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7. 가슴에 폭탄을 품고

오늘의 쉼터 2013. 1. 14. 20:15

37. 가슴에 폭탄을 품고

 

 

세상에는 목숨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종교인이고 또 하나는 나라와 민족을 구해보겠다고 나선 독립 운동가이다.

종교인이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 그를 순교라 하고, 독립운동가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때, 그를 순교자라고 한다.

그러나 한 번 밖에 못 사는 인생살이에서 귀한 목숨을 바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젊은 시절의 한때 객기라면 또 모르겠거니와, 이미 세상살이에 잔 맛을 느끼고 미래를

도모하려 할 나이에 선뜻 나선 사람이 있다.

이봉창이란 인물이 그렇다.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장이면서 민단장(民단長)을 겸임하고 있을 때였다.

민단장이란 고국에서 뜻을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면담을 맡거나 진로를 상담해 주는

그런 역할이었다. 김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재정난으로 인재가 고갈되자 여러 가지 직책을

겸임했었다. 민단장도 그 하나였다.

어느 날 중년의 동포가 민단의 김구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 보니 노동을 한 탓인지

얼굴이 햇볕에 타 검고, 팔다리가 노동으로 단련돼 제법 우람스러웠다.

외모에서 나타나는 형색으로 지식인들이 간혹 갖고 있는 교활함 같은 것이 엿보이지 않고

무척 순박하게 보였다.

그가 말했다.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서,

상해에 가정부(假政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가정부란 한자풀이대로 한다면 임시정부를 뜻했다.

김구가 물었다.

「어떻게 여기를 알았소?」

「상해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전차표 검사원에게 임시정부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보경리 4호로 가라기에 왔습니다.」

김구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투박하게 생겼지만 범상치 않은 용모였다.

가끔씩 임시정부로 찾아와 청탁을 하거나 개인의 이해관계로 정탐을 하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첫눈에 이 사람은 어떤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이 아님이 분명했다.

「전 경성의 용산에서 살았고, 이봉창(李奉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김구는 부담되었다. 왜냐하면 이런 청년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서였다.

재정상태가 형편없어서 있는 식구마저 호구지책이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마디 질문을 던졌다.

「상해에 독립정부가 있으나 아직 운동자들을 입히고 먹일 역량이 없네. 혹시 가져온 돈이 있나?」

이봉창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지금 주머니에 있는 돈은 여비하고 남은 돈이 10여원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활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나?」

「그런 것은 걱정 없습니다. 저는 철공기술이 있어서 철공장에서도 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예,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은 안 됩니까?」

이 말에 김구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해가 저물었으니 근처 여관에서 다음날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세.」

김구는 민단 사무원인 김동우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여관을 잡아 주라고 했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지 반은 일본어를 쓰고 반은 우리말을 구사했다.

동작 또한 일본인과 비슷했다. 그래서 특별히 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외양은 우직하고 순박하게 보였지만 외양과 속마음은 다를 수가 있고,

이런 자들은 김구는 많이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민단 주방에서 직원들과 함께 술과 국수를 사다 같이 먹는 자리에서였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어지간히 취했던지 주담(酒談)을 벌였다.

김구가 우연히 바깥에서 이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먼저 이봉창이 직원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 놈 하나를 못 이기는가?

참으로 딱합니다. 이래갖고서야 어디 독립운동을 한다고 나설 수 있습니까?」

이봉창의 한마디가 서늘하게 들렸다.

그의 자신 있는 목소리와 기개가 웬일인지 김구의 가슴에 와 닿았다.

 

직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개 문무관, 관리도 죽이기가 쉽지가 않은데 일본 천황을 죽이기가 어디 쉽겠소?」

이봉창이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작년에 동경에서 천황이 능행(陵行)을 한다고 해서 엎드리라고 해 엎드려서 한동안 생각했소.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저놈은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소.」

김구는 다시 한번 이봉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봉창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될 인물이란 걸 김구는 간파했다.

그날 저녁 김구는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조용히 혼자 방문했다.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 해보니 과연 이봉창은 의기의 남자였다.

그는 살신성인할 결심으로 일본에서 상해로 온 것이었다.

자신의 포부를 들어줄 곳이란 상해 임시정부이외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김구에게 자신의 인생관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고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 본

방랑생활에서 비한다면 늙어서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김구가 이봉창의 말을 잠깐 제지했다.

그의 말에 너무 어른스러움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자네, 너무 인생이란 것을 얕잡아 보거나 달관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 끼어 있다면 31년 동안의 즐거움은 어느 정도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왔습니다.」

김구는 이봉창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이 젊은이가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인생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로부터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죽고,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고 했지 않는가.

