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22. 의열사단 조선혁명선언과 6·10만세운동

오늘의 쉼터 2012. 12. 28. 14:11

22. 의열사단 조선혁명선언과 6·10만세운동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토히로부미 뿐 아니라 그에 동조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을사오적」이라 불리며

 민중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이때부터 을사오적을 응징하려는 열혈청년들의 거사가 끊이질 않았다.

1907년에는 나철과 오기호가 결사대를 만들어 5적 암살을 꾀하다가 실패했고,

1909년 12월 22일에는 이재명(李在明)이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재명은 일본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1910년 9월 13일 23살의 나이로 사형대에 올랐으며

나철과 오기호는 후에 단군신앙을 발전시킨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여 민족 종교운동에 나섰다.

또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대한제국의 고문으로 있던

화이트 스티븐슨을 매수하여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 대한제국은 「황실과 정부가 부패하고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므로 일본의 통치에 맡기는 것이 좋다.」하며

일본의 침략행위를 옹호하고 선전 하였다.

 


이에 미주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사람을 보내어

스티븐슨에게 힐문하고 취소를 요구 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방자하고 무례한 태도로 매국노 이완용을 충신이라 하고

침략의 괴수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있음이 한국과 동양에 행복이라고 하고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고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등 폭언과 괴변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언행에 참다못한 전재관이 스티븐슨의 턱을 강타하고

다른 대표들이 의자를 들어 스티븐슨을 난타 하였다.

동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티븐슨 처단의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다음날인 1908년 3월23일 아침 스티븐슨이 기차 편으로 워싱톤을 출발하고자

샌프란시스코 페리선창에 일본영사 소지(小池)와 함께 도착하였을 때 밤잠을 자지 못하고

울분에 차있던 전명운 지사는 현장에 나와 스티븐슨을 기다리다가 스티븐슨이 도착하자

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총이 불발이 되자 총을 손에 들고 스티븐슨을 향하여 돌진하여 격투를 벌렸다.

이때 장인환 지사가 다시 나타나 스티븐슨에게 3발의 총을 발사하여 가슴과 어깨,

다리에 맞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틀 후 사망하였다.

장인환은 미국 법정에서 25년 형을 선고받고 감형되어 1919년 1월 출옥하고,

부상을 입은 전명운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이승만에게 연락하여 변호사들과 함께 애국지사들을 변론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만이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론할 수 없다고 거절한 사실이 있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존폐위기를 맞아 자결로, 혹은 원흉처단에 생명을 바친 의열 투쟁의 역사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독립투쟁에 한 장을 장식한 사람으로서 신철휴(申喆休)의사와 박상진(朴尙鎭)의사의

이력을 본다.

  신철휴는 경북 고령인으로 1898년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에서  신진구(申鎭求)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이상룡, 이시영, 김동삼 등의 애국지사들이 신흥무관 학교를 세워 거기에 입학 하였다

이듬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독립은 행동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김원봉, 이종삼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있는 구국모험단에서 폭탄제조법을 익혔다.

  그 후 길림(吉林)으로 돌아온 그는 길림성 파호문(把虎門)밖의 중국인 번(藩氏)집에서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에 참가했다.

이때 신철휴를 비롯, 김원봉, 이종암, 한봉근, 김옥, 윤세주, 서상락, 권준, 곽재기, 강세우, 이성우, 배동선등 13명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창단후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겼다.

  1925년에는 단원이 70여명이 되었으며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의열단이란 명칭은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였다.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였고, 김구, 김규식, 김창숙은 그 고문직을 맡았다.

장개석의 후원을 받으면서 임시정부의 별동대 역할을 했는데 당시의 의열단의 활동은

일제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신철휴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0년 6월 구영필의 밀고로 체포, 1921년 6월 치안유지법으로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출옥한 다음에도 행동으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일제에 주눅 들어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의열단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가장 선명하게 지향한  독립단체였다

 

이 독립운동단체의 공약은 다음과 같다

 


1.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

2.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키로 함

3.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단의 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하시하처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하시하처에서나 조회에 필응 함

8.피사치 아니하여 단의(團義)에 진(盡)함

9.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九)가 일(一)을 위하여 헌신함

10.단의에 배반 하는 자를 척살함

 


  의열단은 이렇게 10개조를 정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 기관은 물론,

일인 지배자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등을 암살 하고자했다.

