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별들은 말한다.
내가 탁기세(卓基世) 노인을 다시 만난 것은 정말 우연히도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독립선열 유족회」사무실에서였다.
다소 긴 이름의 이 단체는 35년 전에 독립운동을 한 분들 중 국가로부터 훈장이나 포상을
받은 독립투사의 후손으로 조직된 단체로 독립선열의 유지를 받들어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이 땅에 민족혼을 살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친일 민족반역자 처벌법 제정 등
민족혼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며 국조 단군숭모, 천부경 알기 운동 등을 전개하는
순수 민간단체이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민족단체와 시민단체가 있으나 우리사회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
생활에서의 지엽적인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 할 뿐 근본적인 문제인 민족혼을
되살리는 문제나 민족정기 확립 같은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단체는 전무한 가운데,
그래도 35년간이나 정부나 사회의 무관심과 홀대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라고 소개했었다.
집중폭우가 쏟아져 시내교통이 마비돼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편할 뻔했던 그런 날,
김삼열 회장은 이튿날 일본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어업협정 파기를 규탄하는 일본대사관 앞
시위에 대 해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탁 노인이 참석했던 것이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었는데 몇몇 사람은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애국시민도
특별회원이라고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의 진지한 회의 모습은 마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모임처럼 진지하고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다.
다혈질의 회원 한 사람은 내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분신자살이라도 하여 국민에게 총궐기할
것을 촉구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정부의 굴욕적인 외교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겠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탁 노인은 회의도중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와 마주치자 어쩐 일이냐면서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탁 노인의 차림새는 탑골공원에서의 옥양목 두루마리가 아니라 양복차림이었다.
이런 지사(志士)에게는 역시 두루마기 차림이 제격인데 조금 어색하게 보였다.
꼭 신분에 맞는 옷이야 따로 있겠냐만 양복이나 잠바차림은 아무래도 협객에게나
걸맞는 옷차림 같아 보였다.
탁 노인과 나는 선열들의 영정(影幀)이 걸린 옆방에 마주 앉았다.
탁 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폭우에 대해서였다.
「을축 년 홍수 때 보다 더 한 것 같소.
천재지변이라지만 이건 인재(人災)요.
인간이 교만해지다보니 하늘이 노한 것이오.」
나는 탁 노인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산전수전을 모두 거쳐 나름대로 인생철학이 몸에 박힌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교만 같았다.
탁 노인이 말했다.
「저 유족들 보시오. 독립선열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외롭게 투쟁하고 있지 않소.
저렇게들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데 정부는 물론이고 누구하나 후원하는 곳이 없어
가난한 유족들이 회비를 내어 운영하고 있으니 어이없는 일이오.
국민의 세금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별별 단체를 만들어 정권에 이용하며 못된 짓은 다하면서,
정작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열심히 국민계도와 애국운동을 하는 단체는 도와주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듣고는 있을 텐데 말이오.
쓸데없는 단체를 만들어 엄청난 세금을 축내면서, 실제로 나라와 민족의혼을 살리고자 하는
단체는 돕지 않으니 모두 눈이 멀은 것 같소.
그래서 나도 작지만 이 단체에 봉사하고 있소.
선생도 정식으로 입회하고 후원금도 좀 내시오.
진정으로 도와야 할 단체요.」
라고 하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벽에 걸려있는 김구 선생의 둥근 테 안경이 유독 돋보였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김구 선생으로 옮겨갔다.
「저 어르신께서 정권을 담당했다면 나라가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거요.」
이 말에 내가 물었다.
「김구 어른께서는 정치는 조금 서투른 분이고 좀 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 정치는 정치 모략배의 전유물이 아니오.」
그 말에 내 가슴이 왠지 서늘해졌다.
「지금의 정치인은 정치가가 아니오.
정치란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것이오.
그런데 요즘의 정치는 어떻소?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 주기는커녕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지 않소.
중국의 삼황오제 때, 백성들은 임금의 이름조차도 몰랐소.
자신들의 행복한 삶 때문이었소.
그런데 초등학생마저 시시콜콜한 지방의원 이름까지 알고 있고,
더구나 그들의 비행(非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편이오.
정치가가 모리배와 결탁하면 이미 정치는 실종된 것이오.
옛날 이회영 선생이나 신익희 선생 같은 분은 돈을 몰랐소.
물론 김구 선생님도 그랬소.
돈이란 자기 소유가 아니고, 국가의 소유, 백성의 소유라고 믿었기 때문이오.
