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2. 낙방 거사 

오늘의 쉼터 2012. 12. 26. 00:24

2. 낙방 거사

 

 

 

 

 원래 김구의 아버지는 아들을 큰 학자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야심이 있어서 서당에 보낸 것은 아니었다.

아들의 머리가 총명하고 배우겠다는 집념이 워낙 강해

그대로 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글이나 깨우치고

문중에 먹물 든 사람으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한 소박한 심정에서였다.

상놈의 자식으로서 학문을 지나치게 연마하다 보면 오히려 양반들로부터

질시를 당하거나 엄중한 피해를 입게 됨을 아버지는 경계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구의 생각은 달랐다.

글에 양반 상놈이 어디 있는가,

글이란 사람을 깨우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김구는,

남들과 같이 과거에 급제도 하고 출세도 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찼다.

 

임진년(壬辰年, 1892)김구의 나이 17세에 경과(慶科)를 해 주에 거행한다는 공포가 있었다.

경과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가끔씩'보는 과거를 말한다.

정 선생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다소 걱정이 된다는 듯 말했다.


"이번 과거에 창암이(김구)를 데리고 가면 좋겠네.

그런데 글씨가 문제야 글씨를 분판에 쓰면 괜찮겠는데 그렇지가 않네.

과거 답안지와 같은 종이에 연습하지 않으면 잘 쓸 수 없을 것이네.

 


  그러니 장지(狀紙)에 연습하면 되겠는데 노형도 가세 가 빈한하여 서 ‥‥‥‥

  장지 란 두터운 한지 (韓紙)의 일종으로서 과거 답안지로 사용되었다.

정 선생의 이야기인즉, 김구가 이런 고급 종이에 연습 하려면 약간의

종이 구입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김구의 아버지는 이 말에 응답했다.

"종이는 내가 주선 함세 창암이는 글씨만 쓰면 되는 것이겠지?"

"글은 내가 지어 주겠네."

 정 선생의 말에 김구의 아버지는 기뻐서 장지 다섯 장을 구입했다.

김구는 너무도 기뻐서 필사(筆師)의 교법대로 정성을 다해 연습을 했다.


그러나 과거 비용이 큰 문제였다.

부자(父子)는 먹을 좁쌀(栗米)을 등에 지고 해주로 떠났다.

해주에 도착한 부자는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계방 집에 짐을 풀었다.

 


 시험 당일, 해주 관영은 사람들로 붐볐다.

선화당(宣化堂) 옆 관풍각(觀風閣) 주변 사방에는 새끼줄로 사람들의 접근을 못하게 했고,

정면의 과거장 입구는 선비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의 무리로 주변은 넘실댔다.

흰 베에 산동접(山洞接)이니 무슨 접이니 하는 이름을 써서 장대에 매달고,

자기 접의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고,

종이 양산에 도포 쓰고 두건 쓴 선비들이 아들뻘 밖에 안 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들어가는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침울하게 했다.

권세를 얻기 위함은 노소가 다름없었다.

 


  또 하나, 김구의 마음을 울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乞科)하는 모습이었다.

걸과란 소과(小科)에 떨어진 늙은 선비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시관(試官) 면전에서

자기 실력을 다시 시험해 달라는 것이지만, 실력도 없으면서 무조건 합격시켜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다.

늙은 선비 몇 명이 관풍각을 향해 새끼줄 구멍 사이로 머리를 빠끔히 들이밀고 애원했다.

집에서는 웃어른으로 존경받을 늙은이가, 이런 자리에서는 체면이 하는 모습이 오히려

측은하게 보였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개이온데 금년 나이 칠십이 넘었습니다.

슬하에 손자 ·증손자까지 있사오나, 아무래도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이번에 꼭 급제를 해야만 할 것 같사옵니다.

요다음 다시 과거에는 참석하지 못하겠사온즉,

초시(初試)라도 합격해야만 되겠습니다.

너그러이 양지해 주소서."

 

또 어떤 노인은 큰 소리로 땅을 치며 통곡을 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굴의 극치였다.

  김구는 정 선생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이번에는 아버님 명의로 과거 답안지를 작성했으면 합니다."

  정 선생이 그 이유를 물었다.

  "저는 다음 기회가 또 있지 않습니까?"

  정 선생은 김구의 마음씨가 갸륵해서 이를 수락했다.

이때 곁의 어느 접장(接長)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네 아버님 답안지의 글씨는 내가 작성해 주마.

네 글씨가 나만 못하기 때문이다.

훗날 너는 공부를 더해서 직접 짓고 쓰도록 해라."

