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8. 쾌남아 윤봉길

오늘의 쉼터 2013. 1. 26. 21:14

38. 쾌남아 윤봉길

 

 

 

 난세(亂世)에는 영웅이 나온다. 이 말은 삼국지와 수호지에 있는 말만은 아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촉각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때 촛불을 지키려는

많은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윤봉길, 후에 의사(義士)가된 그 젊은이였다.

어느 날이었다.

동포인 박진(朴震)의 종품(?品)공장에서 한때 기술자로 일한 적이 있는 윤봉길(尹奉吉)이

김구를 찾아왔다.

종품공장이란 말총으로 각종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을 말하는데 말총을 갖고 방석이나

모자들을 만드는 수공업이 당시 중국에는 성행했다.

윤봉길은 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홍구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했다.

「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저자거리를  다니는 것은 장사를 해서

잔돈푼을 건져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와 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한 것입니다.」

김구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봐서 윤봉길에 쏘는 듯한 눈빛에 거대한 이상이 숨겨져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야기 계속하게.」

윤봉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말이 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도 제 한 목숨이 죽을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죽을 자리를 찾아 달라?」

「그렇습니다.」

「자네 같은 젊은이가 왜 죽으려하는가?」

「무릇 인간이란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게 마련 아닙니까?

태어남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동경사건(이봉창 의거)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저 세상에 가서도 꼭 보답해드리겠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비록 노동일을 하고 있지만 학식이 있고 뜻이 깊어 노동은 생활의 방편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노동을 하면서 호구지책에 매달리기에는 아까운 청년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해보니,

자신의 뜻을 위해 한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큰 뜻을 염두에 둔 대장부였다.

김구는 윤봉길에게 이렇게 안심을 시켰다.

「옛말에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有志者 事意成)고 했소.

내가 요사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있소. 그런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번민하던 참이었소.」

김구의 말을 듣고 있던 윤봉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구가 다시 말했다.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들이 전쟁에 이긴 위세를 업고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경축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모양이오.

그러니 군은 일생의 대 목적을 이 날에 달성해 봄이 어떠하오?」

천장절은 일본 천황이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김구의 말을 관심 있게 듣고 있던 윤봉길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제 가슴에 있던 번민의 덩어리가 모두 눈 녹듯이 사라지려하고 있습니다.

준비해주십시오.」하고 자리를 떴다. 

김구는 윤봉길을 보내고 나서 옛 시 한 구절을 음미해보았다.

「운이 다하면 천복비(薦福碑)에도 벼락을 친다.」

복을 빌 기위해 만들어 놓은 비석도 운이 다하면 벼락을 내린다는 말이다.

상해의  일본 영사관은 일일신문(日日新聞)에 주민에게 이렇게 알렸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하는데 그날 식장에 참석하는 자는

물병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일본국기 하나씩을 갖고 입장하라.」

김구는 신문에 게재된 포고문이 오히려 윤봉길이 거사하는데 안내장 같은 역할을

한 것 같다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구는 즉시 서문로(西門路)의 왕웅(김홍일)을 방문했다.

「이번일은 특히 중요하니  자네가 신경 써서 맡아주게.

왜놈들이 사용하는 어깨 물통」과 도시락을사서 보낼 테니,

속에 폭탄을 장치해서 이틀 이내로 보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이튿날 왕웅이 돌아와서 김구에게 보고했다.

「내일 오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친히 시험하는 것을 확인하라고 창장(廠長)이 이야기하더군요.」

「알았네.」

김구는 이튿날 새벽녘에 강남 조선소(造船所)를 찾아갔다.

조선소 내부에 일부분 병공창이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아 대포나 소총을 수리하는 정도였다.

기사(技士)는 왕백수란 중국인이었는데 그는 물통과 도시락, 두 종류의 폭탄을 시험했다. 

마당 한곳에 토굴을 파고 속에 사면으로 철판을 두른 후, 그 속에 폭탄을 장치했다.

그리고 뇌관 끝에 긴 끈을 잇더니 한 명이 끈을 잡고 수십 보 밖으로 기어가서 잡아 당겼다.

그러자 토굴 안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면서 파편이 산산조각이 돼 날았다.

「폭발물의 시험은 뇌관 20개를 시험해서 20개 전부가 폭발되어야 실물에 장치하는 것입니다.

