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4. 정탐꾼들

오늘의 쉼터 2013. 1. 4. 18:48

34. 정탐꾼들

 

애국자와 배신자

 

김구가 한국에서 타고 온 배는 영국 상인 죠지쇼우의 윤선(輪船)이었다.

이 배에는 15인이 동승했고 4일간의 항해 끝에 상해 포동 항구의 선창에 도착했다.

김구의 눈에 뜨인 광경은 치마도 입지 않은 여자들,

즉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선창 일을 하기위해서는

치마보다도 간편한 옷, 짧은 바지를 입은 여자들이 짐을 나르는 거룻배의 노를 지으면서

선객들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거룻배를 삼판선(三板船)이라 했다.

안동현은 굉장히 추웠는데 상해는 한여름이었다.

중국이란 나라는 광대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 사계절이 두루 걸쳐져 있었다.

김구가 도착한 곳은 프랑스 조계지, 즉 프랑스의 법계(法界)로서

그 나라 경찰력 및 행정력의 관할아래 있는 지역이었다.

당시 중국의 항구는 대부분 열강 세력들의 조계가 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김구와 일행은 공승서리(公昇西里) 15호에 있는 동포의 집에서 담요만 깔고 잤다.

이동녕, 이광수, 서병호, 김보연 등 동지들이 함께했다.

 

당시 상해에는 한국인들이 약 5백여 명 거주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약간의 장사를 하는 사람과 유학생, 10여명 남짓의 전차회사 검표 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립지사로서 본국, 일본, 미주, 러시아, 중국 등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본국의 13개도 각 도시에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들로 들끓었고,

해외의 한인들도 독립에 대한 열정이 화염같이 타올랐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한일합병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단군 개국이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이민족의 속국이 된 적도 있었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이씨(李氏)외 3씨가 혁명하여 자립 왕이 된  전례가 있었다. 

따라서 왜놈에게 병탈당해도 당(唐), 원(元), 명(明), 청(淸)처럼 나라이름만 바뀌었지,

그 주체는 중국인이란 점과 같이 명의상으로만 왜놈의 속국인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왜놈들의 속셈은 베트남(安南), 인도에서의 영국·프랑스 식민정치를 절충하려는 것이었다.

이 속셈을 아는 사람은 100분의 2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합병 후 제1착으로 안악 사건을 조작했고, 제2차로 신천의 105인 사건의 잔학무도한 것을

보고, 왜놈들은 완전히 한국을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을 간파했다.

이것이 만세운동이 폭발된 첫 번째 원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민족자격주의는 한국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또한 만세 운동이 폭발된 또 다른 원인이었다.

 

상해에 모여든 5백여 명의 지사들은 어느 곳에서 왔든지 모두가 선각자요,

지식인이며, 지도자였다. 그리고 민족자주의식이 투철한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 먼저 상해에 도착한 젊은이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회담의 대표로 파송했다.

또 김철은 본국대표로 파견했다. 상해에 모려든 여러 청년들을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그래서 각 곳에서 상해로 집결된 인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대표를 선출했다.

여기에 임시 의정원을 만드니 이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야말로 우리 대한민국의 법통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李承晩)을 총리로 임명하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법무, 교통 등의 부서가 조직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상해로 와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고 각 부총장은 미처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장들을 대리로 국무회의를 진행했다.

이동휘, 문창범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왔고, 이시영, 남현우 등은 북경으로부터 모여들었다.

한편 정부의 사무가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한성(서울)에서 비밀리에

각도 대표가 모여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별도의 정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활동하기 어려워 그 권한을 상해로 보냈다.

당시 한성에서 수립된 정부를「한성정부」라 했고 공식명칭도「대조선 공화국」이었다.

1919년 4월초 이봉수가 한성정부의 각료 명단을 갖고 상해로 왔다.

미리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비슷한 역할을 할 두 개의 정부가 생겨났다.

그래서 결국 두 정부를 개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명하고 4월 11일 헌법을 반포하게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김구는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했다.