 


  김구는 이 말에 너무 고마워 눈물까지 글썽였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정 선생이 짓고 곁의 접장이 쓴 아버지 명의의 과거 답안지를

새끼줄 망 사이로 시관에게 쏘았다.

 원래 과거 시험장에는 수험생 이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에 과거제가 문란해지면서 수험생을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는 폐단이 생겼다.

자연히 부정행위가 생기게 되었다.


  김구와 동행한 정 선생 역시 김구에게 과거에 필요한 도움을 현장에서 주었던 것이다.

시험장에서는 당시 과거제의 문란함을 빗대는 말들이 떠돌아 다녔다.


그것들은 대략 이랬다

"통인(通引)놈들이 시관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과거 답안지를 한 아름 도적질해 갔다.

또 남의 답안지를 몰래 훔쳐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돈만 많으면 과거를 볼 필요도 없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선비의 글을 몇 백 냥, 몇 천 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급제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시관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여,

서울의 아무개 대신에게 미리 손을 써왔지. 나는 반드시 합격한다."


  이 말에 다른 수험생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나는 말일세, 시관의 수청 기생에게 미리 손을 썼지.

  수청 기생에게 중국에서 나는 비싼 주단을 선물로 주었네."

  김구는 이들의 말에 과거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하면 무엇 하겠는가.

돈과 배경만 있으면 과거 합격이란 땅 집고 헤엄치기 아닌가.

결국 돈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합격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가 이 꼴이라니

아무 접장, 아무 선생 모양, 과거장의 대서업 자에 불과할 것이니

다른 길을 모색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님, 제가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하여서

강씨 놈 이씨 놈들에게 당한 설움을 풀어 볼까 했는데,

그 유일한 방법인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도저히 불가능하지 않나 생각되옵니다.

비록 큰선비가 되어 강, 이씨를 압도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큰 재력이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공부를 더 계속하려면 재력이 다소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 또한 가난하니,

앞으로는 서당 공부를 그만 하겠습니다."

이 말에 그의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김구가 스스로의 분수를 안다고 여겨 기특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부는 어떤가? 풍수(風水)나 관상(觀相) 공부를 해보도록 해라 "


  풍수에 능하면 다소나마 궁핍함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복록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관상을 잘 보게 되면 선한 사람과 군자를 만나서 출세 길도 트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김구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치에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서적이 있어야겠습니다."

  김구의 아버지는 그에게 '마의상서(麻衣相書)' 한권을 빌려다 주었다.

'마의상서'란 관상가들의 경전으로 치는 책으로서,

달마 대사가 지은 '달마상법'과 마의도사가 지은 '마의상법' 가운데의 하나였다.

'달마상법'은 불교식으로 쓰인 상법이었고,

'마의상법'은 도가(道家)계의 대표적인 관상 책이었다.

 


  김구는 독방에서 이 책을 원전으로 관상학 공부에 열중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관상학을 공부하는 방법이란 대략 이랬다.

  먼저 거울로 자신의 상(相)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혀야 한다.

또 이것을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 적용해 나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자신의 상을 관찰했다.

김구는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으나 이렇다 할 귀격 (貴格)이란

한 군데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김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솔직히 자신의 상을 털어놓았다.

  "나는 한 군데도 귀격이라곤 없다. 부 격(富格)도 없다.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 격 밖에 없다. 그러니 타고난 상놈이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관상서를 공부했으나,

오히려 관상서를 연구하다 보니 더욱 큰 실망에 빠졌다.

짐승처럼 고기나 먹고, 배설이나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관상으로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애시 당초 틀려먹은 일이다."

  김구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좀 못생겼다면 부격이라도 있어 돈이라도 붙어 있어야 할 텐데,

세상에서 온갖 못된 것들만 얼굴에 붙어 있으니 조물주도 너무 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의 생김새란 이비인후과, 즉 귀와 코, 눈, 입술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들이 조화가 되어 보기가 그럴듯해지거나,

그 사람 부티가 난다거나, 얼굴은 썩 빼어나지 못했지만 귀골상이라든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할 텐데 하나같이 천티가 나는 물건(?)들이었다.

이런 얼굴 갖고서 한 세상 살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와 닿은 글귀가 있었다. '


상서(相書)' 가운데의 한 구절이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김구는 이 구절을 읽고 마음을 바로 먹었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보다는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뜬구름 같은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그것 역시 막막하였다.

 


  김구는 '상서'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이 책 저책을 섭렵 하였다.

지리에 관한 책 (地家書)도 좀 보았으나 와 당지가 않았다.

