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41. 어머니의 눈물과 기쁨 1

오늘의 쉼터 2013. 3. 17. 08:39

41. 어머니의 눈물과 기쁨 1  

  김구는 1924년 1월 1일에 부인을 잃었다.

따라서 부인 최준례는 출산 후 몸이 더욱 부실해져서, 영경방(永慶坊) 10호 2층에서 어머니께 세숫물을 버려 달라기가 황송했던지 아래층으로 들고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층계에서 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골절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늑막염이 되었고,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결국 폐병이 되고 말았다. 홍구의 서양인이 경영하는 폐병원에서 최준례는 눈을 감았다. 당시 김구는 수배중이라서 프랑스 조계지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양인 병원에 가기 전 보륭의원(普隆醫院)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나중에 김의한 부처가 방문해서 아내의 임종을 거들어주었고, 김구는 임종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서 겨우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이때의 이야기를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백범일지에 길게 기록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가정사를 늘어놓는다는 것이 혁명가로서 잔정에 기운다는 세인의 질타를 두려워했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외롭던 심정을 가슴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김구는 원래 여자 복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스승인 고능선의 손녀딸과의 약혼 파기와 그리고 또 한번의 결혼실패, 또 안창호의 여동생과의 실연, 마지막으로 취한 것이 최준례였는데, 그녀마저 세상을 버리니 남아있는 것은 혼자뿐, 아무리 담력이 센 혁명가라할지라도 인간적인 고독이 얼마나 심했던가는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김구의 어머니는 그때 세 살밖에 안된 신이를 우유로 길렀다. 신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치 못한 채 본능적인 배고픔에 칭얼대고 투정을 부릴 뿐이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고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밤에 잠을 잘 때는 김구 어머니, 즉 할머니의 늘어진 빈 젖을 물려 잠을 재웠다. 그 당시 상해의 김구 일가의 생활은 극히 어려웠다. 말이 임시정부이지, 임시정부를 이끌어갈 만한 재력은 전혀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 가운데 취직을 한다든가, 자영업을 해서 호구지책을 하는 사람들은 몇 명 되질 않았다. 그래서 김구의 어머니는 청년과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속 아픈 눈물만 흘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뇌부가 이러하니 일반 국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굶주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왜경들의 감시와 이로 인한 신변의 위협이었다. 마침내 김구의 어머니는 두 손자마저도 상해에서 더 이상 키울 수가 없어서 환국을 결심했다.

  어느 날 김구의 어머니는 김구의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장사가 떼어내 버린 배추의 겉껍데기 가운데 벌레 먹거니 심하게 썩지 않은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를 했다. 이 배추껍데기는 여러 항아리 안에 담가두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는 아이를 굶겨죽이기 알맞겠다. 어른이야 호구는 못해 주겠냐만 어린애야 무슨 죄가 있겠냐. 먹을 것을 먹고 자라야지 안 그렇겠느냐?」

어머니는 김구의 의사를 묻고는 채 네 살도 안 된 신이를 데리고 본국으로 갔다. 김구는 남아있는 큰 아들 인이를 데리고 여반로(呂班路)에 있는 단층집을 세내어서 이동녕 선생, 윤기섭, 조완구 등 동지들과 같이 살며 어머니가 담근 우거지김치를 오래두고 아껴가며 먹었다. 반찬이라야 그 우거지 김치하나였는데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굶주렸던 탓일 것이다.

  김구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어머니가 환국 할 때 여비를 넉넉하게 드리지 못했다. 상해에서 인천까지 가자, 그만 여비가 떨어졌다고 한다. 김구의 어머니는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을 잘 이야기했다.

