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망명자(亡命者)의 노래
김구가 출옥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잔 형이 2년여 남짓 남았기에 감형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끔 가져 보았는데
마침내 그 날이 온 것이다.
7월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감옥 방송으로 수인들은 모두 교회당(敎誨堂)으로 나오라 했다.
김구 역시 다른 수인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당으로 갔다.
교회당은 가끔 중이나 왜놈의 관리가 와서 수인들의 회개를 위한 강연을 하는 곳이다.
분감장(分監長)이란 자가 좌중을 향해 55호를 불렀다.
김구는 인천옥에 와서 55번 수인이 되었다. 김구가 대답하자
「일어나 나와!」 하고 명령했다.
단상으로 걸어 나간 김구에게 뜻밖에도,
「너는 오늘 가출옥으로 석방한다!」 하고 말했다.
김구는 이 말이 꿈이 아닌가 싶어 자시의 손목을 깨물어 보았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김구는 수인들에게 고개를 숙여 꾸벅 절을 했다.
그리고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에 가보니 벌써 준비한 흰옷을 한 벌 주었다.
붉은 죄수복에서 흰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김구는 맡겨 두었던 금품과
그동안 노역한 품삯을 받았다.
김구는 옥문 바깥에서 다시 한번 옥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생활이었다. 출영 나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옥문에서 가까운 박영문이나 안호연의 집으로 가보고 싶었으나,
김구가 느닷없이 나타나면 그 집안에 분란이 날 것만 같아 주저를 했다.
「제가 김창수입니다.」
하면 17년 전의 일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 동안 겪었던 고생담을 털어놔야 하는데
문제는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의 입이란 원래 방정맞아서 20년 만에 찾아온 김구에 대해 말을 만들어서
퍼뜨릴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김구의 신변이 위험해질 경우가 생겼다.
박영문과 안호연의 집을 지날 때 죄송한 마음이 들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다.
김구는 그 길로 옥중에서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을 찾아가 밤을 보내고
이튿날 전화국에가서 안악으로 장거리 전화를 했다.
「김구라고 하오.」
「선생님 옥에서 나오셨소?」
「예, 지금 차 타러 가오.」
「그러시면 제가 댁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받는 직원은 옛날 양산학교 시절의 김구의 제자였다.
경성역에서 경의선 차를 타고 신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사리원에서 내렸다.
선유진을 거쳐 여물평을 건너가며 살펴보니 전에 없던 신작로가 생겼다.
이 길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김구를 향해 오는데 그 선두에 김구의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너는 오늘 살아왔지만,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다.
「그래요?」
김구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딸이 죽다니,
이건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무척 미안한 얼굴이었다.
「네 친구들이 감옥에 있는 너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만 두었다.」
김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7세 된 아이가 무척 총명하고 심지가 깊어 죽을 때
‘나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도 하지 마시오.
아버지가 들으면 오죽 속이 상하겠소.' 하더라.」
김구는 그 말을 듣자 통곡을 했다. 모두가 헛된 인연이었다.
잠깐 세상에 나와서 호강한번 못해보고 떠난 딸이 가엾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못된 인연이로구나. 이 다음 저세상에 가서 꼭 행복하게 살아보자.」
김구는 이를 악물었다.
김구는 얼마 후 안악읍의 동산 공동묘지에가 화경이 묘소를 바라보았다.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 볼썽사납게 보여 두 손으로 잡초를 뜯어 주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로다. 온갖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서 죽게 돼 있으니
사람도 예외가 아니거늘, 사는 동안이라도 평안해져야 하는데, 화경이는 나와 인연이 없구나.」
김구는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삼촌의 말대로 시골에서 조용히 농사나 짓고,
풍파 없는 인생을 살 걸 하고 후회를 해보았으나 이미 인생이란 화살은 쏘아 던져져 있었다.
