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28. 기약 없는 감옥생활

오늘의 쉼터 2012. 12. 30. 18:56

28. 기약 없는 감옥생활

 

 

 

 

 

김구와 동지들은 며칠 후에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40여명이 넘는 동지들이 한꺼번에 들어가니,
썰렁하던 감옥이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지옥에 가서도 아는 사람이 많으면 지옥이 아니란 말도 있듯,
지옥보다 더 나은 것도 없는 경성감옥에 동지들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도
고통중의 한 가지 낙이었다.
잡범이면 몰라도 죄수들은 거의가 「머리에 하늘을 담가둔」깨어있는 사람들인지라
외롭거나 슬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바깥세상을 구경하기에는 틀린 것 같아 가족들의 다정한 얼굴을 아예

지워 버리려 애썼다.

  단기적인 5년 이하는 바깥 세상에 연을 댈 수 있으나 7년 이상은 아무래도

살아 돌아가기 힘들 것 같아 김구는 체념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수칙을 만들었다.
그래야만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메꿀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내 비록 육체적으로는 얽매어 있지만 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왜놈이 나쁘다.
 왜놈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김구의 동지들은 대부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육체적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거의 비슷했다.
 김구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15년 형을 모두 살고 나온다면 이미 젊음은 사라져 버리고 노쇠한 몸으로
편히 연명이나 할 늙은이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과연 15년 후에 출감할 수가 있을는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 감옥살이 끝에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옥중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는 동지들은 대부분 처와 자식이 없었다.
유독 김구 만이 화경이란 두 살배기 딸이 있을 뿐이었다.

  김구는 체포된 이후 자신의 심경에 변화가 왔음을 느꼈다.
이전에는 성경이나 학습교재를 들고 교실이나 강단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을 하라고 권고했는데
감옥에 들어온 이후 이런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강퍅한,
왜놈을 증오하는 마음만 가슴속에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그 첫 번째 증오감은 경무 총감부에서 와타나베란 놈에게 신문 받을 때였다.
그 놈은 17년 전 김창수로 있을 때의 기억을 못했다.
그런데 자기 가슴에는 X광선을 달고 있다면서 출생이후부터 지금껏 김구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투시하고 있다고 했다.
만일 김구가 거짓말을 한다면 쳐죽이겠다고 겁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형사 놈들에게 신문을 받을 때마다 고문을 당했을 때,
김구는 상대가 비록 점령국의 신문관이라 할지라도 겨자씨처럼 작게 보였다.

「이놈들아! 너희 놈들은 우리나라를 통치할 자격이 없다.
 일시적인 힘으로 억압할 수는 있지만 영국 통치는 어림도 없다.」

  김구는 이 생각을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옥에서 살아남는 것은 왜놈에 대한 적개심뿐이었다는 생각이었다.
고등관이라 자처하는, 모자에 금줄을 서너 개씩 붙인 놈의 말은 더욱 김구의 비위를 거슬렸다.

 


  “천황이 재가한 법령이란 신성불가침이다.
조선인민도 천황의 어린 백성(赤子)이라 일본인과 조금도 다름없이
대접받는 행복을 누릴 것이니 공이 있는 사람은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은 벌을 주라는 법령대로 관리는 공평히 시행한다.”

  고등관은 또 자국(自國)의 법률이 민주적이고 선진국이라는 걸 은근히 암시했다.

  “구한국시대(대한제국)에는 관리들이 자기들에게 좋게 보인 사람에게는
 죄가 있어도 가볍게 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겁게 처벌했다.
그러나 우리의 행형(行刑)제도는 인민 모두에게 평등하다.”

  김구는 그 자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며칠 후에 따지듯 물었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는 어떤가?
 안악에서 선생 노릇을 할 때 나는 급료의 많고 적음을 불문에 부쳤다.
오직 성심성의껏 교육에 헌신했다.
더구나 내게는 그동안 아무런 범죄사실이 없었다.
상 받은 일만 할 내게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해줄 수 있는가?”

  그러자 그 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너는 그렇게 말할는지 모르나,
너의 동지란 자들이 범죄사실을 자백했을 때 너는 두목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것이 증거다.”

  “관리로서 법률을 잘못 적용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 그 놈은 자존심을 상했다고 생각했던지 김구를 마구 매질했다.

  “전답을 사들인 지주는 뭉우리돌(모난데 없이 둥글둥글한 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식 아닌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다.”

