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40. 다시 탁(卓)노인이 이야기

오늘의 쉼터 2013. 2. 2. 15:39

40. 다시 탁(卓)노인이 이야기

 

 

내가 다시 탁 노인을 만난 것은「대한민국 독립선열 유족회」사무실에서였다.

 유족회에서는 국권을 일제에 빼앗기고 우리 민족이 노에로 전락하게 된 8월29일 국치일을  선택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희생하신 독립선열들의 합동 추모 제정을 올리기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고,

 탁 노인은 이 추모제전에서 헌시를 탁 노인은 그날 「헌시」를 낭독하기로 돼 있었다.

  대부분 굵직한 직책을 맡고 있는, 이름을 대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 비해 탁 노인의

이름은 여간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삼열 회장이 탁 노인을 기념식행사에 열사로 배정한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탁 노인이 8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도 티끌하나 이름을 헛되이 사용치 않고,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을

충정으로 받드는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탁 노인은 예의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 나는 백범 선생의 일대기를 써나가면서 나름대로

의문 나는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탁 노인에게 상해 시절 김구 선생의 연락병이었느냐고 묻자,

그는 연락병이란 용어는 군대에서나 쓰는 용어가 아니냐면서 이런 말을 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본국에 우리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남의 나라 땅에 임시로 정부를 조직한

것이오. 따라서 요즘처럼 정부조직이 제대로 갖춰질 수가 없었소.

남의 건물에 입주해서 월세를 내야했는데, 자금이 없어서 월세도 못 낼 형편이었소.

나는 국무원을 들락거리면서 동지들의 편지를 전달했을 뿐이오.

선생님은 이런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고 거목처럼 버텨 주신 것이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원년은 해방 후인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으로 잡고 있소.」

  탁 노인은 몇 년 전 동지들 몇과 상해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단체여행이고 구성원도 다양해서, 70여 년 전 임시정부 청사를 가기 위해서는 혼자 빠져나와야만

했다는 것이다.

탁 노인은 택시를 갈아타고 당시의 불조계(佛組界)골목으로 가보았더니 집들은 낡은 채로 그대로 있었고,

 그 가운데 임시청사 건물이 남아있더란 것이었다. 임시청사건물 앞에 웬 90이 넘는 노파가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 유심히 들여다보니 70여 년 전,

그때는 처녀였던 하숙집 주인의 딸이더란 것이다.

  옛날을 캐물으니 노파도 반갑게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려 옛 사람들 이름을 묻는데

「선생님 돌아가신 소식은 알고 있지.」

하며 김구 선생님 이야기를 새삼 꺼내 감개가 무량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노파는 제법 학식도 있어서 그간 겪은 일들을 탁 노인에게 짧은 시간 안에 「다이제스트」해주었다.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기 나부끼던 국민혁명도 겪어보았고, 붉은기가 섬뜩하게 바람이 휘날리면

금방 세상이 달라질 것 같이 설치던 인민공화국의 요원들도 경험해보았다는 것이다.

국경과 민족은 다를지언정 사람의 본성은 같아서 노파나 탁 노인이나 눈물을 흘리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살이가 일장춘몽이란 말도 있듯, 그 말이 맞아요. 남은 건 얼굴의 주름이고 추하고 노쇠한

몸이지만 그래도 그때의 씩씩했던 독립지사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심장박동이 세차게 뛴답니다.」

  노파는 그 말을 하면서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구 주석님이나 그때 그 선생님들 만날 날도 멀지 않았소.」

하며 다시 비탄에 젖었다.

  탁 노인은 노파에게 뭔가 주고 싶어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몇 십 달러가 있어 그 돈을 노파의 손에

쥐어주고

「재래이!」

하고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노파는 탁 노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한다.

  탁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자신이 존경한 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오.

그런데 요즘 나라꼴을 보면 존경할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소.

그때는 김 선생님(김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희망을 가졌었소.」

  탁 노인이 너무 비감에 젖을까봐 도움말을 주었다.

