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불은 꺼지고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거나 위기에 처할 때는 많은 지사와 협객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춘추(春秋)시대의 군왕(君王)들과 군왕을 사이를 오간 지사와 협객이 하나둘이 아니었거늘,
그들은 하나같이 군왕을 중심으로 자신의 포부를 펴본 적이 있던 반면에, 우리의 경우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몰린 한말, 수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나섰다.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을 이른바 보호국으로 만들고 통감정치를 실시한 데 이어,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후부터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고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서둘렀다.
1910년 6월 일본 각의는 병합후의 대한제국 총치 방침을 결정하고,
7월 12일 조선통감으로 데라우치를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합방공작을 진행토록 했다
매국5적과 일제 침략자는 순종황제를 협박하고 조인을 강요했으나 끝까지 하지 않았다.
데라우치는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공상대신 조중웅을 통감 관저로 불러 합방조약의
구체안을 밀의하고, 18일에는 이를 각의에서 통과시킨 다음,
22일 순종황제 앞에서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한 그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 완료했다.
조인 사실을 1주일간 비밀로 부쳤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를 날인케
함으로써 이른바 칙유와 함께 합방조약이 반포되었다,
흔히 경술국치라고 불리는 합방에 앞 장선 사람은 이완용 ,송병준, 조중응, 이재곤, 이병무,
고영회, 임선준 등이다.
합방조약도 을사조약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날인이 없으며 비준서인 칙유에도 날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최소한의 법적형식 마저도 갖추지 못한「합방조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으로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일제는 경찰권을 박달했고 대한제국 조선으로 개칭,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도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극동 아시아에서 러시아가 급속히 세력을 확대시키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극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과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일본을 지원,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묵인한 것이다.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고발 하 고 열강의 힘을 빌어 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합방조약에 따라 왕족, 관료 76명에게 일본천황이 주는 작위와 은사금이 주어졌다.
작위를 수여 받은 사람 중 14명은 얼마 후「독립운동에 가담한 죄」로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물러났고, 김석진(金奭鎭)은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했다.
을사 5적중 이완용은, 이지용은 백작,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은 자작작위를 받고,
갑신정변의 주역이던 박영효는 후작, 일진회를 만들어 합방청원서를 냈던 송병준도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을사조약과 합방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기까지는 친일단체 일진회란 반민족의 역할이 컸다.
송병준, 이용구 등 수괴들은 앞 다투어 친일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지시에 따르고 막대한
비밀 자금을 받아 매국활동에 앞장섰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일진회이다. 이들은 5만원이라는 거금의 운영자금을 받아 친일에
앞장섰으며, 그 외에서 여러 차례 막대한 활동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때 국민들은 일진회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행동이 여러 곳에서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1907년2월자에 의하면 평북 의주군 양서면 게시판에 일진회에 대한
비난의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원수 놈 일진회야! 잘 보아라. 국세를 보건데 분개를 금할 길 없노라.
4천여 년의 생맥은 일조에 패망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단군, 기자를 대하리오.
백두산 밑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도 3천리 금수강산은 간데없고 한설만 쌓여 있도다.
북간도 서간도로 이주하는 동포의 발소리가 요란하고, 단군의 자손은 돈 없어 눈물을 흘리니
이 꼴을 차마 볼 수 있는가.
남편은 본가로 가고 처(妻)는 친정으로 가니 생이별이 가엾구나,
단군의 자손들아, 한국종자들아, 뿔뿔이 헤어져 걸식하고 도처에서 구타되니 오호라,
이렇게 만든 자는 누구냐? 바로 일진회가 아니냐.
이제 합방문서를 냈으니 머지않아 만물세를 낼 것이다.
이놈들아, 골육상쟁도 정도가 있느니라.
내가 살면 너도 살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 것인데 너희들은 무슨 권리를 얻어 무슨 짓을
했기에 이 따위 일을 하느냐?
이 주먹을 받아라. 보라. 우리의 형제 안중근은 이등의 머리를 쏘아 죽이고,
이재명은 역적대신을 총살 하였으니 독립의 날이 날듯이 찾아올 것이다.
원수 놈의 일진회야, 너희도 똑같은 운명이다.