안창호는 처음에 김구가 벼슬을 시켜주지 않는 반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안창호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있던 김구는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나는 일찍이 본국에서 교육사업을 할 때 스스로 순사 시험과목을 치뤄 본적 이 있습니다.

그런데 합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 할 때 만일 독립정부가 조직이 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구(九), 별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이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독립되면 독립된 조국에서 정부의 뜰을 빗자루로 쓰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한때 마곡사에서 하은당의 상좌승으로 있을 때도 하은당 스님이 입적하게 되면 많은 절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도 김구는 이를 마다하고 금강산으로 공부한다는 핑계로 서울로 간적이 있었다.

궁핍하게 일생을 살았지만 물질에 대해 탐욕이 없었고, 평생 벼슬한번 해보지 않았으나

벼슬에 대한 탐욕을 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궁핍함을 지나치게 느낀 사람일수록 물질 욕이 많아지고 때로는 물질로 인해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또 물질은 있되 벼슬이 없는 사람일수록 벼슬 욕이 강해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벼슬을

사려 하지만 김구는 벼슬 욕이 없었다.

김구는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자신의 소유물을 가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자신의 집에 문패를 걸어놓고 산적도 없거니와, 남들처럼 좋은 물건을 갖고 싶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고궁에 들렀을 때,

그 뜰을 바라보며 이것이 내 집이거니 하면서 큰 그릇 안에 모든 사물을 담아 보려 했던 것이다.

김구의 이런 마음을 알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를 구출해 내기 위해 갖고만 있으면 몇 대는

편히 살 수 있는 재산을 기꺼이 투척, 그의 구출에 온힘을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다.

강화의 김주경이란 사람이 그였다.

그들은 물질의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 인간 가운데 진정으로 남을 사랑할 줄 알고 다 함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치를 높게 평가했던 것이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구였다.

도산 안창호는 잠시나마 김구의 본의(本意)를 오해한 것을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미국의 백악관이란 곳이 있소. 백악관은 대통령 궁인데 이 궁을 지키는 관원이

많은 것을 보았소.」

아마도 안창호는 경호실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튿날 안창호는 김구에게 경무국장 임명장을 주며 취임해 줄 것을 권했다.

김구는 다시 한번 사양했다.

「순사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하는 내가 어찌 경무국장의 직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안창호는 김구의 겸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범은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해봐서 왜놈의 성격,

왜놈의 사정 전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지금은 혁명의 시기요. 혁명의 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중요시 여기오.」

하며 경무국장 취임을 다시 한번 권했다.

그리하여 김구는 5년 간 경무국장으로서 신문관, 검사, 판사, 그리고 형 집행까지도 담당했다.

 

김구가 담당했던 한 가지가 있다.

김도순이란 17세 소년은 본국에 파견되었던 정부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 영사관과 협조하여 그 특파원을 체포코자 했다.

밀정노릇을 한 것이다. 그 소년은 왜 영사관으로부터 10원을 받았다.

결국 그는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극형에 처했다.

이런 것은 기성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말로 타이르는 것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임시정부의 방침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남의 조계지(租界地)에 붙어 지내는 것이니 만큼,

경무국의 사무는 정상적인 국가의 보통 경찰행정과는 달랐다.

그 주요임무가 왜놈들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뻗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김구는 정복과 사복경호원 20여명을 임명하여 이 일을 수행했다.

홍구(虹口)의 왜놈 영사관과 임시정부 경무국은 늘 대립, 암투를 벌였다.

당시 프랑스 조계당국은 우리의 독립운동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따라서 일본 영사가 독립운동자의 체포나 소환을 요구할 때 프랑스 당국은

미리 우리기관에 연락, 체포 할 때는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엉뚱한 빈집을 수색하게 할 뿐이었다.

오성륜(吳成倫)이란 의열단원이 있었다.

오성륜은 왜놈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폭탄을 던져 살해하려 했으나 불발이 되었다.