 


  왜놈 고등관이 김구를 뭉우리돌로 인정한 것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김구는 감옥에서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일이란 왜놈의 법률을 무시하고
왜놈(倭魔)을 희롱하는 것을 낙으로 삼기로 했다.
그것도 일종의 독립운동의 다른 방편으로 생각됐다.
왜놈의 자존심을 능멸하고 문화국민의 체하는 왜놈들을 개돼지 취급해주는 것
역시 죄수의 기쁨이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라 생각했다.
서대문 감옥으로 옮길 때 옥관(獄官)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네가 입던 옷을 벗어 집물고(集物庫)에 봉(封)하여 두는 것처럼 네 자유까지 맡겨둬야 한다.”

  한마디로 죄수인 이상 관리에게 절대 복종해야한다는 의미였다.
간수가 김구의 두 손에 수갑을 채웠는데 너무 꽉 잠가
그 이튿날 손목이 퉁퉁 부어 끔직한 형상이 되었다.
다른 간수가 이를 보고 이유를 물었다.

  “그건 관리가 더 잘 안다.”

  간수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는 참 어리석다. 수갑을 풀어달라고 하며 되잖았나?”

  김구가 대답했다. 일종의 항거였다.

  “전옥(典獄)의 훈계에, 모든 건 관리가 알아서 한다고 했다.”

  “관리가?”

  “그렇다.”

  전옥은 김구의 말속에 독기(毒氣)와 함께 적개심이 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인지 김구의 얼굴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의사가 와서 치료했으나 손목뼈까지 금속이 박혀 들어가 나중에 부스럼이 생겨
터지곤 해서 훗날까지도 손목에 상처가 남게 되었다.

 


  함께 수감된 동지들은 점차 감옥의 법률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 고정화는 달랐다.
고정화는 용어부터 험상궂은데다 마음까지 오기가 서려 관리들을 몹시 괴롭혔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음식을 먹다가 밥알에 독이 섞여있는 것을 보고 땅에서 모래흙을 주워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를 밥과 섞어 싸갖고 전옥에게 찾아갔다.

  “1년 징역을 종신형으로 고쳐 달라.”

  “왜 그런가?”

  “사람이란 곡물을 먹고산다.
그런데 내 밥그릇에서 골라낸 모래가 밥의 분량과 같아.
이것을 1년 동안 먹으면, 아니 일년도 못돼 죽게 된다.
기왕 죽을 바에 종신징역을 살다 죽는 것이 영광이 아닌가?”

  전옥은 얼굴이 붉어졌다.
죄수에게 이런 하찮은(?)일 갖고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 분했다.
그래서 식당담당 간수를 불렀다.

  “야, 이놈아! 밥에다 모래를 섞으면 어떡해!”   

하며 다시는 밥 짓는데 모래를 섞지 않도록 했다.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감방의 동료 수인(囚人)들이 이(蝨)를 열심히 잡는 것을 본 고정화는
 이(蝨)를 모두 거둬들여 뒤 씻는 종이에 싸놓고, 전옥면회를 했다.

  “전옥장의 덕으로 돌 없는 밥을 먹게 돼 고맙소.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겼소.”

  전옥은 이 자가 또 무슨 일로 트집을 잡으려는가 눈치를 살피다가,

  “뭔가?”

  “바로 이것이요.”

 


  고정화는 구린내가 나는 종이에 싼 것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펴보라고 했다.
전옥이 펴보자 살이 통통하게 찐 까만 이(蝨)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죄수들의 옷에서 체포한 것이오. 온몸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소.
구한국시대에는 수인의 집에서 의복을 가져다 입었소.
그런데 문명국이라 자처하는 대일본국의 감옥소가 이래서야 되겠소?”

  전옥의 말대로 각 감방에 새로 만든 의복이 지급되었고,
묵은 옷은 증기기계로 소독해줘 다시는 이 잡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서대문 감옥은「경성감옥」으로 불리었다.
이 감옥에 수용된 수인은 약 2천명 정도였는데 대부분이 의병이고,
 나머지는 절도와 사기 등 잡범들이었다.
김구는 옥중의 대부분 수인이 의병이란 말에 다행으로 생각했다.
김구는 이들이 감옥의 선배이고 의병장이나 참모장을 했기 때문에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감방에 들어가서 김구는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수감동기를 물어보았다.

