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9. 탈출 작전

오늘의 쉼터 2013. 2. 2. 15:27

39. 탈출작전

 

1932년 4·29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 사건으로 인해 김구는 신변의 위협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프랑스 조계지라고해서 안심할 곳은 못되었다.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이 국제저인 문제로

비화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강경한 요구를 프랑스 당국이 무조건 거절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일본은 김구의 목에 1차로 2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제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주둔군 사령부 합동으로 현상금 60만원을 내걸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원이고 한달 월급이 30원이라면 60만원이란 돈은 가히 거액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김구를 두둔하는 세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당시 장개석 정부는 상해사변 직후 수도를 남경으로

옮겼는데 남경정부 요인들은 김구를 적극 보호해주기로 했다.

「김구가 원한다면 당장 비행기라도 보내주겠다」고 하는 요인들이 있는가 하면,「아무리 위험해도

한가하게 일하지 않고 지내면 되겠느냐」는 비난도 있었는데 비난의 이면에는 자기들과 같이 일하자는

뜻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을 모두 만족하게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사양하고 미국인 피치씨 댁에서 20여 일을 은둔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치부인이 2층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 올라왔다.

피치 부인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그녀는 숨을 고른 후 김구에게,

「밀정들이 냄새를 맡았어요. 빨리 떠나셔야겠어요. 시간이 급합니다.」

하고 말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남편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피치씨가 자택으로 들어오자, 피치 부인은 뒷좌석에 김구와 부부인 양 앉아 있고 운전대는 피치 씨가

잡아 급히 시동을 걸고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문 밖으로 나가면서 김구가 유리창을 통해 살펴보니 일본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프랑스인, 러시아인,

중국인 등 각국의 밀정들이 앞과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미국인의 집이라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현상금이 60만원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국적을 떠나서 김구를 체포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 중국 지역에 이르렀다.

자동차에서 내린 김구와 안공근은 기차역으로 가서 그날로 가흥(嘉興)의 수륜사창(秀綸沙廠)으로

은신했다.

수륜사창은 면사공장으로 경기가 좋지 않아 놀리고 있어서 피신처로는 적격이었다.

이곳은 박찬익의 형이 은주부(人名)와 저보성에게 주선하여 마련한 곳이다.

이곳에는 비서 엄항섭의 가족을 비롯해 김의한 일가, 그리고 이동녕 선생이 며칠 전에 들어와 있었다.

 


  상해에서 피치 씨의 집 2층에 있을 때 피치씨의 부인은 순간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고 한다.

아래층 유리창으로 문밖을 내다보는데, 겨울 저고리 차림의 낯선 중국인 노동자가 피치씨의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누구요?」

  그러자 중국인 노동자는

「나는 양복점 직원인데 양복 지을 것이 있나 왔습니다.」

했다.

「양복 지을 사람은 주인일 텐데 왜 주방으로 들어갑니까? 이 사람 수상하군.」

  그제서야 그는 더 대꾸할 말이 없는지, 프랑스 경찰서의 정탐꾼 증명서를 보여주었다.

이에 화가 난 부인은,

「외국인 집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요?」

하고 호통을 쳤다.

「미안합니다.」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가더라는 것이다.

밀정들이 피치 씨 댁을 주목하게 된 원인이 있었다.

김구가 그 집 전화를 남용 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김구는 상해를 떠나 가흥이란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김구는 본명 김구를 바꿔 성(姓)을 장(張)씨로 했다.

장씨는 아버지의 외가 쪽 성이었다. 이름은 진구(震球), 혹은 장진으로 행세했다.

  가흥은 저보성씨의 고향인데 절강성장(浙江省長)도 지낸 그는

그 지역에서 명망 받는 유지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 맏아들 봉장(鳳章)은 미국 유학생으로서,

그곳의 동문 밖에 있는 민풍지창(民豊紙廠)의 고등기사였다.

민풍지창은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 집은 남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은 지가 오래돼 고색이 창연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지식인이나 선비들이 들어있을 그런 집이었다.

  저 선생은 수양아들인 진동손(陳桐蓀)의 정자 한 곳을 김구의 침소로 마련해 주었다.

정자가 있는 그 집은 호수가 주변에 있어서 경치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마치 잘 그려진 동양화처럼 정취가 있었고 공기가 무척 좋았다.

김구는 자신이 쫓기는 몸이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서 낚시나 즐기고 한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당시 김구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저씨 댁 부인 내외와 진동손 부부뿐이었다.

그런데 불편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언어(言語) 문제였다.