이번 것은 합격입니다.」

왕백수의 이야기였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김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봉창이 이곳에서 폭탄을 의뢰하여 소지하고 동경으로 가서

일본천황을 폭살하려 했는데, 위력이 약해 실패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김구가 다시 요구하니 지난번 일을 사과하는 의미에서도 성심성의껏 제조해

줘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날 그들은 병공창의 자동차편으로 왕웅의 집에 폭탄을 운반해주었다.

김구는 입고 다니던 낡은 중국을 벗어 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쓸만한 양복 한 벌을 사서 입었다.

그리고 물통과 도시락을 하나씩 두 개씩 프랑스 조계지 내의 친한 동포들의 집으로 운반했다.

 

「귀한 한약재이니 불만 조심하면 되네.」

김구는 이런 당부를 했다. 별다른 물건이 아니나 다만 불만 조심하면 된다고 몇 번 강조를 했다.

동경사건 이후 상해의 동포들은 김구에 대한 애착심과 동정심이 더욱 높아졌다.

어느 집에 들르던지 김구를 반색하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부인들이 많았다.

부인들은 아이를 안고 있으면 김구에게 안아 달라고 했다.

김구가 아이를 안아주면 아이가 잘 잔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구는 가는 곳마다 인기였다.

마침내 운명의 4월 29일이 임박해졌다.

윤봉길은 매일 아침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으로 갈아입고 홍구공원으로 가서

식장 설치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또한 시라카와(白州) 대장의 사진을 구해 인상착의를 세심히 연구했다.

일장기(日章旗)는 미리부터 마련해 두었다.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와 그 동안의 경과를 이야기했다.

「홍구공원에 가보았더니 마침 시라카와 놈도 왔더군요.

그놈 옆에 시민을 가장하고 서 있는데 문득 폭탄을 가져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의 성급한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이번 일은 감정보다 냉철한 이성을 갖고 행동해야 하오.

포수가 꿩을 쏠 때도 일부러 날게 해서 떨어뜨리고,

숲 속에서 자고 있는 사슴을 달리게 한 후 쏘는 것이 사냥의 법칙이오.

윤군이 지금 내게 하는 말은, 거사에 성공할 자신감이 없어서 그러는 것 아니오?」

윤봉길은 김구가 떠보는 말에 강력히 부인했다.

 

「아닙니다. 그놈이 제 곁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충동적으로 느낀 생각일 뿐입니다.」

 김구는 다시 한번 윤군에게 주의할 점을 일러 주었다.

「나는 이번 거사가 성공할 것을 미리 알고 있소.

윤군이 일전(日前)에 한 이야기, 이제는 모두 번민의 덩어리가 말끔히 가시고 편안해진다는

말이 그것이오.」

김구는 치하포에서 왜놈을 죽였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몇 십 년 전, 내가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 스승께서 가르쳐 주신 구절을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 앉혔소.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현애살수장부사(懸崖撒手丈夫兒) 즉,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장부로다.

어떻소? 윤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가슴에 새겨 두는 듯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김구는 윤봉길을 여관으로 일단 보낸 후 폭탄 두 개를 휴대하고 김해산(金海山)의 집에 가서

그들 부부와 상의를 했다.

「내일 아침 윤봉길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으로 갈 것이오.

그러니 저녁에 쇠고기를 사다가 내일 새벽조반을 부탁하오.」

 

다음날 4월 29일이다.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의 집에 가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이 될 아침 식사를 했다.

윤군은 의외로 침착했다. 각오가 된 표정이었다.

 

「저는 지금 마음이 평안합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윤봉길은 아침 식사를 아주 잘 했다. 마치 새벽에 일 나가는 농부가 한 사발의 밥을

거뜬히 비우듯이 그는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고민과 번민이 있는 사람은 진수성찬이 앞에 있어도 입맛이 당기지 않아

젓가락 움직임이 뜸하기 마련이다.

김해산이 김구에게 말했다.

「지금 상해에는 우리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때 윤봉길 같은 씩씩하고 대담한 젊은이를 다른 곳으로 파견합니까?」

김구는 이 말에 어물쩍 넘어갔다. 사실은 홍구공원 이었지만 김해산에게는

이를 비밀로 했던 것이다.

「윤군에게 모두 맡겨두고 우리는 그저 지켜나 봅시다.」

이때 일곱시를 치는 종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의 시계와 바꾸자고 했다.

