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잡범들 틈에
김구의 옥중생활은 다른 사형수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많은 독서를 하게 됐다. 당시의 독서란 신학문(新學文)을
접하기 이전이라 '대학(大學)' 등의 사서삼경, '훈몽자회'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었다.
김구는 아버지가 찾아와 '대학' 한 질을 차입시켜 주어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대학'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유교경전이기도 했다.
김구가 갇혀 있던 제물포(현 인천)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개항한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물론 구미 각국의 외교 사절을 비롯한 여행자들이 드나들고,
이들로부터 신기한 외래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구에서 들어온 종교,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의 여러 파들이
교회나 성당을 건축하고 있었다.
벌써 그곳에는 천주교의' 성당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개신교의 뾰족탑들도 하나 둘 지어지고 있었다.
감리서 관리 가운데 제법 서양 문물을 아는 자가 김구에게,
"자네도 신식서적을 좀 읽어 보게 . 자네 같은 영웅은 많은 것을 알아야 하네."
하고 권했다.
그가 비록 살인죄를 저질러 복역하고 있지만 그의 비범한 인물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닫아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 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네. 세계는 지금 활짝 열려 있네. 정치 ,문화, 도덕, 경제, 교육,
산업이 어떤지를 연구해서,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배우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네.
그러니 창수 자네와 같은 영웅은 마땅히 신지식에 접근하여
국가의 장래를 도모하시오."
비록 일개 감리서의 관리에 불과한 그 사람은 깨어 있는 선지자였다.
김구는 구시대적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관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관리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알고 지내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 관리는 김구에게 '세계역사지지(世界歷史地誌)'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 주고 읽으라고 했다.
당시 중국은 이미 마테오 리치 (이마두)라는 선교사가 북경에서 천주교
포교사업을 벌이며 갖가지 서양 문물을 전해 우리나라보다 훨씬 깨어 있었다.
이때가 1500년대였다.
또 일본에서는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문물이 흘러 들어와 많은 신식서적이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말씀처럼 김구는 감옥 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독서 이외에 달리 할 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감리서 직원들은 김구가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것을 보고 마치 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좋아했다.
김구가 신서적을 보고 깨달은 것은, 고능선 선생(옛 스승)이 조상께
제사를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 운운‥‥‥ . “
이라고 축문(祝文)을 읊던 것이나, 안태훈 진사가 양학(洋學)에 몰두한다고 해서
절교한 일이 탐탁지 않다는 것이었다.
안 진사는 '빌렘'이라는 프랑스 신부를 만나 천주교에 입문 했고,
자연 천주교 교리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 것을 멀리하게 되다
이런 안태훈을 고 선생은 아예 경멸했던 것이다.
'고 선생의 유학에서는 의리를 배우고,
안 진사의 양학에서는 세계 각국의 문화를
입수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김구는 이렇게 생각했다.
김구가 청계동 안 진사 밑에 식객 (食客)으로 있을 때는
오직 고능선 선생만이 최고인 줄 알았다.
고 선생의 한마디 한마디를 경전처럼 받들었다.
고 선생이 양이(洋夷)를 배척, 척왜(斥倭)하는 것만이 진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를 깊이 통찰하여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여 상호 보안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선생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머리에 상투를 틀지 않고 풀어헤치고,
여기에 끈적끈적한 약품(포마드)을 발라 조이고 다닌다고
모두 오랑캐 족속이라고 했고, 상투를 튼 우리 민족만이 문화민족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한자나 삐쭉 빠진 '이상한' 사람들
꼭 원숭이처럼 생긴 서양 '오랑캐'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라를 세우고,
문화를 일으켜 각종 서적을 만들고, 또 상상도 못할 큰 배에 대포를 달고
바다를 누비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학문을 했던가.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선비란 자들은 갓을 쓰고, 점잔을 빼지만,
선비라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려 백성들을
못살게 하는 것은 그들 오랑캐만도 못하지 않은가.
김구는 여기서 많은 책을 접하면서, 자신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이들에 비하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와 함께 갇혀 있던 죄수들은 1백여 명 되었는데, 눈이 뜬 자들의 범죄는 거의 없고, 민사사건 외에는 대부분 절도, 강도, 위조 범, 사기, 살인 등의 범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거의 가 문맹(文盲)이었다 김구는 이들의 처지가 딱해서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무릇 사람으로 태어나 글자를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소.
내가 여러분들께 지금부터 글자를 가르쳐 주겠소."
그러나 감사할 줄 알았던 그들은 의외로 냉담했다.
글자를 모르고도 살아왔기 때문에 글자를 배운다는 것이 오히려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김구에게 보내진 음식을 나눠 먹는데 대한 답례로 글자를 배우는
형식만 취할 뿐이었다.
당시 화개동(花開洞)의 기생오라비(기둥서방)로 조덕근(曺德根)이란 자가
있었다.
이자는 창기 (娼技)를 청 (淸)에 팔아넘긴 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른바 요즘 말하는 인신 매매 행위였다.
