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누가 이 나라를
상해의 정세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으로 민족진영은 간판만 걸고 있는 형편이었다.
마치 찬송가의 구절에 나오는 「요단」강이 강폭이 넓고 거대한 강처럼 인식되나
막상 가보면 우리네의 하천과 비슷한 보잘 것 없는 강줄기에 실망하듯 임시정부 역시
생각한 것과는 달리 초라한 양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첫째 인재도 귀했고, 더욱 큰 문제는 임시정부를 운영할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김구는 이런 임시정부를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 골몰하게 되었다.
정부제도는 대통령 이승만이 체임되고 박은식이 취임하여 대통령제를 변경해서 국무령제로 고쳤다.서간도에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상룡이 국무령으로 취임하기위해 상해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각지원자가 한명도 없었다. 이상룡은 실망감을 안고 다시 간도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홍면희(洪冕熙)를 선거로 추대, 진강(鎭江)에서 상해로 와 국무령에 취임한 후 조각에
착수했으나 역시 호응하는 인물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렇듯 유명무실한 하나이 단체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의정원에서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동녕 선생이 김구를 불러 국무령에 취임하여 조각하라고 권했다.
김구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김 선생 외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소.」
「아닙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리 정부의 권위가 위축됐다고 해도 어찌 김 존위의 아들인 제가 국가 원수가 되겠습니까?」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김 존위는 김구의 아버지의 직위였다. 존위직이란 정식 벼슬 이름이 아닌,
요즘 말하자면 말단직의 봉사요원 같은 것이었다.
상놈을 만해 면하기 위해 하나 얻은 호칭에 불과했다.
「너무 겸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오.」
이동녕은 김구가 적임자인 걸 설명했으나 듣지 않았다.
「아닙니다. 한나라의 국가원수가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걸 맞는 인물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민족의 위신을 살릴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먼저 이상룡씨나 홍면희씨 같은 분도 호응하는 인재가 없었는데,
제가 나서면 더욱 가볍게 보고 호응할 인재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동휘는 조목조목 들어서 김구를 설득했다.
「첫 번째의 것은 이유가 아니고, 다음 것은 백범이 나서면 지원자들이 틀림없이 나설 것이오.
그러니 응낙하여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시오.」
이동녕의 간절한 권고에 김구는 응낙, 국무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등으로 조각을 마쳤다.
이로서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에서 일단 벗어났으나 문제는 운영할 자금이었다.
임시정부 청사가 자체건물이 아니라 남의 집에 월세를 든 형편이었다.
따라서 가옥세가 30원,고용원의 월급이 20원을 넘지 않았으나 이 보잘 것 없는 돈도
충당하기가 힘이 들었다.
집세 문제로 가끔씩 주인과 다툼이 벌어졌다.
집주인은 중국인이었는데, 월세가 밀리면 찾아와 눈알을 부라리고 호통을 쳤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청사인데, 이 청사를 월세로 살고 있으니
누가 봐도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가끔씩 집세문제로 주인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다른 위원들은 가족 식구들과 함께 거처했으나 김구는 홀아비라서 청사에서 잠을 자고 밥은
돈벌이하는 동포의 집에서 얻어먹었다.
김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상거지중의 상거지」라고 자탄하기도 했다.
민국 6년인 1924년에 처를 잃었고 아들 인이와 함께 살았으나
그나마 어머니가 본국으로 데려갔으니 처지가 딱한 건 고사하고 외롭기 그지없었다.
김구가 비록 집도 절도 없이 홀몸으로 여기저기서 밥을 얻어먹고 다녔으나 누구 한 사람도
푸대접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봉길, 이춘태, 나우, 진희창, 김희한 등은 김구의 처지를 이해하여 한 식구처럼 지냈다.
이들 가운데 김구가 고맙게 생각하는 인물로 엄항섭(嚴恒燮)이 있었다.