의열단은 부산 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하사건, 조선총독부 폭탄투하사건,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폭탄투하사건 등 눈부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 투쟁의 정신은 1923년 신채호가 김의봉의 부탁으로 작성한

「의열단 조선혁명선언(일면 의열단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혁명선언

 

[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 기능을 칼로 베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세(百一稅). 지방세, 주초세(酒草稅)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독세.....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산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대다수 인민과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년 내내 소득으로 자기 한 몸과 처자의 호구거리도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소, 말이 될 뿐이오.

  끝내는 그 소, 말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인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고 빠른 비율로 증가하여「딸각 발이」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굶주린 귀신으로부터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일게 된다 하면「단군을 속여 스사노오노미코토의 형제」라 하여「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리는 땅」이라 한 일본 놈들이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담근질, 채찍질, 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 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페인이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처한 형편의 압박에서 소멸되어「찍도 짹도」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 채찍질, 구박, 압제를 받아, 바다에 둘러싸인 삼천리가 하나의 큰 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부터 기게 되어 강도 수중에 사용품이 되고 말 것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지푸라기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명 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가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 선천 등의 국내 각지로부터 북간도, 서간도, 노령연해주 각처까지 오처에 주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능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 내어 죽인다, 아동을 잔혹하게 다룬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 한다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 내정독립이나 참정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동양평화」,「 한국독립보전」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 인민 생명재산 자유보호,「 조선인민 행복중진」 등을 신명((申明)한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체를 못 보느냐?

  3 ·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 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한국 매국노를 시키어 이 따위 미침 주장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이들의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 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 민족은  온통 굶주린  귀신이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몇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굶어죽을 화를 면하겠는가?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자치임을 막론하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 간판인「제국(帝國)」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여기에 딸려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서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느냐?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 보살이 되어 하루아침에 총독부를 철폐 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과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이름뿐인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들자 함이

「치욕」 이란 병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 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 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망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 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과 인구의 많음으로 오랜 옛날 자유롭게 발달한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데서 문화를 혹 지킨 전례가 있더냐?

  검열, 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 잡지를 가지고「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며

강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아니 할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의 과정으로 본다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따라 우리는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는 자 (내정, 독립, 자치, 참정권론자)나 강도 정치 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 강도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첫째는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文弱) 정치가「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 수구당의 성쇠가 거의 외국의 원조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이 나라를 끌어들여 저 나라를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의뢰 하는 습성은 일반 정치 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甲午), 갑진(甲辰) 양 전쟁에 일본이

수십만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 러 양극을 물리치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 하는데 우리 조선의「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한다」하는

이들은 한 자루의 칼과 한 방의 총알로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며 포악한 관리나 나라의

원수에게 던지지 못하고, 청원서나 여러 나라, 공관에 던지며 탄원서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슬피 호소하며 국가존망, 민족 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을사조약」,「경술합방」곧「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 년만의 처음 당하던

치욕에 조선 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山林儒生)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나라가 망한 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모든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미래의 미일전쟁, 러일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에 일반 인사의「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분발하여 전진하는 의기를 쳐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다.

 


  둘째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 당시에 여러 나라 공관에 빗발치듯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 년의 헤이그의 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 아니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 전쟁 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春秋代議)에 성패를 생각하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높은 관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로 지휘의 대장이되며, 사냥 포수의 사냥총을 몰아가지고 조일(朝日)전쟁의

전투선에 나서지만  신문 쪼가리나 본 이들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오늘  이 시간에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 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사관이나 졸병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

함이나,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 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느껴지고, 그 준 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가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겠다.

상공업도 발달해야겠다, 기타 무엇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庚戌)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 북간도의 산림을 더듬으면,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면, 혹 남 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들어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 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 없는 모임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 경제 양방면으로 압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법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실로 한바탕에 잠꼬대가 될 뿐이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외교,「준비」등의, 미몽(迷夢)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느뇨?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 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 을 양 세력 곧 신. 구 양상전 중 누가 더 어질고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 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근본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장의 종이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들인다.」가 혁명의 유일한

미담이 되었거니와, 오늘날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한여 하는 혁명인고로

「민중혁명」이라,「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고로 그 반등, 팽창의

뜨거운 정도가 숫자상 강약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은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도 구축 하나니,

그러므로 우리혁명의 첫 걸음은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神人)이나 성인(聖人)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이 아니오,

「민중아, 각오하자,「민중이이여. 각오 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 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각오의 제1보이니라

  일반민중이 굶주림,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私債)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 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뭇 민중의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굶어 죽음」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한 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사, 교활, 잔호, 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구축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새로운 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한 번 던진 폭탄만 못하며 억 천장 신문, 잡지가 한 차례 폭동만 못할 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라.

