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5. 사상의 갈등

오늘의 쉼터 2013. 1. 4. 19:25

35. 사상의 갈등

 

 

 

 

 

1919년 기미년이 대한민국의 원년(元年)이 되었을 때

국내외가 일치단결해서 민족운동에 매진했었다.

그러나 내외적으로 사상의 갈등이 노골화되어 분파가 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봉건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들이 나돌고,

이 말은 민족운동진영에도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시정부 직원가운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행동이 노골화되었다.

심지어는 정부의 국무원 가운데서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들 간에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 로 심각한 대립양산을 보였다.

그 양대 산맥이 곧 이동휘와 이승만이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주장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논쟁이 일었다.

따라서 일관되게 국시(國是)가 서지 못했다.

정부내부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건 뻔한 일이다.

한 예로 국무회의에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 3인을 뽑아 러시아에 대표로 보내기로 하고

여비를 갹출하던 중 금전이 압수됨을 보고, 이동휘가 자기 심복인 한형권을 비밀리에

먼저 러시아로 파견하였던 일이 있었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시베리아를 통과한 뒤에 이를 공개해 정부나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김구와 의견을 달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가 성재(誠齋)인데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서 이름을 바꾸어「대자유」라고

행세하기도 했다.

어느 날 이 총리가 김구에게

「날씨도 좋은데 공원산보나 합시다.」

하기에 그와 함께 인근 공원으로 나갔다.

공원에는 남녀 아베크족들이 벤치에서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걷다 말고 빈 벤치에 앉았다.

이동휘는 김구에게 귓속말로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했다.

「제가 경무국장으로 총리를 보호하는데 혹시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동휘는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고....」

「그럼 구체적으로....」

「대저 혁명이란 유혈사업이 아니겠소. 어느 민족이나 혁명이 일어났소.

그런데 우리의 독립운동이란 것이 민주주의 혁명운동에 불과하오.

완전한 민주주의 혁명이란 완전한 혁명이 아니오.

민주주이 혁명을 하고 나서 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의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소.」

김구는 이 말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공산혁명이란 독자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1919년 3월 레닌의 지도 하에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사회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공산당의 국제적 통일 조직인 코민테른이 끼어들지 않고서는 독자적인 공산혁명은

이뤄질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즉, 외세가 개입한 공산혁명은 경계를 해야된다는 것이다.

「이 선생 말씀대로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제3국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하겠습니까?」

이동휘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오.」

김구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이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민족의 자존심을 상실한 의존성운동입니다.」

김구의 말에 이동휘는 언짢은 낯빛을 했다.

「이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의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시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弟)는 선생의 지도를 결코 따를 수 없으니 선생께서 자중을 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동휘는 김구이 항변에 아무 말도 않고 몹시 불쾌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한편 이동휘는 자신이 밀파한 한형권으로 부터 보고를 받았다.

한형권은 단신으로 시베리아에 도착해서 러시아 관리에게 러시아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 관리는 즉시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를 했다.

러시아 정부는 한형권의 이야기를 듣고 반색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에 저주하는 한인동포를 총동원했다.

그리고 한형권이 러시아 내의 각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손에 손에는 태극기를 들게 하고

환영을 하게 만들었다.

한형권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러시아 최고지도자인 레닌이 직접 맞이했다.

레닌은 한형권에게 물었다.

「독립자금이 필요할 텐데 얼마나 들겠소?」

한형권은 미처 이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한 2백만 루블 정도가 필요합니다.」

레닌이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막강한 일본을 대항하는데 2백만 루블은 적지 않소?」

한형권은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소. 자기 민족의 독립운동은 스스로 해야 마땅하지요.」

레닌은 즉시 외교부에 명령하여 한형권이 요구한 200만 루블을 현금으로 지급케 했다.

그러나 우성 시험적으로 40만 루블을 한형권에게 주었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때를 맞추어서 김립(金立)을 밀파해, 한형권을 설득했다.

김립은 이동휘의 조종대로 한형권이 레닌정부로부터 받은 돈을 달라고 했다.

「이 돈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산혁명을 위해 쓰여야 하는 돈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한형권으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그러나 김립은 이 돈을 갖고 북간도의 자기 식구들을 위해 토지를 매입했고,

이른바 공산주의라고 하는 한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나눠주는데 그쳤다.

그리고 자신은 상해에 비밀리에 잠입, 광동여자를 첩으로 얻어 쾌락을 즐겼다.

그러나 김립은 그 후 자신의 죄과를 톡톡히 치루었다.

1922년 1월 13일 상해 갑북에서 코민테른 자금을 임정(임시정부)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던

오만직과 노종균에게 암살당했다.

한편 이동휘는 임시정부에서 큰 과실을 한 것에 대해 추궁받자,

총리 직을 사직하고 러시아로 도주했다.

