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47. 잘 있거라 상해여! 7

오늘의 쉼터 2013. 3. 17. 09:20

47. 잘 있거라 상해여! 7

 

 

 

 

  1945년의 한여름,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에 와 있었다.

그해 5월 독일이 항복하고, 독일과의 전쟁을 끝낸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은 일본에 두 차례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와 나카사끼 두 도시는 삽시간에 폐허가 돼 버렸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동남아 일대를 누비던 왜놈의 군대들은 제나라가

망해 가는 것에 허탈감을 가졌다.

왜놈들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항복을 하느니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할복을 하기로 하고 집단자살인 옥쇄(玉碎)를 감행하기로 했다.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다.

이로써 6년간에 걸친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그와 함께 일본의 식민통치 종지부를 찍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35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국내에서, 국외에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젊음과 생명을 바쳤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가혹한 수탈아래

삶을 박탈당했다.


  8·15해방은 연합국 승리의 결과인 동시에 35년간 쌓아 온 조선민중의 투쟁과

희생의 결과였다.

8·15전야,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며 저마다

조국해방을 준비했다.

동북 항일연합군은 소련 영내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중국 연안에서,

광복군은 중경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일본이 항복 선언으로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왜적이 투항한 후 고국에 돌아갈 준비로 임시정부의 문서를 정리하고,

국무위원과 일반직원이 비행기 두 대에 나눠 탔다.

  11월 5일 김구는 13년 전에 떠났던 상해 땅을 다시 밟게 됐다.

중경에서 출발한지 5시간 후였다. 상해도착은 오후 6시였다.

4·29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사건 이후, 김구는 조여 오는 왜적의

마수를 뚫고 극적으로 상해를 탈출한 후 13년만이었다.

  상해 비행장에는 김구의 친구들을 비롯해 노 애국자를 보기위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행장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감행했던 홍구 신(新)공원이었다.

그동안 김구는 상해에 있으면서도 왜놈의 영사관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한번도 이곳에 들르지 못했다. 공원을 떠나서 시내로 들어올 때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 6천여 명이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길 양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김구 일행이 지나가자 환호성을 내면서 박수를 쳤다.


  김구는 차를 멈추고 나가보았다. 마침 그곳에는 축대가 있었다.

그 축대에 간단히 단(壇)을 만들고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시내 양자반점(陽子飯店)에서 묵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구가 올라가서 연설을 하던 축대위의 단(壇)은 13년 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시라카와(白川)들을 폭살한 곳이었다.

왜적들은 그곳을 기념하기위해 군사훈련을 참관하는 장교들의 사열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만사가 무심하고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 수는 13년 전보다 수십 배 늘어났으나 전쟁으로 인한

생활고와 어려움으로 인해 인간성을 망각한 부정한 자들이 속출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시종일관 독립정신을 지키면서 지조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

선우혁, 장덕로, 서병호, 한진교, 조봉길, 이용환, 하상린, 한백원, 원우관 등

10여 인이었다.

상해를 떠나기 전 김구는 서병호의 자택에서 이들과 만찬회를 열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등박문을 하얼빈역전에서 척살한 안중근 의사,

그러나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일찍이 촉(蜀)나라 유비의 아들 유선이  촉 나라가 망하자 사마의 중달의 아들이

세운 진나라에 와서 제 아비를 욕했다는 고사가 있었지만,

부친인 안중근 의사의 높은 절의를 받들지 못하고, 그 아들 안준생이란 자는

왜놈을 따라 본국에 와서 왜적의 두목 이등박문에게 부친 안 의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걸했고,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를 애비라 불렀다.

김구는 민족반역자로 변신한 아들 안준생을 체포해 처형하라고 중국관헌들에게

부탁 했으나 관헌들이 실행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어린아이들은 이미 성장해 어른들이 되었고,

그때의 장정들은 노쇠하거나 죽어 버렸다.

인생이란 이렇게 무상한 것인가?

프랑스 조계지에 있던 아내의 묘지에 찾아가 참배하려 했을 때,

묘지는 사라져 흔적조차 없어졌다.

따라온 묘지기가 설명했다.


「10여 년 전에 이장을 했습니다. 그 장소로 가시죠.」

  묘지기를 따라서 아내의 묘소에 가니 그녀와 함께 지냈던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지나가 김구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상해에서 김구는 10여일을 보냈다. 상해임시정부가 있던 청사도 찾아가

옛날을 회상하기도 했고, 죽은 동지들의 묘소를 참배, 분향을 하기도 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에서 김구는 정들었던 모든 사람들과,

자주 다녔던 마을, 그리고 친근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마침내 1945년 11월 23일 김구는 상해에서 서울로,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비행기에 올랐다.

 


'소설방 >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9. 나의 소원 9   (0) 2013.03.27
48. 그리운 사람들 8  (0) 2013.03.27
46. 광복군과 김구 6   (0) 2013.03.17
45. 아, 이 참상들! 5   (0) 2013.03.17
44. 중경(重慶)으로 4   (0) 201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