  우리 지나온 경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중의 한대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뒷면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 폭력」둘 가운데 하나만 바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장렬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 도다.

  조선 안에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구축하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사 교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장엄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뒤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앞에는 빛나는 활로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장엄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 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하건대

  1. 조선 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찰꾼, 매국노

  4.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 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완화 하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할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구축 할지니라,

 

 

 

[5]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 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 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 할줄 모르면 파괴 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 할 줄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분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 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첫째는 이족 통치를 파괴 하고자 함이다.

왜?「조선」이란 그 위에「일본」이란 이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체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전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를 파괴 함이니라

  둘째는 특권 계급을 파괴 하고자 함이다,

왜?「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 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 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 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 함이니라. 
  셋째는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요,

곧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 약탈 제도를 파괴 함이니라.

  넷째는 사회적 불균형을 파괴 하자 힘이다.

왜? 약자위에 강한 자가 있고 천한자 위에 귀 한자가 있어 모든 불평균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질투, 서로 원수로 보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끝내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 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 함이니라.

  다섯째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해 내려오는 문화 사상의 종교, 윤리, 문학, 미술, 풍속,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공급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 하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 사상이 박약하면 자유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라,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자유적조선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의,「약탈제도의」,「사회적 불평등의」「노예적 문화사상의」현상을 타파 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할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 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이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대 조선이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외나무다리」위에 선 줄 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 할지니라.

 

 

 

  이글은 우리 민족의 나라 잃은 고통과 설움, 독립의지를 후세에게 전하는 명료한 글로서,

모든 국민들에 나라사랑의 이유와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기억해야 할 이러한 애국자도 있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으로 활동한 박상진(朴尙鎭) 의사는 1884년 12월 7일 울산시 종정리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선비 가문인 박 이사는 19세 때 허위(許蔿)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21세 때 의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 고등고시에 합격했으나 일본의 주구가 되기 싫어서

이를 사퇴, 허위선생의 순국을 계기로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만주로 건너가서 대한의군부 조직에

착수했다.

1912년에는 대구에 덕태상회(德泰商會)란 회사를 설립, 무역업을 표방 하는 체 하면서 사실은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박상진 의사는 군대식 조직인 광복회 총사령관으로서 만주 지방의 활동을 담당했다.

1916년에는 김좌진, 노백린, 신현래 등이 독립투사들이 광복회에 모여 광복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1917년에는 기호(경기 호남)지방과 관서(關西)지방의 지사들이 참가, 단원 수가 수백 명이 넘었다.

 


1917년 박 의사는 서울에서 권영목을 길림성의 맹사원에게 보내 군사훈련과 개척사업을 병행케 했다.

그러나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지하에 스며있던 광복단의 조직이 드러났다.

1921년 박상진, 김한종 두 의사는 1921년 8월 21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대의 이슬로 순국했다.

이때 남긴 박상진 의사의 절명시가 후 세인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일유광복 천인소부(日維光復 天人所符)

  성차대죄 계아동포(聲此大罪 戒我同胞)

  성계인 광복회(聲戒人 光復會)

  난복생차세상(難復生此世上)

  행득위남자신(幸得爲男子身)

  무일사성공거(無一事成功去)

  청산조연수진(靑山嘲緣水嗔)

  박상진(朴尙鎭)」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세상에

  남자 몸이 되어나서

  한가지일도 성공 못하고 가니

  푸른 산은 조롱하고 푸른물은 찡그리더라.

 


  이렇게 수많은 애국자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가지 나라를 찾고자 하였다.

 

 

  이어 1926년 6 ·10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순종황제가 일본의 사주에 의한 민족반역자들의 독살 계획으로 승하하시고,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하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순종의 장례식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천여 명으로, 10만 장의 격문을 준비하여

오전 8시 30분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고,

수많은 시민들은 이에 호응 하였다.

 


  이 6·10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이를 예의주시하면서 경계태세를 가지고,

7000여 명의 군대를 경성에 집결 시켜놓고 부사과 인천에는 함대까지 정박시켜 놓았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경찰에 투옥된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여명이었으면,

전국적으로 1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 운동은 학생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으로,

침체된 민족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에 힘입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 역활을 하였다.

당시에 뿌려진 6·10만세운동 격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일본물자를 배척하자!

  조선인 관리는 퇴직하라!

  일본인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라!