'손무자' , '오기자' , '삼략' , '육도' 등의 병서(兵書)를 섭렵해 보았으나

자신의 실력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자신의 마음에 꼭 와 닿았다.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다.

  병사들과 함께 고락을 한다.

  나아가고 물러섬을 범과 같이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지지 않는다.

등의 구절은 읽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이 당시 나라 곳곳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나라가 뒤숭숭하고 국운이 쇠진하면 자연 흉흉한 소문이 나돌게 되는 법이다

신라 말년에도 그랬고, 고려 말년에도 그랬다.

 불가사리란 괴이한 동물이 나타나 전국의 쇠를 먹어 치운다는 소문이 그것이고,

이씨 조선이 망하고 장차 정 도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정감록'이 또한 그것이었다.

이런 소문들은 가뜩이나 겁 많고 선량한, 또 가난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데

한몫을 더해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인(異人)이 나타나 바다에 떠다니는 기선을 꼭 붙잡아 놓고 세금을 받고 있다."

  "내가 들은 소문은 또 이러하네.

정 도령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해 이조 국가는 장차 없어질 것이라네,

다음 세상에 우리가 양반이 되려면 계룡산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데‥‥‥‥"

 

  '정감록'등을 비롯한 당시의 비기(秘記)류의 책들이 나돌고 있었는데,

이 책들의 내용들은 그렇지 않아도 나라에 불만이 많고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가난하고 권세 가진 자에게 억압받던 백성들은 누군가 나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염원하게 마련이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의 메시아라든가,

파라오에게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모세는 그래서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이때 김구의 동네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포동(浦洞)에 사는 오응선과

그 옆 동네에 사는 최유현이란 사람이, 충청도에서 최도명이란 동학 선생에게 입도해

공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이야기인즉 이랬다.

 


  "최도명이란 사람이 도인인 것은 틀림없다.

방문을 열고 닫음도 없는데 흘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공중으로 걸어 다니곤 하네. 최 선생은 하룻밤 사이에 충청도를 왔다 갔다 하는데

축지법을 쓰는 것 같네."


  이야기에 가지를 치면 신선이 된다던가? 이 말은 김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김구는 원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고,

늘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김구는 최도명 선생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예식이 필요했다.

고기를 먹지 않고, 목욕재계를 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가야만 접대를 한다고 했다.

이때의 심경을 김구는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나이 열여덟이 되는 계사년(1893) 정초,

나는 고기를 먹지 않고 목욕하고 머리를 땋고,

청포(靑袍)에 녹대를 매고 포동의 오씨 댁을 방문했다.

문에 이르자 방에서는 무슨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데 시나 경전을 읽는 소리와는 다르고

노래를 합창하는 것 같았으나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공경하는 자세로 문에 나아가 주인에게 면회를 요청했더니,

젊은 청년 한 사람이 나와서 접대를 했다.

나는 그가 양반임을 알고 있었는데, 과연 상투를 짜고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었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하니 그 사람도 공손히 맞절을 했다.

 

 

 

김구는 마음속으로 경외한 생각이 들었다.

허구한 날 속인(俗人)들과 상놈들만 대하다 보니

이런 사람들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교양은 있되 상대 하 는 사람을 깔보지 않고 공손히 인격적으로 접대를 했다.

젊은이가 공손히 물었다

 


"도령께서는 어디서 오셨소?"

김구는 도령이란 말에 너무도 황공했다.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어른이 되어도 당신께 공대를 듣지 못하련만 저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어찌 공대를 하십니까. 황공합니다."

젊은이는 김구의 순진하고 솔직한 말에 감동하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은 처음 봤다는 얼굴이었다.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동학도인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들어 빈부귀천의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어려워하지 마시고 찾아온 용무를 말씀하시오."


김구는 젊은이의 말을 듣자 모처럼 만에 사람대우를 받는 것 같아 황홀한 마음이 들었다.

젊은이는 양반과 같이 거드름을 피우거나 오만하지 않고 겸손했다.

이런 사람이 믿는 동학이란 도대체 어떤 교(敎)인가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젊은이와 김구 사이에 문답이 시작되었다.


"저는 선생이 동학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도리 (道理)를 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런 비천한 사람에게도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김구는 신분을 한껏 내렸다. 원래부터 그는 자신을 천한 사람으로 내 세우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알고 싶다는데 제가 아는 데까지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김구가 물었다.

"동학이란 어떤 취지이며, 어느 선생이 천명하셨습니까?"

젊은이가 대답했다.