김구의 집에는 옛날 동지들, 김용제를 비롯한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희비가 교차하는 얼굴로 김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김구는 안산학교를 들어갔다.
아내 최준례를 안신여고 교원 사무를 보고 교실 한켠에 거주를 하고 있었다.
김구는 예배당에 앉아서 오는 손님을 맞았다.
김구는 안산학교로 들어갔다.
아내 최준례는 안산하교 교원 사무를 보며 교실 한켠에 거주하고 있었다.
깁구는 예배당에 앉아서 오는 손님을 맞았다.
김구의 아내의 얼굴은 무척 초췌해 있었다.
아내는 김구의 얼굴을 보는지 마는지 음식준비에 바빴다.
김구는 여기저기에 초대를 받았다.
한번은 이인배(李仁培)의 집에서 초대를 했다.
음식이 차려질 때쯤 갑자기 기생 몇 명과 악기가 들이닥쳤다.
김구는 놀랐다.
청년들이 말했다.
「선생님을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 뵈어 오늘 좀 흥겹게 놀렵니다.」
노인들은 김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젊은 사람들은 그냥 놔두고 이야기나 합시다.」
이 때 젊은이들이 김구에게 기생을 데리고 와 수배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권주가를 부르게 했다. 김구는 웃으면서 사양했다.
「내가 음주하는 것을 자네들이 보았나?」
「물마시듯 마시지요.」 하며 청년 한명이 기생의 손에 든 술잔을 받아 김구의 입에 댔다.
김구는 분위기를 깰까 생각해 술을 마셨다.
청년들이 김구에게 술을 권하는 사이, 기생들의 가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인배의 집 앞이 안신학교라서인지 음악소리와 기생들의 노랫가락이 어머니와
아내의 귀에 들렸던 모양이다.
김구의 어머니는 사람을 보내어 아들을 불렀다.
눈치를 챈 청년 몇이 김구의 어머니에게
「선생님은 술도 안 잡숫고 노인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했더니 어머니가 몸소 왔다.
어머니는 김구를 앞장세워 집으로 데려갔다.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내가 여러 번 동안 고생을 한 것이 겨우 이거냐?
오늘 네가 기생이나 데리고 술 먹는 꼴을 보려고 그랬느냐?」
김구의 어머니는 그것이 마음 상했던 것이다.
아들이 고생을 하더라도 사람답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이 보람이요
기쁨이었다.
그래서 모진 고생도 마다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출옥하자마자 기생놀이나 벌이고 있는 아들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김구는 무조건 빌었다.
「어머니 죽을죄를 졌습니다. 다시는 그런 망령된 짓을 절대 않겠습니다.」
김구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김구는 부모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이 도리는 인간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로 알았다.
김구는 부모님을 잘 모시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알았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을 어떤 일이 있어도 거역하지 않았고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어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언제나 순종하는 자세로 살았다.
김구의 아내와 어머니는 처음 고부간에 충돌도 많았다.
그러나 김구의 효심을 늘 보면서 변해갔고 김구가 체포돼 6,7년 간 감옥에서 고생을 하는 동안
일심동체가 돼 한점의 충돌도 없어졌다고 했다.
김구가 경성에서 옥살이를 한때 아내는 연동 안득은 여사와 곽귀맹 여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경제적 궁핍 때문에 딸 화경이를 어머니께 맡기고 왜놈 토지국(土地局)의 제본소에서 고된 일도
마다 않았다.
아내는 가끔 김구에게 이런 말로 마음을 상하게 했다.
여자라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서양여자가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왜냐고요, 당신 어머니의 딱한 사정과 화경이를 누가 돌봐 주겠어요.」
김구의 어머니는 집안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선지 아내의 편을 들었다.
다른 어머니와는 달랐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아내가 아들을 타박하면 같이 몰아 세웠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김구는 알만했다.
얼마나 어머니가 속 깊은 분이라는 것을 김구는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고분고분했다.