  “난 강원도 의병 참모장이요.”

  “경기도 의병 중대장 아무개요.”

  탑골공원 같은데서 수인사를 하게 되면 최하가 동장(洞長)이란 말이 있듯
김구가 인사할 사람 가운데 졸개나 병졸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의병 참모장이나 의병 중대장이란 자들의 행동거지가 쩨쩨하고,
 파렴치범 같은 행위에 김구는 저으기 실망했다.
이들은 의병(義兵)이란 말의 뜻도 모르고 있었다.
또 국가가 무언인지도 몰랐고,
손에 쥐어준 무기를 들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략질한 일을 의병일과 견주어 자랑했다.

 


김구가 13호방으로 들어가자 사역 나갔던 죄수들이 들어와 의복을 갈아입었다.
그중 한명이 김구에게 거만하게 물었다.

  “신참(新囚), 자세히 인적사항을 대야지.”

김구는 공손하게 일일이 대답했다.
그러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듣기에 거북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신참은 똥통을 향해 넙죽 절을 하시오”

  그러자 곁의 자칭 의병 중대장이란 자가 한마디 더 거들었다.

  “생김생김이 강도질 할 때는 겁났겠는데, 여보! 강도질할 때 이야기나 하슈.”

  김구는 상대가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김구의 면상을 발로 툭툭 치면서 능멸을 했다.
명색이 의병 대장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도적인가.
사람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할게 아닌가.
신문할 때 대답을 하지 않았으면 형이나 받지 않지.”

  김구는 생각 같아서 벌떡 일어나 모조리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사람같이 않은 동물들에게 화를 낸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옛날 한신이 다리목에서 걸림 패들의 바짓가랑이를 지나가던 생각을 하며 애써 참았다.

  얼마 후에 조선인 간수가 와서 물어다.

  조선인간수는 김구의 심정을 헤아린다는 듯이 친절히 말했다.

  “56호는 구치감에서 나왔소?”

  56호는 김구의 수인번호였다.

  “그렇습니다.”

  “애석한 일이오. 운수가 불길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이나 편하게 가지시오.
여기서는 건강이 제일 중요하오.”

 


  간수의 말에 진정이 깃들어 있었다.
역시 동족(同族)이라 다른 것 같았다.
조선인 간수가 나가자 이번엔 일본인 간수가 와서 김구의 명패와 얼굴을 보고 수군거렸다.
 죄수들이 조선인간수의 친절한 말투에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조선인 간수의 성씨가 박씨인 것 같았다.
얼굴에 털이 원숭이처럼 붙어 산적 졸개 같은 자가 누런 이빨을 들이대며 이죽거렸다.

  ‘박 간수 나리가 신 참수에게 잘 대하는 것을 보니 뭐가 있나보군.
관리가 죄수에게 공대를 하다니.....“

  곁의 놈이 한마디 거들었다.

  “박 간수 나리의 친척어른이겠지.”

  이러자 한 수인이 그 말들을 제지하고 점잖게 물었다.

  “신 참수는 박 간수 나리와 어떻게 되오?”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연관이 없소.”

  그러자 이번에는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이전에 높은 벼슬을 한 적이 있소?”

  “벼슬한 적 없소.”

  김구는 단호히 끊었다.

  이때 또 다른 수인이 끼어들었다.

  “양기탁을 아시오?”

  “짐작은 가오.”

  그러자 아니꼬운 듯이 지껄여댔다.
이런 곳에서는 자기보다 월등한 신분의 수인에게 갖는 적대감이 대단했다.

  “이 신 참수 가만히 보니 국사범(國事犯)인 것 같군.
3일전「대한매일신보」사장 양기탁이란 신참수가 들어왔고,
공범으로 이름 있는 선비들이 역(役)을 졌다고 간수 나리가 말하는데,
저 아니꼽고 역겨운 놈! 야 이놈아, 나도 허왕산(許旺山)밑에 있던 참모장이야.”

 


  그자는 젊잖게 나가다가 별안간 화를 냈다.

허왕산(許蔿)은 김구도 잘 알고 있었고 평소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허위의 부하라는 말에 김구는 여간 마음이 언짢지 않았다.
저런 낭인패가 허왕산의 참모장이라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왕산은 부하를 잘못가진 것이다.