「비록 지금은 안계시지만 김구 선생님의 이름이,

그 행적이, 그분이 가졌던 따뜻한 사랑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희망이 있지요.」

했더니 탁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다시 김구의 상해 탈출 후, 유유자적했지만 마음은 한시도 편치 않았던 남경에서의 생활로

이어진다. 김구는 상해를 탈출해서 가흥에서 남경, 남경에서 장사로, 장사에서 광주로,

다시 장사로, 장사에서 중경으로 갔다.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이란 하나같이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혼자 몸이 아닌, 대가족과의  생활이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미주 동포들은 김구가 상해를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원조를 더욱 많이 해주었다.

  박찬익은 원래 남경에서 중국국민당 당원으로 중앙당부에 취직해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정당의

사무국직원인 셈이었다.

그래서 국민당 안에서의 지인(知人)이 많았다.

그를 통해서 교섭한 결과, 중앙당부 조직부장이자 강소성(江蘇省)의주석인 진과부(陳果夫)의 소개로

장개석(蔣介石)장군과 김구가 만날 기회를 갖게 됐다. 진과부는 당시 중국국민당의 최고 간부였다. 그는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밀접케 하는 임무를 띠었다.

  김구는 안공근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에 도착했다. 진과부는 부하인 공패성(貢沛誠), 소쟁(蕭錚)등을 보내 김구 일행을 맞게 했고 음식점인 중앙반점(中央飯店)에 숙소를 정하게 했다. 다음날 김구는 박찬익(號:남파)을 통역관으로 대동하고, 진과부의 자동차를 탔다. 장개석 장군의 저택은 중앙군교(中央軍校)안에 있었다.

  장장군은 대포(大袍)를 입고 온화한 미소를 띠며 김구를 맞이했다. 김구는 장개석의 명성이 높고 장군으로서의 용맹성을 듣고만 있었을 뿐 막상 개인적으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장개석은 중국인치고 얼굴이 뛰어난 미남이며 웃음 진 얼굴에는 악의(惡意)가 들어있지 않았다.

  이들은 우선 날씨 이야기부터 꺼냈다.

「날씨가 궂은 데,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장개석이 김구의 두 손을 정답게 잡았다.

  처해진 환경과 민족은 달랐지만 만남에서부터 두 사람은 동지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나라를 되찾는 데 얼마나 고생이 심하십니까?」

  김구가 덕담(德談)으로 대응하자 장개석이 자신의 소신을 간단히 밝혔다.

  응접실은 상당히 넓었지만 그리 화려하진 않았다. 이윽고 녹차가 나왔다. 두 사람은 녹차를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십년, 백년을 만나도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반된 이견 때문에 친구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단 몇 시간, 한 번을 만나도 동지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장개석과 김구의 역사적인 만남이 그랬다.

「동방의 각 민족은 손중산(孫中山)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부합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

  중산은 손문의 호(號)였다. 손문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하면서 청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위해 1911년 10월 신해 년(辛亥)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 이듬해 1월 남경(南京)에 중화민국을 수립해서 초대총통에 취임했다. 김구가 장개석을 만났을 때는 이미 손문은 사망한 후였다.

두 사람은 진과부와 박찬익을 내보내고 필담(筆談)으로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일본의 마수가 시시각각 중국 대륙으로 침입하니, 좌우로 물리쳐 주면 필담으로 몇 마디 올리겠다.」고 요청한 것이다. 장개석은 붓과 벼루를  친히 갖다주었다. 김구가 붓으로 썼다.

「장 장군이 백만 원(百萬元)의 돈을 허락하면 2년 이내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서 대 폭동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교량을  파과 할 것이오. 장군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장개석이 이에 답했다. 그의 글씨는 명필이었다. 무관으로서는 보기 드문 필적이었다. 장개석이 글씨를 마치고 그것을 김구에게 넘겼다.

「서면(書面)으로 상세히 계획을 작성해서 보고해주시오.」

「좋습니다.」

  김구는 그 말을 끝으로 장개석의 방을 물러났다. 다음날 김구는 동지들과 함께 간략하게 계획서를 작성하여 장개석에게 보냈다. 그러자 진과부에게 연락이 왔다. 진과부는 자신의 별장으로 김구 일행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진과부는 장개석을 대신해서 말했다.

「특수공장(테러)으로 천황을 죽이면, 그 아들이 천황이 될 것이고, 대장을 죽이면 중장이 대장이 될 것 아니겠소?」

  진과부의 이야기는 한 두 사람 죽여 봐야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왜놈들의 반감만 끌어내 각국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맞습니다.」

  김구도 그의 말에 수긍을 했다.