김구가 너무 심하다 싶어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처는 훌륭한 사람이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는 남편이 죽을 곳에 있는데도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는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
네 처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제처는 네 어미와는 또 다르다.
나와 너는 피가 섞였지만 네 처와 너는 갈라지면 남이다.
남이 이 집안에 들어와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는데 박대하면 쓰겠느냐?」
김구의 어머니는 속이 깊었다
비록 무식해서 글자를 모르지만 생각으로서 능히 문자를 대신하고 진리를 캐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또 김구에게 지난날 집안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네가 체포된 후 우리 세 식구가 해주 고향에 다녀와서 경성으로 가려했더니,
네 준영 삼촌이 극력 만류하더라.
김구의 삼촌 준영은 처음부터 김구를 농사꾼으로 만들어서 대나 이으려는 생각을 가졌다.
김구가 장손이기 때문이었다.
준영 삼촌은 김구가 체포된 후 김구의 어머니, 즉 자신의 형수에게 집이나 한 칸 마련해 줄 테니
세 식구가 함께 살고, 또 자신이 질부(조카며느리) 고생시키지 않을 테니 염려 말라고 했다.
「혹시 젊은 며느리 데리고 다니다가 못된 놈들에게 욕이나 보면 어쩌겠소.」
준영 삼촌은 이런 걱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의 어머니는 며느리의 정결을 한번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경성으로 갔다.
김구가 장기수로 판결이 나자 그쪽에서 자리 잡고 살면서 매일 면회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려 했으나 어디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생계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종산의 우종서 목사의 주선으로
겨우 살아왔다는 것이다.
김구의 삼촌은 이후부터 양식과 쌀을 소달구지에 싣고 와 세 식구의 먹을 것을 대주었고,
또 김구에 대한 나쁜 인상을 씻고, 정분이 두터워졌다는 것이다.
김구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니 삼촌에게 편지나 한 장 띄워라.
네 장모역시 너를 애중해하니 편지 띄우고...」
김구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면회 기간이면 매번 장모가 면회 오는 것을 보고서,
전날 처형관계로 조금 심하게 대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그래서 장모와 준영삼촌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구는 가출옥신세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관청에 신고를 해야만 해다.
한번은 안악 헌병대에 출두를 했다.
거기서는 출옥수에 대한 취업을 상담했다.
「나는 아무런 기술이 없습니다. 다만 옛날에 학교의 선생 노릇을 좀 했는데,
또 아내가 교편을 잡고 있으니 조교수(助敎授)나 하며 되겠는데 어떻습니까?」
왜놈 헌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후부터 안신학교로 나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장모는 남편 신창희와 헤어진 뒤 큰딸이 헌병보조원의 첩질을 하다가 폐렴을 앓고
쫓겨 온 큰딸과 동거를 하게 됐다.
그래서 생활할 길이 막막하던 판에 사위의 편지를 받아보고 달려왔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셈이었다.
김구는 예전 같으면 풍기 문란한 처형의 얼굴조차 대하기 싫었으나 어쩐지
그 사람들이 불쌍해졌고, 그래서 선선히 받아주었다.
마치 성경에 집나간 아들을 다시 맞이하는 아비의 심정으로 장모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형을 맞았던 것이다.
김구는 가출옥 기간이 아직도 7,8개월 남아 있자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책만 보고 지냈다.
어디를 가려면 헌병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구의 가출옥이 해제된 것은 김구의 만기형기가 끝나는 7,8개월 후였다.
가출옥이 해제되자 김구는 할 일을 찾아보았다.
그때 김용진의 부탁이 들어왔다. 분화(地名)의 궁궁(弓弓)농장에서 추수를 하게 됐는데
검사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김구가 김용진의 농장에 간 사이 해주의 준영삼촌이 찾아왔다고 했다.