「선생님,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이후 6원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시계는 2원밖에 나가질 않습니다. 제 시계는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의 심지 깊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사나이의 눈물은 자주 보여서는  눈물의 값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김구는 최근 들어 눈물이 잦아졌다.

일세의 영웅들과 마지막이 잦아졌던 탓이기도 했다.

김구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자신의 낡은 시계를 윤봉길에게 주었다.

윤봉길은 자동차를 타고 가기 전 김구에게 갖고 있던 돈 모두를 주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에겐 돈이 필요하지만 저에겐 이미 필요 없게 됐습니다.」

「약간의 돈은 필요하지 않겠나?」

「제게 선생님이 걱정하는 만큼의 돈은 갖고 있습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구는 목메인 목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은 훗날 아래와 같은 유서(遺書)를 남겼다.

그의 유서는 그의 사람됨과 장부로서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문을 게재한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할 오직 한번의 가장 좋은 기회로 포착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고향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청년제군에게>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은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여명(黎明)은 밝아지려 하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끓는 청년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입고  메고 칼들이면서

  군악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윤봉길이 김구의 말을 알아듣고 차창으로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엔진소리를 요란히 내며 일세의 영웅, 사내대장부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치달렸다.

  김구는 그 길로 조상선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에게 주고 급히 안창호에게 보내라고 했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십시오. 대사건이 발생될 듯합니다.」

  김구는 이번에는 석오 이동녕 선생의 처소에 가서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무슨 소식이 있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오후 1시, 곳곳에서 많은 중국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국 사람들의 말소리는 듣기에 호들갑스럽고 수다스러워 귀담아 듣지 않으면 좀 체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소리가 생겨나지 않았던가. 중국 사람들이 떠드는 걸 보면 큰일이 난 것 같은데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국말에 익숙한 한국 사람이 김구에게 전했다.

「홍구공원에서 조금 전에 한 중국인이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이 죽었소.」

「아마도 고려 사람의 짓 같다.」

  며칠 전까지 채소바구니를 들고 날마다 홍구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윤봉길이 이런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김구,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의 거사는 김구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동녕 선생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고 나서 자세한 소식을 기다렸던 것이다.


  오후 3시경, 신문의 호외가 낙엽처럼 날리면서 거리를 굴러 다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 대상(臺上)에서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하시(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 대장(白州), 시게미츠(重光)대사, 우에다(植田)중장, 노무라(野村)중장 등 문무대관이 중상 운운(云云).....



  당시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에서는 범인이 중국인이라고 했으나, 그 다음날 도하(都下)신문에는 범인의 이름은 윤봉길이라고 큰 활자로 박아 배포하고 있었다.

  곧이어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구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조용히 불러 부탁 했다.

「자네들의 생활비는 내가 충당할 테니 우리 사업에만 전념하라.」

  그리고 김구는 안면이 있는 미국인 피치(吾生)에게 찾아가 피신처를 교섭했다. 피치의 부친은 생전에 김구의 상해임시정부에 큰 호의를 갖고 협조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기쁜 마음으로 김구 일행을 받아들였다. 김구와 엄항섭, 김철, 안공근 등 4명이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얼마든지 사용하세요. 이 집은 의로운 사람 모두를 받아줍니다.」

  피치의 부인은 김구 일행에게 2층 전부를 내주었고, 정성이 담긴 식사를 대접했다. 피치의 집 전화를 이용하여 프랑스 조계지 내의 동포들의 안부를 알아본 결과 많은 한인들이 윤봉길 사건으로 체포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포된 한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서양 변호사를 고용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번 사건은 왜놈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으로는 안창호, 장헌근, 김덕근 등과 그 외에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안창호는 이 사건으로 일경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이나 복역했다.

  왜놈들은 날마다 충혈된 눈으로 연루자들을 찾아 다녔다. 부녀단체인 애국부인회까지도 활동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되자 동포들 사이에서도 김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생겨났다. 이유필(李裕弼)등이 특히 그랬다.

「홍구 사건의 주모자는 따로 있는데, 사건을 감추고 엉뚱한 사람만 잡혀 들어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김구의 편지를 보고서도 그날은 아무 일도 없으려니 하고 이씨 집을 찾아갔던 안창호가 체포된 것은 분명히 그의 불찰이었다.

  주모자가 아무 발표가 없는 관계로 사람들이 체포된다는 원성 때문에 김구는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밝히기로 했다.