그는 다시 권총을 발사했으나 애꿎은 미국여자 여행객 한 사람을 죽게 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문제로 대두돼 일본, 영국, 프랑스가 합작하여 프랑스 조계지의 한일을

대거 수색, 체포했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왜놈 경관 일곱 명이 무슨 일인지 노기가 등등해 김구의 집 침실까지 들어왔다. 그중 프랑스 경관인 서대납(西大納)은 김구와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왜놈 말과 프랑스 말이 서로 달라 체포장에 기재된 이름이 김구 일지 모르고

한일 강도로 알고 체포하러 왔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잘 아는 친구였다.

왜놈들이 김구에게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려하자 서대납이 제지했다.

 

그리고 김구에게,

 

옷을 입고, 빨리 프랑스 경무국으로 갑시다.」

하는 것이었다.

김구가 서대납을 따라서 숭산로(崇山路)의 경찰서에 도착하니,

원세훈등 5명을 먼저 잡아 유치장에 구급해 놓았다.

김구가 유치장에 들어간 후 왜경이 와서 신문하려 하자 서대납은

「안되오.」

하고 거절했다.

일본 영사가 인도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서대납이 김구에게 물었다.

「여기 다섯 사람은 잘 아는 사이요?」

「동지요.」

「그럼 김 선생이 다섯 명의 신원보증을 하고 데려가겠소?」

김구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그들을 모두 석방해 주었다.

프랑스 경찰국에서 한인 범죄자를 체포할 때 김구는 배심관으로 임시정부를 대표해서

신문, 처리했다.

따라서 프랑스 경무국(조계 지역 내의 행정, 외교, 치안을 담당한 기관)에서는

김구를 왜놈 경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인도하지 않았다.

또 김구가 보증을 하면 현행범 이외에는 즉시 풀어주었다.

왜경은 김구와 프랑스조계와의 관계를 안 뒤부터 체포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조계밖에 있는

영국 조계나 중국지역으로 김구를 유인하여 중국이나 영국 당국에 통보하고 체포해 갈 작정을

하고 있었다.

 

김구는 이런 저들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프랑스 조계지 생활14년 동안 프랑스 조계지를

한 걸음도 넘지 않았다.

당시 고등정탐꾼 선우갑(鮮于甲)이란 자가 있었다.

고등정탐꾼이란 이족(異族)의 비밀을 알려주는 체하고 상대의 비밀을 캐는 이중첩자를 말하는

것으로 선우갑이 바로 고등정탐꾼이었다.

그를 유인하여 포박하고 신문을 하려하자

그는 이미 죽을 결심을 했는지 순순히 모든 것을 자백했다.

「제 죄를 알고 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는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이었다.

「그럼 살려 줄 테니 그동안 반역한 것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우갑은 풀어주었더니

그는 그동안 상해에서 정탐한 것을 임시정부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김구는 그의 말이 진실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김보연, 손두환 등을 왜놈의 승전여관으로 보냈다.

과연 그는 왜놈에게 이들을 고발하지 않았고 시간을 어김없이 지켰다.

그러다가 4일 후 비밀리에 본국으로 도주 하였는데,

그곳에 가서 임시정부의 일을 칭송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조선인 가운데 왜놈경찰에 투신해서 꽤 높은 계급을 달고 독립지사들을 정탐하던 자들도

많았으나 그 반대로, 왜놈 경찰을 위해 일하는척하면서도 독립지사들에게 좋은 정보를

비밀리에 전해주는 사람 또한 많았다.

강인우(姜麟右)란 사람은 왜놈의 경부(警部)였다. 경부란 요즘의 경찰서장격인

총경 바로 밑의 계급이다.

그는 본국에서 비밀사명을 띠고 와서 김구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선생님에게 제가 상해에 온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인우가 상해에 온 목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독립지사의 염탐을 하기위해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만날 장소를 왜놈과 동행하면 김구를 체포할 수 있는 영국 조계지의 신세계 음식점으로 정했다. 김구는 그자의 결백을 우선 믿었다.

그래서 그 장소로 나갔더니 예측한대로 왜놈경찰은 보이지 않았고, 강인우 혼자였다.