준영삼촌은 말을 타고 왔는데, 점잖은 조카를 보러가면서 초라하게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남의 말을 빌려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준영삼촌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김구는 집에 돌아와 이런 말을 듣고 정초를 기해 삼촌에게 신정 문안도 하고,
선친의 묘소에 성묘를 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새해가 되었다.
그런데 초나흘 날 재종 아우 태은이가 와서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준영 당숙이 별세하였습니다.」
김구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준영 삼촌이 세상을 떠나다니,
인생사 무상함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김구는 준영 삼촌과의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준영삼촌은 술을 좋아했고, 또 주사가 심해서 친척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술을 끊었고, 분수를 생각해서 농사꾼으로 살았던 것이다.
준영삼촌은 늘 조카인 김구를 속으로 사랑했다. 김구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차라리
농촌에서 농사꾼의 딸과 혼약을 맺어 농사나 지으며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영삼촌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초에는 장조카인 김구를 볼 줄 알고 기다리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 준영삼촌이
그렇게 불쌍해질 수가 없었다.
준영삼촌은 딸은 있으나 아들이 없어서 4형제 소생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조카인
김구를 대하고 떠날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아! 인생이란 풀잎우의 이슬이라더니 그 말이 맞구나.」
다음날 아침 태운과 함께 삼촌 집에 도착해서 장례를 주관했다.
그리고 삼일 후 삼촌이 태어나 평생 동안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텃골의 동산에 묻어 드렸다.
김구는 부친의 묘소로 가서 옛날 자신의 손으로 심은 잣나무 두 개를 살펴보았다.
죽지 않고 늠름하게 자라고 했었다.
그 해에 셋째 날 은경(恩敬)을 낳았다. 김구는 안신학교에서 교사를 하는 틈틈이 추수 때가 되면
김용진의 농장에 가서 타작을 도와주고 수확을 검사해주었다.
김구는 읍내의 생활에 별다른 흥미가 없어져서 홍량과 용진, 용정에게 농촌생활을 부탁 했다.
「나는 다시는 도시에 나가지 않겠네. 농촌에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있겠나?」
「우리들 소유 중에 산천이 수려한 곳을 알선해 드리겠습니다.
거기 가셔서 농사 감농(監農)이나 해주십시오.」
김구는 몇 해 동안 추수를 감수(監收)해본 결과 가장 말썽 많고 부정의 소지가 많은
동산평(東山坪)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동산평은 소작인들의 인품이 험악할 뿐 아니라 풍토가 나쁜 곳이었다.
「몇 년간 그곳에 가서 소작인들의 악습·패속을 살펴보았네.
차라리 그런 곳에 가서 농촌개량이나 하고 싶네.」
그들은 김구가 그런 「좋지 않은 곳」에 가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바람직했지만
내놓고 권할 수가 없던 처지였다.
고소원불감청(固所願不敢請)이란 이런데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동산평은 예부터 궁장(宮庄)으로, 감관이나 소작인이 서로 짜고 주인에게 보고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가로채 실제 수확량은 많았지만 거두어들이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 습속은 몇 백 년 동안 내려왔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고쳐질 일이 아니었다.
소작인들도 수확기에 벼를 베고 운반하고 타작할 때 농산품을 빼돌렸다.
여기에 소작인을 감독하는 마름이 합세했다.
김씨 가문에서 이 농장을 매수한 사람은 진사 용승(庸昇)이었는데 단독으로 매입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고, 파탄지경에 빠졌다.
그러데 우애가 남다른 김씨의 형제들이 그 손해를 분담하고 김씨 가문의 공유로 했던 것이다.
노형극(盧亨極)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자는 동산편의 감옥, 즉 소작인을 감독하는 마름의 위치에 있었는데,
소작인들을 끌어들여 자기 집에 도박판을 벌이게 했다. 일종의 사기도박이었다.
도박꾼들에게 고리를 뜯고, 고리를 주어서 노름자금을 제공, 결국 일년 동안의 수확을 모두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였다.
도박에 응하지 않는 소작인들은 농작지를 얻기가 어려웠다.