  “똑바로 굴어”

  그 자는 왕산을 핑계로 함부로 대했다.
진정 왕산의 부하라면 저렇듯 버르장머리 없고 무례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구가 수감생활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 중 감동 깊은 이야기가 하나있다.

  이강년(李康年)선생과 허위 선생이 왜놈에게 체포되었다.
신문과 재판을 생략하고 사형당할 때까지 왜적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순국했는데,
그 후 서대문감옥의 우물 자래정(自來井)이 허위선생 사형 후부터 벌겋게 돼
폐정(廢井)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선죽교에서 조영무라는 군졸에게 쇠방망이로 맞아죽은
정몽주의 피가 몇 백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고사와 같았다.
 김구는 그분들과 자신을 견주어 보았다.
허위는 김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네가 보는 바처럼 옛날 의병은 무식한 것들이고 국가에 대한 의무도 이해하지 못하나
 너는 일찍이 고능선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 않았느냐.”

  고능선 선생은 김구에게「삼척동자라도 개나 말을 가리켜 절을 하게 하면 불응한다는 것」
을 가르쳤다. 그런데 김구는 왜놈간수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다.

 


「食人之食衣人衣 所去平生莫有違」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만들어준 옷을 입지만

  품은 뜻은 어기지 말아야 하느니라

 

 

 

  김구의 뇌리 속에는 선생의 준엄한 꾸짖음이 들락거려다.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 입지 않았어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왜놈이 주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는지 아는가.
의병이든 아니든 10년 을 살게 하면 그 가치로 의병임을 인정할 수 있지 않는가.
남아는 의(義)로 죽을지언정 구차히 살지 않는다고 너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느냐.
지금 너의 정신은 깨어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과연 17년 후에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는가.”

  김구가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심란할 때, 안명근이 이런 말로 심정을 토로했다.

  “형, 곰곰이 생각하니 이곳에서는 하루 살면 하루가 욕되고 10년을 살면
10년이 욕되는 것 같소.
차라리 굶어죽어 이름이라도 남길까 하오.”

  김구는 이 말이 듣던 중 반가웠다.
김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해보시오.”

  안명근은 그날부터 단식을 하게 됐다.
자기는 굶고, 자기 분량의 것은 다른 수인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4, 5일을 단식을 하자,
그는 탈진되어 운신을 못했다.
대소변을 보려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 놈은 왜 기운이 없소?”

  “배가 아파서 그렇소.”

  “밥을 먹지 않소?”

  “소화가 안 되오.”

  곁의 김구가 대신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런데 눈치가 밝은 것이 왜놈간수들이었다.
간혹 의병장들이 왜놈들이 주는 밥을 더럽다고 거식(拒食)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한 왜놈간수들은 안명근을 병원으로 옮겨 진찰을 받게 했다.
그러나 아무런 병명이 없었다. 김구는 이 방법이 쓸데없다는 생각에서 안명근에게
 계란을 풀어 억지로 먹이고 원기를 차리게 했다.

  “할 수 없이 금일부터 먹겠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부처님도 감옥에 오면 어쩔 수 없소. 자중하시오”

  김구가 위로했다. 김구는 모처럼만에 가짜 의병장들이 아닌 동지들을 접했다.
이재명의사의 친구들도 끼어있었다.
김정익, 김용문, 박태은, 이응삼, 전태산, 오복원등이 이재명의 친구들이고
안중근 의사의 동지로서는 우덕순이 있었다.
이들은 사이비 의병장들에 비하면 모두가 봉황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 가운데 김좌진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무관학교를 나운 무인(武人)이었는데 국사범으로 체포당했다.
그는 점차 옥중생활에도 취미를 갖게 되었고, 김구와도 의기가 투합 되었다.
김구가 신참수로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감옥 안이 벌집 쑤신 듯 소란해졌다.
왜놈들이「뭉우리돌」을 줍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1,2차로 나누어 벌였는데 1차는 황해도 안악을 중심으로 하여
40여명의 애국지사를 타살, 징역, 유배의 세 종류로 나눠 척결했다.
2차는 평안도 산천을 중심으로 애국신사를 일망타진 105명을 검거 취조했다.

