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3. 김구의 겸손

오늘의 쉼터 2013. 1. 4. 18:03

33. 김구의 겸손

 

 

 

 

김구는 이동녕,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들을 만나 앞으로 할 일을 의논했다.

그때 임시정부가 조직 되여 있었다.

김구는 내무위원으로 피선되고,

안창호는 미주에서 상해로 건너와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김구는 안창호에게 정부의 수위를 요청했다.

「내무위원이란 직책은 아무래도 내게 과분합니다.」

 안창호는 처음 김구가 의도적으로 겸양을 하는 줄 알았다.

「무슨 말씀이오?」

「아니오. 내 말은 진실이오. 그 이유가 있소.」

「이유?」

「그렇소.」

「김 선생 같은 분은 내무위원보다 더 높은 직책을 맡아야 하는데.」

「겸양하는 것이 아니오. 옛날 본국에 있을 때 관리로서의 자격은 시험해 보기 위해

순사시험 과목을 혼자 치뤄 봤소. 그랬더니 합격하기가 어려웠소.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떻게 막중한 책무를 맡겠소.」

 

안창호는 김구의 진실을 알았다.

그러나 수위라면 김구에게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출입하는 사람들의 안내를 맡는 일 외에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머리를 썼다.

미국에 있을 때 백악관을 수호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김구 같은 사람이

이일을 맡으면 적격이라 판단했다.

그 이튿날 안창호는 김구에게,

「경무국장을 맡으시오.」

하며 임명장을 주었다.

그 당시는 아직 임시정부에 각부 총장들이 취임하기전이라

각각의 차장이 직권을 대리하여 국무회의를 진행했다.

윤현진, 이춘숙 등 젊은 청년들이 그들이었는데 이들은 수위인 노인에게

문을 여닫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늘 말했었다.

그래서 직급을 높여 김구에게 경무국장을 시킨 것이다.

김구는 임명장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사양을 했다.

「나는 순사의 자격도 없는 사람이오. 경무국장이라니 분에 넘치는 직급이오.」

안창호는 가만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감투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김구는 좋은 떡을 줘도

나쁜 떡을 달라는 격이니 사양도 지나치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백범이 거절한다면 큰 오해가 생길 것이오.」

「오해라니?」

「생각해보시오.

백범이 사양한다면 젊은 차장들의 부하가 되기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소?

거절하지 말고 공무를 수행하시오.」

결국 김구는 안창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대한민국 2년(1920), 민국 2년이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년째 되는 해를 말한다.

그때 김구의 나이 45세, 독립운동의 최전선, 행동대원으로 나서기에는 나이가 조금 과만했다.

그해 아내 최준례가 아들 인이를 데리고 상해로 건너왔다.

아내로부터 본국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본국에서는 어머니가 장모와 같이 사시다가

장모가 돌아가시니 그곳 묘지에 안장했다.

대한민국민국4년(1922)에 다시 상해로 건너와 김구로서는 평생 처음 가정의 행복함을 맛보았다.

그해 8월 신(信)이 태어났다. 모처럼만에 풍파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아아! 이 얼마만인가. 필부의 행복이란 과연 군왕의 그것보다 못하진 않구나.」

김구는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했다.

첫째 딸 화경이, 둘째 은경이등 모두가 인연이 없어선지 김구 곁을 떠나고,

남아있는 세 식구, 김구는 두 아들과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있는 아내의 주름투성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김구가 경무국장 일을 맡아 보고나서 안 일이 있다.

24년 전 치하포에서 왜놈 육군중위를 격살한 사건(국모보수)이 왜놈들에게

그제야 알려져 왜놈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일본 형사소송법에 공소시효란 것이 있을 리 없고,

시일이 지났어도 왜놈들의 치를 떨게 한 범인을 놓치지 않는 근성이 있음을 김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일이 자신이 해외로 나갔을 때야 알려졌을까?

본국에서는 이름 있는 애국지사들이 학교에서나 대중들에게 연설할 때

치하포사건의 김구를 들면서 그의 애국심을 본받으라고 했고,

해주 검사국과 경성총감부에서 김구에 대한 정부보고서인

「김구」란 책에 김구에 대한 일거일동을 상세히 기재했건만

그 사실이 왜놈에게 보고 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투철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었나,

김구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민족은 반드시 독립을 할 것이다.」

김구는 이렇게 믿었다.