이봉창이야말로 목숨의 가치를 크고 숭고하게 잡고 있는 것이었다.

쩨쩨한 관리나 속물들처럼 몇 푼의 돈에 희로애락이 교차되면서 친구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칭 애국자가 어디하나둘인가.

「이봉창, 자네는 나보다 낫네. 이야말로 한낱 세월만 낭비한 늙은이에 불과하네.」

김구는 속으로 자책을 하면서도 이봉창의 씩씩한 말에 감동되어 흐르는 눈물을 씻지도 못했다.

「제게 지도를 해주십시오.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선생님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젊은 혈기는 때로는 많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그러니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이봉창의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젊은이란 간혹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가게 마련이어서 이 감정을 추스르고 다독거리고,

제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김구는 이봉창의 제의를 쾌히 승낙했다.

「좋소. 1년 이내에 군의 행동을 위한 준비를 해주겠소.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의 형편이 궁핍해서 군에게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기 어렵고

또한 군의 장래행동을 위해서는 우리 기관가까이 있는 것이 불리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러자 이봉창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시의 계획을 김구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시다면 더욱 좋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에 익숙합니다.

일본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 쇼조(本下昌藏)라고 행세했습니다.

이번에 상해에 오는 동안에도 이봉창이라는 본 성명을 쓰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일본인으로 행동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일을 준비하실 동안 제가 철공 일을 할줄 아니

일본인의 철공장에 취직을 하면 꽤 많은 월급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김구는 그의 시원스런 말에 찬동을 했다. 그래서 노파심으로 다음과 같이 충고를 했다.

「우리 기관이나 우리 사람들과의 교제를 가능하면 삼가게, 순수한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매월 한 차례씩만 한밤중에 나를 찾아오게.」

김구는 이봉창이 임시정부에 자주 들락거리면, 혹시라도 그의 정체를 수상히 보는 프락치들에게

정보가 새나갈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 기관이나 임시정부 내의 사람이라도 알려서는 안 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봉창이 홍구로 떠난 후 그 며칠이 지나자 김구는 다시 찾은 그는 얼굴이 훨씬 좋아졌다.

「마침내 일본인 철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월급이 80원입니다.」

그 후 그는 종종 월급을 탔다면서 술과 고기를 사갖고 민단 사무실에 와서 직원들과 술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술이 얼큰하면 곧잘 일본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서 호방하게 놀았다.

이로인해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일본영감」이였다.

어느 날은 일본인 행색으로 하오리(겉옷)에 제라(나막신)을 신고 정부의 정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이런 일 때문에 김구는 이동녕 선생에게 질책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 젊은 놈 말이요. 일본 놈인지 조선인인지 알 수 없는 그놈 어떤 놈이오?

게다짝을 끌고 감히 임시정부 정문을 들어오게 하다니.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그놈 내가 보기에는 왜놈 첩자 같소.」

김구는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로 얼버무렸다.

「요즘에 일어난 사건을 조사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친구를 가끔씩 부르는 것입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김구의 말에 동의는 했으나 여전히 불쾌한 기색이었다.

김구가 이봉창을 만난지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당시만 해도 항공통신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하와이의 서신 왕래는 거의 두 달이나 걸렸다

그 무렵 하와이의 교포지사들로부터 상해임시 정부에 미화 몇 백 달러를 보내왔다.

이것은 매월 또는 정기적으로 정한 독립자금의 명목이었다.

하와이에는 앞서도 말했지만 임성우가 주관하는 「하와이 애국단」이 결성되어 있어서

백범의 특수공장 계획을 지원, 1천 달러를 보내온 것이었다.

김구는 그 돈을 받아서 아무도 모르게 허름한 전대 속에 감추어두고 전처럼 걸식을 했다.

교포들에게 돈을 내지 않고 밥을 얻어먹는 것을 김구는 걸식이라고 표현 했다.

그러나 김구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그 허름한 옷의 전대에 천여원의 거액이 들어있는 줄 짐작조차

못했다.

마침내 계획의 날이 다가왔다. 김구는 이봉창을 조용히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중흥여관으로

불러냈다.

1931년 12월 중순 경이었다.

 

「자네 마음 변하지 않았나?」

 김구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선생님?」

이봉창은 오히려 물었다.

김구는 자신의 말이 이봉창의 마음을 상하게 했음을 알았다.

「미안하네.」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기 마련이네. 오래 살거나 짧게 살거나 죽음은 같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하는 것이 문제이지. 자네는 젊고 나는 늙었다만 지금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은 똑같네. 자네의 삶은 내 삶을 뜻 하고 자네의 죽음은 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네.」

김구는 이 말을 하면서 비상한 생각을 했다.