이자가 '대학'을 배우는데 '인생팔세개입소학(人生八歲皆入小學)'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여 외우다가 개입(皆入)자를 잊어버리고
'개아가리소학' 이라 한 것을 보고 웃은 일도 있었다.
건양(建陽) 2년, 그때 '황성신문'이 창간되었다.
건양이란 연호는 양력을 쓰기로 한 연호를 말한다.'
'황성신문'에 이런 조그만 기사가 게재되었다.
김창수가 인천옥으로 들어간 후 인천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인천옥은 죄수들의 공부방이 되어 간수나 관리들 모두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
모든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어 타 감옥의 모범이 되고 있다.
김구는 이들 일자무식인 죄수들에게 뭔가 도와 줄 일이 없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억울하게 재산상의 피해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문자를 아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을 이용해 순박한 사람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김구는 죄수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 보고 그들에게 유리한 송사(訟事)문건을
작성해 주기도 했다.
김구가 써준 송사 문건은 가끔 이길 때도 있었다.
죄수들은 대서 (代書)를 대부분 바깥 대서인들에게 부탁 했는데 ,
비용이 꽤 많이 들어가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김구는 인지 (印紙)만 사다가 붙이게 하고 이들에게 무료로 송사
문건을 작성해주어, 이기는 확률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옥내는 물론 이고 관리의 대서까지 한 일도 있었다.
간수들은 이런 김구를 높이 평가해 함부로 죄수 취급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구에게 존칭을 쓰기도 했다.
김구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농사일을 별로 하지 않아 선지
'김매는 소리' 한 마디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고작 시詩)나 풍월(風月)을"읊은 적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끝까지 읊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입 흉내를 내는 정도였다.
당시의 감옥 규칙은 죄수들에게 낮잠을 허락하는 대신 밤중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야간에 죄수들에게 잠을 재우면 잠든 틈을 타서 탈옥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밤중에는 죄수들 에게 소리를 시키거나 옛날이야기,
과거에 겪었던 경험담 등을 시켰다.
그러나 허구헌 날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기 때문에 별 재미(?)가 없었다.
덕분에 김구는 다른 재미있는 죄수들의 타령 등을 귀담아듣거나,
시조를 잘하는 자들의 귀동냥을 해서 시조의 운치를 터득할 수가 있게 됐다.
특히 기생오라비 조덕근으로부터 온갖 창(唱)과 시조를 터득해,
남창지름(창의 일종), 여창지름, 적벽가,
가세 타령, 개구리 타령 등을 배워 심심치 않게 지냈다.
특히 적벽가는 '삼국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전투의 한 장면으로 극적인 맺음이 인상 깊어 몇 번씩 되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곁의 죄수가 '황성신문' 을 보여 주었다.
거기엔 이런 기사가 나와 있었다.
0월 0일, 경성, 대구, 평양, 인천옥 등지의 강도 형 집행, 김창수도 교수형!
김구는 그 기사를 보면서도 웬일인지 동요가 되지 않았다.
죄수들은 형 집행 날짜를 받아 놓으면 초조해져 신경질을 부리거나 일부러
의연한 척하는 것이 관례인데, 김구의 마음은 의외로 조용했다.
이미 삶과 죽음을 달관했던 탓일까. 시간을 재어 보니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김구는 그날도 태연하게 독서를 하고 사람을 만났다.
김구는 이때의 심경을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아마도 고능선 선생의 영향 같았소.
고 선생은 옛 선인들의 죽음 앞에 의연한 자세를 가끔씩 이야기해 주었소.
특히 삼학(三學士)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것이 큰 작용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소."
삼학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세 선비들,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으로, 봉림 대군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결국 처형을 당했다.
'황성신문'이 배포된 후 감옥 안의 분위기는 여간 뒤숭숭하지 않았다.
감리서 사람들도 어두운 빛을 하고 있었고, 사형수 김구에게 마지막으로
면회 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이른바 산(生)조문이었다. 김구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위로 했다
"우리는 김 석사(김구)가 살아 나와 상면할 줄 알았소. 그런데 이게 웬일이오? 하늘도 무심하지."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김구가 사형 당한다는 말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김구의 어머니는 예외였다. 음식을 손수 넣어 주면서도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들이 이 소식을 알면 충격을 받을 까봐 그랬다.
당시 인천옥에서는 사형수들의 집행을 오후에 했다.
집행 장소는 우각동(牛角洞)이었고, 집행 방법은 교살이었다.
동료 죄수들은 마치 자신이 사형을 당하는 것처럼 아침부터 밥을 못 먹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들 그러시오. 여러분들이 그러면 내 마음이 편치 않소.'
김구에게 글을 배워 까막눈을 깨우친 죄수들은 제 아비가 죽었을 때보다
더 슬피 울었다.