요사이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자기 직분도 모르는 멍청한 자들이 대부분인 것 같소.
정치인이 무엇 하는 사람이오?
정치인이란 자기의 지식과 돈, 모든 것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바치고,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봉사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오.
따라서 이들이 앉는 자리는 성스러운 국가지도자의 자리로,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들의 자리요.
그런데 그 자리가 무슨 국민에게 군림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로 아는지,
그저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로 얼굴의 철판을 깔고 국민을 우롱하며,
국가경제는 물론 사회기강마저 파괴하고 모든 것을 망치는 자들이 정치를 하고 있으니
우리민족의 장래가 암담할 뿐이요.
탁 노인의 음성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팔순이 훨씬 넘은 노인의 기력이라지만 몇 푼 안 되는 돈에 주눅 든 젊은이보다 힘이 넘쳤다.
이 기세대로 산다면 백 살은 넉넉한 것 같아 보였다.
화제가 다시「요즘의 젊은이」로 돌아갔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지식이나 인생철학이 결여된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덕(德)이었다.
「선생님(김구)은 이런 나라를 원하지 않으셨소.
국민 모두가 희망을 갖는, 제 맡은바 일에 보람을 느끼며,
도덕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를 원하셨소. 그런데…….」
탁 노인은 이 대목에서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중단했다.
「사람이 올바른 정신을 갖고 저마다 꿈을 갖고 사는 나라,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나라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짐승만 우글대는 것만 같소.」
「짐승이라뇨?」
탁 노인이 탄식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짐승이 따로 있소.
오직 생리적인 즐거움만 목적으로 하는 것이 짐승의 생활이 아니오.
지금이 그렇소.
사람들이 저마다 소유할 줄만 알았지, 나눠 줄 줄 모르고 제가 잘산다고 생각하면
남이 물질 때문에 고통당해도 뒷짐 지고 오히려 그걸 즐겁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짐승만도 못한 생활이오.
젊은이들에게는 희망보다는 순간적인 쾌락이 전부인줄 알고,
오늘을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소.
텔레비전 화면을 봐도 이런 상스런 자들이 등장해 괴성을 지르고 발광을 하는데
그게 노래인지 말세적 발악인지,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오.
그것도 프로그램에 한 반 정도만 그래도 오락으로 생각하여 이해하겠는데
온통 모두 그 지랄들이니 언제 정서적인 음악을 듣고 삶의 진정한 도리와 지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소.
오늘의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과 산업의 발전으로 사람들에게 편리함과 물질적인 풍요는
주었는지 몰라도 지적인 것,
인간 생존은 물론 인간의 삶을 위하여 기본적이고 꼭 지켜야 하는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기위한
정신문명, 인간존중이라든가 자연과 환경보호 도덕성 등의 사고는 실종되고 말았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그거야 시대풍조가 그런 걸 어떡합니까?」
탁 노인이 너무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 한마디 했다.
「시대풍조? 대체로 노래란 시대가 바뀌어도 아름답고 순전하고 마음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겠소.
멜로디를 적당히 구사해서 아름다운 노래 말을 붙여 누구나 불러도 마음이 와 닿아야 하는데
이건 가수인지 불량배인지 모를 이상한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뛰어나와 서커스를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려보면서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악을 써대니
이것도 시대풍조요? 젊은이.」
탁 노인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었다,
그만큼 내 나이가 많아져서였을 것이다.
탁 노인은 내가 관심을 갖고 듣자 더욱 톤을 높였다.
「물론 오락으로 가끔씩 한번 나온다면 또 모르겠소.
그런 이상한 것들이 한 시대 풍조라면 그것을 앞도 할 수 있는 정신문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런 것을 오락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을 압도하는 정신문면, 철학이 있어야 하는 거요.
요사이 젊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의식구조를 그대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될 심각한 실정이오.
극도의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하고 인내할 줄 모르고 극도의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자기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자신의 뿌리인 부모조차 살해하고 스승을 폭행하니
더 말할 것이 있겠소.
어른이 눈에 보이겠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달려드는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소.」
탁 노인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늙은 얼굴에 눈물이 배어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무척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큰일 났소. 도덕이 기반이 되는 나라, 그것이 자유요, 민주주의요.
도덕이 타락해서 아무렇게나 마구 사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요.
소돔과 고모라를 보시오.
옛날 폼페이 시에서 발굴되는 타락한 남녀의 시체를 보시오.
김구 선생님이 원한 나라는 그게 아니었소.
