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탁 노인 이야기
내가 탑골공원을 다시 찾은 것은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여전히 탑골공원 안은 붐볐다.
탑골공원 하면 으레 70세 이상 된, 어딘가 몸 한구석이 성치 않은 노인들,
주로 허리가 굽었다던가(이건기본). 이가 몽땅 빠져 틀니 할 돈이 없어선지
하관이 급경사를 이룬 기형의 얼굴과 지팡이 차림의 흔한 노인들로
그늘진 구석은 앉을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날 40대 중반의 장년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마도 직장에서 쫓겨났거나, 그래서 집에서 하루 온종일 있기에는 인내에
한계가 있어서 나온 사람들 같았다.
IMF한파는 탑골공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 역시 점심을 이곳에서 해결했을 성싶었다.
탁 노인과 기약 없이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어, 혹시나 탁 노인이 눈에 띌까,
두리번거려 보았다.
탁 노인 같은 기개 있는(?)노인이란 이곳의 단골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노인을 만난다는 것은 내겐 오히려 행운이었다.
여전히 탑골 공원은 무슨 일이 당장이라도 벌어질 듯 소란했다.
중세 프랑스식의 뚜껑 모자를 쓴 채 백발을 날리며 트럼펫 연주를 하는
노인은 단골손님이었고, 이 노인 곁의 40대 중년이 구경꾼들로부터
약간의 사이다 값을 받고 있었다.
아마도 그 돈은 중년의 주머니 몫이리라.
나는 한 달 전 탁 노인이 앉았던 팔각정을 올려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인의 전화번호라도 알아 둘걸, 은근히 후회가 되었다.
혹자도 간혹 느끼는 것이겠지만 나이 오십대 중반 된 사람이 탑골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웬일인지 서글퍼짐을 느끼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무상한 세월 속에 언제 저 노인들처럼 몸이 망가지고 이빨이 몽땅
빠져 의치도 못한 채 탑골 공원의 하릴없는 노인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어떤 공포감과 함께, 아무리 애써 부인하려 해도 안 되는 그들과의 선별(選別)된 생각 같은 것 들이었다
마침 배식 시간이 끝났는지 , 대다수의 노인들은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목청껏 떠들어대던 정체 모를 종교의 전도사 같은 사람도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이런데 오는 노인들은 대부분 나름대로 친구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처럼 당장 마음을 주고, 대사(大事)를 도모 하려는 의기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인생 최후의 말상대 역할로 서의 우정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누구 하면
그 노인의 신상 명세 정도는 익히 알고 있어, 특징 있는 노인을 물으면
최근의 일을 알 수가 있는 법, 그러나 탁 노인의 경우는 달랐다.
탁 노인이 매일 시간을 두고 탑골공원의 단골 자리를 점령 하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를 대하기란 그의 의중(意中)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내겐 행운(?)이었다.
한 달 전 팔각정 그 자리에 옥양목 두루마기를 걸친 채 앉아 있는 신선 같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8월 복중의 옥양목수 없었는데, 탁 노인은 여전히 옥양목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나는 노인들을 비집고 팔각정으로 갔다. 그리고 무심코 흐르는 구름을 응시하던 탁 노인의 곁에 앉아, 한 달 전의 만남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르신,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내가 묻자 곁의 인기척에 눈을 돌렸다.
혹시나 잡배(雜輩)나 아닌가 하는 눈총이었다.
그제야 탁 노인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구면이라 한결 친근한 빛이었다.
"알겠소. 한 삭(朔) 전이 아니겠소?"
"맞습니다. 어르신 기억이 대단하십니다."
나는 탁 노인을 은근히 추켜 주었다
"그 동안 젊은이는 무고했소?"
"예, 어르신 "
"난세(亂世)엔 칼잡이와 고리대금업자들이 제법 날친다는데 요즘이
그런 것 같소."