김구는 그의 백범일지에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호라! 국가는 피병한 후이다.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몽(蒙)한 당시 인심으로는 심히 흉흉하다.
원로대신들 중 자살하는 자들과 내외 관인(官人)중에도 자살하는 자가 많았다.
또 교육계의 배일사상이 극도로 달했다.
오직 듣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농민들 중, 합병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도 많았다.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망했던 나라가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앙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1907년에는 국내 국외를 토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이것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창설했다.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의 사업으로 내세웠으나 이것이 신민회의 모체가 되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신민회를 상동교회에 받아들여 함께
민족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이로써 상동교회는 초창기 민족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이로써 상동교회는 초창기 민족독립운동의 산실로서 우리민족사에 민족의 얼을
지킨 성지가 되었다.
안찬호, 이회영, 양기탁, 김구,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영,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과 그 외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400여명의 정수분자오 인원이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요산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신민회의 규약은 아래와 같았다.
· 회원은 조국의 정신을 굳게 지키고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충성을 다할 것.
회원은 조국을 위했던 선열을 반드시 사모하고 계술(繼述)할 것
회원은 본회의 비밀을 엄수할 것이며,
만일 탄로 났을 경우에는 당사자는 혀를 깨물고 말하지 말 것
· 회원은 달고 쓴 생활과 힘들고 편한 활동을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할 것
이 규약은 철저히 지켜졌다.
한편 합병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요주의 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을 예감해서,
안창호는 몰래 장연군 송천(松川)에서 위해위(威海衛)로 건너갔다.
위해는 중국의 산동반도 끝에 있는 도시로,
명(明)나라 때 왜구들의 빈번한 습격에 대비해 이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했었다.
경성에서 언론인인 양기탁이 주최하는 비밀회의가 있어서 김구는 여기에 참석했다.
야기탁의 집에 모인 사랍들은 양기탁 본인을 위해서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 김구 등이었다.
먼저 양기탁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왜놈들이 경성에 총독부를 설치햇소. 이것은 전국을 통차하기 위한 준비된 기구요,
따라서 우리도 비밀리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 일환으로 민주에 이민 계획을 세워야 하며,
그 준비로 이동영 동지를 먼저 만주에 파송하여 토지매수,
가옥건축과 기타 일반적인 것을 위임하고, 참석한 여러분께서는 각 지방 대표를 선정하여,
김구 동지가 15만원, 강원의 주진수 동지가 10만원, 그리고 제가 20만원을 모금해야겠습니다,”
양기탁의 제안은 곧 받아 들여졌고, 모인 사람들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항일투쟁의 시작이었다. 김구는 김홍량과 협의하여 토지와 가산을 팔았다.
이 당시 장연의 이명서(李明瑞)가 자기 모친과 친동생 명선(明善)을 서간도에 먼저 보낸 뒤에
도착하는 동지들의 편의를 제공해 주게 하고 안악으로 왔다.
김구는 그들을 그에게 북행을 권해 출발 시켰다.
한편 김구가 양산학교 교무실에 있을 때,
한밤중 건장하게 생긴 사내가 찾아왔다.
「누구요?」
「안명근이라 합니다.」
안명근은 안중근의 친동생으로서 안태훈 진사의 아들이었다.
안진사 댁에 있을 때 그들 형제를 자주 접촉했기 때문에 낯선 안면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웬일이요?」
「필히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입니다.」
「의논이라니?」
「예, 안악에 와서 선생님을 찾아뵈려 했으나 길이 어긋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해서(海西)의 부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염출 협조를 얻어 놓았는데
이들의 행동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김구는 안명근이 이성(理性)보다 감성이 앞서는 젊은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안명근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안악읍의 몇몇 부자 놈들을 총기로 위협해 타지방에 영향을 줄 예정이오니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구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사태가 급박하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서 무력으로 금품을 탈취한다는 것
반발이 클 것으로 보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시오.」
「황해도 일대의 부자들에게 금전을 나눠 거두어 우선 동지를 모으고,
전신과 전화를 끊어버리고, 각 군에 산재한 왜놈들을 그 군에서 도살하라고 하면,
왜병 대대가 도착하기 5일전 까지는 자유천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김구는 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명근의 손을 잡고 만류를 했다.