1923년, 48세 때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총상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아내 최준례는 신이를 해산한 후 낙상(落傷)으로 폐렴에 걸려 몇 년을 고생했다.

처음 상해 보륭의원(寶隆醫院)에서 진찰을 받고 홍구(虹口) 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다.

홍구 폐병원은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던 병원이었는데,

그곳이 하필 일본의 조계지(租界地)였다.

일본의 법률적용을 받는 장소이기 때문에 김구는 부인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찾지를 못했다.

1924년, 민국 6년, 1월 1일 김구의 부인 최준례는 폐병원에서 영면했다.

실로 가련하고 기구한 사람이었다.

김구와 결혼한 후 최근 몇 년 동안의 짧은 행복을 가져본 것이 그녀에게는 마지막「봄」이었다.

남편 옥중면회 하랴 어려운 살림 보살피랴,

그리고 두 딸의 계속된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낀 참담함,

서울과 인천을 오가면서 지낸 세월이란 인고, 그 자체였다.

김구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딱한 사람이로다.

못난 남편 만나서 남들처럼 호강한번 못해보고 저 세상으로 가다니,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리.」

김구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인 숭산로(崇山路) 경찰서 후면의 공동묘지에 매장,

손수 비문을 썼다.

 

최준례 무덤

대한민국 6년 1월 1일 죽음

남편 김구 세움

 

화강석에 음각한 초라한 비석 앞에 김구, 인이, 신이,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한 이 사진 한 장,

그것은 만고풍상을 겪은 풍운아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결국 아내는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인이와 신이 두 아들을 남편 김구에게 남겨주고

다시는 못 올 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김구는 아내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룰 생각이었다.

독립운동 기간이라 혼례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기에는 자금 사정도 어렵고,

또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의 의견은 달랐다.

「오늘의 김 선생이 있기에는 최 여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최 여사는 아내이자 혁명가였습니다.

최 여사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뤄야 합니다.」

그들은 모금을 해서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김구의 아내 최준례는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고, 또 거기에 묻혔다.

김구의 두 아들, 인이와 신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제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신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힐 때였고, 제 어미젖을 먹고 재롱을 부릴 나이였다.

먹는 것은 우유를 먹이고 잠을 잘 때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 잠드는 모습을 보며

김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자못 걱정이 되었다.

 

1926년 김구의 나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소명을 알 나이,

김구의 어머니는 큰 아들 민이를 데리고 고국으로 갔다.

그  이듬해 인이도 고국으로 보내라는 말에 인이를 보내고 상해에는 김구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시 홀몸이 된 김구는 이제부터 홀가분하게 나라 일에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11얼 김구는 국무령에 피선되었다.

김구는 의정원(議政院) 의장(議長) 이동녕에게 국무령에 피선된 것을 사양했다.

그해 11월 김구는 국무령에 피선되었다.

김구는 의정원(議政阮) 의장(議長) 이동녕에게 국무령에 피선된 것을 사양했다.

「지금 우리 정부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운 시기인데,

이런 대 나보다 더 유능한 인물이 국가의 원수를 맡아야 합니다.

나는 아시다시피 김 존위의 아들로 미천한 출신이며 배움이 넉넉지 않고,

모든 대사(大事)를 추진함에 있어서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이동녕은 김구의 말에,

「지금은 혁명 기간이오. 이 중대한 시기에는 김 선생이외에 다른 방안이 없소.」

김구는 이동녕이 강권하므로 부득이 승낙했다.

김구는 높은 감투와 직위보다도 자신이 한날의 밀알이 되어 그

 밀알이 썩어 많은 씨가 퍼지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한 것이다.

이동녕은 그런 김구의 속마음, 겸양하는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곧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등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헌법개정안을 의원에 제출하여 독재제인 국무령제를 고쳐 평등제인 위원제로 개정

실시하여, 김구 자신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집무했다.

말하자면 국무령 한 사람의 의견으로 일사분란하게 이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도를 채택한 것이다.

김구의 민족주의적인 발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즈음 한국침략에 하늘이 노했던지 1923년 9월1일 일본 관동지방에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가구가 불탔으며, 사망자와 행방불명이 총40만에 달했다.

야마모토산본(山本)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조선안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날조 유포했다.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관헌들과 함께 조선인을 무조건 체포, 구타,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몇 명이 학살당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3천명 또는 6천명 등의 설이 있다.