 


  왜놈들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600여명을 검거했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했는데 이를 일컬어 ‘105인 사건’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위 보안사건으로 2년 형을 살고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유배형에 처해진
이승훈까지 다시 얽어놓고 신문을 했다.
김구와 김홍량은 징역 15년에 2년을 합해 17년이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간수가 김구를 데리고 면회소로 갔다.
누가 왔는가 기다리고 있자니 찰칵하고 뚜껑이 열렸다.
거기에 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근 일곱 달 만에 면회 온 어머니였는데 김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으려 했는지 의연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장하다. 나는 네가 평안 감사하는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딸)까지 데려왔는데 여기는 한사람밖에 면회가 안 된다더라.
우리 세 식구는 무고하다.”

하며 신변 사항을 걱정스럽게 물었다.

  김구는 공연히 분기가 솟았다.

  “저렇게 의연한 기질의 어머니가 개만도 못한 간수 놈에게 아들 면회시켜달라고
사정한 것을 생각하면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김구는 어머니에게 오히려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피붙이들은 면회를 오게 되면
서로 울다가 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아들이 징역17년을 선고받고, 옥중 귀신이 될지도 모를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의연하다니 참으로 강인한 분이라 생각되었다.

 

김구는 나중에 이렇게 어머니를 회고했다.

  “나는 실로 말 한마디 못했다. 그러다가 면회구(面會口)는 닫히고 어머님은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 뿌리가 뵈시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가처(家妻)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나의 친구들도 주의를 주어 드렸을 듯 하나 급기야 대면만하면 울음을 참기가
극언할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김구의 옥중생활은 모두 기록하기가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여기서 불편하다는 말의 의미는 복잡다단하고 번거롭다는 뜻을 말한다.

  우선 감옥에서는 의식주(衣食住)가 가장 큰 문제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여러 명이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만 갖고도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더구나 좁은 공간이상으로 제한된 자유 때문에 더욱 문제가 생긴다.
또 수인(囚人)들의 사고방식과 출신, 범죄 종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인격」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바깥에서는 존경받는 의병장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서는 파렴치범에게 괄시를 당하고 때로는 구타까지 당하니
그 심정을 참아야하는 고통이 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다.

  김구가 수인생활 할 때의 수인들은 판결을 받기 전 미결수(未決囚)로 있을 때는
요즘과 같이 자기 옷을 입는다.
그러나 형량이 선고돼 기결수가 되면 붉은 옷을 입게 된다.
붉은 옷은 조선 복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입동(立冬)시기부터 춘분까지는 솜옷을 입히고 춘분에서 그해 입동까지는
홑옷(솜을 뺀)을 입혔다.
그리고 병든 수인에게는 흰옷을 입혔다.

 


  식사는 하루에 세끼였는데, 그 재료는 각도(各道)에서 가장 값싼 것들을 선택,
그래서 감옥마다 음식이 똑같지 않았다.
서대문 감옥이라 불리 우는 경성옥에서는 콩이 5할, 좁쌀 3할, 현미 2할로 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음식은 8등급으로 분류했고 250문을 기준으로 2등까지 문수를 늘려나갔다.

 

  차입되는 사식은 감옥바깥의 식당에 신청을 한다.
식당 주인은 수인친족의 부탁을 받아 배식시간마다 밥과 한두 가지 반찬을 가져오면
간수가 검사를 한다. 그리고 일자(一字)박은 통에 다식(茶食)판에 다식 찍어 내듯 박아서
분배하는데 사식을 먹은 수인들은 따로 먹게 했다.

  식사시간에는 밥과 찬을 똑같이 분배한 후 고두례(叩頭禮)를 시킨다.
고두례는 머리 숙여 감사한다는 표시이다.
수인들은 호령에 좇아 무릎을 꿇고 무릎위에 양손을 단정히 얹어놓고 머리를 숙인다.

  “모도이!”

모도이는 머리를 들라는 뜻이다.

  “키반!”

  키반이란 밥 먹으라는 용어인데 간수는 이렇게 일갈한다.

  “너희들이 먹는 식사는 천황께서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이다.
머리를 숙여서 천황께 예를 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라.”

 


  김구는 수인들이 경례라는 호령을 간수가 할 때 마다 가만히 보니 무어라고
입속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오래된 수인에게 물었다.

  “입속말이 뭐요”」

  그러자 수인이 이렇게 답했다.