「형,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오.
형이 여순에서 사형당한 안중근으로 인해 피가 끓는 의분을 갖고 있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소.
울분을 못 이겨 행동이 앞선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가 있소.
형의 이야기한 5일 동안 황해도 일대에 자유천지를 만든다고 해도 금전보다 중요한 것은
동지인데 과연 몇 사람의 동지들을 규합했소?」
「동지는 몇 십 명 됩니다.」
김구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만류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끝낸다면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앞으로 일본과의 대규모 전쟁이 필요하오.
그러려면 인재양성이 급선무요. 일시적인 감정으로서는 5일은 커녕 3일도 지탱할 수가 없소.
그러니 울분을 참고, 많은 청년을 북쪽 지대로 데려가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오.
매산(명근)의 뜻을 이해하나 지금은 순서가 아니오.」
김구와 안명근은 이런 대화 끝에 작별했다.
안명근은 김구가 자신의 뜻을 수용하지 않은데 다소 섭섭한 감이 있었다.
그런지 며칠 후 사리원에서 안명근은 왜경에게 체포당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났다.
또 안명근과 함께 연루된 사람들도 모두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구는 이 소식이 불길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신변안전이 위협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1911년, 김구의 나이 36살, 신해 년(辛亥年) 정월 초닷새,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김구가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아직 잠이 깨지 않았을 새벽, 왜군 헌병이 노크를 했다.
김구가 깨어 바깥을 보니 왜놈 헌병이었다.
「우리 소장님이 김 선생님을 뵙자고 합니다. 잠시 가주셔야겠습니다.」
김구는 새벽에 찾아온 헌병의 발걸음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헌병은 혹시 김구가 딴 짓을 할까봐 밀착방어를 해서
헌병대까지 동행했다.
헌병대에는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등
교직원들이 와 있었다.
이들은 집에서 연행당한 것이었다.
헌병소장은 긴 칼을 빼들고 이들에게 겁부터 주었다.
“경무 총감부의 명령이오. 여러 선생들을 임시 구류에 처하겠소. 이유는 받아주지 않겠소.”
하며 유치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황해도 일대의 애국자로 지목된 인사들 대부분을 체포했다.
일대 검거선풍이 내린 것이다.
이일이 있기 전, 배천군수 전봉훈이 김구에게 상의를 한 적이 있었다.
“나라가 이 꼴이 됐으니 군수직책도 못하겠소.
결국 왜놈들에게 아부나 해야 하느니,
차라리 김 선생 계시는 학교 부근에 가옥 한 채를 사서 손자 무길의 학업에나 힘쓰겠소.”
하는 것이었다.
전봉훈은 곧 습락현에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수리했는데 그때 수안(遂安)군수로 있었다.
그가 김구가 있던 안악으로 이주해 오는 날, 공교롭게도 김구 일행은 재령에서 사리원으로,
사리원에서 경성으로 다시 이송되고 있었다.
해서(海西) 각 군의 애국인사들이 체포되어 경성으로 이송될 때 송화의 반정(泮亭)
신석충(申錫忠) 진사는 재령강 철교를 건너다 열차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결했다.
“왜놈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내 한 몸 자결로서 항거하노라.”
김구는 신진사의 자결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잠깐 동안 김구는 신진사와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신석충은 해서의 저명한 학자요, 자선 사업가였다.
김구는 석충의 형제 석제(錫悌)진사의 자손 교육문제로 한차례 방문,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이때 석제의 아들, 낙영(洛英)과 손자 상호(相浩)등이 동구까지
나와 김구를 맞아 주었다.
김구가 모자를 벗어 인사할 때 낙영은 검은 갓 (黑笠)을 벗고 답례를 하려했다.
김구는 웃으면서
“그만 두게. 갓끈을 풀지 않아도 되네.”
하자 낙영이 송구한 듯 말했다.
“선생님께서 관을 벗으시는데 우리가 가만있으면 그게 예의입니까?”」
“내가 쓴 모자는 양인(洋人)이 쓰는 것이네. 서양인들은 인사할 때 모자를 벗는 것이네.」
김구는 석제 진사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교육을 받지 않은 인간은 짐승이나 다름없소.