제일 한국유학생회를 비롯한 몇 곳에서 한인학살진상 조사 활동을 벌이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 일본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 지구상에 언어를 달리한 수많은 미족이 있지만 일본민족만큼 잔인하고 표독한 민족은 옛날에도, 지금도 그 유래가 없었다.

신(神)이 호랑이를 만든 것은 비록 살생만 하고 표독스러우나 가죽이라도 쓰려는 것이고,

뱀은 간악하나 약재로 인간에게 이롭게 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만들었는가.

수 세기에 걸쳐 남의 민족을 괴롭히고 무수한 양민을 학살한 이들은 일찍이 남경대학살도

그렇거니와, 관동대지진 때 우리 동포를 죽인 그 잔인한 수법은 인간의 생각을 달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 당시의 기록을 다시 게재해 이들의 인간성이 어떠한가를 알려, 경각심을 도취코자 한다. 일본인들이 자행한 짐승만도 못한 잔인한 행위를 그래도 기술한다는 것이 다소 썩 내키지 않았으나, 일본인들은 원래 이렇게 잔인무도한 민족이란 걸 참조하라는 의미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는

것이다.

마치 지옥의 악귀처럼 이들은 수많은 우리 동포를 학살했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우리들의 부모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자고로 불구대천이란 말은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하는 바,

이들 종족이야 말로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 불구대천에 인간들이 아닐까?

친일 민족 반역자들은 이런 종족에 빌붙어 현세적인 부귀를 누린,

역시 용서받지 못할 인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금가지도 일본국에게 역사왜곡을 바르게

정립하고 인식하여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위하여, 일왕과 일본 국회의 진솔하고 구체적인 사제와,

이역만리 사할린에 버려진 우리 동포의 귀환, 철 천지 한을  안고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유해수습

등을 수없이 촉구해 왔으나, 말장난만을 일삼으며 우리 민족을 우롱하고 능멸하면서

또다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솔하고 구체적인 사죄와 반성만이 일본이 경제력과 군사력에  걸 맞는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국은 우리 민족의 최대의 아픔이며 고통인 민족분단과 6∙25 민족상잔의 비극도

그 근본적인 원인이 일제침략과 식민통치에서 비롯된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 관동대지진 한인학살보고서를 소개한다.

이 보고서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한국인을 말살하려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관동대지진 한인 학살보고서

 

2만의 동포가 왜노(倭奴)의 총칼에 죽어갔다.

동포들이여! 왜도 관동에서 2만의 동포가 왜노의 총칼에 참혹히 죽어갔다.

동포들이여! 다리를 꺾이고 배를 갈리어 죽은 우리 동포의 최후의 애호는

다만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아버지’ 뿐이었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전도에는 이보다 더한 학살! 노소남녀 구별 없이 모두 살육하자!

모두 굳은 결심과 주먹만 있으면 된다.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이를 조사 보고함과 동시 하루 속히 최후의 결사전투를 개시할 것을

절원(切願)하는  바이다.

형제여, 알거나 모르거나 청천(晴天)도 낯을 찌푸리고 백일(白日)도 빛을 잃었다.

개천 4256년 9월 1일부터 동 15일경까지 2주일간 장시일 계속하여 왜지 관동에서 왜족이

한인을 학살한 그 참상을 무엇이라고 평가할 것인가.

우리 인류사회에 있어서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참변일뿐더러 폭랑(暴狼) ∙ 독사와 같은

동물계에서도 희유의 만행으로서, 우리 동포 수만을 도살한 그 잔인 비참한 정형(情形)에는

요귀 악마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동1일 왜정부는 동경시 선교(船橋) 무선전신을 경유 관동부(關東府) 6현(六懸)전반에 대하여

한인 박멸을 명령하였다.

그 이유는 한인은 당시 당지의 진화(震禍)를 기회로 각처에 방화 또는 폭탄으로써 제반의

건축물을 파괴하고 혹 음료수에 독약을 투입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혹은 권총∙ 장총∙ 폭탄을

휴대 혹은 대(隊)를 지어 일본인을 습격하는 등 관동지방의 전멸을 도모한다.