마침내 교수대로 끌려갈 시간이 되었다. 김구는 읽다만 ‘대학'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교수대로 갈 시간이 됐는데 간수의 발그림자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밥이 들어왔다. 김구는 태연히 밥을 한 그릇 모두 비웠다.
죄수들은 김구의 초인적 (超人的)인 행동을 보면서 내심 그의 담력에 놀랐다.
"아마도 특수 죄인이기 때문에 야간에 집행을 하나 보다."
저녁 여섯 시쯤 되어 여러 사람들의 발소리와 함께 왁자지껄 저희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자신을 엮어가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참으로 짧은 인생이로구나.
세상도 살아보지 못하고 죽다니‥‥‥‥ '
하며 지난날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모두가 후회스러웠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불효했다는 죄가 몹시 걸렸다.
잘 모시고 자식된 도리를 해야 하는데, 자식된 도리를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못내 아쉬워 눈물을 흘렸다.
김구의 얼굴을 보는 동료 죄수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아까운 나이에, 아까운 인재가 오늘밤 목숨을 다하는구나."
이때다.
"김창수, 어느 방에 있나?"
"여기요."
김구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저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간수의 소리였다.
'당신은 살았소. 우리 감리 영감과 감리서 전 직원,
각 청사 직원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밥 한 술 떠먹지 못하고 기다렸소.
어찌 우리 손으로 당신을 죽일 수 있냐고 한탄하고 있었소.
그랬더니 대군주(고종황제)께서 전화를 주셨소."
이야기인즉 이랬다.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받고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고종)의 특사로 사형 직전에 집행 정지령이 내렸다.
따라서 일단 김구는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후에 김구가 안 사실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에는 두 번의 극적인 일이
있었다.
법부대신(법무장관)이 김구의 이름과 함께 사형 죄의 인지(認知)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승지 가운데 한 사람이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警)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미 재가 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황제께 보인즉, 황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인천 감리에 전화를 걸어 사형을 정지 시켰다
국모보수란 죄명을 유심히 본 승지는 황제께 이렇게 간언을 했다고 한다.
"이 죄수는 조금 특이한 죄명을 갖고 있사옵니다. 일반 살인수가 아니라
황후마마의 복수를 하다가 살인을 한 것인 바,
그냥 사형을 집행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사옵니다."
고종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일본인들에 대한 심기가 불편했던 터였다.
그런데.국모보수의 범인을 사형 집행케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일 이때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란 네 글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김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인천에 전화가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이 된 것이 바로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도착되기도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감리서에서 내려온 주사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객주(客主) 32명이 긴급회의를 하고 통문(通文) 돌리는 것을 보았소. 항구 안에 있는 집집마다 우각동에서 처형당하는 김구의 교수형을 구경 가되, 주머니에 엽전 한 냥씩 준비하고 오라고 말이오."
사람들이 돈을 모아 오면 그 돈으로 한 사람의 몸값을 쳐주고, 만일 모자라는 액수는 32객주가 부담하여 김구를 살리자고 결의했다는 것이다. 객주란 각 항구마다 무역을 관장하는 점포주를 말한다. 이들은 물동량이 많아서 큰 재산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천명으로 살아났으니 앞으로 또 다른 은명 (恩命)이 있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마음 편히 지내시오."
김구는 이 말이 마치 꿈결에서 들리는 듯했다.
역사책을 뒤져보면 간혹 사형 직전에 황제의 특명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사형 직전에 황제의 특명을 받고 살아났다지 않은가.
김구가 잠을 청하려 하자 옥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죄수들이
김구에게 다가와 제일처럼 기뻐했다.
이들은 차꼬를 두들기면서 흥타령을 부르고 죄수복 차림으로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했다.
"당신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준 이인(異人)이오.
사형을 당하는 날에도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있으니
필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오.
옛날 홍길동이도 그렇지 않았소?"
죄수들뿐만이 아니었다.
관리들 역시 김구가 특이한 인물인 것을 알고 김구를 대하기를 마치
상전처럼 했다.
김구의 어머니도 그날 밤 이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이 범인(凡人)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이인이다. 내 아들이지만 장하다. 언젠가 배를 타고 갑 곳을
지날 때 같이 강물에 빠져 죽자고 했더니 나는 살아난 다고 했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김구를 면회 오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산(生)조문이 아니라 이제는 정식으로 면회를 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 가운데 간혹 김구가 감옥에서 나와 득세하게 될 때 한자리를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았다.
관리 가운데서도 특히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창수, 자네가 이 옥에서 나와 한자리하면 나를 꼭 기억하게나.
나는 누구보다도 창수를 잘 알고 있네. 내가 창수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과 다르네. 대신 옥바라지를 계속 하겠네."
김구는 이런 대가성 있는 면회에 대해 구역질이 났다.
이런 자들은 만일 김구가 사형을 당했을 경우,
형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김구를 모른다고 할 사람들이었다.
"정말이네. 나를 꼭 기억해 주게. 낮은 벼슬이라도 괜찮네."
김구는 이들의 말에 외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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