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2. 2천만 동포야, 궐기하자

오늘의 쉼터 2013. 1. 4. 17:02

32. 2천만 동포야, 궐기하자

 

 

김구의 나이44세,

농촌생활에 한껏 재미를 붙이고 있을 때 나라에 중대사가 발생했다.

기미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사태는 점점 심각하게 진행돼가고 있었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정오 무렵,

탑골공원이 있는 종로 거리는 수만 명의 군중으로 가득 메워졌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이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한명이 단상에 뛰어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인과 조선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원히 갖게 하노라.」

그러자 여기저기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독립만세는 거대한 함성이 되어 하늘가 땅을 뒤흔들었다.

학생들이 ‘광복가’를 부르며 앞서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이천만 동포야 일어 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서

잃었던 내 조국과 너의 자유를

원수의 손에서 피도 찾아라

한산의 우로 받는 송백까지도

무덤 속 누워있는 혼령까지도

노소를 막론하고 남이나 여나

어린아이까지도 일어 나거라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한자(漢子) 용어를 한글로 풀어쓰기로 한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에서 우리 민의 입장과 일본의 죄악상을 낱낱이

세계에 고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독립선언서>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 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밝히며,

민족의 항구하고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합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이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딴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을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의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버리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우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다다가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혈심하고,

인류공동의 무기로써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 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조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 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건설이 있을 뿐이며, 그

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고명에 희생된,

불합리 하고 부 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 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중국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용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야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운기와 혈액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면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 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 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에서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이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 3 장

 

1. 오늘 우리의 이번거사는 정의와 인도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장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리라.

 

1.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건국4252년 3월일 조선민족대표 손병희 외 32인

 

그러나 애석한 일이다. 조선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많은 변절자가 생겼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과 3 ∙ 1운동의 주모자격인 최린, 목사 정춘수,

그리고 박희도 등이 그들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변절자들,

그것 자체가 한시대의 비극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개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 무렵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벌이기로 했던 민족대표 33인은 약속을 어기고,

탑골공원에서 좀 떨어진 태화관에서 모여 선언서를 읽고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수를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지금도 의문으로 남는다.

 

 

당시 세계는 변화를 맞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와 농민이 나라」를 선포했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러시아 내의 1백여 개에 달하는 소수 민족에게「민족자결」을 선언하고

세계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혁명이 성공하자 러시아는 전쟁에서 손을 뗐다.

러시아 혁명은 유럽에 커다란 여파를 던졌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스위스로 망명을 하고 항복을 했으며,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사회민족당이 이끄는 독일공화국이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1919년 1월, 27개국의 전승국 대표가 프랑스파리에 모여 강화회의를 했다.

회의의 중심인물은 미국대통령 윌슨, 그가 제안한 전쟁종결과 사후처리를 위한

「14개조 평화원칙」이 채택되고 그중 하나인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독일의 지배를 받던

유럽이 약소민족들은 독립을 얻게 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약소민족들에게도 큰 희망을 주게 되었다.

중국 상해에 있던 여운형(呂運亨) 김규식(金奎植), 장덕수(張德秀)등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사정을

호소하고 독립을 청원했다.

미국의 대한국민회의는 민찬호, 정한경, 이승만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다가 미국 당국이

출국을 금지하자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일본에서는 동경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종교인 지식인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 미국에 지원요청, 일본에 독립은인요구라는 방침을 세웠다.

국내에서의 독립선원은 이를 뒷받침하는「독립의지의 시위」이고 따라서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은 패전국에만 해당되는 원칙일 뿐 연합국의 일원이요

승전국의 하나인 일본, 그의 식민지 조선에는 무관한 일이었다. 당시의 조선독립운동 카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열강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국가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파리강화회의에 민족자결의 원칙은 조선에도 적용해달라고,「정의」와「인도」의

이름으로 호소하면 이를 적극 후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은 바로 이 같은「외교를 통한 독립」,「비폭력 노선」에 의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1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학생과 지식인들이 앞장을 섰지만 차츰 농민과 노동자, 상인들이 중심에 나섰다.

운동형태도 비폭력 만세운동에서 무장 항거로 변해갔다.

농기구나 간단한 무기를 들고 면사무소 헌병 분견소, 경찰서, 토지회사, 친일지주 등을 습격하고

세금대상과 민적부를 태웠다.

상인들은 철시(撤市)로,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기생과 백정의 부인들까지 시위를 벌였다.

그해 3월부터 5월까지 열린 집회횟수는 모두 1천 5백여 회, 참가자 2백여 만 명, 전국 218개 군

가운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일제는 주동자를 체포하고 무차별 발포와 살육으로 탄압했다.

일제의 공식집계에 의하면 3,4월 두 달간,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만 6천여 명,

체포 4만 6천여 명, 그리고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탔다고 하니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3·1운동은 4월 중순 이후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도부도 조직력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일제의 탄압을 뚫고 나갈 힘이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운동의 열기는 그대로 남아 동맹휴학, 철시, 농민봉기, 파업이 이듬해까지 끊이지 않았다.

