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3.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의 쉼터 2012. 12. 26. 00:25

 

3.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김구가 고향에 돌아온 것은 갑오년 1894년이었다.

이해에 동학전쟁이 시작되었다.

김구가 살고 있던 황해도에도 양반과 관리의 압제가 말이 아니었다.

삼남(三南)에서 향응하라는 경통이 잇따라 도착했다.

김구와 I5인의 접주들은 회의를 했다. 접주 한 사람이 의견을 냈다.

  "거사를 하라고 하는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의견을 통일합시다."

  마침내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총집결 장소는 포동 부근 시장인 죽천장(竹川場)으로 정했다.

그리고 각지에 경통을 보냈다.

  김구는 팔봉산 아래쪽에 산다고 해서 팔봉(八峯)이란 접명 (接名)을 지었다.

그리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소(八峯道所)란 큰 글자를 적었다.

팔봉도소란 팔봉사령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표어로는 척왜척 양(斥倭斥洋), 일본과 양인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거사하면 경군(京軍)과 왜병이 와서 접전을 할 테니,

동학 연비 중무기 가진 자를 선발합시다."

 


  김구의 연비 가운데는 산포수가 많았다.

포수란 총이 필수품이기 때문에 이들은 총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김구의 연비 들은 가끔씩 부잣집에 들러 호신용으로 쓰이는 총을 거둬들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연비 자신의 것들이었다.

부대를 편성해 보니 충 가진 자가 7백여 명쯤 되었다.

김구의 부대는 다른 접주보다 무장한 자가 월등히 많았다.

이윽고 최고회의가 열렸다.

  "황해도의 수부(首府)인 해주 성을 먼저 함락하고,

탐관오리와 왜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입시다. "

  김구의 말은 곧 명령이었다.

어떤 질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의분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수장이 결정하면 곧 그것이 실행되었다.

최고회의에서 결정을 본 김구 일행은 즉시 출동했다.

김구는 선두에서 말을 탔다.

그리고 선봉(先鋒)이란 깃발을 잡았다.

김구를 선봉으로 한 것은 김구가 평소에 병법 (武學)을 연구했고,

그의 접이 산포수로 무장이 잘되었기 때문이었다.

  해주성 밖 선녀산(仙女山) 위에 진을 친 총사령부는 김구의 명령에 움직였다.

김구는 접들에게 아래와 같은 계획을 제시했다.

  "지금 성내에는 경군(京軍)이 도착하지 않았다.

오합지졸로 편성한 2백여 명의 수성군(守城軍)과 왜병 7명이 있다.

먼저 선발대가 남으로 진격하면,

내 지휘하의 선봉부대는 최대의 속력으로 서문을 공격하여 함락할 것이다.

총사령부에서는 정황을 보고 아군이 허약한 곳을 공격한다."

  김구의 계획은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훈련된 군사가 아니었다.

농민들이나 포수들로 만든 급조된 군사들이었다.

작전을 개시할 무렵 왜병들이 성 위로 올라갔다.

왜병 한 명이 총을 한 방 쏘았다.

  "탕 !"

 


  난생 처음 총소리를 들어 본 선발대는 이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도주하기 시작했다.

  "겁낼 것 없다. 도망가지 말라!"

  김구의 말을 선발대는 듣지 않았다. 김구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런 자들을 이끌고 싸움이라니 한심한 일이로다.'

  전열이 흐트러지자 왜군들은 신이 나는지 연발로 쏘아댔다.

  "탕탕탕!"

  김구는 도주하는 군사들을 억지로 달래,

선봉대를 이끌고 서문 아래에 도착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총 사령부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퇴각하라!"

  선봉대가 퇴각을 위해 머리도 돌리기 전에 사령부 소속(道所)의 병사들은 산과들로 도망을 쳤다.

그들은 왜 죽을 둥 살 둥 도망을 하는가,

그 연유를 다른 자에게 물었다.

  "도유(道儒) 몇 명이 남문 밖에서 왜군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겁이 나서 도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거야 싸움터에서 늘 상 있는 일이지.

군사 서너 명이 죽었다고 도망을 한다면 싸움은 어찌하겠소."

  김구가 이끄는 선봉군도 퇴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구가 이끄는 접은 정신훈련이 되어 있어선지

그래도 정연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퇴각을 했다.

김구는 해주 서쪽 80리 후방인 회학동 곽감역에 집결하기로 했다.

나중에 군사들을 점검'해 보니

김구 휘하의 병사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집결했다.

 


김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군사들이 총 한 방에 도망을 할 정도라면, 이들을 갖고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가,

그래서 김구는 동학교도건 아니건 간에 각 지방에 장교와 무력을 갖고 있는 자들을

정중히 모셔 오기로 했다.