지국에서는 담당자가

「신문에 난 상해 소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경성(서울)에 갈 여비와 차표를 사주었다. 경성에 가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니 거기서 또 사리원까지 갈 여비와 차비를 마련해 주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에 왔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암담하다고 보도했다. 김구의 어머니에게는 조선에 연고자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상해를 떠날 때 김구는 어머니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어머니, 사리원에 가셔서는 안악의 김홍량군에게 통지하여 영접을 나오거든 따라가시고, 만일 김군에게서 소식이 없거든 송화 두성리의 이모 댁으로 가십시오.」

  김구의 어머니는 사리원에 도착해서 아들의 말대로 김홍량에게「기별」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어 송화로 갔다. 2, 3개월 후인 음력 정초에 안악에서 김용제의 큰 아들 선량군이 어머니를 찾아뵙고 안악으로 모셔갈 의사를 전했다.

선량군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일본경찰이 몇 차례 우리집을 다녀갔습니다. 그놈들이 하는 말이, 할머님이 안악으로 오지 않고 중도에 계시게 하면서 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에게 돈을 줘 상해에 계신 김구 선생님에게 독립자금을 대드린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가서 모셔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 사람들아! 내가 사리원에서 왔다고 통지했으나 아무 회신도 없다가, 지금 일본 순사의 심부름으로 왔는가?」

「오해하지 마십시오. 연유가 그렇게 된 것은 성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환경과 정세가 그렇게 된 것이 모든 걸 용서하시고 같이 가십시다.」

  그제서야 김구 어머니는 조금 풀어졌다.

「네 말 잘 알아듣겠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해주고향에 가서 영감님 성묘나 하고 안악으로 가겠다.」

이렇게 말하고 선량을 돌려보냈다.

  이듬해 봄이 되어 어머니는 득성리를  떠나 도고로(지명) 임성재(셋째 삼촌의 사위)의 집과, 백석동 손진현(고모의 아들)의 집을 방문하고 해주 텃골 김태운(재종동생)과 몇몇의 친척들과 함께 부친 묘소에 마지막으로 다녀서 안악으로 갔다. 안악의 김선량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김씨 문중에서는 이를 이미 알고 다정히 지냈던 용천, 홍량 등이 김구의 어머니를 극진히 대접했다.


「어머니가 오시기전에 이미 주택과 식량, 의류를 준비해두었습니다. 편안하게 계십시오.」

하고 모셔갔다.

  어머니의 생활은 상해에 있을 때 보다 훨씬 넉넉해졌다. 생활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당신의 생활은 편해지고, 먹는 것은 제법 기름진 것들이었으나, 상해에서 세끼 밥 찾아들지 못하고 고생하는 아들 김구의 얼굴이 떠올라 밥숟가락이 떠지질 않았다.

  밤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붙잡고 상의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생활비에서 떼어내 아들 김구에게 부쳐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김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동지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김구 혼자서 받아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독립운동자금에는 홍로점설(紅爐點雪), 즉 타오르는 화로 속에 떨어지는 한점이 눈송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를 눈치 챈 김구의 어머니는 홀아비 김구가 키우고 있던 인이를 보내라고 했다.


 

  얼마나 고생이 심하냐.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이는 아무래도 내가 맡아야 할 것 같다. 그 어린 것이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모습이 밤마다 어른거려서 잠을 못 이루겠구나.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 읽어본 김구는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의 아들 노릇은 못한다고 치고, 어린아이의 아버지 노릇 또한 못하고 있으니 자신의 처지가 어쩌면 딱하게 보인 것이다.

  얼마 후 김철남(金鐵南)의 삼촌 편에 인이를 귀국시켰다.

  김구의 나이 50여세, 인생을 살만큼 살아, 나머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김구는 문득 인생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세에 마음을 아름답게 갖기 위해 동학(東學)에 입도했다가 그것이 실패로 끝나자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해 거기서 고능선 스승을 알게 되고, 다시 치하포에서 왜놈 스즈끼를 죽이고, 인천감옥에서 탈출해 승려가 됐다가 다시 안악 사건에 연루돼 5년의 형기를 마치고 상해로 오기까지의 과정이 여느 소설가가 구성한 소설보다도 파란 많은 인생살이 같아 전생에 어떤 역마살이 있던 사람과 인연이 있지 않았나 생각 들었다.