중국이란 나라는 광대해서 북경어가 틀리고, 남경으로 오면 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광동(廣東)사람으로 행세했으나 처음부터 중국말을 모르고 또 광동 말은 상해 말과

다르기 때문에 김구는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가흥이란 곳은 산(山)은 거의 없고, 호수가 많아서 어린아이들도 수영에 능하고 배를 잘 저었다.

아마도 ‘수호지’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본거지가 이곳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큰 호수 작은 호수, 마치 문어발처럼 호수가 연결되어 있었다.

토지는 기름지고, 기후 또한 일품이라선지 각종 농산물이 풍부해서 상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인심이 각박한 상해와는 달리 이곳은 사람들의 심성이 고고, 인심이 훈훈해서 마치 지상의 낙원

같아 보였다.

상점에는 물건이 풍부하고 물건을 깎자고 대드는 사람도 없었다.

상점에 물건을 놓고 나왔다가 며칠 후에 다시 가면 잘 보관 했다가 공손히 내주었다.

이런 모습은, 이 지방 사람들의 품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진동손 내외는 김구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김구는 볼거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관광시켜주었다. 남호(南湖) 연우루(烟雨樓)와 서문 밖의 삼탑(三塔)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그곳은 명나라의 임진란 때 일본군이 침입해서 인근부녀들을 잡아 사원에 가둔 곳이다.

일본군은 부녀들을 감시하기 위해 한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했으나, 밤중에 그 승려가 부녀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러자 왜놈들은 그 책임을 묻고 그를 타살했다.

지금도 핏자국이 돌기둥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왜놈들은 우리 조선민족에게도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중국민족에게도 천인공노할 짓을 자행해,

동양에서 가장 악질민족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다.

진동손은 왜놈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흔들었다.

「근본적으로 왜놈들은 악인(惡人)입니다.

순박하게 사는 조선민족과 한민족(漢民族)을 집적거려 살상하고 땅이나 뺏고 하는 야만인이

그들입니다.」

하며 김구의 행위를 영웅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동문(東門)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한(漢)나라 때의 주매신(朱買臣)의 묘지가 있었고,

북문 밖에는 낙범정(落凡亭)이 있었다. 주매신은 전한(前漢) 무제(武帝)때의 문신(文臣)이었다.

  주매신이란 사람은 글만 알지 세상사에는 문외한(門外漢)이라서 서치(書癡) 같은 사람이었다.

집안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 아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새벽부터 글이나 읽고 소일하는,

요즘으로 치면 남편으로서 무능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부인 최씨가 농사일을 나가면서 보리 나락을 잘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밭에서 돌아와 보니 널어놓았던 보리가 소나기에 휩쓸려 내려가는데도 남편은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다.

주매신의 아내는 이런 남편을 믿고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하층민인 목수에게 개가를

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주매신은 과거에 급제했고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도로는

수리하는 얼굴이 꾀죄죄한 아낙네를 보니 자기의 옛 처 최씨였다.

「여봐라, 저 여자를 수레 뒤에 태워라.」

  하인들이 최씨를 수레 뒤에 태우고 관사까지 와서, 주매신은 최씨를 불러내 내 얼굴을 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지난날 남편 주매신이 책만 읽고 무능한데 대한 보복으로 개가를 한 것을 후회했다.

최씨는 주매신이 높게 된 것을 보고 다시 부인이 되기를 원했다.

이때 주매신은 최씨에게

「나하고 살겠다면 물 한 동이를 갖고 와 땅에 쏟은 뒤 그 물을 다시 물동이에 그대로 담아 보시오.」

했다. 그녀는 그와 같이 해보니 물이 동이에 차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슬픔과 탄식 끝에 낙범정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이것 말고도 강태공의 일화에도 나와 있다.

중국인들은 글 읽는 학자를 높이 생각했으며, 다소 생활에 무능하더라도 선비를 귀하게 여겼다.

또 아내의 인내심을 높이 사서, 이런 이야기로써 많은 여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김구는 생각했다.

  김구는 주매신의 전설을 생각하여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해보았다.

자신으로 말하자면 주매신보다도 더 생활 무능력자가 아니었던가.

아내 최준례는 그런 의미에서 착하고 인내심 많은 전형적인 조선 여자였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날 자신이 과연 있었겠는가 생각하면서 울적해했다. 


 한편 상해로부터 소식은 더욱 불길했다. 김구는 상해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흥으로 잠적했다. 이렇게 되자 왜경은 상해, 항주간의 철도와 북경, 상해간의 철도를 샅샅이 살피고 다닌다고 했다.