라고 하여 동경∙ 횡빈(橫濱)을 시발점으로 하여 병대와 경찰관을 2부 6현에

일제히 나포(羅佈)하여 한인박멸을 종횡으로 선전하니 왜족은 장약(壯弱)을 가리지 않고

손에 닿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장총∙ 단총∙ 장검∙ 단검 ∙철창∙ 죽창∙ 곤봉∙ 추자∙ 소화구의 ∙건어(鍵漁)찍기 등 형색의 흉기를 휴대하고 ‘조선인을 박멸하자’고 회치며 그 함성 천지를 진동하고

벌 떼와 같이 일어나니 이가 소위 청년당 혹은 자경단(自警團)이라 칭하는 것이다.

집의 내외 촌락 ∙시가는 물론 산∙ 야∙ 천∙ 초원까지도 빈틈없이 수색하여 한인이하고만 하면

남녀노유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보는 대호 불문곡직하고 살육하니 선혈과 양심뿐인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면할 것인가?

우전(羽田) 부근에서는 기병대에 의해 2천명이 죽었고 우전천(羽田川)변에서 4백 명이

총살을 당했고 신나천(神奈川) 부근에서 3백여 인. 기옥현(埼玉懸) 취상역(吹上驛) 부근

및 동경시 본소(本所) 부근의 4백여 명. 동경시 구호(龜戶)경찰서 구내에서 2백여 명,

중선도 본압정 부근에서 1백여 명이 죽었고 동경시 상야(上野)경찰서 구내에서 150인.

학견(鶴見) 경찰서 부근에서 1백여 명을 살육하니

우리 동포 2만 다수의 선혈은 보람 없이 왜지 관동 전반을 피로 물들였고

우리 동포 2만 다수의 육체는 하릴없이 돼지 관동 전반의 비료로 화하였다.

 

 

살육의 참상

 

하동(河東) 광장에 한인을 다수 포집하여 기천기백 인을 한꺼번에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 기십 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나상에서 보는 대호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 자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을 ‘조선인’이라고 외쳐 부르는

한 마디에 백이 응하여 낭의 군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모여와 1명의 우리 동포에 대하여

수십 인의 왜노가 달라붙어 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묶어 끌고 다니면서 찌르고 차면서

시체에까지도 능욕을 가하였다.

부인 등을 보면 양편으로 좌우의 다리를 벌려 생식기를 검으로 찔러 일신을 4분5열로 자르며

여자는 이렇게 하여 죽이는 것이 묘미가 있다고 웃으면서 담화하였다.

우리 동포를 전차궤교(電車軌橋)하에 목을 매달고 양다리를 끈으로 묶어 좌우에서 다수인이

끈을 잡고 신호하며 호응하면서 ‘그네’ 와 같이 흔들어 죽인 것도 있다.

신체를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장면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인 것도 있다.

각 기차 중에서는 다수의 왜노 등이 4자를 잡고 창밖으로 던져 역살(轢殺)하였고

남녀 수십 인을 발가벗겨 보행시키고 또는 춤을 추게 하여 수 시간 동물적 희롱을 감행시킨 후

찔러 죽인 일도 있었다.

이러한 괴악한 수단은 우리의 뇌수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바이다.

한인 중에서도 왜어에 능통한 자가 왜족으로 오인되어 보명(保命)할 것을 염려하여

정정가가(町町街街) 기차 중에서도 통행인에게 왜국문의 탁음자의 발음을 시킴으로써

한인을 색출하고 왜인 중에서도 자기에게 관계있는 한인을 은닉 또는 보호하여 살해당한 자도

1,2인뿐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 동포를 주밀히 학살하니 돼지 관동에 있는 우리의 형제 내지 주중의 사람과 모두

적뿐인 곳에서 어디에 가서 생을 구할 것인가?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사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아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흡도 막힐 정도이다.

왜족이 자인한 학살의 동기. 왜족이 한인 학살의 이유를 내세운 왜지 관동의 전멸계획이라는 것

혹은 난폭한 행동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전혀 무근한 허설로서 왜족 중 ‘사회혁명을 도모하는 일파가 당시 왜지의 진화재를 기회로 방화∙

약탈 등의 난행을 하였던 바 이와 같은 허언을 선포하여 자체의 죄를 한인에게 전가하려고 하였다.’ 라고 한다. 이는 동 6일에 왜국 내각총리 및 경시총감의 유고로써 공표한 바이다.