엄항섭은 지강대학(之江大學) 중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그는 자기 생활은 거의 돌보지 않고,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이나 김구처럼 의지할 데 없는
동지들의 숙식을 해결하기위해 프랑스공무국에 취직을 했다.
그가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을 한 것은 왜 영사관에서 독립 운동가를 체포하려는 정보를 탐지해
전달하려는 목적과 받는 월급으로 음식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엄항섭의 부인 임(林)씨는 마음이 무척 넉넉하고 심지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구식 부인인데 아이가 없었다.
김구가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문밖까지 따라와 은전 한두 개씩을 김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기 사탕이나 사주세요.」
김구에게 아이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돈을 김구에게 주는 것은 김구가 수중에
돈이 없는 걸 잘 알고 있고, 또 김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아이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그 후 그녀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서 불행히도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 노가만(盧家灣)묘지에
묻혔다.
김구는 그녀의 무덤을 볼 때마다 남편 엄항섭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자기라도 능력이 생길 때
묘비라도 세워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느님은 참으로 무심하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렇듯 착하고 마음이 넉넉한 부인을 왜 일찍 데려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가 나중 상해를 떠날 때 묘비정도는 세워줄 재력이 있었으나 환경이 여의치 않아
그것도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그 후 엄항섭은 김구의 측근으로서 문장에 능숙하여 임시정부 선정부장을 맡아보았고,
김구 명의의 발표문이나 성명서 대부분을 기초했다.
민국원년(1919)에서 3,4년 정도 지나자 열렬하던 독립 운동자들 중 하나둘씩, 변절, 왜놈에게
투항하는 자가 늘어났다.
또 직책을 버리고 귀국하는 자들도 생겼다.
그 임시정부 군수차장 김의선과 독립신문사 주필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등이 그들이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세력을 확장하기위해 국내로 보내지는 동지들도 있었다.
비밀정치조직으로는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했다.
연통제는 상해임시정부가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휘, 감독하기위해 설치했던 비밀연락망이었다.
경성에 총독부를 두고 13도에 독판(督辦), 각 군에는 군감(郡監), 각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었다.
각각의 주무장관은 임시정부에서 임명하여 다른 방면으로 전국을 통치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납세도 잘 이루어져 상해임시정부의 위신을 크게 떨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연통제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경북, 충남 및 제주도에는
조직되지 못했고 함남으로부터 연통제가 왜놈에게 발각 당하자 각 시도조직이 붕괴되었다.
점차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큰 뜻을 품고 상해로 몰려든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자
임시정부의 빈약상에 실망을 했고, 경제난으로 인해 취직을 하거나 나름대로 돈벌이를 위해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이 수천 명이던 것이 점차 줄어들어 수십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김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맡아보게 됐다. 노동총판, 외무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 등이 그것이다.
임시정부에는 오직 대한 독립이라는 대망을 품고 산처럼 곧은 마음으로 버티는 큰 인물이 많지는
않았다.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이 모두가 떠나고 남은 인사들이 거의 없었으며, 바로 김구는
이 상황에서도 묵묵히 임시정부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후에 회고를 했다.
「마치 폐가에 혼자 남아 폐가를 지키는 불목하니 같았습니다.」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시무할 적에는 외국 인맥 때문인지 외국어 실력 때문인지 미, 영, 불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내방,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고 명실상부 국가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김구가 주석 직을 맡고 있을 때는 사정이 악화돼 밀린 집세 독촉을 받고, 엉뚱한 사람들이 잘못 찾아와 길 안내나 할 정도로 모습이 안 좋았다. 마치 큰 집 사람들은 몇 없이 파리채만 들고 파리를 쫓는 형국이었다. 임시정부에 서양인이라고는 한명도 찾아오질 않고 가끔씩 프랑스 경무국에서 경찰이 왜놈을 데리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으로 오는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매년 서양의 큰 축제인 크리스마스에는 그래도 체면치례랍시고 몇 백 원 어치의 선물을 사서
프랑스 영사와 경무국, 또 전에 친하게 지내던 서양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다.