생활은 어려워도 저마다 이상과 꿈이 있고,
서로 돕고, 세계인과 함께 사는 나라가 그 분이 원하던 우리 나라였소.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요?
백범 선생님이 산처럼 임시정부를 지키면서 장래 독립한 나라의 틀을 만든 것은
이런 식이 아니었소.」
탁 노인은 도덕의 타락을 질타했다.
「지하철을 타보면 멀쩡한 놈들이 젊은 계집을 부둥켜안고, 늙은이가 서있거나 말거나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
사회란 함께 사는 곳이어서 서로 질서를 지키고 예의를 지켜야만 건강해 지는 것이오.
어서 빨리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만 싶소.
저 세상에서 선생님이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싶은 거요.」
나는 탁 노인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질문을 했다.
「어르신께서 제 말이 사리에 맞지 않다면 꾸짖어 주십시오.
어르신께서는 그 연세가 흔히 갖는 지나친 구시대적 사고가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소.
그러나 과학문명과 정신문화는 동시에 발달되어야지,
과학문명은 앞섰는데 정신문화가 뒤떨어졌다든가,
아니면 정신문화가 앞섰는데 과학문명이 뒤떨어졌다든가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문화지체론‘처럼 ‘문명은 앞서는데 문화가 뒤떨어졌다,’
이 말씀 아닌가요?」
「젊은이 말이 맞소. 문명이란 무엇이겠소? 결국 이비인후과적인 안락함이 아니겠소?」
「이비인후과적인 안락함?」
「왜 내 말이 틀렸소? 눈을 즐기고, 귀를 즐기고 이상한 냄새로 코를 즐겁게 하고,
맛있는 걸 만들어 잘 먹는 씹는 즐거움, 그리고 빨리 가게 하는 물건을 생산해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공해가 생기고, 결국 하늘이 노했소.
이러한 과학문명은 정신문명이 이를 감싸고 가야 하오.
자연과 환경을 먼저 생각하고 역기능적 장애는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연구 말하자면
지적인 검토를 거치고 하늘 天(천)地(지)人(인)이 합일하수 있는 문명을 펄쳐 나가야
하는 것이오.
지금 내리는 비를 보시오.
저건 비가 아니라 하늘의 노여움이오.
인간이 만들지 않아도 될 물건을 만들어 편하게 살려다 재앙을 받는 거요.
옛날엔 그렇지가 않았소.
옛말도 있소.
역천자(逆天子)는 망하게 돼 있소.
김구 선생님은 순천(順天)을 하며 도의가 세상을 지배할 세상을 염원하면서
도의를 저버리는 자를 응징해 이천만 국민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희망했던 것이오.
그런데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오. 정치인들을 보시오.
이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불량 사업가요.
권력을 이용해 약점 있는 기업인들의 등을 쳐 돈을 긁어보아 해외로 빼돌리고 있소.
물론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오.
애국은 간데없고 사리사욕만 취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오.
이들이 만드는 나라가 오죽하겠소.
선생님이 만들려고 하는 나라와는 그 근본이 맞질 않소.」
탁 노인은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존칭을 붙이지 않지만 김구 선생에게는 꼭 님자를 붙였다.
「이 나라에는 색깔이 있소.」
「무슨 색깔인가요?」
「선거 때마다 상대후보를 비방하는 정략적인 무슨 색깔이 아니라,
이승만적인 색깔과 김구 선생님의 색깔이오.
이승만적 색깔이란 원칙보다는 현실 담합적이면서 도둑놈도 필요하다면 장군을 시켜도
된다는 이론이요.
그래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고, 원칙은 없어지고,
온갖 기회주의자들이 발붙일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오.
부정부패의 온상을 만든 것이오.
김구 선생님의 색깔은 그것이 아니었소.
가장 동양적이면서, 기독교적인 철학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동선을 바탕으로 원칙을 지켜,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색깔이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생님의 색깔이 희석돼가고 있다는 것이오.
정치인들도 이 두 부류가 있소.
그런데 이승만적 색깔을 가진 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소.
그것이 잘못이오. 부정과 담합하고, 결과만 좋으면 모두 좋다는 그 생각,
그래서 안두희 같은 파렴치한 자가 나타나고 그를 법의 이름으로 보호했던 것이오.」
나는 탁 노인의 이론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치문제에 대해 그리 깊은 생각도 없었거니와 아직까지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깊숙한 곳까지
아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탁 노인은 헤어질 때 자신은 한달에 한번씩 이 사무실에 들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과 같이 무의미하게 늙어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이곳에 들르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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