  그러나 안공근은 김구의 말에 펄쩍 뛰었다.

「형님 위험합니다. 더구나 프랑스 조계지에서 발표하는 것은 안 됩니다.」

  왜놈 당국이 프랑스 당국에 외교적으로 정식으로 요청하면 프랑스 당국도 어쩔 수 없이 범인인도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떳떳하게 사건의 전모를 세계에 발표했다.

「동경사건과 상해사건의 주모자는 김구요.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다.」


  로이타 통신사에 투고하여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이때부터  김구라는 이름은 일본인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구가 예전에 계획했던 두 가지 사건, 즉 신천(信川)사건과 대련(大連)사건은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발표하지 않았다. 신천 사건은 이덕주와 유진식을 파견해서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는 사건이고 대련사건은 유상근, 최홍식을 파견해서 만주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시게루(本庄繁)를 암살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김구는 이후부터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4∙29사건 후 많은 동포들의 성금이 답지해 더욱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중국인들의 김구에 대한 태도와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 동포들의 그에 대한 태도, 그리고 마지막 중국 관내 우리 인사들의 반응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첫째 중국인들이다. 왜놈들은 중국과 한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만보산사건을 조작했다. 지식층들은 만보산사건이 왜놈들의 소행이란 것을 알았으나, 하층계급은 사건의 책임이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 있다고 믿고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4∙29사건으로 인해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었다.

  둘째, 이 사건으로 인해 해외 교포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감을 보냈다.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도 많이 들어왔고 후원금도 답지했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가들의 김구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많았다. 교포들의 불만은 4∙29사건이후 김구의 신변이 위험해져서 친지들의 면담요구에 모두 응해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구는 항상 왜경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서, 친지들과의 면담시간도 급히 서둘러서 끝내야만 했다.


  이런 일이 잘 증명된다.

  전차 검표 원을 하는 박 대장이란 젊은이의 집에 결혼축하차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 집에 도착해서 주방 부인에게,

「급히 가야겠으니 국수 한 그릇만 말아 주시오.」

하고 국수를 받아먹고 곧장 그 집을 나왔다. 그 집 옆에는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다. 잠시 그 집에 들렀을 때 주인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것 보시오. 왜놈 순경들이 선생을 찾고 있소.」

  김구가 보니 전차 정류장에 일본 순경 10여명이 전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경들이 박대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마도 무슨 연락을 받았거나 정보가 샜던 것 같았다. 박대장의 집으로 들어간 왜경들은 아궁이 속까지 모두 뒤졌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김구는 이봉창과 윤봉길 같은 의사들을 대동하고, 거사 전에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사진관을 똑 한 번씩 다녀왔다. 지금도 교과서나 그 이외의 자료집에 남아 있는 몇 장의 사진들은 당시 김구와 그 이외 애국지사들이 들르던 단골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다. 신원이 불확실한 사진사에게 촬영을 맡길 경우, 왜경의 밀정 들을 염려해 의기가 투합된 사진사에게 부탁 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사진관의 주인은 그 자체가 애국지사였다. 즉 사진관이 독립 애국지사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이봉창에 이어서 홍구공원의 폭탄사건을 일으킨 윤봉길도 상해시절, 사진관을 즐겨 찾았다. 시간을 벌기 위해 출입했는데 이곳의 사진관, 즉 프랑스 조계하비로 307호에 있던 명성(明星)사진관이 바로 그곳이다. 사진관의 주인 곽중규(郭重奎)는 충북 옥천 사람으로, 1919년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을 가던 중 상해에 주저앉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임시의정원 비서, 인성(仁成)학교 교사 등을 거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또 나창헌, 최석순. 강창제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안을 제출, 이승만을 면직 처리케 했다.

  그 후 그가 한 일은 윤봉길을 사진관에 은신, 기숙케 했고, 동생 곽중선(郭重善)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 등을 알려 주고 장차 거사에 대비케 했다. 윤봉길이 홍구공원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곽중규와 동생 곽중선의 도움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곽중규는 그 후 나명, 한구, 우후, 구강, 사시, 중경으로 전한을 피해 이동했고, 상해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경찰서로 이송, 치한유지법 위반으로 2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출옥한 뒤에도 천진의 동생 곽중혁의 집에 머물면서 독립 운동울 계속했다.