이것은 아직도 상해임시정부가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선전용이었다.
되는 집안은 사람이 들끓어야한다고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정치고 경제고 간에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인데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첫째 이렇다할 수익이 없으니 말만 임시정부청사이지 객인(客人)의 눈에 보면 할 일없는 실업자들의
쉬어가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감케 했다.
김구는 여기에 착안을 해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그것은 해외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처지와
사정을 알리는 편지공세였다.
해외에 있는 동포들의 비원을 받지 않으면 임시정부의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는 동북삼성에 가장 많았고, 그 다음 러시아령에 1백50만 명 정도 다.
세 번째로는 일본 교포, 그러나 그들도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이들의 도움을 얻기란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미주에 이주한 동포들이었다. 미국, 하와이, 그리고 멕시코, 쿠바 등에 1만 여명 살았는데,
그들 역시 주업이 노동이라 수입이 신통치를 않았다. 멕시코는 선인장 농장에 많은 동포들이 이주,
막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노예나 다름없니 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동포들의 애국심만은 높이 평가해 줄만 했다.
그들은 이미 망명해서 뿌리를 박고 있던 독립지사인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박용만등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지사들은 독립된 국가가 왜 필요한가, 독립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가끔씩 들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들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사정을 널리 알리고, 임시정부의 성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영어에 대하여는 문맹(文盲)이라서 봉투의 겉봉도 쓸 수
없는 입장이었다.
미주에는 상해를 통해서 건너간 몇 사람의 지인(知人)도 있었지만 주소도 알 수 없는 지경이어다.
김구는 엄항섭, 안공근 등의 도움으로 그 곳 동포들의 주소, 이름을 알아내서 동정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엄항섭이나 안공근에게 겉봉을 쓰게 하여 우송하는 일이 김구가 하는 사무의 전부였다.
편지를 보내면 주소를 잘못 기재해 반송돼 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회답하는 동포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 가운데 김경(金慶)같은 사람은 미화 2백 불을 보내왔다.
「상해임시정부가 집세를 못내 쫓겨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파서 한잠도 못 잤습니다.
김구 주석님, 용기를 가지십시오. 반드시 우리는 독립할 수 있습니다.」
김경은 김구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의 동포들은 투철한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집을 떠난 사람들만이 고향의 그리움을 안다고, 해외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은 조국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오는 송금이 없었다는 것은 임시정부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자주 바뀌는 각료와 변경되는 헌법, 구심점 없이 분파만 일삼는 조직 내의 갈등이 해외동포들의
불신을 낳았던 것이다.
김구는 용기를 내어 계속 통신을 보내 성금을 모았다.
하와이의 안창호, 현순, 김상호, 이홍기, 임성우, 박종수, 문인화, 조병요, 김현규, 안원규, 황인환,
김윤배, 박신애, 심영신 등 많은 해외동포들이 뜻을 같이하고 성금을 보내왔다.
미주의 신문에 상해임시정부의 소식단을 개설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김호, 이종소, 홍언, 한시대, 송종익, 최진하, 송헌수, 백일규 등은 멕시코의 김기창,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박창운 등의 교포 또한 임시정부에 성금을 냈다.
이외에도 성금 명단에 적힌 인사는 수없이 많아 일일이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구는 편지를 받았다. 안창호, 임성우, 현순에게서였다. 그들은 하와이 교포였다.
자신들이 성금을 내긴 내는데, 임시정부의 청사만 지키고 있대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김구 주석께
상해 임시정부를 지키고 계신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주석님께서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펼칠 계획이십니까?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성금을 내겠습니다.
김구는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지금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직 할 수 없으나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인 것을 감안, 조용히 돈을 모아두었다가 송금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랬더니 회답이 왔다.
김구 주석의 말을 믿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회신이었다.
김구는 민족이 빛이 날 일이 무엇이며,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떠날 사람은 모두 떠나고 자신과 같이 무능하고 빈천한 사람이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어 나간다는
어떤 압박감이 그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을 되씹으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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