 

  김구는 한때 서대문 감옥에서 소원하기를,「천우신조로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가 성립되거든 정부의 문지기를 하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김구는 평범한 한 문지기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막상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다보니 책임감도 막중해져, 그동안 지나온 일을 어린 두 아들에게 알리고자 유서대신으로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 하여 1년2개월 만에 ‘상권’을 끝마쳤다. 백범일지 상권을 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김구가 백범일지 ‘하권’을 쓰게 됐을 때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슬프도다! 살아계셔서 효도 못하고 불효만 하다가 먼저 모낸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다할까?」

  김구는 또 탄식하고 탄식을 했다.


  김구의 어머니가 안악에 있을 때 동경사건(이봉차의 폭탄사건)이 나자 순사대가 어머니가 사는 집을 포위했고, 홍구 사건(윤봉길 의거) 이후에는 더욱 심했다고 한다. 김구는 이런 어머니의 입장이 딱한 것을 알고 비밀리에 사람을 접선시켜 의견을 전했다.

「어머니, 이제는 이곳도 다소 여유가 생겨서 아이놈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에 오셔도 이전과 같이 굶는 고통은 없을 테니, 기회가 닿는 대로 나오십시오.」

  김구의 어머니는 이 말을 받아들였다. 아들의뜻을 쫓기로 했다. 그래서 용감하게 안악 경찰서에 출국원(出國願)냈다.

「내 나이 칠십이 넘어. 죽을 날이 며칠 남지가 않았소. 손자 둘을 내손으로 키우지만 언제 눈을 감을지 몰라 이 아이들의 장래를 장담할 수가 없소. 다행이 제 아비가 살아서 나라 바깥에 있기 때문에 제 아비에게 맡기고 올 터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김구 어머니의 청원은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왜놈 순사들도 사람인지라 감동해서 허가를 해준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김구 어머니의 신변을 잘 알고 주의를 기울이던 경성경시청에서 정보요원을 안악으로 파견해, 어머니에게 갖은 말로 때로는 설득을 하고 때로는 위협을 했다.

「우리 경찰이 그동안 당신아들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시오. 상해에 있는 요원들을 모두 동원해서 수색했으나 찾아 못했소. 그러니만큼 당신 같은 노인이 출국해서 어떻게 당신 아들을 찾을 수 있겠소. 상부의 명령이오. 출국은 절대 허락치 않으니 그리 알고 집으로 가서 편안하게 쉬시오.」

  김구의 어머니는 왜놈 형사의 말에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너희들 보다 나을 것이다. 언제는 출국을 허가한다고 하기에 모든 가재도구들을 다 처분했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꿔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니, 남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이렇게 억압정치를 하고도 오래 버틸 줄 아느냐!」

  김구의 어머니는 너무 흥분해서 이 말을 하고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경찰은 김씨집(김선량)에 급히 연락했다. 이튿날 정신이 든 어머니에게 경찰이 찾아와서 물었다.

「할머니, 아들이 그렇게 보고 싶소?」

「그렇소.」

「그런데 지금은 되질 않소. 말썽이 많소.」

  김구의 어머니는 형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형사의 말에 수긍하는 척했다.

「그렇게, 말썽이 많다면 출국을 하지 않기로 하겠소.」

  김구의 어머니는 목공(木工)을 불러 부서진 지붕을 수리하고 처분했던 살림살이를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기왕에 상해로 못가는 것, 고향에서 터를 잡아 오래 살아볼 요량이라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몇 달 뒤 송화(松禾)에 사는 동생 병문안을 간다면서, 신이를 데리고 자동차표를 사갖고 신천읍으로 갔다. 그리고 신천에서 재령,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인이는 당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자인 인이를 불러 만주 안동행 직행 열차를 탔다.