장교란 구식군대가 해체될 때 제대한자들이었다.

이들을 소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들에게 총술, 체조, 행군 등을 교련시켰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자들이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으려니 잘될 리 있겠는가.

핫바지 차림의 농군이 교련을 한다고 들뛰는 모습은

마치 메뚜기가 뜀 방아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이 김구를 면회하러 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문화 구월산 아래에 사는 정덕현과 우종서라고 소개했다.

이들의 형색이 심상치 않아 김구는 정중히 모셨다.

선비 같았다.

김구 보다 열 살 정도는 많아 보이고, 아는 것이 많아 보였다.

  "어떤 영문이신가요?"

  그러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태연히 대답했다.

  "원래 동학군이란 놈들은 한 놈도 쓸만한 놈이 없다고 하던데, 그

대가 조금 이들보다 낫다고 해서 찾아왔소,"

  김구는 속으로 불쾌하게 생각되어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동학군 놈들이라고 비하를 하니 기분이 내킬 리 없는 일이다.

곁에서 다른 접주가 불쾌한 눈으로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김구는 이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김구의 연비들이 내놓고 불만을 토해냈다.

  "동학군 놈들이라니? 저자들은 분명 첩자가 틀림없소. 처치해 버립시다."

  어떤 사람들은 칼을 매만지기도 했다. 김구는 이들에게 화를 냈다.

  

  "손님과 면담하는데 이 무슨 무례한 짓들인가!

이것은 나를 돕는 일이 아니라 멸시하는 일이다."

하고 꾸짖고 그들을 방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공손히 예우를 갖췄다.

필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계책을 일러주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들이 이처럼 먼 곳까지 오신 것은 제게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정씨가 대꾸했다.

  "우리가 좋은 대책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선생들이 그것을 실행할는지 의문이오.

무릇 계책이란, 그것을 실행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아니겠소?"

하며 더 나아가 이번엔 김구를 아주 무시하는 태도로 물었다.

  "동학군의 접주라는 자들이 의기충천해서 선배를 무시하는 판국에, 군도 동학의 접주가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김구는 애써 참았다. 쓴말이 오히려 영약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릇이 작은 자일수록 화를 잘 낸다는 말도 있듯이, 감정을 먼저 표출하는 자가 지는 법이다.

  김구는 조금 전보다 더욱 공손하게 물었다.

  "먼저 가르쳐 주신 뒤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본 다음,

다른 접주와 마찬가지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김구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방책을 말했다. 그것은 아래와 같았다.

 


  첫째, 군기정숙. 병졸에게 서로 절하거나 경어를 쓰는 것을 폐지할 것.

  둘째, 민심을 얻을 것.

  동학당이 총을 갖고 마을을 배회하면서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질을 하는 것을 금할 것,

  셋째, 현자(賢者)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경륜 있는 인사를 많이 구할 것.

  넷째, 전군(全軍)을 구월산 안에 모아 군사훈련을 시킬 것.

  다섯째, 재령 ·신천 두 군에 왜놈이 무미 (貿米) 수천 석을 쌓아 두었으니

  그것을 몰수하여 패엽사(貝葉寺)로 옮겨 양식을 충당할 것.

 

 

 

  두 사람의 경륜은 대단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구는 이들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일찍이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갔을 때 삼고초려를 했다는데,

마치 제갈량이 스스로 걸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구는 곧바로 전군을 소집하여 정씨를 부관 격인 모주(談主)로,

우씨를 종사(從事)로 선언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최고의 예를 표했다.

  "군사들은 듣거라.

지금부터 내가 군령을 발표할 테니 만일 위반자들은 태(苔)와 곤(棍)으로 다스리겠다.

그리고 전군은 구월산으로 옮긴다."

  작전은 곧 개시되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밤,

신천(信川)의 안 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 태훈(泰勳)은 회학동에서 동으로 20여 리 천봉산(千峯 山)이란 큰 산 너머에 있는

신천군 청계동에 살고 있었다.

안태 훈은 동학에 맞서 격문을 뿌리고 의병을 일으키고 또 산포수를 불러 모으는 등,

 동학으로서는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안태훈의 아들 안중근 역시 아버지와 함께 동학에 맞서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안태훈의 부대는 그 아들 안중근 등의 활약으로 동학 접주 원용일 부대 2천여 명을

대파한 적이 있었다.

1894년 12월의 일이었다.

안태훈은 동학에게는 매우 두려운 존재였지만

그의 문장과 글씨, 그리고 지략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동학을 소탕하기 위해 동생과 아들까지 동원, 병사를 담당케 하고

3백여 명의 산포수를 모집했다.