탁 노인이 이야기하는 칼잡이란 권력자를 뜻하는 것이었고,
고리대금업자란 재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 늙은이야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사귀었던 사람들과 더욱 자주 만나고 있지."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대부분 죽었고, 살아 있다고'해서 제 형상이 아니지.
어서들 가야 하는데, 죽는 것도 큰 문제요 사람이란 태어나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끗이 후손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가는 것도 큰 복이지.
젊은이는 아직 모를 거요."
"어르신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신데‥‥‥‥"
내 말에 노인은 그저 허허 웃었다.
"대체로 사람이라 일컫는 동물은 노추(老醜)를 범하지 않아야 하오.
젊은 시절에는 나라를 구한다, 정의를 위한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옛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악의 편에 서서 약자를
오히려 괴롭히는 자들이 어디 하나둘이겠소.
그래서 시종일관이란 말이 생겨났소. 처음과 끝이 같다는 이야기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김구)은 시종일관, 애국자 중에서 애국자요.
그분을 둔 이 나라는 행복한 나라요."
마침내 김구 선생의 이야기가 노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탁 노인은 김구 선생을 후미에 '님' 자란 호칭을 꼭 넣었다.
탁 노인의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감도가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탁 노인의 이야기로 미루어, 탁 노인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시대의 노인들 가운데 생존한 과거의 독립투사들과 만나 방담하는 걸
유일한 기쁨으로 알고 있었다.
탁 노인의 나이가 여든 여섯일진대, 대부분 타계를 했겠고,
남은 사람이라도 근력이 신통치 않아 후손들의 뒤치다꺼리를 받고 있을 것이
뻔했다.
"빨리들. 떠나야 할 텐데 , 업 (業)들이 너무 강한 것 같아 데려가질 않아.
그게 걱정이야."
"가다니요?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저승이지."
탁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젊은이, 사람의 일생이란 초생, 중생, 종생으로 나뉘어져 있네.
시종일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없고, 또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오.
출발을 잘 했는데, 중반 인생이 어그러져 좌절해 죽는 사람도 있고, 종반에
와서 인생 전체를 그르쳐 버린 사람이 어디 하나둘이오.
과거에 친일(親日)했던 자들이 죄를 뉘우치고 민족진영으로 돌아온 사람보다, 젊어서 독립운동을 했던 자들이 늙어서 민족반역자로 돌변해 천추에
그 더러운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소.
내 누구라고 이 야기하진 않겠소."
탁 노인의 이야기는 옳은 것 같았다 젊은 시절 반독재 투쟁에 앞장 서
국민적인 지지를 받던 사람이 늘그막에 '조국과 민족' 을 위해 독재자 편에 서서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 감투도 쓰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탁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마침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어서, 탑골공원 안으로 몇 명의 후보들이
찾아와 노인들에게 표를 구걸하고 있었다.
탁 노인이 이들을 보고 혀를 찼다.
"사람이 출세한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거나 국회의원에 뽑히는 것이 아니오. 진정한 출세와 성공은 사람의 값을 높이는 데 있소.
요즘 보아하니 아이엠에프라고 떠들어대는데, 왜 이지경이 됐는지 아시오?
돈 많이 벌고, 저마다 권력 잡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오.
돈 많이 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의 돈을 갖는 것인데,
그 와중에서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오.
또 국회의원이나 장관 자리가 그저 많은 것이 아닌데, 이것을 하자면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니겠소?"
"사람에게도 값이 있다뇨?"
나는 탁 노인의 요지가 다른 데로 흐르는 것 같아 말의 진행을 잡아 주었다.
"사람의 값이란, 얼마나 정직하게 살아왔는가,
또 이웃을 위해 마음을 쏟았는가 하는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김구)은 사람의 값을 올려놓은 위대한 분이오."
상해시절 탁 노인이 김구 선생의 문서 연락병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나는 그에게 몇 가지 김구 선생에 대해 의문 나는 점을 물었다.