「선생님 총독부에서 받은 사명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하며 정보를 제공하고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거짓 보고 자료를 주시면 귀국해서 적당히 얼버무리겠습니다.」

그래서 김구는 거짓자료를 만들어주었다.

나중에 강인우는 이 공로로 총독부로부터 풍산(豊山)군수로 임명받았다고 한다.

합방 후 왜놈으로부터 작위가 수여된 사람은 왕족과 관료를 합해서 76명이다.

이 가운데 김가진(金嘉鎭)이란 인물이 있다.

별호가 동농(東農)인 그는 3?1선언 이후 대동당(大同黨)을 결성했다.

대동당이란 조선민족대동단의 약자로, 조선민족의 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이다.

그는 아들 의한(毅漢)을 데리고 남은 여생을 독립운동의 책원지(策源地)에서 보낼 목적으로

상해로 왔다.

김가진은 문과에 급제, 병조참의, 공조판서, 농상부 대신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는데

왜 총독은 남작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일본의 수치라고 생각하여,

김가진의 며느리 사촌오빠 정필화를 비밀리에 파견, 김가진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경무국에서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정필화를 신문해 보니 사실과 같았다.

결국 정필화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황학선(黃學善)이란 사람이 있었다.

황학선은 이미 독립운동 이전에 상해에 터를 잡고 살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김구가 보기에 그가 독립운동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그를 데려와 함께 일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각 방면에서 상해로 모여든 지사들을 그의 집에 숙식을 하게 했다.

그런데 황가는 임시정부에 호감을 갖고 있던 태도를 돌변,

자신의 집에 모인 지사들에게 악평을 늘어놓았다.

「임시정부는 설립이 며칠 안 된 허수아비 단체에 불과하다.

아무런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이 임시정부에 참가해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임시정부에 기대를 갖고 모여든 청년 중, 김가진 선생과 서울에서 열렬히 운동하던

나창헌(羅昌憲)같은 사람은 그 말을 믿고 임시정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런지 며칠 후, 김기제, 김의한 등 수십 명의 임시정부 내무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청년들 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외국에서 자국의 청년들끼리 혈투란 창피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나창헌과 김기제 두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내무총장 이동녕은 싸움을 벌인 사람들의 신분이 모두 애국청년들이라,

중상을 입은 나창헌과 김기제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포박된 10여명은 포박을 풀어주었다.

 

김구는 그 분란의 원인을 조사케 했다.

그 결과 놀랄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나창헌과 김기제의 뒤에는 황학선이 있었고,

황학선은 이들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황학선의 배후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었다.

일본 영사관은 황학선을 프락치로 침투시켜 임시정부를 악선전해 교란시키려는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마침내 황학선은 체포하여, 신문을 벌였다.

황은 처음에는 완강히 그 사실을 부인했다.

「너 이놈, 아무리 돈이 좋아 눈알이 뒤집혔기로서니

왜놈의 돈을 받아서 임시정부를 파괴하려는 그 행위가 과연 옳으냐?」

황학선은 침묵을 지켰다.

황학선을 몇 차례 더 신문한 결과, 그는 나창헌 등이 애국열정이 있음을 간파,

그에게 김구 등의 행적을 왜곡되게 설명하여,

반감을 갖게 하고 끝내는 김구와 각 총장까지 모두 암살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나중에 나창원과 김기제는 자신이 황학선에게 놀아난 사실을 알자 분노하며

큰 죄를 졌다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황학선을 극형에 처해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황학선은 사형을 집행한 뒤였다.

그 후 나창헌은 이승만이 외교를 빙자하여 임시정부에 위신을 훼손하자

이승만 탄핵심판위원장을 맡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여기에서 참고로 이승만 탄핵심판 판결문을 소개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서

 

(주문)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 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가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1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22일부로 국무위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6년 7월3일에 발한 구미위원회 통신 특별호,

동7년 1월28일에 낸 구미위원회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이다.