 

 

동학에 맞선 사람들

 

 안태훈은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義旅所)란 것을 세우고,

경성모 대신의 원조와 황해감사의 지도 아래 동학토벌에 나서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의 각 접은 이런 안태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김구 역시 안태훈의 존재에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안태훈이 그에게 밀사를 보내온 것이다.

  정씨 등이 밀사를 만나 본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안태훈은 비밀리에 김구의 사람 됨됨이를 조사했던 것이다.

  밀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군이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인품을 지닌 것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아껴 토벌하지 않겠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괴멸당하는 불행을 당하면 그것이 몹시 애석하노라."

  그래서 밀사를 보낸다는 뜻이었다.

  김구는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 결과 '먼저 치지 않으면 우리도 치지 않겠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 ‘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김구의 군대는 구월산 패엽사로 옮겼다.

패엽사는 조그만 암자와 같은 절이었다. 패엽사에 본영 (本營)을 두고,

입구에 파수막을 두어 군인의 산 밖 출입을 엄금했다.

  신천군에는 왜놈들이 비치한 백미 1천여 석이 있었다.

그래서 방을 붙였다.

  '백미 일석을 패엽사까지 운반하는 자는 백미 서 말을 준다.'

  그랬더니 그 백미가 하루 만에 모두 패엽사까지 운반되었다.

김구는 군율이 다소 느슨해진 것 같아 다시 군기를 잡았다.

  "동학당을 빙자하여 금전을 강제로 뺏거나 행패하는 자가 있으면 곧 보고하라.

고발되는 대로 체포하여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뺏고 곤장과 태장으로 다스리겠다."

  김구는 군이 있는 마을에서, 마을 민을 보호하는 것이 선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부터 이런 군율이 먹혀 들어갔는지 민심이 안정되었다.

김구가 여기서 하는 일이란 군사전술과 정신교육이었다.

군사교육으로는 실탄연습, 즉 사격술을 시켰다.

그리고 도인(道人)이나 현인(賢人)을 초빙하여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방법'에 대해 강의를 하게 했다.

  김구는 원래 무(武)보다도 문(文)을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더 낫고, 깨달은 사람을 사귀기 좋아했다.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어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노력한 사람이었다.

  김구는 깨달은 사람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던 중 신천군 월정동(月精洞)의 송종호(宋宗鎬)란 사람이 지혜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모셔다가 스승으로 삼았다.

  송 선생은 일찍이 상해 등지에 다녀와 해외 사정도 밝았고,

 사람 됨됨이가 쩨쩨하지 않고 걸출하여,

난세가 아니라면 정부에 들어가 큰 벼슬을 할 사람 같았다.

이런 시골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또 한사람이 있었다.

풍천군(豊川郡)에서는 허곤(許坤)이란 사람이 찾아와 김구에게 합류했다.

  패엽사에서는 도승으로 명성이 자자한 하은당(荷隱堂)이란 스님이 주지로 있었는데,

그 제자와 학인을 합쳐 수백여 명의 남녀 승도가 있었다.

김구는 하은당 스님에게 가끔씩 찾아가 도학을 들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보다도 자신이 남을 알아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김구는 남을 먼저 알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위에는 많은 현인들이 있었고 이들로부터 여러 가지 자문을 들었다.

  패엽사에서 김구 일행은 가끔씩 최고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최고회의에서 각 접주들이 김구에게 건의했다.

  "경군(정부군)과 왜군이 해주 성을 점거하고, 주위에 흩어진 동학교도를 소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점차 서쪽으로 옹진, 강령 등을 평정하고 학령으로 넘어온다고 합니다."

  이 당시 구월산 주변에는 이동엽 (李東嬅)이란 접주가 이끄는 동학군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학군들의 군기가 엉망이어서, 이들은 민가에 행패를 부리기가 일쑤였다.

이 부대의 동학군이 패엽사 부근의 촌락을 노략질하다가 김구가 이끄는 동학군에게 잡혀

기를 빼앗기고 벌을 받은 후 돌아가기도 했다.

  "동학군의 군기가 느슨해져서 무슨 대책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동학군 가운데 부하 몇 사람이 촌락으로 내려가 재물과 보물을 약탈하다가 발각돼

엄한 형벌을 받으면 이동엽의 군대로 도망가기 일쑤입니다."

 


이들은 아예 이동엽의 부대로 들어가 동학의 임무를 버리고 도적질을 상습으로 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구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상이었다.

최고회의는 기회를 보아서 김구가 쓰고 있는 각종 감투를 벗기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그에게 병권(兵權)을 뺏자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을 보전케 하려는 계획이었다.