소작인들은 한 식구 가운데, 아버지나 형이 도박하면 아이들이 망을 보는 등
콩가루 집안을 연출했다.
김구가 그곳에 자원하게 된 것은 그들의 악습을 타파할 목적도 있었다.
1917년 정사년(丁巳年), 김구의 나이 42세였다. 그해 2월 동산평으로 이사를 했다.
김구는 어머니에게
「소작인들 가운데 뇌물(농산물)을 가져오는 자가 있으면 제가 없더라도 거절하세요.」
하고 당부를 했다.
소작인들은 소작지를 더 많이 받기위해 가끔씩 닭이나 생선, 농산물 등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뇌물로서 인격을 상실하는 행위였다.
받는 자는 주는 자 모두 인간을 천하게 만드는 그 행위를 김구는 아주 싫어했다.
「당신이 빈손으로 왔다면 생각해보겠으나 물건을 가져왔으면 도로 가져가시오.」
「이건 뇌물이 아니올시다. 선생께서 새로 오셨는데 빈손으로 찾아뵐 수가 있습니까?」
「당신 집에 이런 물건들이 많으면 남의 토지를 소작할 필요가 없지 않소.
그대의 소작지는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오.」
작인들은 뇌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세상에 다 있나 하면서도 김구를 다시 한번 보았다.
「사실은 이런 관행을 전 감독관님에게 항상 해오던 것입니다.」
「앞의 감독관은 어찌했는지 모르오. 그러나 나는 다르오.」
김구는 소작인들의 준수규칙 몇 개를 만들어 알렸다. 그것은 이랬다.
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치 않음.
학령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놓은 논 두마지기씩을 더 줌.
학령아동이 있는데도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중 좋은 논 두마지기를 도로 회수함.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김구는 이렇게 규율을 정하고 동산평에 소학교를 설립했다.
교사 한명을 초빙하고, 학생 20여 명을 모집하여 학교 문을 열었다.
학교 건물이라야 보잘것없지만, 김구의 평소 교육에 대한 이념을 실현한 것이다.
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김구는 틈틈이 나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김구가 이런 규칙을 정했는데도 전(前) 감옥관 노형극과 그 형제 다섯 명은 따르지 않고
김구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노가 형제의 소작지는 평내에서 상등지였다.
그래서 김구는 노가의 소작지를 모조리 회수하겠다는 통지를 보냈다.
그리고 학부형들에게 분배시키려 했으나 한명도 경작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소작인들에게 물으니,
「노가 형제의 횡포가 심해서 그렇습니다.」 했다.
그래서 김구는 자신의 소작지를 대신 분배하고 노가의 소작지를 자신이 직접 경작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문 밖에서 김구는 부르는 소리가 들었다. 술 취한 목소리였다.
「야! 김구 놈아 나 좀 보자!」
김구는 그 자가 노형극의 동생 노형근임을 대뜸 알 수 있었다.
「낮에 올 일이지 한반 중에 무슨 일인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가는 김구의 왼쪽 팔을 힘껏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인근 저수지 근처로 갔다.
이웃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뛰쳐나왔으나, 노가의 이세에 한명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김구는 이런 무례한 놈에게는 말로 이해시키기에는 어렵고,
완력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 노가의 왼쪽 팔을 물어뜯었다.
「윽!」
노가는 물린 팔이 고통스러웠는지 잡았던 손을 얼른 놓았다.
문득 치하포 나루에서 왜놈을 격살한 생각이 났다. 그때는 김구의 나이 젊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가 마흔이 넘고, 감옥에서 보낸 오랜 고생을 했기에 기력이 쇠진돼
젊은 노가 놈에게 대항하려면 기습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노가의 뒤에는 그의 네 형제가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김구는 겁을 주느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야, 이놈들아!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모두 나와라!」
예측한대로 겁을 먹어선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다만 팔을 물어뜯긴 노형근이 씩씩거리면서
「야 김구야! 경성의 경감(京監)도 저수지 물맛을 보고 달아났다.」
경감을 노가네 형제들이 저수지로 끌고 와 위협을 했더니 도망갔다는 이야기였다.
