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42. 대장부 김좌진(金佐鎭) 2

오늘의 쉼터 2013. 3. 17. 08:44

42. 대장부 김좌진(金佐鎭) 2

 

  김구가 경성감옥에서 복역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청년이 있었다. 바로 김좌진(金佐鎭)이었다. 그는 호(號)를 백야(白冶)라 했다. 1911년 북간도에 군관학교를 서립하기위해 자금을 모으다 강도죄로 체포돼 2년 6개월간 경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함께 수감되어 고생을 한바 있었다. 김좌진의 출옥이후의 행적과, 그의 최후를 밝힘으로서 한사람이 걸출한 영웅이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희생되는 당시의 현실을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몇 자 적어두고 넘어가기로 한다. 

  1920년 말 러시아 영토로 넘어가다가 보청에서 우수리 강을 건너 만주로 되돌아온 김좌진은, 호림(虎林)을 거쳐 밀산(密山)에 도착해 만주에 살고 있는 교포들의 민심을 살폈다. 

  청산리 전투란 역사적인 전투에서의 영웅으로서, 김좌진은 이미 전설적인 장군이 돼 있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란 명성과 그 당당한 풍채에 압도되어 그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가 숙여졌지만, 독립군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 당시의 교포 들이었다. 왜냐하면 청산리 전투로 인해 수많은 왜놈들이 교포들을 들볶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김좌진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지도자들은 동포들, 특히 독립운동을 뒷받침하던 동지와 가족들이 바랬던 인생문제와 교육문제를 표방하고 실력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직한 것이 신민부(新民府)였다. 최고 책임자는 김혁(金赫)선생이었으나 실제 실력자는 김좌진이었다. 신민부는 창립하자마자 시대의 흐름에 순응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인 혁신인물을 포섭하여 당면한 적(敵)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위해 모든 주의나 사상을 초월하여 병진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자 어느 겨를에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기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민부는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우수한 청년들은 차츰차츰 떨어져 나가고, 원로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노인들만이 김좌진을 둘러싸고 김좌진의 영웅심을 돋구어주는 공치사나 즐겼다. 빈번히 찾아오는 이들은 김좌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더욱이 민족주의에 빈곤한 이론만 갖고서는 대사업의 전위 구실을 한 청년 대중을 이끌고 나갈만한 지도이론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일제무리의 암약, 조직이 헤게모니를 탈취하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의 별동부대라 할 수 있는 적기단의 준동, 그리고 편협되고 비루한 지방색을 짙게 내세우는 사람들로 인해 김좌진은 사면초가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런 위기는 신민 부 뿐만이 아니라 당시 만주의 3대 독립운동기관의 하나였던 정의부(正義府)와 참의부(參義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 김좌진의 이재종 동생뻘 되는 김종진(金種鎭)이 남방에서 군관학교를 마치고 김좌진을 찾아왔다. 1927년 10월 하순이었다.


  김종진의 신규식의 알선으로 운남성(雲南省)의 독군(督軍)인 당계요(唐繼堯)의 지도와 후원으로 운남 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수재였다. 그는 김좌진에게 만주에 사는 동포의 실정을 파악하겠다고 요구하여 허락을 받고 신민부 관내인 북으로는 만주와 소련의 국경선인 밀산현(密山縣)으로부터 남으로는 백두산 지대인 안도현(安圖縣)까지, 그리고 동만주와 몽강, 화문, 오상현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면밀히 교포의 실정을 파악했다. 그리고 형인 김좌진에게 만주교포의 실정보고와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물론 여기에는 소위「조선인민위원회」라는 일본 영사관의 지시 아래에서 조직된 교포들의 위장 교민회와 일제의 세력권 밖인 독립운동기관의 영향 밑에 거주하는 동포 부락만을 답사한 실정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포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북간도 일대를 빼놓고 한국 교민들의 농가는 형편없이 피폐한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각지의 교포들은 종전과는 달리 무장독립부대들에 대해 경원하는 눈치를 보이는데, 이것은 운동자들의 반성을 촉구해야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이 각 지방의 민중사이로 끼어들어 선동함으로써 구태의연한 민족주의 이론만 갖고서는 지식청년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넷째, 재래의 기관을 개편하여 혁명민가의 요망에 응해야하며 이색분자를 이론으로 이끌 수 있도록 사상적 이론으로 이길 수 있는 준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다섯째, 민족진영이 요청하는 철저한 항일 의식을 가진 반공이론으로서 고결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상과 같은 의견은 김좌진에게 건의한 김종진은 자신이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깊이 사귀게 된 혁명동지들의 사고방식과 인물 됨됨이를 소개했다. 그 중에는 중국인들도 끼어있었는데, 중국 국민혁명의 원로학자인 무정부주의적 이상을 가진 오치휘와 이석증, 사학지, 신채호, 그리고 이런 주의에 공명한 유자명, 원로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백정기, 유림, 정화암, 이을규 등이 그들이었다. 이 무렵 단재 신채호는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호서(湖西)은행 사건으로 젊은 투사들이 다수 일경에게 체포되어 관내에서 활약하던 그들 자유혁명 그룹은 수많은 동포가 살고 있는 만주로의 진출을 기도하고 있다 하였다. 김종진의 초청권고를 받는 이을규 등은 원하던 일이어서 곧 만주로의 진출을 기도했다.