탁 노인이 김구 선생의 문서연락병이었다면 김구 선생 생전에 다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 테고, 그 이야기 가운데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였던
쓰치다(土田)를 살해했던 때의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 틀림없어,
탁 노인에게 이 부분을 물었다.
"그때는 내가 열다섯 정도의 나이였소.
선생님은 나를 무척 아껴 주셨소. 나뿐만이 아니오.
선생님은 우리 또래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셨소.
그때 잠깐 들었던 것 같소. 치하포란 곳에서 선생님이 왜놈을 살해했는데 ,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말들이 많소."
내가 물었다.
"김구 선생님이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혹시나 애꿎은 일본상인을 죽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그렇소. 그러나 이렇게 한편 생각해 볼 수도 있소.
스치다가 흰 두루마기 속에 칼을 품고 조선 사람처럼 변장을 했다면
누구라도 의심을 품어 볼 만한 것 아니겠소.
그때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고,
왜놈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이 들끓고 있을 때요."
"일본 측(외무성)의 자료에 의하면 스치다란 자는 나가사키(長岐) 현 대마도
이즈하라(嚴原) 현 상인으로 되어 있고, 1895년 10윌 진남포에 도착한 후
11월 4일 황해도 황주로 가서 활동했으며, 1896년 3월 7일 진남포로 귀항하던 길이었다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애꿎은 상인을 죽인 결과가 되지 않습니까?"
내 말에 탁 노인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원래 왜인들은 간사한 무리요. 그 자료의 신빙성도 문제지만,
당시의 정세에서 왜놈들은 능히 선생님에게 일반적인 살인범으로 몰고 갈
처지에 있었소."
"그건 왜?"
"선생님을 일반 파렴치범으로 몰아넣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오.
국모시해 범인의 일당, 혹은 패거리를 살해했다면 우리국민들의 호응이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오."
"탁 선생님은 그걸 믿습니까?"
"믿고 있소.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자는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가
틀림없었소. 그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물론 직접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겠지만, 능히 시해사건에 가담할 인물이었소.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탁 노인은 춘추(春秋)시대의 오자서 (吳子脣)란 인물을 상기 시켰다.
오자서란 인물을 아는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 글깨나 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자서가 억울하게 죽은 아비와 그 형을 대해 복수했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잔인하다거나, 신의에 어그러진 자로 취급하지 않소. 불구대천이란 옛말이 있소.
부모를 죽인 자와는 하늘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김구 선생이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죽인 것은 마치 오자서가 자신의 아비를
억울하게 죽인 '평왕'과 같다는 것이오.
그러나 춘추시대의 오자서란 인물과 선생님을 비교할 수는 없소.
오자서는 그 생애를 오직 복수의 화신으로 살다간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그렇지가 않소. 선생님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소.
특히 불행한 이 백의민족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생애의 목표였소."
내가 또 물었다.
"간혹 사람들은 일본군 중위의 몸에서 나온 피를 선생님이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마셨다는 표현에 대하여 마치 잔인의 극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럴 거요. 더구나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것이오.
그러나 명성황후께서 시해를 당했을 때, 그 왜놈들이 한 파렴치한 행동은
이보다 백배 천배나 잔악했던 걸 알면 선생의 울분의 표현은 그리 대단치가
않을 것이오. 문제는 말이오."
하고 탁 노인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문제는, 선생님의 정직성이오. 선생님은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분이오. 선생은 자란 과정이나 상놈으로 어렵게 지낸 모든 것들을 일지에 소상히 기록했소. 요즘처럼 출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좇는 세상에 선생님은 자신에게 철저했던 것이오. 선생님은 출세 따위는 염두에 두질 않았소. 독립된 조국에서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오."
탁 노인은 태어난 보람을 김구 선생과 만났던 것으로 찾고 있었다.
탑골공원에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한 떼의 노인들이. 빠져나가자,
남은 사람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부랑자 몇 사람이었다.
이윽고 4개의 문이 닫히자,
노인과 나는 서둘러 탑골 공원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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