  “보아하니 먹물깨나 든 사람 같은데, 당신일본 법전 못 보았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져 각 죄인을 방면한다고 쓰여 있소.
그래서 수인들은 어서 빨리 천황이나 황후를 하느님이 데려 가소서, 하는 말이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김구는 그날 이후부터 「노는 입에 염불」하는 식으로 식사 때마다,

「내게 전능을 베풀어 주소서. 동양의 대 악마 왜 황을 내손에 죽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이야 누가 알리도 없고 말릴 사람도
있을 리 없는 것이 아닌가.

 

  수인들 가운데 간혹 감식 벌(減食罰)을 받는 자가 있었다.
감식이란 밥을 줄이는 벌이다. 내 몫의 밥을 남에게 불쌍하다고 주거나
남의 밥을 얻어먹다가 간수에게 발각당할 때 3일 또는 7일간 감식을 당하는데
조금 심하면 자기 몫의 3분의 2, 덜하면 2분의 1을 감식한다. 감식 벌을 당하는
죄수는 간수가 마구 구타를 한다. 감식역시 징벌 가운데의 하나였다.
 김구는 이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붉은 옷을 입어 죄수이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 나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이 정한 신부민(新府民)이 아니라 나는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김구는 왜놈의 법을 어기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구는 세 끼 식사 면에서는 남보다 훨씬 나았다. 하루에 한끼,
또는 두 끼의 식사를 다 채우니, 자연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을 수가 있어서
건강에는 큰 결함이 생기질 않았다.
그래서 곁의 수인에게 간수 몰래 나눠주곤 했다.
처음에 먹을 때 곁의 수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면 그 사람을 알아차리고
빨리 자기 분량의 밥을 먹은 후 김구 앞에다가 밥그릇을 놓는다.
밥그릇을 그에게 주면 간수 놈은 김구가 밥을 벌써 먹고 앉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인들이란 거지 근성이 있어서 열 번 은혜를 입고,

한번 섭섭하게 대하면 그 즉시도 욕설을 퍼붓고 난리를 친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소. 나가서 꼭 보답하겠소.”

  그러다가 사식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라도 하면 얼굴색이 달라지고 눈알을 부라린다.

  “저 놈이 네 의붓아비냐? 효자손 세우겠다.”

  그러다 보면 김구에게 밥을 한술 얻어먹은 자는 김구를 편들고 욕설을 하다가

간수에게 발각돼 함께 벌을 서게 된다.
지나치니 친절은 오히려 화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은 이곳에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곳에 수인들이 김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은 함께 입감된 동료들이 모두 지식인이고 일어에 능통했으며 따라서
 왜놈들에게 큰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그 동지들이 김구를 존경하는 것이었다.
수인들은 임시로 신문할 때 그 동지들이 통역을 맡았기에 아무리 사나운 수인이라도
통역에게 밉보이면 불리해질까봐 고분고분했다.
또 김구가 밥을 다른 사람에게 자선하는 것을 보면 그의 앞날에 기대를 걸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수인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은 왜놈의 간수이지만 정신적으로 수인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김구와 그 동지들이었다.

 


  김구의 동지들은 사이비 의병이나 의병의 졸개들과는 품행이 달랐다.
그리고 인격 면에서도 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김구의 숙소는 물론 감방이었다.
왜놈의 다다미(草席) 3장반에 해당하는 방안에는 10여명, 때로는 20여명을 몰아넣어
돗데기 시장을 방불케 했다.
앉아있는 시간에는 수인번호순으로 1열, 2열, 3열씩 종횡으로 앉아있는데
저녁을 먹은 후에는 서적도 보고, 문맹(文盲)자들은 서적대신 이야기로 때운다.
그러나 서적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읽지 못하게 한다.

 

  죄수들끼리 말소리가 들리면 간수가 달려와 무슨 말을 하였다.
범인을 잡아 쇠창살 바깥으로 손가락을 내밀게 해서 때려 주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밤 이방 저 방에서「어이쿠 어이쿠」하는 비병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리 난폭하게 구나하고 간수를 짐승 취급 했지만
자주 보니 신경이 둔해졌다.

  왜놈이란 원래 신뢰할 수가 없어서 앞뒤 말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김구는 감옥에 들어와 더욱 실감하게 됐다.

