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추억의 저편에서
양산학교에서 근무했을 때 김구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학생으로 손두환(孫斗煥)이란
중학생이 있었다.
김구가 장련읍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에 근무할 때 그는 초립동이였다.
그의 부친 손창렴(孫昌濂)이 늦게 아들을 두니 품속에 넣고 기르다보니 버르장머리가 없어져 버렸다. 손두환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부모, 심지어는 군수에게까지 반말을 함부로 지껄여 듣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야 이놈아, 어서 인사해라.”
자신보다 나이로 보나 학식으로 보아 월등한 사람에게도「해라」소리는 물론 「이놈 저놈」하니
어디 그게 상놈의 말버릇이지 양반 댁의 종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황해, 평안 양도에는 성년이 될 때까지 아동들이 부모와 연장자에게 함부로 「해라」하는
못된 습속이 있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이 몰상식한 동양윤리에 극히 반(反)하는 습속을 뜯어고치려고 애썼다.
물론 지금도 이런 습속이 지방마다 약간씩 남아있어서 타지사람들이 「자네」「여보당신」같은
낮춤말을 들었을 때 그 습속을 몰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김구는 이 습속을 개선하려
애썼다.
그래서 김구는 두환을 학교에 입학시킨 후 그 버릇을 고쳐주기로 했다.
김구는 수신(修身)시간에 학생들에게,
“너희들 가운데 어른들에게 아직도 ‘해라’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했다.
그랬더니 몇 명이 손을 들었다.
물론 그 가운데 두환이도 끼어 있었다.
아마 이들은 해라하는 용어를 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김구는 수업이 끝난 후 두환을 별실로 불렀다.
“손두환이는 어른이 된 징표로 상투를 짜고 거기에 초립까지 썼는데,
부모에게 반말지거리나 내뱉고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하며 근엄하게 책했다.
두환은 김구의 말에 조금 미안했던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마 자시도 그 말이 나쁜 것인 줄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그러면 언제부터 공대를 합니까?”
“바로 지금부터다. 사람이란 잘못된 것을 알면 빨리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고치겠습니다.”
두환의 고집은 의외로 쉽게 꺾였다.
그 이튿날이었다. 학교 문을 들어서는데 누군가
“김구 선생님 안녕 하시 온지요?”
하고 큰소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손창렴 의관(議官)이었다.
그는 하인에게 쌀 한 섬을 지우고 와서 문안에 들여놓고 너무 기쁜지 눈물까지 흘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김구가 묻자 손창렴이 대답했다.
“두환이 말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내게 깍듯이 공대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 모친에게는 여전히 해라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라를 하다가 실수란 걸 알았는지 얼른 ‘잘못했습니다.’ 하며 사과를 하지 않겠어요.”
“그게 기쁘셔서....”
“예, 모두가 선생님 덕이지요.”
하며 새로 들어온 쌀이라서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김구는 황해도 일대의 나쁜 습속을 고치려 애썼다.
교육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어른을 공경하며 짐승과 달리 살아가게 하는 목적이 있었기에
김구는 수신(修身)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수신이란 요즘의 도덕(道德)과목과 같은 것이었다.
학교는 설립했지만 학생들을 모으기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특히 길게 땋은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이 큰 불효이며 관습에 대한 부정이란 생각 때문에
학교에 입학시키길 꺼려했다.
학교에 입학하면 머리를 깎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형들에게,
“절대로 머리를 깎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사정을 해서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감기지 않아 머리 속에는 서캐(이의 알)가 들끓었다.
하얗게 약을 뿌려놓는 것처럼 새끼를 친 이(?)들이 꿈틀대 불결하기가 짝이 없었다.
김구는 틈새가 촘촘한 얼레빗, 참빗을 준비해두고 매일 몇 시간씩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서캐를 털어주었다.
“이 녀석들아, 머리가 가렵지도 않냐? “
“예, 가렵지만 참아야지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머리인데...”
“그래도 그렇지 불결하면 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김구는 땋은 머리를 잘라내는 대신 머리를 빗겨주거나 감겨주는 등 위생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점차 학생들의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머리 빗겨주는 일에 시간을 모두 뺏기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거추장스럽고, 비위생적인 머리를 아예 깎아주는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학부형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김구는 시범적으로 두환이를 불렀다.