  천황이나 대장을 죽이는 것은, 당장 일본이 망하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켜 한국인의 기개를 보이자는 것과, 그로인해 독립자금을 염출하는 데 성과가 있고, 주눅이 든 한국민족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자는 의미가 있었다.

  진과부가 제의했다.

「장래 독립을 하기위해서는 군인을 양성해야하지 않겠소?」

  김구 역시 생각하던 바였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문제는 학교를 설립할 장소와 재력입니다.」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무관학교의 설립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장소를 낙양분교(洛陽分校)로 하고 학교의 발전에 따라 자금을 계속 지원한다는 약속 하에 1기에 군관 1백 명 씩을 양성하기로 합의를 했다. 이에 따라 동북3성에 사람을 파견해서 옛 독립군들을 소집했다.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 오광선(吳光善), 김창환(金昌煥)등 장교와, 그들의 부하인 청년 수십 명이 모였다. 또 중국관내의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 흩어져있던 청년들을 총집결했다. 그리하여 100여명을 제1차로 진학케 하고, 이청천과 이범석은 교관(敎官)과 영관(領官)으로 근무케 했다. 이청천과 이범석은 전형적인 무인(武人)이었다. 이청천은 일명 지청천(池靑天)으로 불리우며 서울 출신으로 한말 무관학교와 동경육군중장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서조군정서, 대한독립군단, 고려혁명군, 정의부군사위원장등 주로 군사 활동에 잔뼈가 굵은 장군이었다.

  또 이범석은 호가 철기로, 1920년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참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낙양의 군관학교, 한국인군관대장, 광복군 제2지대장과 참모장등을 역임했다.

  이 당시 우리사회에서는 또 다시 통일운동이 벌어졌다. 대일전선통일 동맹의 발동으로 의논이 엇갈렸다.

  어느 날,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이 김구를 찾아와 특별면회를 청했다. 남들이 들으면 곤란한 중대한 이야기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남경의 진회(秦淮) 강가, 어떤 정자 밑에서 대담을 했다. 김원봉이 김구에게 물었다.

「현재 발동되는 통일운동에 참가하려하오니 선생님도 동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구가 그의 의중을 엿보고 반대 의견을 냈다.

「통일을 하자는 대원칙은 같으나. 그러나 그 내용이  같은 이불속에서 다른 꿈을 꾸는 것으로 생각되니, 군의 소견은 어떻소?」

  김원봉이 이에 대꾸했다.

「제가 통일운동에 참가하는 목적은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이란 혐의를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김구가 이 말에 단호히 말했다.

「나는 목적이 다른 그런 통일운동에는 참가하길 원하지 않소.」

  그 후부터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5당이란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독립단 등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했다. 5당통일속에는 임시정부를 눈엣 가시로 보는 의열단원 김두봉, 김약산 등이 들어있었고, 이들은 임시정부의 취소운동을 격렬하게 벌였다. 국무위원인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연등 7인 가운데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등 다섯 사람은 통일에 심취해서 임시정부 파괴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것을 본 김두봉은 임시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송병조, 차이석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했다.

「이 기회에 명패만 남은 허수아비 같은 임시정부의 깃발을 끌어내립시다. 5당이 통일되는 마당에 존재 가치가 없지 않소?」

  그러나 두 사람은 김두봉의 말에 인언지하 거절을 했다. 국무위원 다섯 사람이 질책을 내놓으니 국무회의를 개최할 수가 없었다. 다섯 사람은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김구는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뿔뿔이 흩어져 무정부 상태라는 조완구의 친서를 받고 분노했다.

「이런 몹쓸 사람들, 헛된 것에 농락당해 주인의 의무를 망각하다니.....」

  김구는 급히 행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그곳에 주재하던 김철은 이미 병사했고, 조소앙은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 사상적인 이유에서였다.