  그것은 장덕준(張德俊)의사 사건이었다.
장덕준은 김구가 보강학교 교장이었을 때 교사로 있었다.
그는 1920년 동아일보에 입사, 기자로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승리 후 일본군 상황을
취재키 위해 만주로 갔다.
그는 그해 왜놈들이 독립군이나 평민들이나 가릴 것 없이 잡히는 대로 사건을 조작해
처형하는 것을 보다 못해 왜놈대장에게 엄중히 항의했다.
왜놈대장정도면 졸개와는 달리 인격이 있겠거니 해서였다.
왜놈대장은 장덕준의 신분을 생각해서 겉으로는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곧 시정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런 후 왜놈 대장은 졸개를 비밀리에 배치, 체포하여 장덕준을 암살했다.

 김구는 평소 형제처럼 지내던 최명식과 오래간만에 회포를 풀어 보리고 했다.
그때 최명식은 옴(疥)방에 격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김구는 옴을 만들어 감옥의에게 보여 같은 방에 지내도록 계획을 짰다.
감방에서 옴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가느다란 철사의 끝을 더욱 갈아 뾰족하게 만들어 둔다.
그러다가 의사가 각 감방을 돌아다니면서 병수(病囚)를 진찰하기 30여분 전,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콕콕 찔러두면 찌른 자리가 옴과 같이 솟아오르고
그 끝에서 하얀 물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지 옴으로 보게 된다.

  “옴병 올랐소. 이것 보시오.”

  감옥의가 김구의 손가락을 보니 틀림없는 옴 병이었다.
옴 병에 걸린 것은 잘 알리지 않는데 그것은 옴 병통에 들어가기 싫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구는 최명식이 옴 방에 있기 때문에 옴 환자를 만든 것이었다.
전옥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로 김구는 옴 방으로 전방되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말썽이 생겼다.
너무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둘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이때 사토(佐藤)란 간수 놈에게 발각이 되었다.
사또는 두 사람에게 다가오더니,

  “누가 먼저 말했나?”

하고 말했다.

  “내가 먼저 했소.”

김구가 나섰다.


그러자 사토는 창살 밖으로 나오게 하더니 김구의 몸을 가리지 않고 난타했다.
그때 몇 있던 상처로 왼쪽 귀의 연골이 상해 봉충이(짝짝이 귀)가 되어 평생 동안
 고생을 하게 됐다.

  “하나시 햇소데 다다귀(조심해 때려 줄거야.)”

  사토 간수는 최명식에게 이렇게 주의를 줬다.

  김구가 그때 전방한 이유는 또 다른데 있다.

  감방에 수인의 수가 너무 많아 앉았을 때는 마치 그릇에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 되었다가
잠을 잘 때는 한사람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면 다른 사람이 머리를 서쪽으로 두어 착착 모로 눕고,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선다.
그리고 좌우에 완력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발로 먼저 누운 사람의 가슴을
힘껏 밀어 붙는다.
이때 드러누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어이고 뼈다귀 부서진다!”

  그러나 미는 쪽에 공간이 생긴다.
서있던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오게 되고, 몇 명이든지
그 방에 있는 자가 다 누운 뒤에 밀어주던 자가 눕는다.
마치 방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방을 위해 있는 것과 같다.
힘껏 밀어낼 때는 사람의 뼈다귀 부서지는 소리인지 방이 늘어나는 소린지 우두둑 소리에
소름이 돋곤 했다.

  “야, 이놈들아 좀 조용해!”

간수는 악을 쓰면서 들여다본다.
김구는 노쇠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끼어서 죽는 광경을 여럿 보았다.

다음은 김구가 ‘백범일지’ 자세히 적은 감옥 풍경이다.

 


  종일 노역을 하던 수인들이므로 그같이 끼어 서로 잠이 든다.
첫 번 누울 때는 수남자(首南者)측은 면북(面北)모로 눕고,
수북자(首北者)측은 남면이와(얼굴을 남쪽으로 향해 누운)하고 잠이 들었다가도
가슴이 답답하여 잠이 깨면 방향 전환하자는 의사가 일치하며 남면 측은 북면,
북면측은 남면으로 돌아눕는다.
그는 고통을 바꾸는 것과 구비(口鼻: 입과 코)를 마주 대고 호흡을 할 수 없음이나
잠이 들 때 보면 서로 키스하는 자가 많고 약자는 솟구쳐 올라 사람위에서 잠을 자다가
밑에 든 자에게 올리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날을 밝히는 것이 옥중 일야(一夜)이다.

  옥고(獄苦)는 하동(夏冬)양절이 우심하니 하절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발하여 서로 면목을 분간 못하게 된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이 되면 방내로 물 조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하절(여름)이다.