  한편 막내 동생 곽중선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밀결사인 병인의용대에 가입,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 두 차례 폭탄을 투하 하는 등 민족 반역자의 척살을 주도하다가, 1935 9월 20일 일제의 밀정에 의해 권총 저격을 받고 28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했다.


  한말(韓末) 의병(義兵)이었던 부친 곽준희를 비롯해 곽 의사 일가(一家)의 독립운동사는 지금도 세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탁 노인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적 있었다.「한사람의 의사나 열사가 나오기까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밑받침이 있어야 하고, 이들과 횡적이고 종적인 연결고리가 맺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스타가 탄생하기까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 말이오. 윤봉길 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소. 그렇다고 윤의사가 주연(主演)이고, 다른 사람들이 조연(助演)이라고 말하지 않겠소. 모두가 독립을 위한 주역 역활을 충실히 했기 때문에 의사도 후세에 길이 암을 수 있다는 이야기요.」

  탁 노인은 윤봉길에게 힘을 모아준 또 한사람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물론 역사책에는 쓰여 있지 않소. 그러나 내 말을 믿어도 될거요. 내 생전에 그분들과 몇 번의 접촉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화(夜話)가 아니라 실화(實話)인 셈이오.」

  이렇게 말하며 탁 노인은 내 얼굴을  직시했다. 그리고 물었다.

「선생은 혹시 백용성(白龍城)이란 스님을 아시오?」

「33인의 한 분 아닌가요?」

「그렇소. 바로 이 스님이 윤 의사를 김구 선생에게 보내 홍구공원의 거사를 성공시켰다는 이야기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그저 백용성 스님, 즉 백용성 조사(祖師)가 33인이 한 사람으로서 만해 한용운 스님과 일반적인 이야기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탁 노인인 다시 말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문학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면, 백용성 조사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했소. 윤봉길 의사와 같은 사람을 많이 양성해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배치하자는 것이었소. 그런데 문제는 , 왜놈들의 사주를 받은 한국인 밀정들이었소. 왜놈들이야 그놈들 생각으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자는 건 당연한 일일는지 모르나. 이놈들에게 매수당해 애국지사들을 밀고하는 밀정이야 말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인간들이었소.」

  그러면서 백용성 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가 다소 빗나가는 것 같다면서 탁 노인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백용성 조사는 58세 때 3∙1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 했다. 그 후 백 조사는 일부 승려들에 의해 한국 불교가 일본화 하는데 깊은 근심을  하게 돼,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했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봉익동 3번지 대각사가 그 본부이다.

  한편으로는 이 나라가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을 방문, 당시 국부군의 총통 장개석과 중국 공산당의 주석 모택동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백 조사는 이들에게「윤봉길 의사 같은 사람을 1만  명 양성해낼 터이니, 국부군과 공산군 10만 명과 함께 훈련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훈련을 공산군이 담당하도록 밀약을 받고 귀국했다.

  그런데 한국의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백용성 조사의독립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해 밀정을 따라 붙였던 것이다. 백 조사는 단골가게 천일당 약국에서 속병치료에 필요한 약을 짓는다는 정보를 고등계에서 입수, 안(安)모라는 밀정을 약국 직원으로 위장 취업시켰다. 안모는 마치 백 조사에 감화 받은 듯 접근, 마침내 백 조사의 상좌승이 되었다.


  안모는 그 후 중국 만길 연길현 봉녕촌 대각사 포교원 선농당, 화과원의 과장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넘겨 줘 이들을 일망타진케 했다. 안모는 포교원 선농당과 그 주위 마을 사람들이 독립운동 항일무장부대에 식량을 공급한다는 것을 알고일본 경찰에 연락, 전 마을의 주택과 사람들을 살상시켰다는 것이다.

  탁 노인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찌 보면 한간(漢奸)이라 불리던 밀정들과의 싸움이 오히려 더 피곤했소. 왜놈들이야 그럴 수 있지만, 밀정들이란 인간성 자체를 버린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이오. 이놈들로 인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희생당했던 것이오.」

하며 흥분했다.

 

 

 

 

'소설방 >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 다시 탁(卓)노인이 이야기  (0) 2013.02.02
39. 탈출 작전  (0) 2013.02.02
37. 가슴에 폭탄을 품고  (0) 2013.01.14
36. 누가 이 나라를   (0) 2013.01.14
35. 사상의 갈등  (0) 2013.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