양철도와 연결되는 도시 가운데 가흥이 있었는데, 가흥역시 김구가 피신하기에는 안전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흥에 왜경이 눈에 불을 켜고 수색을 한다는 정보원의 말에 따라 김구가 사실 확인을 해보니,

과연 사복차림의 일경이 이곳저곳을 순찰하고 있었다.

가흥에까지 일경이 파견됐으니 김구의 신변이 위험해졌다.

그러나 이제 또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동지들은 쫓기는 몸이지만 가족이 있어 위로라도 해주련만,

김구는 홀아비에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이었다.

  저한추라는 중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처가가 해염현 성내에 있었고,

거기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해염 주(朱)씨 산당(山堂)이 있었다.

그곳은 피서별장이었다. 저한추는 김구의 피신문제와 생활방도를 부인과 상의했다.

부인은 재취였는데 굉장한 미인이었다.

  김구는 부인과 단둘이서 기선을 타고 해염성내 주(朱)씨의 공관(公館)에 도착했다.

주씨의 집은 해염현 내에서 제일 큰 규모였고 김구의 숙소는 남의눈에 잘 뜨이지 않는 뒤편 양옥으로

정했다.

주씨의 집과 주변은 잘 정돈되어 있어 마치 그림에 나오는 저택을 방불케 했다.

집 대문 앞은 돌길이었는데, 아마도 인부를 동원해서 깔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건너편은 호수였다.

호수로 거룻배들이 다니고 큰 돛단배들이 풍경화에서나 보듯이 지나쳤다.

 


  대문 안에는 정원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여기서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어

그곳에서 집안일을 담당하는 집사가 매일 매일의 생계를 꾸려갔다.

주씨의 식객(食客)은 엄청나게 많아서 한때는 4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식구들 대부분이 장사를 하거나 그 외 생계를 위해 분가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남아있는 식구들도 개별적으로 취사를 원해 물품을 따로따로 사용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중국인 집은 가(家)가 붙은 집이 일가(一家)를 이루어 살고, 있는데,

주씨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주씨의 사택은 엄청나게 컸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살고 있으니 방 또한 많아, 마치 벌집과 같은 방들이 가옥마다 서너 개씩 되었다.

  해염의 삼대 화원(花園)가운데 전가(錢家)화원이 제일 크고 화려하다고 한다.

그 다음이 주씨 화원이라고 해서 김구는 두 집 화원을 모두 구경했다.

  김구는 주씨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노리언에서 내려 서남삼령까지 십리를 걸었다.

저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걸었기 때문에 몹시 힘 드는지 연신 땀을 흘렸다. 저부인의 친정집 여자

한명이 김구가 먹을 식료와 육류 품을 들고 수행했다.

김구는 이런 모습을 필름에 담아 후대에 전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활동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을까.

김구는 저 부인을 「용감한 여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친절하고 용감하고, 정의감이 강한 부인이었습니다.

중국에 와서 지인(知人)들을 많이 사귀었지만 저씨 부인만큼 친절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김구는 나중에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주씨가 건축한 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휴식하고 다시 한참 따라가니

산중턱에 아담한 양옥이 한 채 보였다.

그 집에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용인과 일가족들이 김구와 저 부인을 맞이했다.

저부인은 하인들에게 김구의 식성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김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본가로 돌아갔다.

  김구가 와 있는 집은 원래는 별장이었지만 저부인의 숙부를 매장한 후에는 묘소의 제청(祭廳)이

되었다.

김구는 거의 매일 묘지기를 데리고 산과 바다를 감상하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상해시절의 일이 아득히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마치 피서객이나 된 듯한 느낌이었다.

  상해 생활 14년, 남들은 남경, 소주, 항주의 산천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들을 했으나,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매일매일 불안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별천지였다.

산 앞 바다 쪽에는 범선(帆船), 윤선(輪船)이 그림 같은 모습으로 떠있고, 산장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나그네에게 더욱 쓸쓸함을 안겨주었다.

  김구가 이곳에 오지 꽤 여러 날이 되었건만, 날짜를 잊어버릴 정도로 시간이 지나갔다.  

묘지기를 안내 꾼으로 해서 응과정이란 정자에 오르니, 산위에 조그만 비구니 암자가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한 늙은 비구니가 맞이했는데 묘지기와는 잘 아는 사이 같았다.

 


  묘지기가 비구니에게 김구를 소개했다.

「이 분은 해염 주씨 댁의 큰 아가씨가 모셔 온 분인데 광동인 입니다.

약을 드시기 위해 머물고 계시는데, 잠깐 구경하러 오셨습니다.」

  노비구니가 합장을 했다.

  노비구니의 깎은 머리가 고상하게 보였다.