교육을 통해 인간도 깨우치고 깨우친 인간이 중심이 되어 위난을 극복할 수 있는 거요."
하며 밤새도록 교육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김구는 눈물을 지었다.
기차 안에서 이승훈(李昇薰)을 만났다.
이승훈은 호가 남강(南岡)으로 평북출신의 민족기업가였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고향인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 사람이었다.
이승훈은 김구 일행이 오랏줄에 묶여 앉아있는 것을 보고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하염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기차가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형사 한명이 이승훈에게 물었다.
“선생이 이승훈씨 아니오?”
“그렇소.”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갑시다.”
이승훈 역시 기차에서 내려 김구 일행과 오랏줄에 묶여 동행이 되었다.
왜놈들은 한국을 강점한 후 반발이 예상되는 애국지사들을 색출, 검거선풍을 벌였다.
이들은 인원이 많자,
형무소나 경찰서에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집물창고, 사무실까지 구금소로 이용했다.
김구 역시 그런 조악스러운 곳에 수감되었다.
장소가 좁아 두 명 이상은 가두어 두기가 힘들었다.
이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잡혀 들어간 애국지사는 아래와 같았다.
신천(信川)의 이원식, 박만준(도주), 신백서, 이학구, 유원봉, 유문형, 이숭조, 박제윤, 배경진,
최중호, 재령에서 정달하, 민영룡, 신화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박도병,
이상진, 장명선, 한필호,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최익형,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 장응선,
원행섭, 김용진, 장련에서 장의택, 장원용, 최상륜, 은율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 장홍범,
권태안, 이종록, 김익룡,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 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
이효건,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 평남에서 안태국, 옥관빈, 평북에서 이승훈, 유동렬,
김용규형제 경성에서 양기탁, 김도희, 강원에서주진수, 함경에서 이동휘였다.
김구는 이동휘와 상면이 없었지만 유치장의 명패를 보고서 그가 수감된 줄 알았다.
이동휘는 신민회에 참여했었고, 105인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으나 무혐의로 석방,
상해임시정부에서 초대국무총리를 맡았었다.
그러나 1920년 공산주의 그룹 상해파의 영수가 됨으로써 김구와 대립되었다.
김구는 왜놈형사에게 신문실로 끌려갔다.
신문실은 으슥한 지하방으로서 여기저기 고문도구가 걸려있었다.
피의자에게 처음부터 겁을 주기 위해서였고, 여차하면 이 기구로 고문할 태세였다.
눈초리가 매서운 형사 한 놈이 거만하게 나타나더니 채찍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연령과 주소 등을 물은 후
“어째서 이런 곳에 끌려왔나?”
하고 물었다.
“모른다. 세 놈들이 잡아 와서 끌려왔다.”
그 자는 김구를 더 이상 신문하지 않고 수족을 결박, 천장에 달아맸다.
천장에는 고리가 있어서 밧줄을 꿰면 사람이 대롱대롱 떠 있게 돼 있었다.
처음에는 피가 아래로 역류해 심한 고통을 느꼈으나 조금 지나자 안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깜빡 정신이 사라졌다.
한참 후 깨어보니 신문실 귀퉁이에 모로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얼굴과 전신에 왜놈이 사정없이 냉수를 끼얹은 기억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윽고 정신이 들자 왜놈 형사가 물었다.
“안명근과는 어떤 관계인가?”
“친구일 뿐이다. 같이 일한 사실도 없다.”
그러자 이 자는 노발대발하여 다시 김구를 천장에 매달았다.
세 놈의 덩치 큰 형사들이 돌려가면서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이놈 아주 지독하군. 죽여도 괜찮다.”
김구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들어다가 김구를 유치장에 눕혔다.
이미 철창 밖은 훤해져 있었다. 밤새도록 세 놈들에게 구타당한 것이다.
김구는 곰곰이 생각했다.
세 놈이 왜구가 조선사람 한명의 자백을 받기위해 밤새도록 묻고, 고문하고 하는 일,
그놈들에겐 그놈들의 조국을 위해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저놈들처럼 조국을 위해 일한 적이 없지 않는가.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아, 나야말로 망국노(亡國奴)로구나.