  김구는 항주에 거주하던 이시영, 조완구, 김봉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등과 함께 김구는 임시정부의 유지문제를 협의했다. 그 결과 의견이 일치를 보았다. 임시정부는 민족의 정통성과 구심점, 그리고 상징성이 있기에 결단코 유지되어야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과 함께 가흥으로 간 김구는 남호(南湖)에 놀잇배 한척을 빌려 선상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이동녕, 조완구, 김구 3인을 새로 국무위원으로 보선했다. 이미 국무위원인 송병조, 차이석을 합하여 5인이 되니, 비로소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5당통일이 형성된 당시부터 동지들은 김구에게 단체조직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는 이에 대해 극구 만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일을 하자는데 내용이 복잡해 참가하지 않았소. 그러니 내가 어찌 다른 단체를 조직할 수 있겠소?」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조소앙이 한독당 재건을 추진하니, 김구 다른 단체를 조직해도 통일의 파괴자란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가 종종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은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다른 친위단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 김구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나중에 한국국민당은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함께 한국독립당으로 합류했다.

  한편 낙양군교(洛陽軍校)의 한인학생문제로 남경에 파견된 일본영사 스마(須麻)란 자가 중국 당국에 엄중히 항의했다.

「김구란 자는 우리 일본의 적이요. 이미 그의 목에 60만원의 돈을 항상 걸어놓고 있소. 이런 대역죄인을 우리가 체포하려는데 도대체 협조를 하지 않으니 무슨 이유요?」

  스마는 경비사령 곡정륜(谷正倫)에게 교섭을 벌였다.

「김구의 목에 걸린 60만원의 돈을 내가 찾겠다.」

  곡(谷)씨는 스마에게 시달리다 못해서 김구에게 이 내용을 알려주었다.

「남경에서 조용히 있어줘야겠소. 왜놈들의 간섭이 너무 심하오.」

  결국 장개석과 김구 사이에 합의한 낙양군교는 학생 1기를 배출하고 다시는 학생모집을 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구의 신변에도 위협이 더욱 따랐다. 김구를 중국당국에서 일본 왜경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일본 국적에 입적(入籍)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였는데, 일본 당국은 아예 이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왜놈들은 김구가 남경 어디엔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에서 암살대를 남경으로 파견했다고 했다. 김구가 남경의 공자묘(孔子廟)근처에 사람을 파견해 보니 과연 왜놈 사복경찰 7, 8명이 대오를 지어 순찰하고 있는데, 그 경찰들이 찾는 사람이 김구더라는 것이었다.

  김구는 부득이 다시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데려왔다. 한달에 15원씩 주기로 계약을 맺었다. 주애보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사람이 성실했다.

  김구는 그녀를 회청교(淮淸橋)근처에 방을 얻어 동거에 들어갔다. 왜놈 경찰의 눈을 따돌리기 위해서 부부로 가장했다. 그는 직업을 고물상이라고 했고 광도 해남도 사람으로 위장했다.

  경찰이 가끔씩 호구조사를 왔다. 김구는 피해있고 주애보가 대신 답변을 했다.

「제 남편인데요. 고물상을 하고 있습니다.」

  김구가 답변을 잘못하다가는 단서가 잡힐 까 우려해서였다.

  노구교사건으로 중국은 일본에 대해 항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노구교사건이란 북경교외의 영정강(永亭江)에 있는 다리 노구교 근처에서 훈련 중인 일본군대와 중국군대와 충돌한 사건을 말했다. 따라서 한인의 인심도 불안해졌다.

  5당 통일로 합쳐진 민족 혁명당은 다시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또 한 개 생겼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취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 주체는 김원봉, 즉 의열 단원이었다. 김원봉 일파는 민족독립운동을 전개 하면서도 이면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고 있었다.

  김구는 자신이 결성한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과 미주, 하와이 각 단체를 연결하여 민족진선(民族陳線)을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지지, 옹호케 하여 정부는 더욱 활기를 띄고 있었다.

  한편 상해 전쟁은 중국 측이 아주 불리한 형세로 전개돼갔다. 왜놈들의 비행기가 남경을 폭격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김구는 회청교 집에서 초저녁부터 왜놈 비행기들이 넘쳐대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보 사이렌이 해제돼 잠이 깊이 들었는데 갑자기 잠결에 공중에서 기관포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놀란 김구는 잠자기를 박차고 뛰쳐나가보았다. 그러자 김구가 누워 있던 천장이 무너져 먼지와 함께 쏟아졌다. 뒷방에서 자는 주애보를 불렀다.