이때 숨어있던 한 놈이,
「바람 잘 부는 날 보자.」 하고 도망했다.
몰려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김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의 행패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내 집에 만일 불이 나면 저놈들의 짓이니 명심하시오.」
노형근이 물러나자 마을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저놈들의 행패가 심하니 웬만하면 잘 지내시오. 몸조리 잘하시오.」 하고 충고를 했다.
아마도 노가형제들은 소작인들에게 평소 몹쓸 짓을 많이 했던 것 같았다.
노가에게 구타당한 상처를 김구가 내보이자
김용진 형제가 진단서를 떼어 소송을 하자고 했으나 만류했다.
나중에 노가 형제는 신변에 위협이 생길 것이 두려워선지 김구에게 백배 사죄를 했다.
그 후 김구의 농촌생활은 대략 이렇게 진행됐다.
새벽 일찍 일어나 소작인이 집을 일일이 찾아가 늦잠 자는 게으른 자들을 깨워
집안일을 하도록 했고, 집안이 더러운 자는 청소를 시켰다.
땡감인 마른풀을 거둬오게 했으며, 짚신 감기와 자리 짜기(돗자리, 멍석)를 장려했다.
그리고 소작인들의 근면부(勤勉簿), 즉 근무성적표를 작성, 추수철에 농장주의 허가를 얻어
부지런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고 나태한 자에게는 경작권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종전에는 추수 때 차작 마당에서 채무자가 벌떼같이 나타나 곡물 전부를 가져가고,
소작인들의 대부분은 타작기구만 들고 집으로 갔다.
노름빚과 술빚, 그리고 외상값들로 인해 일년 동안 헛농사를 지은 셈이다.
평생을 이렇게 보내는 소작인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김구는 이들의 사정을 감안, 악습을 뿌리 뽑아 주었다.
김구가 감독을 맡은 후 이런 일은 없어졌다.
농가의 부인들은 김구를 은인처럼 대했고 도박의 풍습은 사라졌다.
그때 장덕준이 재령에서 명신여고 소유 장토를 관리했는데 장덕준은
일본 유학 시 보고배운 농촌 개발을 함께 하기로 의견을 보았다.
또 동지 지일청(池日淸) 역시 함께 농천 개발에 힘을 합쳐 나가니 모든 것이 잘 풀렸다.
당시 김구가 한 일은 농촌근대화 운동이었다.
이렇게 좋은 일만 김구에게 있던 것은 아니다.
그해 딸아이 은경이가 사망했고, 폐렴중증이던 처형역시 세상을 떠나 그 땅에 묻었다.
김구는 자식 복이 없음을 한탄했다.
처형은 젊은 시절 몸을 함부로 굴려, 그 여독이 심한 탓도 있었지만 죽음을 재촉한 것은
그 성격 때문이었다.
첫 남편 신창희와 결혼생활을 계속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람의 일생이 그렇게 허망한데 사랑과 미움이 한갓 시간 속에 함몰되는 것 같아
인생무상을 느꼈다.
1918년 무오년 11월, 김구의 나이 43세 때 장남 인(仁)이 태어났다.
인이는 김구 뿐만 아니라 아내와 여러 친구들이 바라고 바라던 아이였다.
김구는 독자라서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필요했다.
그런데 40여세가 되어 인이가 태어났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김용제는 인이가 젖을 물고 있을 때,
「인이가 장가갈 때 내가 후행(後行)하겠습니다.」 하며 기뻐했다.
이름은 김용승 진사가 지었는데 처음 김린(金麟)이란 것을,
김린도 왜의 민적에 등록된 까닭에 인(仁), 즉 어질 인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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