김구는 자괴감을 가졌다.
이웃 감방의 김홍량, 한필호, 안태국, 안명근들도 김구와 똑같이 당하고 있었다.
“윽! 윽”
그리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명근은 철창이 떠나갈 듯이 소리소리 질렀다.
“너희놈들은 적대국의 애국지사를 이렇게 밖에 대하지 못하느냐!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하며 꾸짖었다.
그러다가 안명근은 내게
“나는 내 말만 했소. 김 선생(김구)과 김홍량은 관계가 없다고 했소.”
했다.
당시 감방에서는 무선(無線)으로 통하기도 했다.
이재림의 방 좌우 20여방의 40여명은 서로 밀어(密語)를 전했다.
왜놈들은 우리 사건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보안범이고 또 하나는 살인 모의 및 강도로 다뤘다.
한 사람이 신문을 당하고 나면 그 내용을 각방에 전달해 신문당할 때 불리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놈들이 이 같은 사실을 탐지하여, 동지 가운데 한사람, 한순직(韓淳稷)을 꾀어
각방에서 밀어하는 내용을 알리게 했다.
이른바 간첩이다. 하루는 양기탁이 밥 구멍(食口道)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한순직이가 밀정이다.
그놈을 조심하라.
그놈이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고발하고 있다.
이제부터 밀어전달을 폐지하자.”
한순직은 안명근이 소개했다.
용감하고 의리 있는 청년이라고 했기에 김구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지독한 고문에 한순직의 의지는 안타깝게도 꺾이고 말았다.
생리적인 고통을 참기에는 그 의지가 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한순직 뿐인가.
최명식(崔明植)도 밀고 같은 가증한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고문에 못 이겨 허위사실을 자백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호(號)도 아예 바꿔버렸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긍허(兢虛), 즉 마음을 비우고 삼간다는 뜻이 어다.
김구는 사람의 한 치 혀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말을 더욱 조심하기로 했다.
어느 날 신문실에서 왜경이 물었다.
이때는 이미 김구에게 호칭이 사라져있었다.
왜놈은 함부로 물었다.
“네 평생의 친구가 누구냐?”
“오인형이요."
왜놈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평생의 친구라면 반드시 김구와 같은 모의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도신문이었다.
“그래? 그 친구 어디서 무엇 하지? 나도 한번 만날 수 있겠나?」
김구가 그놈의 의중을 알고 대답했다.
“오인형은 장련에서 살았으나 몇 년 전에 죽었소.”
그러자 그놈은 실망했던지 김구를 사정없이 팼다.
“이 놈이 누구를 놀리나”
정신이 든 김구에게 다시 그놈이 물었다.
“네가 선생이었다니 너를 따르는 학생이 있었겠지? 누가 너를 가장 좋아했나?”
김구는 말을 하고 나서야 실수한 것을 알았다.
“최중호(崔重鎬)요”
김구는 이 말을 하고 자신의 혀를 깨물어 끊어버리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고초를 당하겠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자 한 시간도 안돼 최중호가 반죽음이 되어 끌려 나가고 있었다.
이현, 즉 충무로, 필동 근처에 경무총감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매일 개 소백정들의 살상행위가 계속되고, 신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왜놈 형사들의 고문이 그만큼 지독했던 것이다.
어느 날 한필호(韓弼昊)가 신문을 당한 다음 밥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고 김구에게,
“김 선생, 이제 나는 죽소. 지독한 고문을 당했소. 그러나 동지들에겐 아무런 해도 없소.”
하며 마지막이란 듯 눈물을 흘렸다.
“물이라도 마시오.”
김구가 말하자.
“아니오. 나는 틀렸소.”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필호의 얼굴을 보니 그건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왜놈들이 마구 때리고 발길질을 해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약이 오른 왜놈들은 그에게 더욱 지독한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그 후 한필호는 왜놈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공판 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한필호는 고문을 받다가 순국한 것이다. 애석한 일이었다.
한필호 같은 유능한 지식인이 할 일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다니,
김구는 땅을 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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