회의의 본안은 허곤을 평양에 보내어 장호민의 소개로 황주병사(동학조직의 병권 관장자)의

양해를 얻고 난 뒤, 패엽사에 있는 군대를 김구 대신 허곤에게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구의 나이 열아홉 살, 갑오년(1894)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용선(李龍善)이란 사람에 대해 설명을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용선은 함경도 정평(定平) 출신인데 원래 장사꾼이었다.

그는 사냥하는 기술이 뛰어났지만 무식했다.

그러나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그를 화포영장(火砲領將)에 임명했다.

  김구의 나이 열아홉 살 때 신열과 두통이 심해 병석에 누워 있었다.

홍역이었던 것이다.

주지스님 하은당이 문병 와서 김구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아마도 홍역 같구나. 홍역도 치르지 못한 대장이구려."

하며 영장인 이용선이 김구의 방을 출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치료를 해주고 나이 든 수좌 여승으로 간호케 했다.

(필자 주(註), 하은당 스님은 김구가 마곡사에서 스승으로 모신 스님이 아니다.

동명이인이거나 김구의 기록이 잘못 되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려 둔다.)

 


  어느 날,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김구의 군대를 공격한다는 전갈이 왔다.

이동엽은 부하들을 이끌고 절 안으로 쳐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그리고 물건들을 약탈했다.

  "김 접주는 손대지 마라 김 접주에게 손대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

  이동엽은 난리의 와중에서도 김구에게는 털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이동엽이 김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김구를 해치면 나중에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이동엽은 해월 선생 이 직접 임명한 정통접주가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임종현으로부터

임명받은 접주였다.

임종현은 황해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중 가장 과격한 지도자였다.

이동엽으로서는 만일 김구를 해치게 되면 정통으로 이어받은 접주를 살해했다는

죄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이동엽은 영장 이용선만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김구는 이 말을 듣고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이용선을 죽이면 안된다! 이용선은 나의 지휘명령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이다.

이용선을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라!"

  김구가 외치자 그들은 김구의 손과 발을 결박했다.

그리고 이용선을 끌고 나갔다.

  얼마 후 동네 어귀에서 총소리가 났다.

절 안에 있던 이동엽 의 부하들은 모두 퇴각을 했다.

이동엽의 부하 한 사람이 이용선이 총살됐다고 했다.

김구가 달려가 보니 이용선은 이들의 총에 맞아죽어 있었다.

그리고 입은 옷이 불에 타고 있었다.

 


  김구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서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 주었다.

김구가 벗어준 저고리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동학의 접주노릇을 한다고

대견하게 생각해 지어 보낸 명주 저고리였다.

김구는 동네 사람들을 지휘하여 이용선의 시신을 정성껏 묻어 주게 했다.

김구는 눈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호곡을 했다.

이 모습이 보기가 딱했던지 이웃 사람들이 입을 것을 갖다 주었다.

나중에 이용선의 아들과 조카가 와서 시신을 이장할 때 김구의 저고리로

시신을 싼 것을 보고, 김구에게 나쁜 감정 대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돌아갔다.

이용선이 죽은 날 밤 김구는 부산동(缶山洞)의 정덕현에게 가서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정덕현은 지사답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오. 그러나 세상살이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소.

그냥 넘길 것은 넘겨 버립시다.

물론 이용선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오.

그렇다고 당장 감정을 앞세운다는 것은 더 큰 화를 자초할 뿐이오."

  "아닙니다. 이용선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김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 선생은 이런 김구의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복수는 의리에 비춰 당연하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오.

경군과 왜병이 아직 구월산을 소탕하지 못하는 것은 산 밖의 이동엽 부대가 막강하기 때문이오.

또 산속 패엽사의 우리 부대가 험한 산세에 의지하고 또한 정예부대라고 탐문했기 때문이오.

만일 두 부대가 싸움을 벌인다면 그들은 어부지리를 얻는 형세가 아니겠소.

즉각 이동엽 부대를 격파하고 곧 우리 부대를 섬멸할 것이오.

지금은 복수를 말할 때가 아니라고 보오."

정 선생의 이야기는 사리에 맞았다.

안목이 대단했다.

 


  "김 접주는 아직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혈기가 왕성하여 자칫 이 혈기는 일을 그르치기가 싶소.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는 것은 결코 이로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요."

김구는 정 선생의 집에서 2, 3일간 요양을 한 다음,

난을 피해 장연군 몽금포 부근으로 와서 3개월간 요양을 했다.

이때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다.

이동엽이 사형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각 군의 동학군이 모두 소탕되었다는 나쁜 소식이었다.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는 결국 그 생명이 짧다는 것을 김구는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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