「애보! 어디 있소!」

「괜찮아요.」

  애보는 다행히 죽지 않았으나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뒷방에 같이 사는 사람들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뒷벽이 무너지고, 무너진 밑에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각처에서 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라, 밤하늘은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같이 현란했다. 왜놈들이 한차례 공습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왜놈들은 민가나 관가를 가리지 않고 폭격을 가했다. 그 자들은 중국민중을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말로는 동양평화운운하지만 자기 민족만 제일이고 남의 민족은 개나 돼지 취급을 했다. 특히 중국인들은 마치 쓰레기 취급을 했다.

  공포의 밤이 지나자 날이 밝고 어김없이 태양이 솟아올랐다. 김구가 바깥으로 나가보니 아직도 부서진 집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중상을 입은 사람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창자를 끊는 듯 애절하게 들려왔다.

여기저기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돌무더기처럼 쌓여있었고 넘어져 피가 흐르는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김구는 마로가(馬路街)에 있는 어머니 집을 찾아갔다. 어머니집 앞에 이르러 널빤지로 겨우 방을 가린 문을 두드리자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안전했다.

「놀라셨나요?」

「나는 괜찮다.」

  어머니는 오히려 태연했다.

「너는 어땠냐?」

「나는 하나도 놀랍지 않다. 침대가 요동을 치더라. 바깥에 사람이 많이 죽어 있더냐?」

「예, 오면서 보니 요 근처에서도 사람이 많이 상해 있더군요.」

  어머니는 근심이 되는지

「그래 우리 사람들은 괜찮니?」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김구는 어머니의 집을 나와서 이청천의 집을 찾아보았다.

폭격 때문에 유리창들이 모두 부서졌으나 별 이상은 없었다. 남기가(지명)? 대다수 한인학생과 가족도 무고했다.

  이광(李光)댁의 자녀들은 일곱인데, 한밤중 자전거로 피난 가던 도중, 천영(天英)이 혼자 잠자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담을 넘어 들어가 아이를 안고 나왔다고 했다.

  남경이 왜놈의 손에 함락될 것을 우려한 중국정부는 중경(中慶)을 전시 수도로 정하고 그는 기관을 천천히 옮기기로 했다.

  광복진선 3당이 인원 및 가솔 1백여 명은 물가가 그다지 비싸지 않은 호남성(長沙)로 이주하기로 했고, 상해, 항주에 있는 동지들과 율양(?陽) 고당암(古堂庵)에서 선도(仙道)를 수련하고 있는 양기탁을 포함해서 각지의 식구(食口)들에게 남경으로 올 여비를 보내어 소집장을 내었다.

  김구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해 자기 가솔과 큰형인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형수를 반드시 모셔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속들만 데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모시고 오지 않았다.

  김구는 이것이 화가나 안공근을 질책했다.

「내가 자네에게 무엇이라고 당부했나? 선비의 집에 불이나면 사당(祠堂)부터 포출(抱出)한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 형과 같은 대인(大人)이 국가를 위해 한 몸을 의롭게 버렸는데 자네 형수를 점령구 왜구의 속지에 버리고 오는 것은 자네로서 의(義)를 버림과 같네. 자네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 민족독립운동가의 도덕으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일이네.」

  안공근은 김구의 말에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아무런 대구도 없었다. 결국 안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편입을 원하지 않으므로 안공근의 뜻에 맡겼다.

  김구는 둘째 아들 신(信)이를 불러왔다. 신이는 안휘의 둔계 중학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를 모셔 온 김구는 안공근 식구와 함께 영국 윤선(輪旋)으로 한구(漢口)를 향해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백여 가구나 되는 대식구를 중국 목선한척에 짐까지 잔뜩 싣고 남경에서 소개(疏開)했다.

  남경에서 출발할 때 여사공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김구가 주애보에 대해 미안한 감을 갖은 것은 송별할 때 1백 원밖에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애보란 여자는 김구의 중년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여자였다.


  그 뒤, 한구(漢口)까지 동행한 공근의 식구는 나중에 중경으로 이주했고, 백여 식구의 동지와 동포들은 공동생활에 익숙해 지지 않아서 따로따로 방을 얻어주고, 개인적으로 실림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3권에서는 김구 선생님의 환국과 해방 직후의 사회상, 민족의 앞날을 내다본 백범 선생님의 통일운동, 천인공로 할 안두희의 백범 선생 암살 진상, 선생님의 말씀까지 수록한 완결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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