 

 

왜정부의 간책

 

왜정부로서는 한인 학살의 사실을 엄폐하여 한인을 보호한다고 외계에 대하여 선전하던

유일의 빙자는 ‘한인으로서 잔명을 보존한 것은 대개 병영 내지 경찰에서 보호를 받는 자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경찰관 내지 병대도 한인을 만나는 즉시 그 장소에서 살육하였으니

그 후에는 일정한 장소에 집합시켜 편리한 방법으로 죽이려는 생각과 또한 학살을 시작 하였던바

본래 다수의 한인인고로 관동지방 전반에 총성∙ 갈성∙ 애호의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난타 난자하여 피가 바다를 이루고 시체는 산더미가 됨에 이르러 외인들에게 보이는 것을 겁내어

각처의 한인을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집합시킴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병영∙ 경찰서에 온 사람은 임시 잔명을 보존하였다 하나 도중에서

 대개 모두 중상을 입었다.

더구나 중상을 입은 자는 과연 몇 시간이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혼은 광장∙ 하변에 끌고 나가,

혹은 그러 한인의 죄 없음이 밝혀짐에 따라 외계의 여론이 점차로 일어나니

왜정부는 각 경찰서 구내 또는 병영에 한인을 집합한 것은 보호를 위한 것이다.

라고 선전함과 동시에 각 소에 한인수용소를 설치하영 한인을 그곳에 이송∙

집합시켜 병대 또는 경찰관으로써 감수(監守)를 삼았다.

따라서 7일부터는 이 참극이 점차 감소하였으나 왜관민(倭官民) 공히

학살을 계속한 것은 15일경까지이다.

당시 조선 내의 각 언론계 출판물은 물론 왜지의 각 신문∙ 잡지의 한인 학살에 대한 보도를

일절 금지하고 오히려 한인의 이재자를 구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는 선전적 기재를

장려하고 각처에 한인수용소를 설치하여 실지로는 감금하면서 외계에 대하여는

‘조선인 보호이다’라고 선전함과 동시에 한인이 귀국하여 이 참변의 실황을 설포 할 것을

겁내어 정부의 비밀통첩으로써 각 경찰서에서 한인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외계에 대하여는

도중의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때문이라 하였다.

그 후에 이르러 귀국을 허가하였으나 이들 귀국인의 신변은 순사가 비상한 사찰을 가해

지인에게 자기가 겪은 경력담을 하면 즉시 ‘우언비어’ 라고 엄벌을 가하는 등

요악한 정책과 가혹한 압박으로써 조선 또는 외지에 한인 학살의 정황이 전포되는 것을

방지하고 간사한 수단으로써 한인 보호의 형식으로 꾸며 세계를 기만하려 하였다.

현로(現露)한 사실을 정책과 압박으로써 그 영향을 소멸하려고 세계 공지(公知)의 참극을

수단으로써 호도하려고 했다.

왜정부에서는 당시 외국인으로서 한인 학살의 실황을 목격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국인을

각소에 집합시켜 경찰관 또는 병대로서 감수하고 외출을 금하고 그 주변에서 왜노들은

총을 쏘고 또는 싸움을 하면서

‘이 총성은 한인이 쏘는 총성이며 이 싸움은 한인이 습격하는 소리다.’

라고 기만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 한인의 폭행 또는 습격 등의 사실이 빈번하다고 선전했다.

 

 

왜노의 궤변

 

왜정부 야마모토 내각총리의 유고 중에 ‘금회 조선인에 대한 사건은 일반인민의 오해로 발생한

바이다.’ 라고 말했으나 왜정부 당국에서 동경시 선교 무선전신을 통해 관동지방 전반에 대해

한인 박멸을 명령한 것은 동년 10월  중 왜국 임시국회 중의원에서 공인된 바이다.

더구나 왜노의 상투어인 ‘진화재의 당시 관민을 논할 것 없이 일본인은 이지력을 상실하였던 때인

고로 이러한 사건의 발생을 본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이지력 상실자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닐까?

이지력을 상실하였다면 한인 학살과 외국인 기만의 수단은 어떻게 그리 고착할 수 있었던가? 

 왜족 중 소위 지식계급의 언론은 모두 ‘금회의 일은 조선인 뿐 만이 아니라

일본인 중에서도 사회주의자는 다수의 피해자를 낸 것인즉 조선인에 대하여 특수한 원한을 가진

경우다.’ 라고 하니 그렇다면 한인 중에서도 사회주의자나 혹은 건설 파괴 내지 인명살해의

행위자만 해하였는가?

