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아, 대한제국
그 즈음의 국내사정은 이랬다.
개항 이후 자본주의 열강은 조선에서 갖가지 이권을 빼앗아갔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다음 열강의 이권침탈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에 의지하는 국모(명성황후)를
일본 낭인들은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세웠다(1894년 을미사변).
고종과 친러파는 아관파천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고종은 1년 남짓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냈고,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열강은 황실을 보호해 주는 대신 각종 이권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허약한 황실은 이를 허락했다.
광산, 임 업 , 어업 등 자원과 철도, 해운, 전차, 전기, 전신 등 교통 통신에 관한 이권이
일본, 미국, 러시아, 프랑스, 청, 영국, 독일로 죄다 넘어갔다.
무역을 통해 외국 자본들이 침투해 왔다.
그 결과 조선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기초자원은 고갈되었고,
성장 하던 국내 자본은 발전의 싹을 꺾였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위협적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이권을 빼앗고 대외 무역과 내지 상권까지 독점하다시피 했다.
조선의 수출품은 발과 콩 같은 곡물이대부분이었다.
쌀의 경우 1891년에 94만석, 1909년에 154만 석이 수출되었는데,
이는 총생산량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수입품은 석유, 성냥, 화장품부터 모피, 카펫 따위의 고급품에 이르기까지 2백여 종류에 달했다.
대개 일본, 청, 영국, 러시아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물건이었다.
이 물건들은 부산, 인천, 원산, 용산, 마포 등지에서 부려져
등짐장수나 봇짐장수에 의해 집집마다 보급이 되었다.
장수들은 현금이 아닌 쌀, 콩, 깨로 값을 치르고, 이렇게 해서 모아진 곡식은 배에 실려 수출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쌀과 콩을 본국에서 몇 배의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한편 조선에서는 쌀 부족사태가 일어났다.
따라서 쌀값이 폭등 했다.
지주는 소작료로 받은 쌀을 저장해 두었다가,
가격이 오르면 내다 팔아 큰돈을 벌고,
그 돈으로 많은 땅을 더 사들였다.
그러나 소작인, 빈농들은 추수가 끝나자마자 거둬들인 쌀을 소작료로 바치거나,
당장 급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장에 내놓아야만 했다.
땀 흘려 농사짓고도 비싼 쌀을 사 먹어야 하는 농민들의 입에서 한숨 소리만 흘러 나왔다.
"금년 농사가 작년보다 풍년이긴 한데,
왜놈들이 훑듯이 쌀을 사가니 곡가는 뛰고 가난한 농민은 더욱 살길이 막막하구나."
당황한 조선 정부가 방곡령을 내려 쌀 수출을 금지시키면,
일본은 조약위반이라고 위협하여 방곡령을 철회토록 했다.
외국자본의 침투와 함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촛불 대신 석유등잔이 쓰이고, 부싯돌 대신 성냥이 쓰였다.
'구리무' 라고 하는 화장품에 여인들은 넋을 잃었다.
도포 대신 두루마기, 서양 양복과 조끼가 유행 되였다.
두루마기는 상것들이나 입는 것이라고 반대하던 양반들도 두루마기를 입었다.
전에는 넓은 도포 소매에 주머니를 만들어 소지품을 넣곤 했는데,
주머니 달린 조끼가 유행되어서 이 조끼 주머니는 개화주머니라고 했다.
옷 빛깔도 흰색과 회색 일색에서 검은 옷을 많이 입게 되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옥양목(玉洋木)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옥 같은 서양옷감이라고 해서 옥양목이라 불리운 이 영국산 면직물은
조선의 면직물 산업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조선의 목화가 싼값에 팔려 나가 옷감이 되어 되돌아왔다.
상투를 자르고 담뱃대 대신 궐련을 입에 물고, 옥양목 조끼에 두루마기 입은 신사가
문명개화의 상징인 양 서울 거리를 활보했다.
조끼 안에는 길게 줄을 해서 시계를 매달았다.