「나무아미타불, 머리서 오셨는데 이것도 전생(前生)의 인연이지요. 내당으로 들어갑시다.」

  그런데 조금 전 노비구니를 만났을 때처럼 엄숙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암자의 각방에서는

입술에 붉은 칠을 하고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여승들이 승복을 맵시 있게 입고 염주를 들고 있었다.

김구를 보자 그녀들은 농염 짙은 웃음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사창굴에 들어온 이상한 기분이었다. 묘지기는 김구의 시곗줄 끝에 매달린 지남침이 있는 것을 보자

「뒷산에 암석이 있는데 그 암석위에 지남침을 놓으면 지북침이 됩니다.」

  아마도 그 바위가 자석광인 듯 했다. 묘지기를 따라 암석위에 지남침을 놓았더니 지북침이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묘지기가 장날이 오늘인데 구경이나 가지 않겠느냐고 김구에게 말했다.

「좋소. 갑시다.」

  김구가 묘지기의 뒤를 따라가자, 그곳은 임진란 때 건축한 작은 성이 나왔다.

보통 진(鎭)이 아니고 포대로 있는 해변의 요새였다.

성안에는 인가가 즐비하고 관청도 자리 잡고 있었지만 후미진 곳이라서 장꾼도 많지가 않았다.

김구와 묘지기는 어떤 국수집에 들어가 국수 가락을 집어먹고 있는데,

노동자 차림의 젊은이와 경찰들이 서로를 눈을 맞추어 김구를 쳐다보았다.

수상쩍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윽고 묘지기를 불렀다.

그리고 김구도 불렀다.

김구는 서투른 광동어로.

「나는 광동상인이요. 이곳에 초청을 받고 유람 차 나왔소.」

하면서 묘지기가 경찰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를 주시했다.

  묘지기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이야기했다.

「해염 주씨 댁 큰아가씨가 산장에 모셔 온 귀하신 손님입니다.」

  그러자 경찰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주씨의 세력은 그곳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산장으로 돌아와 김구가 묘지기에게 물었다.

「경찰들이 고분고분 돌아가는데 어쩐 일이오?」

「경찰들이 장 선생(김구)에 대해 묻기를, 광동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죠. 주씨 댁 큰 아가씨가 일본인과 어떻게 동행하겠소?

일본인이라면 이를 갈고 있는데, 대갓집 아가씨가 일본인과 상대하는 걸 보았소?」

  며칠 후에 안공근, 엄항섭, 진동손이 김구가 있는 산장으로 왔다.

그들은 응과정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다시 가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진(鎭)에서 경찰이 김구에 대해 추궁한 후

산장을 비밀리에 감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별 단서를 잡지 못하자 경찰국장이 해염 주씨 집에 출장 나와서

산장에 머물고 있는 광동인의 정체(김구)를 조사했다고 한다.

저부인의 부친이 김구가 오게 된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자 경찰국장은


「오 그러십니까? 있는 힘을 다해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골 경찰이 보호하면 얼마나 보호해주겠는가,

김구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가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김구는 그 길로 해염현성에 들어가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가 남쪽 지방을 순시했을 때

주연을 베풀던 누방(樓房)을 구경했다.

건륭황제는 청나라 6대 황제로 60여 년간 재위 하면서 청나라의세를 크게 확장했다.

외치(外治)뿐 아니라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등 문화사업도 벌인 황제이지만 순행(巡行)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김구는 가흥으로 되돌아와 작은 배를 타고 매일 남호(南湖)로 나가 뱃놀이를 하기도 하고,

시골 가서 닭을 사다가 식도락을 즐기기로 했다.

김구의 나날은 이렇게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조국이라는 두 글자가 각인돼 있었다.

「내가 과연 이대로 여기서 놀이나 즐기고 시간만 보내도 되는 것일까.」

  김구는 빼어난 경치를 보면서도 이렇게 자책했다.

  진동손은 손용보라는 농부는 상당히 친했다.

진송손의 소개로 잠시 김구는 엄가빈의 있는 손용보의 집에 묵게 되었다.

김구는 스스로 노인이 되어 그 집식구들이 모두 논밭으로 일하러 나간 후 빈집에 남아

아이가 울면 아이를 안고 논밭으로 아이 엄마를 찾아 주러갔다.

집과 농토가 멀리 떨어져있어 한참 동안 걸어야만 했다.

그러면 아이 엄마는 너무 송구스러워 고맙다는 소리를 몇 번씩이나 했다.

 


  시골의 5, 6월은 양장업 시기이다. 김구는 양장업을 하는 집들을 돌아다니며

부녀들이 고치에서 실을 뽑는 것을 구경했다.