국내정세가 이렇게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김구는 현실 참여를 하지 못한 채 시골에서

거사(居士)로 지내고 있었다.

평양, 진남포, 신천, 안악, 온정, 문화에서 벌써 백성들이 궐기를 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을 때 장덕준이 사람을 시켜 한통의 서신을 보내왔다.

그 서신의 내용은「국가대사가 생겼으니 재령에서 만나 같이 논하자」는 것이었다.

「기회를 보아서 움직이겠소.」

김구는 위와 같은 답신을 보내고 진남포를 건너 평양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그곳 친구들이 만류했다.

「평양은 이미 왜놈들이 삼업하게 진을 치고 있소.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하여 그날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김구에게 청년들이 권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우리도 나가서 만세를  부릅시다.」

그러나 김구는 마음에 없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할 마음이 없소.」

청년들이 김구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선생님께서 참여하지 않는다면 누가 선창(先唱)을 합니까?」

김구가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대한의 독립이란 만세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오.

여기에는 치밀한 계획아래, 동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해야 할 문제가 많소.

 내가 참여하고 안하고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자네들 어서 나가 만세를 부르게.」

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안악읍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김구의 생각은 잔악한 일본 놈들을 상대하기위해선 비폭력적인 만세보다도

더 구체적인 항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놈들은 그날부터 김구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점령지에서는 우선 지식인과 불평불만을 갖고 있는 자,

그리고 지사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을 감시하기 마련이다.

김구는 그 다음날 아침에도 평내 소작인들을 지휘했다.

농기구들 모두 동원 제방 수리하는데 몰두했다.

왜놈경관은 안심이 됐는지 다른 곳으로 갔다.

점심때쯤 김구는 안악읍으로 나갔다.

김구는 상해로 갈 생각이었다. 김용진은 김홍량에게 먼저 상해로 가길 권했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10만원이 있어야 떠난다고 하니 먼저 김 선생이 가십시오.」

김구는 김용진에게 3백 원을 받아 우선 사리원에 도착,

김우범의 집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신의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919년 3월 29일,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지 한 달 만이었다.

김구가 열차에 타니 화제는 온통 만세 이야기였다.

황해도 평산 금천은 며칟날 몇 명이 나와서 불렀고, 연백은 어느 날,

황주 봉산에서는 어떻게 불렀다는 이야기였다.

 김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백의민족은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

왜놈의 압제 밑에서 만세 부른 것을 자랑으로 삼으니

한편 보면 장하고 한편 생각하면 딱하다.」

김구의 곁에서 한 사람이 물었다.

「우리가 죽지 않고 독립을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옆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독립은 벌써 됐습니다. 왜놈들이 제나라에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지요.

전국의 백성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는데 당할 재간이 있습니까?」

김구는 만세가 만병통치약처럼 통용되는 무저항주의가 비현실적이란 생각을 했다.

비폭력 부저항운동이란 왜놈들같이 무자비한 놈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김구가 감옥에 있을 때 겪었던 일들이 다시 한번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신의주역에 하차해서 개찰구로 나가자 왜놈순사가 한 사람 한 사람 검색을 했다.

「재목(材木) 상(商)인데 재목 살돈이오.」

김구가 대답하자 그냥 가라고 했다.

신의주 역시 만세 이야기로 온통 시내가 떠들썩했다.

김구는 중국인의 인력거를 불러 타고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 장사로

가장하고 일주일동안 묵고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를 탔다.

상해로 가기위해서였다.

이륭양행의 선주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죠지쇼우였는데,

이 사람은 임시정부의 통신연락과 물자수송을 적극 도와준 사람이다.

황해를 지날 때 일본 경비선이 경적을 울리면서 뒤쫓아왔다.

이륭양행 소속의 배들은 불법 밀행 자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서라! 서라! 발포하겠다!」

선상에서 왜놈들이 마이크로 계속 떠들어 댔으나 선장은 들은 체도 않고

경비구역을 지나 4일후 포동(浦洞) 선창에 무사히 도착했다.

함께 승선한 동지는 모두 15명, 안동현에는 아직도 얼음이 녹지를 않았으나

황포선창에 내리며 보니 녹음이 우거져다. 남쪽이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국내에서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상해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동녕은 이미 1909년 북간도 용정촌으로 들어갔고,

그 후 서간도에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광수(李光洙)는 1919년 동경에서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후 상해에 서있었다.

그 외 김홍서, 서병호 등이었다.

상해에 온 사람들은 일본을 거쳐 왔거나 러시아령과 중국 내지(內地)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중국본토에서 원래부터 살고 있던 사라들인데 5백 명쯤 된다고 했다.

 

그 이튿날 김구는 김보연의 집으로 옮겨 숙식을 했다.

김보연은 장연읍 김두원(金斗元)의 큰 아들이며 경신학교 출신으로,

김구가 장연에서 학교 사무를 맡아보고 있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선생님, 앞으로 여기서 하실 일이 많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보다 상해에서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여기는 국제도시이기도 하고, 중국요인들을 만나 협조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김보연은 김구의 상해 행을 누구보다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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