한형권은 러시아 수도에서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20만 루블을 갖고 상해에 잠입, 공산당들에게 돈을 풀어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했다.

당시의 한인 공산당은 세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첫째가 상해에서 설립된 상해파로 우두머리가 이동휘였다.

둘째는 이르쿠츠파로서 그 우두머리는 안병찬과 여운형이었다.

셋째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파로서 일본에서 조직된 엠엘(ML)파로

일본인 후쿠모토 가즈오(福本和夫)와 김준연 등을 우두머리로 한 것이었다.

상해에서는 그 세력이 미약했으나 만주에서는 그 활동이 맹렬했다.

한편 이을규(李乙奎)와 이정규(李丁奎)형제와 유자명(柳子明)등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상해, 천진 등에서 세력을 뻗쳤다.

한형권이 소집한 국민대표대회에는 잡종회(雜種會)라 부를 만큼 각양각색이었다.

60여개 그룹의 대표 113명이 참석했는데 의장으로는 간도에서 온 김동삼이,

부의장으로는 안창호가 선출되어 3개월에 걸쳐 2차 회합을 가졌지만 민족통일에 실패했다.

김구와 이동녕 등은 임정고수파로서 노령만주계의 창조파,

국내 미주계의 개조파와는 노선을 확실히 달리했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양파공산당이 서로 투쟁을 벌였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김구는 내무총장이 직권으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령을 내렸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을 러시아 대표직에서 파면하고 안공근을 러시아 대표로 임명했다.

 

국민대회가 실패한 후 상해에서는 통일이라는 이름아래 공산당운동이 끊이질 않았다.

이들은 순수한 민족운동자들을 충동질했고, 공산당 청년들은 양파로 나뉘어져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명칭으로 재(在)중국 청년동맹과 주(住)중국청년동맹을 조직,

상해의 우리 청년들을 포섭해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 하자고 했다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사주의자들에게,

「식민지 운동은 복국(復國)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앞서야한다」

라고 발표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했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해서 독립민족운동은 공산당의 당시(黨是)로 주창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자연적으로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촉성회(有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공산당 양파의 권리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걸음도 진전되지 못했다.

이즈음 민족운동자들도 점차 자각을 했다.

공산당의 사탕발림에서 벗어나 결국 유일독립당촉성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순수한 민족주의자인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봉준, 김구,

송병조등을 중심으로 창립이 되었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조직을 따로 갖게 되었다.

공산당들은 상해의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속임수에 놀아나지 않자 남북 만주로 진출,

상해에서보다 더욱 맹렬하게 활동하며 살부회까지 조직했다.

살부회란 이념과 목적이 배치되면 아버지까지 죽인다는 끔찍한 모임이다.

공산당이란 이렇듯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동원, 근본적인 윤리의식마저

짓밟고 있었다.

나중에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네 아버지는 내가 죽이고 내 아버지는 네가 죽인다.」

는 것이 규칙이라고 했다.

남북 만주의 독립단체로 정의부(正義部), 신민부(新民部), 참의부(參議部) 외에

남군정서(南軍政署), 북군정서(北軍政署)등이 있었는데,

 각 기관에 공산당들이 침투해 조직을 파괴하고 살상을 자행했다.

이들의 의해 백광운, 김규식(金奎植), 정일우, 김좌진등 뛰어난 장군들을 희생시켰다.

이때의 김규식은 임정 부주석 김규식과는 동명이인이다.

이 당시 중국최대의 군벌 장작림(張作霖)과 일본과의 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의 내용은 한인 독립 운동가들을 잡으면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인 한명의 머리를 베어 들고 가서 중국 돈 3~4원을 받고 팔아넘기기도 했다.

마치 옛날 쥐꼬리 몇 개를 잘라 들고 가면 그 대가로 설탕 한 봉지를 주는 식이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은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이부나 신민부에 세금을 걷어 바쳤다.

그러나 이런 순박한 백성들이 점차 독립운동기관의 지나친 위력에 반발, 오히려 왜놈에게

밀고하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또한 독립운동자들까지 왜놈에게 투항하는 일까지 늘어났다.

그러던 중 왜놈의 괴뢰인 만주제국이 탄생되었다.

따라서 만주는 제2의 조선이 돼 버리고 말았다.

동북삼성의 정의, 신민, 참의부와 임정과의 관계도 점차 어색해졌다.

임정이 처음 조직되었을 때 3부는 임정을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3부가 할거하여 세력다툼을 벌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긴다.」

는 속담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생각 든다.

그 당시 정세로 말하자면 동북삼성방면에 독립군이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신흥학교시절 이후 30여 년간 김일성(金日成)등 무장부대가 산악지대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드나들며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하고

러시아의 후원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상유지를 하는 정세라, 관내 임시정부 방면과의 연락은 곤란하게 되었다.

정의, 신민, 참의부는 나중에 정의부로 되었고, 이들은 서로 반목해서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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