그러나 조정의 사정을 알고 보면 점차 망국(亡國)의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이미 닻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온갖 외국 물건이 판치는 가운데 친일파들이 득실대고,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이 호시탐탐 궁궐을 노리고 있었다.
1898년 10월 29일 오후 3시 , 서울 종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단상에는 천막이 쳐 있고,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의정부 참정 박정양을 비롯해 중추원 의장 한규설, 법부대신 서정순, 농상공부대신 김명규,
탁지부대신 고영희 등 정부 관료들이 나타났다.
"황제께서 우리들에게 이 자리에 참석하여 이국편민의 방책을 들으라 해서 왔다.
이 자리에서 협의한 내용을 돌아가 아뢰겠다."
박정양이 말하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맨 먼저 백정 출신 박성춘이 단상에 올라왔다.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몰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국편민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 친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 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반만년 이어지도록 하게 합시다."
박성춘의 뒤를 이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단상에 올라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 집회를 일컬어 만민공동회라고 부른다.
이 자리에서 황제에게 건의하는 '헌의 6조'가 발표되었다.
1. 외국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고 관민이 동심 합력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케 할 것.
2. 광산, 철도, 석탄, 삼림 및 차관 차병 (借兵)과 모든 정부와 외국과의 조약의 일은,
정부대신과 중추원의 의장이 합동하여 날인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3. 전국재정은 어떤 조세를 막론하고 모두 탁지부에서 관장 하되 ,
다른 부서와 사(私)회사는 간섭할 수 없으며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표할 것.
4. 이후 모든 중죄범은 공개재판을 시행하되 , 피고가 자복한 후 지행할 것.
5 칙얌관(勒任官)은 대황제 페하께서 정부에 자순(諮諦)하여 그 과반수에 따라 임명 할 것.
다음날 종로에는 다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고종황제의 재가를 기다렸다
"헌의 6조는 마땅히 실시할 것이며 그 밖에도 몇 조항을 첨가해 조칙으로 발표할 것이니
해산하여 기다려라."
고종은 이렇게 명을 내렸다
11월 2일,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 설립 안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추원 의원 50명 중 과반수는 정부가 국가에 공로 있는 자로 천거하고,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하게 돼 있다.
독립협회와 서울 시민들은 환호 했다
그런데 그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에 의해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해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회장 윤치호는 체포 직전 몸을 피했다.
만민공동회에 참석한 박정양 이하 정부 관료들도 해임되고,
대신 조병세, 조병식, 박제순, 민영기 등이 그 자리에 앉았다.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선거 전날 수구파는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하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외부대신 정교 등으로
정권을 쥐려 한다는 익명서를 거리에 내다 붙였고,
익명서에 놀란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렸던 것이다
최초의 의회성립 운동은 이렇게 무산되었다.
날이 밝자 민중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열고 사건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상인들도 이에 호응 철시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11월 10일 체포한 17명 전원을 석방했다. 하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헌의 6조 실시,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이기동 등의 처벌, 독립협회의 부활을 요구 했다.
수구파는 각지의 보부상을 서울로 불러들여 황국협회를 즉석에서 인가해 주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게
했다.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는 매일 유혈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11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다.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는 본래 관료들의 사교단체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로 출발했다.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등 이른바 정동구락부라 불린 친미, 친러 경향의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계몽 운동에 나섰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 '대조선 독립 협회 회보 못지않게 충실한 협회의 대변지 역할을 했다.
1898년 3월,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을 격렬히 성토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독립 협회를 이끈 사람들은 시장개방을 통해 상업을 진흥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공업과 농업을 발달시킨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열강의 이권침탈은 외국자본 도입수단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영국, 일본, 미국의 이권침탈은 반대하지 않고 러시아와 그 동맹국 프랑스의 이권침탈에만
반대했다.
김구가 동학에 입도하고 있을 때 국내의 정세는 이렇게 앞일을 예측 못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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