  이때의 일을 다른 기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1934년 3월 19일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안악에서 손자 김신과 함께 오후 5시 40분 신천행 자동차에 탑승하여, 미리 그 차에 타고 있던 김선량과 더불어 신천에 도착했다. 신천에서 세 사람은 오후 6시 7분발 평양행 기차를 타고, 미리타고 있던 최창한을 만나 오후11시30분경 평양에 도착, 우양여관에 숙박했다. 다음날 아침 김선량은 숭실학교 기숙사로 가서 김인을 데리고 왔고, 곽낙원, 김인, 김신, 최창한은 중국으로, 김선량은 안악으로 갔다.」



  김구의 어머니가 대련에 도착 했을 때 일본 경찰이 열차 칸을 수색하다가 김구의 어머니를 검문했다. 이때 이이가 어른스럽게 답변했다.

「할머니와 어린 동생을 위해위(威海衛)의 친척집에 잠시 맡기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상대가 노인이고, 특별히 수상한 점이 없어보여선지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때 김선량과는  대련 검문소에서  검문을 통과하지 못했을 경우 「돈을 받지 못해 곤란하다」란 전보를 치고, 검문을 통과했을 경우「돈을 받았으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치라고 약조되어 있었다.

  김구 어머니는 상해에 도착해 안공근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 다음 가흥의 엄항섭의 집으로 갔다. 김구는 남경에서 어머니의 소식을 접했다. 엄항섭의 전갈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가흥의 엄항섭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헤어 진지 9년 만에 다시 김구는 어머니를 만날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동안 본국에서 지내던 어려웠던 이야기 등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김구는 어머니의 야위어진 손목을 붙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얼굴의 주름이 더욱 많아졌고, 9년 전에 비해서 완전히 노인이 돼버렸다. 자신의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역시 주름진 아들의 얼굴을 만져보면서 김구의 어머니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 사람아, 혁명가가 눈물을 보이면 백성이 누굴 믿겠나? 사나이가 눈물이 그렇게 헤퍼서 무슨 큰일을 하겠나?」

「잘못했습니다.」

  김구는 눈물을 거두었다. 나이 오십이 넘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이란 속일 수가 없는 법이다. 다만 그것을 숨기거나 억제할 뿐이었다.

  어머니가 다시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너를 지금부터 어른으로 대접하겠다. 그래서「너」라고 하지 않고 「자네」라고 하겠다.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는 절대 들지 않기로 하겠다.」

  김구의 어머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듣건데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모범이 사표(師表)된 모양이니, 나도 자네 체면을 세워 주겠네.」

  나이 육십에 김구는 어머니로부터 큰 은전을 받았다. 그것은 어른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김구는 그 후 어머니를 남경으로 모셔갔다. 왜군들의 남경함락이 가까워질 때쯤 다시 장사(長沙)로 모시고 갔다.

  남경에서 지낼 때 청년단과 동지들이 돈을 모아 생신잔치를 크게 차려드리려 했다. 아들과 헤어져 근 10년 동안 이렇다 할 생신 상을 받지 못한 김구의 어머니는, 비단 김구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는 모든 동지들의 어머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청년단과 동지들의 눈치를 알아챈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을 나에게 다오. 그러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그래서 김구는 동지들의 성금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돈을 받은 어머니는 김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돈으로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사먹은 것은 도리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라를 찾느라고 굶주리며 고생하는 판에 이 늙은이가 입맛만 즐기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스러운 일이다.」그러면서 어머니는 받은 돈에 자기 돈을 보태어 이 돈으로 권총을 사서 왜놈들을 죽이라고 청년단에 하사했다. 청년들은 그 돈을 도로 받으면서 김구의 어머니의 위대한 마음에 감읍되어, 다소 나태해진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

  김구의 어머니는 비록 나이 들어 수족은 불편했지만 혁명가의 어머니로서, 또는 스스로 혁명가로서 젊은이들의 사표가 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