  일본인 교원에게 배우지 말자!

  일본인 상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군대와 헌병을 철수하라!

  재옥(在獄) 혁명수를 석방하라!@

  보통교육은 의무교육으로!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철페하라!

  일본 이민제를 철폐하라!

 

 

 

이후 전국은 독립의 의지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듬해인 1928년 광주고보생인 이경채가 식민지교육을 철폐를 주방하며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살포하다 적발되어 퇴학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2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282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3차 맹휴는 전국적인 호응으로 일어나 일본 유학생들의 성원과 동조를 불러일으키고,

이듬해에 대대적인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광주고보 맹휴 격문은  다음과 같다.

 

 

 

4백 용사! 우리들의 투쟁이 점점 전개되어 가나 투쟁은 단순히 광고보(光高普)니

혹은 전남에만 한한 일이 아이다.

조선, 전 세계에 연결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조선 수백만의 학생대중은 우리들의 승리를 기다리고,

2천만 부여민족은 우리들의 성공을  눈물을 머금고 갈망하고 있다.

자! 가자! 자유의 천지에! 용사야 힘이 있지?

용기를 내어 결정적으로 싸우자! 우리들의 싸움에는 승리가 있을 것이다

이 승리는 실로 우리들 피압박 민족의 해방되는 싸움의 길이요 소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용감한 투사여! 우리는 우리 앞에 전진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여러 가지 부패물을 제거하고

천신만고를 참고 멀지 않은 우리의 목적지에 용감하게 돌진하자.

 

 

 

  1.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계속할 수 있는 데까지 싸우자.

  2.우리들은 우리들의 몸으로 견고한 철성(鐵城)을 포위하자.

  3.학교당국의 서약서를 제출하는 자는 우리들의 역적이다.

  4.서약서를 제출한 자는 박멸매장하자.

  5.우리들의 싸움을 저해하는 5학년OOO를 박멸하자

 

 

또한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일제의 굴욕적인 식민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관주보보생과 일본인 중학생과의 사소한 충돌이 도화선이 되어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11·3광주학생운동은 3 ·1운동 후 최대의 항일 민족투쟁이었다.

당시 광주에는 광주여고보 등 대부분의학교에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독서회의 전신은 1926년 조직되어 장재성, 왕일재 등이 이끌던 성진회(醒進會)로서,

성진회는 1927년 10월 해산하고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 하는 한편,

독서회중앙본부를 두어 상호 긴밀한 연계를 맺어 활동했다.

항일투쟁으로의 발단은 10월30일 오후 5시 30분 광주를 떠난 통근열차가 나주에 도착 했을 때.

일본인 남학생이 광주여고보 3년생의 사촌 박준채 등이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을 벌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11월 3일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간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으며, 조선인 학생들은 이 사건을 편파 보도한 일본어신문「광주일보」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1월 12일, 광주의 학생들은 일제히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경찰 교내침입 절대반대를,「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등을 담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투쟁본부를 설치하고 신간회, 근우회등 주요 단체들과 연계를 맺으며,

광주의 투쟁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 거의  모든 학교들이 이에 호응, 시위나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했다.

 


참가 학교수 194개교, 참가 학생 수 5만 4천여 명, 그중 580 여 명이 퇴학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을 받았으며, 2,330여 명이 유기정학 당했다.

학생들은 광주고보맹휴 중앙본부를 통하여「학부형들에게 보내는 글」과「격문」을 비롯,

많은 유인물을 통해 학생투쟁의 정당성을 밝히고 계속적인 항쟁을 촉구했다.

 

 

 

학부형들에게 보내는 글

 

학부형 제씨여! 우리들의 요구는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맹휴는 결코 틀림없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금번 우리들의 맹휴는

연내(年內) 광주고보 노예교육제도의 철제(鐵蹄)하에서 극도의 유린을 당하고 위선과

기만에 속아오던 3백 노에의 최후비명의 절규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학교당국자들은 6회나 거액의 교육 회비를 강취하여

그 대부분을 체육운도(특히 경기)에 소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체육 그것도 우리들을 위하여서라고 한다면 재언할 필요도 없으나,

그 내면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참다운 정신을 박탈하고 속히 부패한 고깃덩어리를

제조하려는 가공한 정책입니다.

그리하여 소위 학교 도서실에서는 진부한 서적과 체육에 관한 서적만 있고,

그 외 조선말로 된 잡지는 한 장도 없고, 일본문, 영문 서적도 우리들의 상식을 제공할 만한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다 학생들이 희망한 서적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들의 요구의 제1은「교육의 획득 문제」가 절대로 필요 합니다

(학교장에게 낸 진정서 제1조를 말한 것임, 이하 2조, 3조도 위와 같음).