 


"동학은 용담 최수운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분의 조카 최해월(최시형) 선생이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포교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자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어

장래의 참주인 (眞主)을 모시고 계룡산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김구는 거리낌 없는 젊은이의 설명을 듣고서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자신의 처지와 꼭 들어맞는 교(敎) 같아서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관상공부에서 터득한 맘씨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한 자신에게 하느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김구는 원래부터 사악한 인간들을 경멸했다.

사악한 인간들이란, 선민(選民)의식을 갖고 있는 양반들이나

또는 돈푼깨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권세 있는 자들은 권세를 이용해 백성들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갖은 권모술수를 써서 재산을 불리고, 불린 재산을 호화의식에 탕진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김구가 찾아와 대담을 나눈 젊은이는 뭔가 달랐다.

상놈이 된 자신에게 동학도에만 입도(入道)하면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李朝)의 운수가 다해서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의 과거장에서

비관했던 생각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김구는 동학에 입도할 생각이 굴뚝같았다.

동학에 입도만하면 무슨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자신의 일이란 고작 상농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이하는

생각에서, 김구는 동학에 입도할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입도 절차는 어떻게 됩니까?"

젊은이가 대답했다.

 


"백미(白米) 한 말, 백지 세 묶음, 누런 초 한 쌍을 가져오면 됩니다."

젊은이는 김구에게 동학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성경대전(聖經大典)', '팔편가사(八編歌辭)', '궁을가(弓乙歌)' 등을 열람시켰다.

모두가 다 동학 입도에 필요한 책들이었다.

김구는 아버지에게 젊은이와 대화한 내용을 소상하게 전했다.

"동학에 입도해야겠습니다.

동학이란 도(道)는 우리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도입니다.

특히 요즘 같은 난세(亂世)에는 동학 이외에 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그럼 입도 하거라."

  아버지는 김구에게 동학 입도를 허락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사람이 되는 도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상놈으로서 학문과는 담을 쌓고 지낼 바에야 훌륭한 도(道)를 믿는 것도 괜찮다는

그분의 속 깊은 생각이었다.

  "동학에 입도하려면 약간의 입도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내가 마련해 주겠다."

  입도 비란 쌀 한 말과 종이 , 그리고 황초 두 자루면 되었다.

김구는 입도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해 젊은이를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동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893년, 김구의 동학 입도는 이해에 이뤄졌다고 문서에는 적혀 있다.

 


이후 아버지도 동학에 입도했다.

당시에는 양반들은 동학에 입도하는 자가 드물었다.

왜냐하면 동학사상이란 양반 상놈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상놈의 위에 있는

양반이 굳이 입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양반의 기득권을 버리지 않고서야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상놈들은 동학으로 대거 몰렸다.

 


  불과 수개월 만에 김구의 연비(連臂)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연비란 부하(部下)라기도 하고 제자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도를 받은 사람을 뜻한다.

김구가 도를 전했기 때문에 도를 받은 사람을 일컬어 연비라고 한다.

  김구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이야기는 동네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김구를 찾아와 동학에 입도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도 생겼다

  "동학에 입도하니 무슨 조화가 있는가?"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조화다.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일만 하게 된다."

  김구는 간단히 설명을 했다.

  그러나 듣는 이들은 김구가 아직 조화를 보여 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을 퍼뜨렸다. 
 

"김창수(동학에 입도하면서 김창수로 개명)가 한 길 이상이나 되는 공중에서

걸어 다니는 걸 보았다."

고 전했고, 이 말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안 남북도 에까지 퍼졌다.

그래서 김구의 연비는 수천에 달했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동학당가운데 나이가 제일 어려 아기 접주라고 불리어졌다.

접주(接主)란 동학의 기초조직이면서 우두머리이다.

접주를 포괄하는 조직은 포접 (包接)이라고 했다.

김구의 연원, 도를 전한 사람, 젊은이는 오응선이었고,

연비는 김구가 포교한 사람들이 되는 셈이었다.

계사년 가을이었다.

 


  오응선, 최유현 등이 '충청도 보은에 있는 해월 대도주에게 각자 자기 연비를 보고 하라.'는 경통(敬通)에 따라 황해도에 서는 도유(道儒) 열다섯 명을 선발했는데 , 김구가 여기에 뽑히게 되었다. 김구는 길게 늘어진 머리가 먼 길 걷는 데 불편해서 관을 쓰고 떠났다. 연비들이 여비를 거두어 해주에서 특별히 만든 향먹(香墨)을 토산 예품으로 갖고, 육로와 수로를 통해 충청도 보은군 장안(長安)이란 동네에 도착했다. 김구가 도착한 동네는 동학도의 마을 같았다. 여기저기서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주문이란 이랬다.