한인이라고 말만 하면 불문곡직 도륙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왜정부의 소위 조선 총독은 동 6일에 왜지 각 신문에 공포하여 왈 ‘당시 관동지방에 재주하는

조선인은 노동자 3천, 학생 3천, 합계 6천명 중 조사의 결과 살해당한 자 2인뿐이다.’ 라고 했다.

관동∙관서 양 지방에 가장 많이 재주 하여 강축의 계산으로 전부의 5분의 1이 관동지방에 재주하니 그 수가 3만 이상에 달아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수만 다수의 임명을 살육하면서

2인뿐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로 수심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구사일생으로 우리 동포로서 잔명을 보존한 사람은 왜병영 내지 경찰서에서 요행이 살아남은

사람이 가장 많고 혹은 서까래 밑에서 10여 일간의 기한을 참고 견디어 살아남은 사람, 물속에서

수일간 혹은 장시간을 은신하여 살아남은 사람, 양옥건축의 입주준비를 위해 둘러친 목동 속에서

수일을 경과하여 구명한 사람, 우리 동포의 시체 속에서 묻혀서 구명한 사람도 있고 왜노 등의

난행을 받아 사전(死前)에 전도하여 눈을 부릅뜨고 사지를 떨며 죽은 시늉을 하여 구명을 한 사람,

그 외에도 그롤 다할 수  없이 기막히고 비참한 경과 후 살아남은 자도 많다.

슬프다, 구사일생의 우리 동포여! 왜노의 괴악한 수중에 들어가 최후의 죽임을 시험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심정일까? 이래도 최후의 동작이 없을 손가? 필사의 힘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형제들이여! 왜지 관동에서 모진 폭행을 당하는 것이 누구의 뼈며 왜지 관동을 진홍으로 물들인

겻은 과연 누구의 피인가?

주를 같이하는 우리 형제의 손이요 발이 아닌가?

거지 동일하여야 할 우리 동포의 살과 피가 아닌가?

이는 우리의 치명상이 아닐 수 없지 않는가? 우리에게 위기일발 닥쳐온 것이 아닌가?

없을 수 없다.

오인이 야만이 아니고 신성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면 개인이 가진 모든 것을 민족적 위기에 처해

희생하여야 하지 않은가?

목이 천이 잘릴 때까지는 치행준동을 한탄만 하고 그물이 내게 던져질 때에 이르러 자기도

같은 우물의 고기인 것을 알아차릴 것인가?

특히 양두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팔 시대적 사기배들아!

한시라도 속히 허예와 기만의 흑심을 씻어내라!

냉정한 고려로써 결렴한 양심을 회복하라!

배를 불리기 위해 안구를 빼먹고 개를 크게 하기 위해 팔을 잘라

다리에  있는 것과 같은 짓을 하면 아니 되잖은가?

형제들이여! 내일은 살아남을 가자 형제의 몸에 왜마의 독아가 범습 하는 날인 것을 모르는가?

내일은 오인 전체 민족에게 왜노의 괴조가 침박하는 날인 것을 모르는가?

형제들이여!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죽은 후에 장사지낼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형제들이여! 주저하면 함몰시킬 때를 놓친다.

말할 것 없이 최대의 분발로써 최후의 결투를 행할 뿐이다

1924년1월 조사원 일동 고백

우 대표 김건(金犍)

 

 

이렇게 우리 민족이 살육되고 있을 때 김구는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자신이 힘없음을 탄식했고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며 탄식했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며 잠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김구는 가끔씩 혼자서 사무실 뜨락을 산책하며 지난날들을 회상해 보았다.

이순(耳順)의 나이가 내일모레인데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했는가,

내가 내 욕심으로 인해 남들에게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주지 않았나,

목적을 위해 지나친 수단을 동원해 그 결과 많은 사람에게 못할 짓이나 시키지 않았나 생각했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그로인해 가슴 저미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생로병사(生老病死) 제행무상(諸行無常)

 

무릇 인간이란 태어나 병들어 늙어죽는 것이고 이처럼 허망한 것이 인생일진대

그동안에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내 조국을 위한답시고, 가족 몇 사람도 권사하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은

과연 올바른 삶의 자세였는가.

