교포들이 성금으로 부담했고, 이것을 분배해서 사업을 이끌어갔다.

  장개석의 부임 송미령 여사는 한국광복군에게 중국 돈 10만원을 특별 위로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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