눈물이 흘렸다.

지금부터 이 젊은이를 죽음의 길로 나서게 한다는 미안한 마음이 김구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독립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고 독립이 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은 기쁨을 누리겠지만

한번 던진 목숨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김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아들 같은 젊은이에게 자시의 요구가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김구는 멍하니 이봉창의 얼굴을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이봉창이 이번엔 침묵을 깨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선생님의 저에 대한 말씀은 저를 자꾸만 약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알았네. 자네가 아까워서 하는 말일세.」

김구는 그동안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우기를 왕웅(王雄)을 시켜 병공창(兵工廠)에서 구입했다.

왕웅은 김홍일(金弘壹) 장군의 중국식 이름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현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劉峙)에게 구입하여 숨겨두게 했다.

김구가 폭탄을 두 개 구입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 천황을 독살하는데, 또 다른 하나는 자살용이었다.

김구는 이 폭탄의 사용법을 일러주고 자살이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신문에 응할 문구까지

지시해주었다.

그 다음날 이봉창은 김구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김구는 품속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내 이봉창에게 주었다.

「자, 이것이 자네와 나의 금생(今生)에서의 마지막이 될 것이네.

짧았던 인연은 나는 살아있는 동안 기억하겠네. 그리고 이 다음 저세상에서 만날 때

서로 웃는 낯으로 만나세. 기구한 인연의 만남이 왜 이다지 나를 슬프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김구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고풍상을 모두 겪은 노 혁명가, 노대인(老大人), 그리고 스스로 겸양한 사람 김구는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한사람의 젊은이를 그 목적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죽음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란 걸 김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소국가의 백성으로 태어난 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한 사람이 희생되면 만 사람이

춤을 덩실덩실 출 그대를 기리며 독한 마음을 추스르려는 또 다른 아픈 마음이 있었다.

마지막 날 밤, 중흥여관에서 이봉창은 김구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와 같은 말을 했다.

「며칠 전 선생님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군요.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저께 함께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선생님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갖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테지요.

과연 선생님은 영웅의 도량이십니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는 것은 선생님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이봉창의 눈에서도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김구는 그 길로 안공근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선서식을 했다. 김구는 폭탄 두 개와 돈 3백 원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봉창)은 이 길이 마지막이나 이 돈을 동경 가실 때까지 다 쓰시고 동경도착 즉시

전보 올리면 다시 송금하리라.」

김구는 이봉창이 비록 아들 뻘 이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이라 깎듯이 경어를 썼다.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반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경우가 바로 이봉창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봉창은 나이 31세에 이미 사생관을 갖고 있었고 인생을 달관하고 있었기에 어른 가운데

어른이었다.

나이가 많은 늙은이가 목숨을 구걸하면서 비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안중근이나 이봉창 같은 이는 나이가 어리되 그 인생이 무르익었고, 생로병사 과정에서

지나쳐야할 인생의 중요한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이봉창을 데리고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으로 갔다.

사진을 찍을 때 김구의 얼굴이 너무 엄숙하고 딱딱했던지 이 봉창이 오히려 위로했다.

「저는 지금부터 영원한 삶을, 쾌락을 향유코자 떠나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그래서 김구도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한 장의 기념사진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후인들의 가슴에 서늘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차에 올라앉은 이봉창은 머리 숙여 김구에게 마지막 경례를 올렸다.

그러자 이봉창을 실은 차는 곧 출발했다.

10여일 후, 이봉창으로부터 동경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1월 8일에 물품을 방매하겠습니다.」

 

즉 1월 8일에 거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백 원을 부쳐 주었더니 그 후 다시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돈을 함부로 써서 주인댁에 밥값까지 빚이 져있었는데

2백 원을 받아 빚을 갚고 돈이 남아있습니다.」

김구는 이봉창이 거사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1년 전부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독립운동이 매우 지지부진해 아무런 실적이 없자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왜놈들의 한·중 두 민족의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날조해냈다.

1931년 7월 2일의 일이었다.

중국 길림성 장춘의 만보산 지역에서 한·중 양국 농민들 사이에

일어난 수로(水路) 분쟁이 그것인데, 이 사건은 왜놈들의 간계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중국인 대학살사건이 일어나, 인천, 평양, 경성, 원산 등지에서

조선인 무뢰배가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 중국인을 닥치는 대로 타살했다.

 

만주에서는 1931년 왜놈들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이 굴욕적으로 일본과 강화했다.