“머리 빗는 일이 싫지?”
“예.”
“상투를 짜고 그 위에 무거운 초립을 얹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요.”
“그럼 됐다. 내가 머리를 깎아주겠다.”
김구는 가위로 머리를 바짝 깎아 주었다.
불결한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두환은 기쁜 얼굴을 했다.
머리가 모두 떨어져나가자 두환은 상쾌한 듯,
“이젠 살 것 같아요.”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아버지 손창렴이었다.
손창렴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깎는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두환이 머리를 깎은 후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김구의 예측은 적중했다.
손창렴은 박박 깎은 아들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통곡을 했다.
마치 부모가 상을 당한 것처럼,
“어이구, 이게 웬 변고인가? 큰일 났구나.”
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러다가 김구를 보았다.
손창렴은 김구에게 잔뜩 분풀이를 하려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두환이는 김구가 따라온 것을 보자
「선생님」하며 안겨들었다.
이 모습을 본 손창렴은 사랑하는 아들을 생각해서인지 눈물을 거두었다.
분한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얼굴에는 함박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선생님, 아들이 좋아해서 그냥 놔두겠지만 이게 무슨 맨 하늘에 날벼락입니까?
차라리 내가 눈을 감거든 깎아주시지 않고....”
김구는 손창렴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란 선비의 유훈을 철저히 지켜 온 손창렴에게 삭발을
조상을 배신하는 것과 같았다.
김구는 그 점이 미안했다.
그래서 두환의 머리를 깎아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뒤늦게 둔 아들을 사랑하는 심정 누구보다 잘 압니다.
나 역시 두환이를 사랑합니다.
두환이는 남들보다 목이 유난히 가늘고 빈약한데,
여기에 주먹보다 큰 상투를 짜고, 망건으로 단단히 조르고,
무거운 초립을 씌워두는 것이 보기엔 좋을지 모르나 위생적으로는 큰 방해가 됩니다.
이걸 자르고 나서 두환이가 얼마나 명랑해졌습니까?”
사실 그랬다. 두환이는 목이 학처럼 가늘었다.
길고 가느다란 목 위에 무거운 상투, 초립, 거기에 망건으로 바짝 조여 놨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두환은 그래서인지 얼굴은 늘 수심으로 가득 찼었다.
서캐가 득시글거려 몹시 가려웠지만 머리속의 서캐를 잡아내야 시원 할 텐데
머리카락 바깥쪽만 긁어내니 여간 괴롭지 않았다.
손창렴은 마음을 돌이켰는지,
“선생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하며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그로부터 두환은 김구를 따라서 안악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아버지 손창렴도 같이 따라와 아들의 공부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두환은 어릴 때 버릇없이 함부로 행동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는 머리가 총명해 나라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원인이 한국인들의 교육 부족이며,
깨우침이 없다는 데서 온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두환의 그 후는 성장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연임했고,
민족혁명당에서 활동, 여운형의 인민당, 근로인민당의 중간파 조직에서 움직여
김구와는 다소 길을 달리했다.
또 한사람, 우기범(禹基範)이란 학생이 있었다.
우기범은 과부의 자식으로 입학해서 수업을 받았다.
김구가 문화군 종안의 서명의숙에 있을 때였다.
과부의 자식이란 남들에게 천시를 받는 법이다.
또 과부의 배움이 부족해서 아들을 훌륭히 교육시키기에는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우기범은 비록 과부의 자식이었지만 재질이 남다르고 머리가 총명해 장래성이 있어보였다.
김구는 그의 모친에게
“기범이를 내게 맡기면 안악의 내 집에서 가르치겠습니다.”
하며 자식 공부를 맡기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식 공부가 불가능하던 터에
김구의 제의는 여간 반갑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그러시다면 이 과부어미가 따라가 방물장사,
엿장수를 해서라도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김구는 기범을 9세 때부터 집에 두고 가르쳤다.
안신학교 소학교를 거쳐 양산학교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왜놈들이 들어와 애써 가꿔놓은 양산학교를 해산시키고 교구(校具)일체를 강탈해 갔으니
하루아침에 김구의 교육사업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목자를 잃은 양떼와 같은 학생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눈물만 앞설 뿐이었다.