  이때 남만주에는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등 3대 단체가 명칭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단체가 모두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조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 기관 자체가 민중들 자신이 이룬 것도 아닐뿐더러 일부 지도자와 일부 지배에 가득 찬 항일독립의 탈을 쓴 야심가들도 섞여있었기 때문에 신성한 목적을 지낸 독립운동기관으로서는 말기현상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김좌진을 비롯한 김종진, 민무 등은 여러 차례 의논한 끝에 기존 조직을 발전적으로 해체하며 아울러 민중의 총의에 입각한 새 조직을 꾸며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계획하고 우선 김종진이 제안했던 관내 인물들의 만주입국을 기다렸다.

  이에 따라 1929년 봄 이을규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을규가 북만주에 도착하자 김좌진은 신민부를 해체하고「한족자치총연합회」를 조직했다. 주석에는 김좌진, 그리고 신민부 간부였던 정신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김좌진과 정신은 점점 틈이 가라져 갔다. 정신은 청산리 전투 때 북로군정서의 중진이며 민족진영의 제2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김좌진에 대해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다.

  

  김좌진은 성격이 호방해서 밑에 있던 사람들의 사상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 밑에 있던 간부들 가운데 무정부주의 이론은 마치 공산주의 이론과 동일시한 사람들이 많았다. 김좌진은 총을 잘 쏘고,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중용을 했다.

  한편 하얼빈에 있는 일본 영사관원들은 김좌진의 소재파악에 전력했다. 밀정은 그가 관여하고 있는  관내에 침투시켜 그날그날의 동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당시 김좌진은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중동철도의 조그만 정거장인 산시참의 오막살이 초가에서 부인 나혜국과 젖먹이 아들 철하, 그리고 처제 나혜정과 같이 기거하고 있었다.

  여기에 김봉환이란 자가 등장한다. 김봉환은 북경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접촉, 공산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 김성숙은 남쪽으로, 김봉환은 북만주로 갔다.

  1929년 당시 김좌진을 상징으로 하는 북만주에서는 민족진영의 활동무대가 해림이었다. 해림에서 남쪽으로 6십리쯤 되는 곳에 영고탑이 있었고, 여기에서 또 7십리 거리에는 발해국의 수도였던 동경성이 있는데 동경성과 영고탑에서 목단 강을 사이에 두고 10리쯤에 있는 황지둔(지명)은 고려 공산당의 만주 근거지였다. 김봉환은 해림에 근거지를 둔 김좌진의 동지들과 접촉해서 「한족 총 연합회」를 자기 마음대로 다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진과 이응규가 있었기에 김봉환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김봉환은 일본 제국주의를 공박하는 글을 종종 발표했다. 그리고 강경애라는 여류문인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29년 겨울, 하얼빈으로 갔다가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됐다. 그 당시에 송도(松島)라는 영사관 경찰서 경부가 해림에 있는 동거녀 강모를 꾀어내 하얼빈 경사관 감옥에 감금된 김봉환과 만나게 됐다. 김봉환은 그 후 즉시 석방되어 애인과 함께 해림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나 6, 7년이 형을 살려다 일본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난 김봉환에게 주위 사람들의 눈총은 싸늘했다.