이 전쟁 중에 한인 부랑자들이 왜의 권세를 빌려 중국인에게 살상을 자행했다.

결국 민족적인 감정이 유발돼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 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거점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는데 이렇게 반목과 갈등이 첨예화되면

독립운동진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파괴 공작의 실행에 착수했다.

공작에 사용하는 돈과 인물의 선택에 대해서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제1착으로 이봉창의 동경사건을 주관하게 되었다.

1월 8일 마침내 도하신문에 이봉창의 의거기사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본천황을 저격, 그러나 미수에 그쳐(狙擊自皇不中)....

 

김구는 천황을 죽이지 못한데 심히 애통했으나 동지들이 위로했다.

「일 황을 죽이지 못한 것은 유감이오.

그러나 정신적으로 우리 한인이 신성불가침인 천황을 죽였으며,

이것은 한인이 일본에 동호될 수 없음을 세계만방에 일리는 의미가 있소.」

사건이 난 그 다음날 아침 프랑스 공무국에서 비밀 통지가 왔다.

그 통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프랑스 당국에서는 김구를 지극히 보호해왔으나,

이번에 김구가 부하를 보내서 일본 황제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에 대해 일본이 반드시

체포 인도를 해올 것인바,

그런 까닭에 프랑스가 일본과 전쟁을 하기로 결단을 내리기 전에는 김구를 보호하기가 힘들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청조(靑鳥) 「민국일보」에는 주먹만한 활자로 이렇게 보도했다.

 

한인 이봉창 저격 일황불행부중(韓人 李奉昌 狙擊不幸不中)

 

한인 이봉창이 폭탄을 던졌으나 일 황은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는 기사 가운데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라는 대목에 일본군경은 분노를 했다는 것이다.

마치 일 황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뜻과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청도민국일보」뿐만이 아니라 복주(福州) 장사(長沙)들의 수많은 지방의 신문들도

「불행불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으로 일제히 보도되었다.

결국 일본은 중국당국에 대해 엄중히 항의를 했다. 천황을 이렇게까지 불경스럽게 보도해서

천황폐하는 물론 그를 존경하는 일본국민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훼손하는 귀국의 신문들을

그대로 나둔다면 국제적인 예의가 아니란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중국정부는 각 신문사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당한 이 한 가지 사건만을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해에서 중국인이 일본 승려한명을 타살했다는 것을 빌미로,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승려살해사건이란 1932년 1월 18일 상해에서 일본 승려 다섯 명이 중국인 낭인패거리에게

습격당해 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일본은 개전중이라서인지 김구에 대한 체포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동지들은 김구에게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선생님, 저 놈들은 언제고 선생님에게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저들은 전쟁 중이라 선생님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지만 왜놈들의 근성이란

끈질긴 것이어서 틈만 나면 체포하러 올 것입니다.

식사시간이나 취침시간에도 절대 바깥출입을 삼가십시오.」

그래서 김구는 낮에는 쉬고 밤에는 동지들의 집이나 창기(娼妓)의 집에서 변장을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식사는 동포의 집으로 찾아가면 언제나 환대를 하고 차려주었다.

중일전쟁이 시작 된지 19로군(路軍)의 채진개 군대와 중앙군 제5군장 장치중이 참전하여

전투 더욱 격렬해졌다.

일본군은 이 틈에 상해 갑북(閘北)에서 방화를 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불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이는 야만적인 행동을 했다.

인간으로서 차마 할 짓이 아니었다.

왜놈들이란 그 핏속에 잔인함이 배어 있어서 사람을 죽여도 가죽을 벗기거나 갈가리 찢어

죽이는 등 축생만도 못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습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아간 조선백성들의 코를 베어 그 숫자에 따라 상금을 받고

또 귀를 베어 파묻는 등, 만행을 저질러 일본 내에서는 코 무덤과 귀 무덤이 있다고 한다.

사무라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칼잡이들은 사람을 죽일 때 가죽을 베지 않고 죽이는 걸

자랑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 역시 왜놈들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한 예인 것이다.

일본군과의 전투로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중국군들은 프랑스 조계지의 병원에 연일 실어 날랐다.

나무판자 틈으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김구는 생각했다.

「우리도 어느 때나 저들처럼 왜놈들과 당당히 맞서 싸워 조국의 강산을 충성스런 피로

물들일 날이 있을까?」

김구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길가는 사람들이 수상하게 여길까봐 자리를 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세계에 전파되자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우리 동포들은

김구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들 가운데는 임시정부에 반대하던 자들도 있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구의 입장을 두둔해주었다.