전생에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선지 김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옥바라지로서 점차 늙어가고 있었다.
기력도 예전 같지가 못했다. 김구의 어머니는 상경하여 사식을 날마다 챙겨주고 편지로
바깥소식을 알렸다.
“안악의 집과 가산은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네 처는 딸아이(化敬)과 함께 처형 집에 들렀다 온다고 하더라.”
김구는 두 살배기 딸아이와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신혼재미 한번 못주고 옥바라지만 시키는 자신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김구는 곰곰이 가족들의 처지를 생각해보았다.
“어머니는 18년간 해주 옥바라지부터 인천 옥바라지하실 때까지는 슬프고 황망한 중에도
내외분이 함께 계셨다.
내외분이 서로 위로를 하고 의논도 했으나 지금은 과부의 몸으로 누구하나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다. 피붙이라고는 준영삼촌과 재종형제가 있으나 이 사람들은 농투성이라 의논할 처지도 못된다.
약한 아내와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무슨 위안을 줄 것인가.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모친 역시과부인지라,
처형 집에 얹혀사는데, 그 집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 한가. “
김구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애국운동을 하는 것이 국민 된 도리이지만 가족들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고
앞날이 불확실한 자신의 행동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점차 마음이 약해져가고 있었다.
김구의 처형은 신창희와 결혼, 가족과 함께 황해도에서 살았다.
김구는 준례와 결혼한 후 신창희는 의과를 택해 세브란스의 학교에 입학할 계획으로
아내와 장모가 함께 경성으로 이사를 했다.
김구는 자신이 정식으로 배우질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장래에
큰 기대를 걸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들이 자라서 나라에 한몫해줄 것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자신이 감옥에 들어옴으로써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가르치던 학생들도 구심점을 잃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고,
어머니와 처에게 도리를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판일자가 다가왔다.
김구의 어머니는 일본인 변호사 나가이(永井)란 변호사를 고용했다.
피고인을 위해 일한다는 변호사가 오히려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질문만 하니
김구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예심 심문 때 그 자는 이렇게 물었다.
“총감부 유치장에 있을 때 양기탁과 이야기한 내용이 있지?”
“없소.”
“나무 판자벽을 두드리면서 무선시호를 했다고 하는데?”
김구는 이 말에 나가이를 노려보았다. “
“당신은 변호사인가? 형사놈을 대신해서 다시 묻는 건가?
그 같은 사실은 조서에 모두 기록돼 있다.”
그러자 변호사 나가이는 검사 놈과 눈 맞춤을 했다. 안되겠다는 신호였다.
변호사나 검사 놈이나 왜놈이란 모두 한 통속이었다.
왜놈의 변호사란 자국(自國)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란 것이 드러났다.
재판 날이 다가왔다.
마차(馬車)에 실려 용수(죄수의 얼굴에 쓰는 도구)를 쓴 채 경성 재판소 문 앞에 다다랐다.
김구의 어머니는 화경이를 업고 아내와 같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김구는 2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돼 있었다.
맨 앞자리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김구가 세 번째,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피고인이 40여명이었다.
피고인들로 법정 안은 거의 찼다.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거기엔 각 학교, 남녀학생과 각 피고인의 친척, 친구가 모두 보였고,
변호사들과 신문기자들로 이미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법정에 나와 있어야할 한필호와 신석충은 피살되거나 자결했다.
주마간산 격으로 대강 신문을 마친 후 소위 판결이 내려졌다.
안명근 종신징역, 김홍량, 김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7명은
15년 형(원행섭, 박만준 등은 결석했고),
도인권, 양성진은 10년형,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7년
또는 5년으로 구형됐고, 판결도 그대로 언도되었다.
그 후에 보안사건으로 또 재판을 받을 때는 수석으로(주범)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 김용규의 조카 등이었다.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2년 징역이고,
그 나머지는 1년 또는 6개월이었다.
이외에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병옥 등 19명은 무의도, 제주도,
고금도, 울릉도 등으로 1년간 유배가 내려졌다.
1911년 7월 22일이었다.
이로써 왜놈들이 신경을 쓰던 사건 두 가지의 피고인 모두에게 골고루 중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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