  동절(겨울)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면금(솜이불)4개를 들여 주는데 턱밑에서
겨우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대반(大半)도창이 나고 귀와 코가
얼어서 극히 참혹하고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나서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

  간수 놈들의 심술은 감방에서 무슨 말소리가 났는데 누가 말을 하였나 물어서 말한 자가
자백을 않고 동수(同囚)들이 누가 말했다는 고발이 없는 때는 하절에는 방문을 폐하고(닫고)
동절에는 개하는(여는) 것이 감시의 묘방이다.

  감옥생활에 제일 고생을 더하는 자는 신체장대한 자이니,
내 키가 5척 6촌인즉 중키에 불과하나 잘 때에 종종 발가락이 남의 입에 들어가고
추위도 더 받는다.
나는 노쇠자(늙은이)가 흉골이 상하여 죽는 것을 여러 명 보았다.

 


  그놈들이 내게 대하여는 유달리 대우를 하는데 복역시킨다고 말만하고 실지는
 복역을 아니시키고 서대문 감에 가서도 백일동안을 수정(수갑)을 채워두기 때문에
그같이 좁은 방에 두 손을 묶어 놓아서 잠자리에 너무 고통이 되고 동수(同囚)들도
잠결에 나의수갑이 몸에 닿으면 죽는다고 야단이니 좀더 넓은 방에 거처할 생각으로
그리하여 획계(劃計)가 맞았으나 모처럼 이야기를 하다가 이 봉변을 당한 것이다.

 


  행동의 구속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잠을 깨도 함부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반드시 일정한 시간을 지켜서 일시에 구령에 맞추어 일어나게 했다.
간수들이 각방을 오가며 수인들을 끊어 앉힌다.

  “기오츠케!”

  간수 놈이 소리를 지르면 수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기오츠케는 일본말로 「차렷!」이다.
간수가 명패를 들고 수인의 번호를 부른다.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아침 점호인 셈이다. 자기 번호를 부르면
「하이!」하고 대답해야한다.
인원파악이 끝나면, 잘 때 입었던 옷을 꾸려놓고 수건 한 장씩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알몸에 맨발로, 멀면 100보, 가까우면 50보 이내의 거리를,
천천히 손 활개도 못 피고 벽돌 한 개씩 펴놓은 것을 밟으니 공장으로 향한다.


  거기서 일복을 갈아입고, 또 열을 지어 쪼그려 앉힌 뒤 수효를 점검하고 세면을 시킨다.
아침밥을 먹이고 나서는 노역(勞役)을 시작하게 되는데, 노역이라는 것이 간단한 철공,
목공, 직공, 피복 공, 보석(寶石), 권련 갑(담배)제조, 새끼 꼬기, 김매기, 빨래, 밥 짓기 등이었다.

보석(寶石)이란 금은을 세공하는 기술이 아니라 깔개나 멍석같은 자리 용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수인들 가운데 간수의 눈에 든 사람이거나 모범수의 경우 내감(內監), 청소부(소제부),
병동의 간호부, 취사장의 취사부로 기용했다.
내감이란 감옥안의 잡다한 일을 맡아서 하는 잡역을 말한다.
 이런 일에 뽑혀 직책을 맡은 자들은 대우도 좀 후하고,
간수로부터 인간적 대접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통도 덜했다.


  감옥안의 구속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수인들의 심성도 강퍅해 지기 마련이다.
가령 횡령이나 사기 같은 죄로 들어온 자라도 감옥 안에서 절도나 강도 같은

죄를 연구해서 만기출옥 후 다시 중형을 받고 들어오는 자들이 가끔씩 있다.
김구가 있던 서대문 감옥에는 열대의 진귀한 보물들이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함께 투옥되었을 때 이국의 진기한 서적을 구입해서
5,6년 간 가옥의 수인들에게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키는 방도를 강연했던 것이 그것이다.


  노역이 없는 날,
서적고(書籍庫)에 쌓인 각종 책들을 각방에 들여보내 읽게 하는데 김구가 인상 깊었던 것을
이 박사(이승만)의 손때가 묻은 ‘광학유편(廣學類編)’, ‘태서신사(泰西新史)’등을 접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그 내용보다는 이박사가 어떻게 생긴 분인가 하며 얼굴을
그려보기도 했고 그저 반가운 생각만 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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