  결국 김봉환은 김좌진을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번민을 계속하다가 한 가지 가증스런 욕심이 생겼다. 공산주의자들이 경원하는 무정부주의자를 내세움으로써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방패도구로 삼고 있는 김좌진을 해칠 경우, 비난보다는 환영을 받을 것이고, 또 일경의 도움에 대한 보답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봉환은 부하인 박상실을 사주하여 김좌진의 암살을 의뢰했다. 박상실은 권총을 휴대하고 산시참(지명)으로 가서 농가에 묵으면서 족제비 사냥을 했다. 그곳에는 족제비가 많았다. 그는 매일 같이 족제비 덫을 갖고 산골짜기를 오르내렸다.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좌진 장군과 마주치면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숙하게 지냈다. 그러면서 박상실은 김좌진을 호위하고 있는 별동대」와 그 대장인 고강산(高岡山)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김봉환에게 보고했다. 마침내 김좌진이 최후의 날이 왔다.

  1930년 1월 24일 오후 4시경, 별동대장 고강산을 한 대원들이 철둑 너머 중국인 술집으로 가고 김좌진을 혼자서 약 3백 미터 떨어진 정미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박상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뒤를 쫓아가 아는 체를 했다.


「장군님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오, 누군가?」

「박상실입니다.」

「그렇구만.」

  김좌진은 남을 의심하지 않는 대범한 사나이였다. 사람의 내부에 도사린 쩨쩨한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 대인(大人)이었다. 박상실은 인사를 하고 김좌진과 친한 체 동행을 했다. 마침내 정미소에 들어갔을 때 김좌진은 허리를 굽혀 기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때 박상실은 그의 입술에 음흉하고 잔인한,  「쥐새끼 같은」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사자가 쥐새끼에게 물린 꼬리 되었다.

「탕! 탕! 탕!」

  세발의 흉탄이 김좌진에게 명중되었고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민족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이렇게 이국에서 한 많은 삶을 바쳤다. 마치 링컨 대통령이 희극배우 부스란 자에게 총을 맞아 쓰러지듯, 마하트마 간디가 이름도 모를 힌두교의 총에 맞듯, 영웅은 한줌도 안 되는 간악한 무리의 앞잡이에게 쓰러져 버린 것이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중국 군경이며 별동대원들이 박상실의 뒤를 좇았지만 쥐새끼보다 더 빠른 족제비 같은 박상실의 날랜 몸을 가둬두지 못했다. 민족의 영웅을 죽이고, 제 영화로운 삶을 찾아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 하던 민족이 반역자 김봉환과 박상실을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이 민족이 영령들을 만날까. 김좌진 장군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련한 넋이 오히려 안타까울 뿐이다.


  탁 노인은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 유족회에서 만났을 때 김좌진 장군 이야기를 하면 흥분하고 있었다. 탁 노인은 생전에 한번도 김좌진 장군을 만나지 못했으나 그의 남자다운 기개에 늘 흠모 감을 가졌다고했다 탁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이런 자들조차 국가에 의하여 민족반역자로 정리되지 않고 민족정기 실종시대에 살고 있소 정부는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역사청산위원회 같은 기구를 두어 국법으로 민족반역자들을 정리해 주고, 그 후손에게 대대적인 불이익을 줌은 물론 자손만대에까지 그 역사를 남겨야 만이, 그 역사의 교훈으로 위대한 애국자가 암살되는 국가의 결정적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불의한 자들이 한 지도자를 암살하고자 한다면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오. 국가가 기강을 바로세우고 준엄한 형벌을 가해야만이 민족정기가 확립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이제라도 민족반역자 처벌법과 역사청산위원회를 만들어 국가 정의와 기강을 바로 세워야 만이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오. 민족반역자는 대를 누리 가며 잘 살고, 애국자의 후손은 설움 받으며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가난과 고통 속에 살면서 3·1절이나 8·15 광복절같이 좋은 날, 그 가난하고 못사는 모습이 TV 단골로 등장시키기를 반복한다면 그 나라에 애국자가 다시 생산되지 못할 것이오. 국민 모두가 국가와 민족 보다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로 돈과 권력을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오늘의 정국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오.”

  탁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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