 

 

이승만 대통령 탄핵문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미주에 있으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유포하여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무시하고 공식결의를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한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 대통령으로서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선열이 편히 눈감을 수 없고 또 살아있는 동지들의 뜻이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한민국 7년 3월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을 가졌는데 황학선과 같이 민족의식보다

개인의 사욕에 젖은 교활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정직한 사람 또한 없지 않았다.

한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김구의 면회를 요청했다.

첫눈에 우직하고 체격이 튼튼해 보였다.

「무슨 용건이오?」

김구는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얼굴 모습만 보아도 당장 정탐꾼인지

협조자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직감력을 가졌다.

김구가 이 청년의 얼굴을 보자 사(邪)가 보이질 않아 호감을 가졌다.

그는 초면인데도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품속에서 권총 한 자루와 왜놈이 준 수첩을 내놓았다.

「며칠 전에 상해로 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본국에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이곳에 와서 노동일이라도 할까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일본 영사관 직원을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첫 대면에 제 체격이 튼튼한 것을 보고 김구 선생님을 살해하면 돈도 많이 주고,

본국의 가족들에게는 나라의 토지를 주어 경작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요?」

「만일 여기에 불응하면 후데이센린(不逞鮮人)으로 체포 한다고 해서 응낙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지 못해 무식한 저라도 프랑스조계지에서 독립을 위해 고생하시는

선생님에게 감히 총을 들이대겠습니까?

선생님을 해치고 왜놈들에게 받은 돈으로 잘 살아보아야 무엇 하겠습니까?」

청년은 권총과 수첩을 내놓았다.

김구는 청년이 말에 거짓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김구는 가능하면 남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남들에게 많은 해를 입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선천적으로 한국민은 교활한 성품이 못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구였다.

 

김구는 청년을 내보내주고 생계가 어렵거든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사람을 믿었다가 낭패를 당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나는 사건의 하나였다.

한태규(韓泰奎)라는 청년이 경호원으로 있었는데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착실해서 7, 8년 함께 일하면서도 실수한번 하지 않았다.

안팎의 신임이 두터워 김구가 경무국장을 그만둔 후에도 그는 경무국 사무를 그대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원(桂園) 노백린이 아침 일찍 김구의 집을 방문했다.

「무슨 일로 아침부터...」

「백범에게 상의할 일이 하나 생겼소.」

「어떤 일이요?」

「뒤 도로변(임시정부)에 어떤 젊은 여자의 시체가 한 구 발견되었소.

중국인들이 한국인 시신이라고 하기에 혹시 백범이 아는가 해서요.」

노백린과 함께 현장을 답사해보니 시신은 명주(明珠)란 여자였다.

명주는 하층여자였는데 어찌 굴러왔는지 상해로 와서 정인과, 황진남 등 집에서

식모생활을 했고, 여러 남자와 추잡한 정을 통하고 살던 전력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녀가 경호원 한태규와 함께 산책하는 것을 보고 김구는,

「한 군도 젊었으니 여자를 사귈 만하지.」

하며 농담을 던진 기억이 있었다.

명주의 시신을 검안해 보니 목 졸려 피살된 흔적이 역력했다.

타박으로 머리위에 피 묻은 흔적이 엿보였고,

목 부분에 노끈으로 힘껏 조른 흔적이 흉측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교살한 수법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대문 감옥에서 김 진사로부터 들은 활빈당에서

사형하는 방법, 바로 그것이었다.

김구는 김 진사로부터 전수(?)받은 사형방법을 경호원들에게 연습시켰다.

정탐꾼들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할 때 이 방법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 방법과 명주의 교살수법이 똑같았다.

그럼 이 사건은 경호실 요원, 한태규와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태규는 원래 착실한 사람이었다.

그를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김구는 한태규를 용의선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다.

프랑스 경무국으로 가 친한 서대납에게 고발하고 합동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기법의 하나로 우선 한태규를 용의선상에 올려놨다. 살인사건이란 가장 가까운 측근부터

조사한다는 것이 수사의 원칙이었다.

그래서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킨 한태규를 다시 불러들였다.