김구는 그 생각을 하다가 뜰 언저리를 지나가는 흰 구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탄식했다.

삶은 뜬구름의 만남이오,

죽음은 뜬구름의 흩어짐인데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

살아온 날보다 짧아진 지금,

일관되게 지켜왔던 일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보람이다 하는 생각을 가졌다.

김구는 그의 백범일지에 당시의 심경을 솔직히 기록했다.

 

나의 60평생을 피고하면 너무도 상리(常理)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窮)이 없겠고, 궁하면 귀(貴)가 없을 것이나

나는 귀역궁(貴亦窮), 궁역궁(窮亦窮)으로 일생을 지내왔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는 부지(不知)이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地球面)에 일촌토(一村土) 반 칸 옥이 없다.

그러고도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고 보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옹산(甕算)도 많이 하여 보았다.

도금(到今)하여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석(昔)에 한유(韓愈)는 송궁문(送窮文)을 지었지만

나는 우궁문(友窮文)을 짓고 싶다. 그러나 불문(不文)이므로 그도 불능이다.

자식들에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윤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인 심성으로 사회를 사비로 효사(爻辭)하면

나의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김구는 평생 동안 돈다운 돈을 만져본 일이 없었다.

돈을 만졌으되 돈이 수주에 머물러 있던 시간이 별로 없다.

하도 궁해서 어느 때는 옹산(甕算)도 해보았다.

옹산이란 옹기장수가 잠이 들어 꿈에 큰 부자가 되어 좋아서 뛰는 바람에 지게를 걷어차

독이 깨어져 허사가 됐다는 옛 고사(古事)이다.

또  한유처럼 송궁문, 가난귀신을 쫓아내는 글을 써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으나

부질없다는 일이고 오히려 우궁문, 즉 가난과 친해지는 글을 지속 싶으나

문장실력이 변변치 않아서 이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송궁문은 가난귀신을 모두 쫓아버려 좀더 잘 살려고 했으나 가난귀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그들을 상좌에 모시고 사기로 했다는 글이다.

 

김구는 또 자식들과 아내에게 남편과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그래서 아비에 대한 이무를 하지 않아도 죽고, 다만 사회의 아들이란 심정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기미년(1919) 2월 26일, 김구의 어머니가 환갑을 맞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당시는 조혼(早婚)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김구를 16세에 낳은 것이다.

김구는 아들로서 격을 다하고자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친구를 초대하려 했으나

낌새를 안 그의 어머니는 이를 거절했다.

「네가 1년만 추수를 더하면 생활이 나아질 테니 그때 친구들을 초대해서 흥겹게 놀아라.

곤란한 가운데서 환갑을 준비하면 오히려 내 마음이 불안하다.」

이런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김구가 그 어려운 일을 감당했고,

모진 풍파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 생신도 장만하지 못하는 처지에 자신의 생일을 입밖에 내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해(민국 8년, 1926) 나석주(羅錫주)가 제법 쓸 만큼 고기와 채소를 사와 어머니께 드렸다.

「돈은 없고, 옷가지를 전당해서 고기 근이나 사갖고 왔습니다.」

김구가 물었다.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인가?」

「선생님 생신 아닙니까?」

그리하여 김구는 나석주가 가르쳐준 생일날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김구는 지난 평생 동안 종횡으로 만났던 헤어진 사람들,

그 가운데서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준 사람들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나이가 그만큼 들어서 지난날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이유에서였지만

그 사람들이 좀더 하는 일에 성취를 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사무실에서 김구는 그간의 소식을 접했다.

그 결과, 인천의 물상객주 박영문(朴永文)은 별세했고, 안호연은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래서 김구는 안호연 앞으로 회중시계 한 개를 사보내서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

성태영은 길림(吉林)에 와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었으나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유완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피살되었고 그 아들 한경(漢卿)은 아직 북간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종근은 러시아 여자를 아내로 삼아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나보았다.

김형진 유족의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고, 김경득 유족은 탐문중이다.

김구가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감탄할 것은 자신의 강건한 몸이라 생각했다.

5년여의 감옥생활에도 병으로 인해 노역을 단 하루 쉰 적이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옥에서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란 곳은 혹을 떼러 제중원(濟衆院)에 1개월,

상해에 오고 나서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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