60여세쯤 된, 얼굴에 주름투성이인 노파가 물레 곁에 솥을 거고,

물레 밑에 발판을 달아 오른발로 눌러 바퀴를 돌리고, 왼손으로 장작불을 지켜 누에고치를 삶았다.

그리고 오른 손으로는 물레에 실을 감는 것이었다. 김구가 친근감이 나서 노파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나이가 몇이오?」

「육십 좀 넘었소.」

「몇 살 때부터 이 기계를 사용했소?」

「6, 7살 때부터요.」

「그럼 60년 전 이전에도 이 기계였소?」

「물론이오. 이 기계는 어머니가 물려준 거요.」

  김구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기계는 수백 년 전부터 그들의 조상이 착안해 쓰여진 것이리라.

  농가에 있으면서 농기구를 살펴보니 우리나라의 것보다 편리해보였다.

전답에 물을 대는 것만 해도 그렇다. 나무 톱니바퀴를 소나 말에 걸고,

여러 사람이 밟아 굴려 한 길 이상이나 호수 물을 끌어올려 물을 대니 어마나 효과적인가.

  김구는 중국 농촌지방에서 묵으면서 농기구와 관련된 것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편리한 것들을 보고 배우지 않고 헛된 것만 받아들인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무런 쓸모없는 망건이나 갓 같은 것을 받아들여 의관이라 해놓고 팔자걸음이나

걷던 양반들의 행세가 김구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김구의 방랑은 또 시작되었다.

엄가빈에서 다시 사회교의 엄항섭의 집으로와 오룡교 진동손 집에서 숙식할 때였다.

낮에는 주애보의 작은 배를 타고 인근 운하로 다니며 여러 농촌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가흥성 내에는 몇 개의 고적이 있었다. 고대의 부자로 유명한 도주공(陶朱公)의 집터가 있고,

암소 다섯을 기르던 축오자 바깥을 파서 만든 양어장이 있는데, 문 앞에  도주공 유지라는 비석이

있었다.

도주공이란 사람은 춘추 말에 월(越)왕 구천의 신하인 범려이다.

  김구가 하루는 심심해서 동문(東門)으로 가는 대로변 광장으로 나가 보았다.

그곳에는 군대의 조련장(훈련장)이 있었다.

제식훈련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신식훈련이 흥미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련을 하던 군관 한사람이 부리나케 뛰어나오더니 김구의 얼굴을 유심히 아래위로 살폈다.

그 사람은 김구에게,

「어디서 온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김구는 혹시나 이 사람이 정탐꾼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만있자니 수상쩍게 생각할까봐,

「나는 광동사람이오.」 했다.

  그러나 그 군관역시 광동사람이었다.

김구는 그 길로 보안대로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되었다.

취조관이 꼬치꼬치 캐묻고 험악하게 대하기에 김구는.

「사실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 당신의 단장을 면담케 해 달라. 그럼 내 신분을 밝히겠다.」

하고 말했다. 김구의 요구에 단장은 나오지 않고 부단장이 나왔다.

김구는 부단장에게 말했다.

「나는 한인(韓人)이요.

상해 홍구사건에 연루돼 거주가 곤란해 이곳 저한추의 소개로 오룡교 진동손의 집에 머물고 있소.」

 


  부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어를 썼다.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장진구요.」

  그러자 경찰은 그 길로 남문의 저씨 댁과 진씨 댁에 가서 신원조회를 해보았다.

네 시간쯤 뒤 진동이 와서 신원보증을 섰다. 그런 뒤 풀려났다.

  저한추는 김구가 홀아비로 사고무친하게 혼자 쓸쓸히 사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는지

이렇게 권고를 했다.

「김 선생께서는 홀아비가 아니오? 나이도 어지간하신데 인생이 무척 쓸쓸하시겠소.

혁명도 좋지만 혁명을 하려면 가정이 있어야 하오.

마침 내 친우 중 과부가 된 사람이 있소.

중학교 선생으로 있는데 선이나 한번 보시고 마음에 맞으면 취함이 어떻소?」

  김구가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교원이라면 지식인일 텐데 나의 비밀이 탄로 날 것이 분명하오.

차라리 여사공(搖船女)을 취함이 좋을 것 같소. 주씨(주애보)같은 일자무식이면

내 비밀이 보장될 것이오.」

  김구는 그 후 선상생활을 계속했다. 오늘은 남문 호수, 내일은 북문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위에서는 행보 할뿐이었다. 김구는 하루하루가 초조했고 한편으로는 허망한 시간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다짐을 했지만 경치가 너무 좋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인간적인 시간들이 마냥 흘러가기만 했다.

문득 어머니의 실망하는 주름진 얼굴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