그 다음 제2는 학교 당국 교육방침 문제의개선, 제 3은 한극인 교육문지 개선 등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우리에게 대하여 적절치 않은 것이 있습니까?

지면의 관계로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으나 그 곡절 곡절에는 적어도

우리들의 생명을 도박하면서라도 최후까지 투쟁할 문제라고 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을 때에는 절대적으로 폐교(廢校)의

불가피성을 파악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27명의 퇴학자는 물론 374명 아니 우리 일동의 퇴학은 확연히 있을 것이 사실이므로, 퇴학에 대한 전율 공포의 관념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목적을 달성할 최후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법정적으로 투쟁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학부형 제씨여! 학교당국의 배후에도 도(道)당국, 경찰당국 등의 소위 절대적 세력이 있습니다.

학부형 제씨여!

우리들의 민족적 파멸의 경향이 있음을  보고  피를  토하고 통곡하며 공포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무엇 때문에 맹휴를 단행하였겠습니까? 다만  유희적으로 공부를 싫어하여 이를

단행하였다고 평정(評定)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공부와 시험을 두려워 퇴학을 각오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들의 들은 바에 의하면 부형들이 자제들을 강압하여 서약서를 제출하고

또 고향으로 데리고 가서 허위전보로써 일종(결자 있어 속문 생략)

「27명이 퇴학이 통쾌하다.’

혹은 학교당국과 경찰당국에 우리들의 내정을 밀고하여 맹휴에 대한 전사(戰士)의 이름을

밀탐 고발 한다는 등 소문이 들려옵니다.

 


  오호! 제씨여,

제씨는 무엇 대문에 우후(소의궁둥이, 권세가의 졸개 편주)되기를 자감(自甘)합니까?

한번 고려하여 보십시오.

어떤 자는 고통과 낙망을 좋아하고 어떤 부형을 자제를 사랑할줄 모른답니까?

  우리들 학생은 노예적 기만교육의 철감(鐵監)으로부터 탈출 하려고 목적을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희망이 다 페리와 같이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4백 건아의 머리를 베고 자기 자식만을 행복스럽게 하려 합니까?

우리일동을 상대하며 미래에 유명한 위인이 되며 호화스러운 행복을 보지하십시오.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는 우리 민족을 팔고 저놈들이 더욱더욱 빼앗고 있는

우리 강산을 팔아서라도 자기 한 사람만의 향락을  영구히 지속하려 합니다.

  부형 제씨여! 냉정히 고려하여 보십시오. 이것이 모두 공중누각 입니다.

그 누각이 설령 건설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인간적 양심이 다소라도 있다고 하면

이러한 일은 아니 될 것입니다.

사실로 말하면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교육기관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씨여! 우리들 4천여 년이라는 긴 동안의  역사적 계통의 혈관에는 피가 움직이고 잇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피를 동일한 통에 걸러 넣는다면 필연적으로 옹화하여 합칠 것입니다

 


  부형 제씨여! 자기자제 한 개인을 위하여 학교당국의 익익에 속한다는 것보다도 차라리

우리들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정당한 길일 것이면 문제를 속히 해결시키는

유일한 방침입니다.

지금 서약서를 제출 한다 할지라도 일 개인이 통학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며,

결국에는 문제가 순조로이 해결된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불가피의 위험이 육박 될 것입니다.

  부형 제씨여! 좀더 타산적으로 비판 결정 할 것이오.

지금부터는 우리들의 각각 그 개성을 4백의 맹휴단에 의탁하고 결정적 으로 항쟁하려합니다.

제씨여! 부자형제 전력 결심하여 문제 해결에 노력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보십시오. 학교 측에 폭행은 더욱 더욱  악화되어 가는 형편으로서 어떤 학부형에게 대항 무리,

1년생에게 대한 무조건 구타, 맹휴생에 대한 폭압 등 현 단계에 있어서 분기치 않는 자는

피 없는 인간이요,

눈물도 없는 인간입니다.

  부형 제씨여! 우리들은 혈통적으로 부자 형제는 아닐지라도 민족의 계통적 부. 자 형제임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조선  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는 미약한 우리들을 지도, 후원하여

용기를 돋워 주셔서 일치협력으로 문제의 해결에 조력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광주고보맹휴 중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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