한편 이봉창의사 말고도 큰 뜻을 품고 상해에 왔던, 김구가 가장 신임하던

나석주 이승춘등의 청년이 또 있었다.

나석주 의사는 총과 폭탄을 품고 경성에 잠입하여 경성 한복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일곱 왜적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나석주 의사의 의사는 신문호외로까지 보도되었다.

 

백주 돌연한 근대 초유의 대사건

동척과 식산은해에 폭탄 투척

권총을 난사하여 일거에 거명타격

작년 12월 28일 오후 황금정 일대참주

탈주한 범인은 도상에서 자살

 

도하 각신문은 해설기사로 이렇게 보도했다.

 

사건의 발단은 동일 오후 2시경에 동양척식회사에 약 30여 세 되어 보이는

중국인 한명이 들어와 종이 조각에 이모라는 이름을 써 갖고 수위에게 보이며

이 사람을 만나보러 왔노라고 마치 중국 사람이 조선말을 하는 것 같이 서투르게 하므로,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였더니 그대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 뒤 2시가 지나서 다시 식산은행의 정문으로 또 중국 옷 입은 사람이 들어가서

은행 창구의 철책을 넘어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담벼락을 맞고 떨어졌으나

불발되고 은행에서 연말이라 바쁜 중이라 폭탄이 던져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은행 창구밖에는 일반 내객이 다수였고 다른 일로 주의도 없었으니

중촌(中村)이란 일본인이 폭탄 던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은행 서무과로 가지고 가서

육군중좌 소전(小田)이 폭탄이라고 하여 즉시 경찰서로 알려 다수 경찰이 동원하여

은행으로 달려왔다.

식산은행 폭탄 투척이 있은 지 10분 뒤에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자

고본길강(高本吉江)을 권총으로 쏘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꺼꾸러지는 것을 보고,

다시 나는 듯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동척사원 무지광(武智光)을 사격하여 쓰러지게 하고,

그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동과장 능전풍(稜田豊)을 쏘아 넘어뜨리고,

그 다음 조선철도주식회사 정문 뒤쪽 현관에 앉아있는 송본필일(松本筆一)과 또 그때

마침 기게실에 있던 목촌열조(木村悅造)를 쏘고는 곧 문밖으로 빠져 달려갔는데,

전기개량부에 던진 폭탄도 불발되었다.

 

그 다음 수많은 경찰이 추격 중 전전(田畑) 경보부도 맞아 즉사하여 도합 7명이 죽는

활극을 연출하였다.

 최후로 황금정(黃金町) 2가의 전신주 옆에 이르러 일부러 넘어진 나 의사는 자기 권총으로

가슴을 겨누고 세 방을 쏜 뒤 순사들이 달려드는 곳을 향해 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군중을 향하여,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동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 독립을 위하여 분투하였다. 2천만 동포여!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하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한편 이승춘은 천진에서 체포당해 역시 사형 당했다.

당시 상해에는 이봉창, 나석주, 이승춘 같은 열혈청년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왜놈들이 한인 노동자를 채용하는 것을 틈타 홍구 쪽으로 가서 일본군의

부역노동자가 되었다.

이들 중 몇 명은 일본군 군용 창고에 일본인 노동자들과 같이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폭탄항고와 비행기격납고를 조사하고 그곳에 연소탄을 장치하기로 했다.

폭탄기술자 왕웅(王雄)에게 의뢰해 상해 병공창에 교섭해서 연소탄을 제조하기로 하고 날마다

실행을 재촉했으나 중일 간에 송호협 정이 체결되어 무산되었다.

송호 협정의 내용 중 하나가 중국정부는 항일운동을 단속한다는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

김구는 이 일을 몹시 한탄하고 있었다. 이때 많은 열혈청년들이 찾아와 조국을 위해 할 일을

달라고 했다. 김구는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에게는 왜놈 총독의 암살을 면했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만주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등의 암살을 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모두 체포, 미수에 그쳤고 이들은 체포당해 옥중에서 순국하거나 사형 당했다.

당시의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의 한 목숨을 의로운데 쓰기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것이 2천만 민족을 위해 보람된 일이이면서도 자기 자신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길 기원했던 것이다.

요즘의 물질주의 풍조에 개인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쩨쩨한 젊은이들이 많은 세상에,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될 줄 알지만, 진정한 가치가 과연 무엇 인가 생각해볼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봉창의 그 후는 이렇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관병식(병사들의 정렬모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7월 19일 재판에서 이봉창은「나는 너희들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다.

감히 내게 무례한 짓을 하느냐」면서 재판을 거부했다.

재판관은 방청인도 없이 판결문을 작성,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결국 그는 교수대의 이슬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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