한태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이 집에 젊은 남녀가 동거한 적이 있소?」

물으니 주인 노파는

「1개월 전에 남녀가 동거한 적이 있소.」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오.」

「얼굴이 길고 눈썹 밑에 점이 있는 남자이고 여자는 화류계 쪽 사람 같소.」

노파의 대답은 한태규와 명주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집은 시체가 발견된 장소와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시체가 발견된 근처의 셋방 명부를 보니 한씨 성 갖고 있던 사람에게

방 하나를 빌려 준적 있었다.

 

그 방을 찾아가 방문을 열어보니 마루 위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혈흔감정을 한다거나 지문감식 같은 과학적인 감식기술이 없었기에

직감이 대부분 동원되었다.

「한태규가 맞소. 어쩌다 이런 일이, 안타까운 일이오.」

김구는 탄식을 했다.

그는 서대납에게 김구는 한태규의 체포를 의뢰했다.

프랑스 조계이기 때문에 살인사건은 프랑스 경찰이 담당했다.

김구는 한태규를 불러,

「요즘 어디서 숙식을 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낯 색이 파랗게 질리면서 얼버무렸다.

「마땅한 방을 얻지 못해서 동가숙(東家宿) 서가식(西家食)하고 있습니다.」

이때 프랑스 경찰관이 한태규를 체포했다.

김구는 배심관으로 이 사건에 참여했다.

김구가 경무국장을 그만둔 후 한태규는 왜놈에게 매수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 등에 대한 정보를 왜놈 경찰에 빼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이 왜놈 경찰에 매수됐다는 사실을 명주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명주는 비록 배우지는 못해 천하게 살고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애국심마저

버릴 수만은 없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란 것을 알고 실망했어요.」

한태규는 배우지 못한 명주가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놀랐다.

어쩌면 임시정부 쪽에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 그를 심문했을 때 그는

「명주란 여자는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 천한 여자와 동거를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하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범행수법을 기리키면서 추궁하자 그는,

「명주가 나를 독살하려 했기 때문에 살해했습니다.」

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일본의 비밀첩자가 되어 임시정부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받은 증거가 드러났다.

한태규는 종신징역을 선고받았다.

한편 한태규의 행동을 이상하게 본 나우(羅愚)등 청년들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한태규가 돈을 물 쓰듯 쓰며 가끔씩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밀정이란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해서 선생님께 보고 드리지 못했습니다.

의심만으로 동지를 고발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했다.

그 후 감방에 갇힌 한태규는 중 죄수들과 함께 탈옥할 것을 모의했다.

그런데 영악한 한태규는 이들을 배신하고, 이 사실을 프랑스 간수들에게 밀고했다.

한번 배신한 자는 두 번, 세 번도 배신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행동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감옥의 중 죄수들이 감방 문이 열리며 칼, 몽둥이, 동을 갖고 몰려나오자

이 사실을 알고 기다렸던 경비 간수들이 총을 난사, 죄수 8명이 즉사했다.

이를 본 옥중의 죄수들은 겁을 먹고 탈옥은 실패로 끝났다.

 

한태규는 재판정에서 자신이 배신해서 죽은 중죄수의 사실을 일일이 확인해야하는 일을 했다.

김구는 이런 악질적이고 이중인격자인 한태규를 절대 신임한 자신의 실책이 한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김구에게 한통의 서신이 날아 들어왔다.

한태규로부터였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프랑스 감옥관으로부터 감옥 친구를 밀고하여 8명이나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서

특전으로 풀려났습니다.

전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보답하겠습니다.」

 

김구는 너무도 불쾌해 이 편지를 태워버렸다.

우리민족 가운데 이런 자가 있었다는 수치를 느꼈다.

이런 자들은 일본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한태규는 평야에서 소매상 노릇을 한다고 했으나

그의 저도가 그리 밝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남을 밀고하고, 밀고한 보상으로 풀려나고,

사람을 죽인 자가 잘된다는 것은 인생의 법칙을 크게 위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를 일컬어 철면피라고 부른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가끔씩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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