 

 

  지 기 금지 원위 대 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지기금지원위대강'이란 주문은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이 외는 초심자의 주문으로, 지극한 기운과 원을 내려 달라는 뜻이다. 이것을 8자 주문이라고도 했다. '시천주조화정, 영예불망 만사지'는 동학의 본 주문으로 13자 주문인데,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의 경지가 이루어지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동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떼 지어 나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떼 지어 들어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마도 무슨 동학교도들의 행사 같았다. (필자 주(註), 이 행사지는 제3차 교조 신원운동 집회가 열린 장내리 일 것이다.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가 체포된 후, 2대 교주 최시형은 대구, 평해, 울진, 영양, 영해, 영월, 인제, 단양 등을 전전하다가 1885년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접대인은 김구 일행 열다섯 명의 명단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곧 해월(최시형) 선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 시간쯤 그렇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접대인이 나왔다.

  "해월 선생님이 허락하셨소. 황해도에서 오신 도인들을 접견하시겠답니다."

  접대인의 말에 따라 김구 일행은 안내자의 뒤를 따라 해월 선생의 처소로 갔다. 집은 목조 건물이었는데 차양이 들어 쳐져 있었고, 마루 한가운데 검은 수염이 길게 드리워진 오십대의 도사풍의 사내가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해월 선생이었다.

  눈빛에서 흐르는 범접치 못할 서기가 일행을 압도했다. 김구 일행은 조심스럽게 차양을 걷고 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김구를 중심으로 해월 선생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자 해월 선생도 맞절을 올렸다.

  "멀리서 수고스럽게 올라 오셨구려."

  해월 선생의 말이 끝나자 김구와 일행은 각자 만든 명부 책을 선생께 드렸다. 명부에는 각자의 연비들이 적혀 있었다. 김구가 천리를 마다 않고 선생이 있는 보은까지 온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해월 선생이 무슨 남다른 조화를 부리지 않는가, 또 선생의 도골도풍(道骨道風)은 어떤가, 살펴보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살펴본 해월 선생의 용모는 이랬다.

 

 

 

  선생의 나이는 예순 가까이 되어 보였다. 수염은 길며 색깔 은보기 좋을 정도로 약간 검은 가닥이 있었다. 선생의 얼굴은 밝고 여위었으며, 머리에 큰 검은 갓(黑笠)을 쓰고 저고리만 입고 앉아서 일을 보셨다.

 

 

 

  방문 바로 앞의 무쇠화로의 약탕관에서는 독삼탕(獨蔘湯)이 끓고 있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선생이 잡수신다고 했다. 독삼탕은 인삼 한 가지만 넣고 끓이는 탕이다.

  선생의 방 안팎에는 많은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가장 측근에 손응구(孫應九, 손병희), 김연국(金演局) 등 선생의 두 사위가 있었다.

  손응구, 즉 손병희는 그 후 3.1운동 때 천도교 대표로 33인 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 외에도 박인호(朴寅浩)등 많은 제자 들이 있었다. 김구가 본 김씨는 나이가 사십 정도의 순박한 농사꾼 같았고, 손씨는 젊은 청년으로 지식이 들어 있어 보였다. 손씨가 쓴 부적(符籍)에 '천을천수(天乙天水)'의 글씨로 보아 필재도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김구가 그 방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려 무슨 보고를 들였다. 그것들은 이랬다.

  "남도지방의 각 관청에서 동학당을 체포하여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 급한 용건을 전하기도 했다.

  "전라도 고부(古埠)에서는 전봉준이 병사를 일으켰습니다."

  선생은 이런 보고를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희로애락의 표정이 얼굴에 들어 있지 않았다.

  "어떤 군수는 도유(道儒)의 전 가족을 체포하고 가산 전부를 강탈했습니다."

  그러자 바위 같은 침묵으로 일관하던 해월 선생이 진노를 했다.


  "이런 괘씸한 것들,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되지 않는 법 ,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나가서 싸우자!"

  해월 선생의 이 한 마디는 전시(戰時) 동원령 같은 말이다. 각지에서 와서 대기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자, 나가서 싸우자! 해월 선생님께서 명령하셨다!"

  조용하기만 하던 이 본부는 급기야 싸움의 본부로 변해 버렸다. 일테면 군사정부가 된 셈이다. 대접주들이 몽둥이, 낫 등 재래식 무기를 들고 밀려 나갔다. 금방 한판 벌일 것 같은 기세였다. 김구 일행에게도 해월 선생은 접주로 임명하는 첩지(帖紙)를 내려 주었다. 첩지 원형에 전자(築字)로 새긴 해월인(海月印)이 찍혀 있었다. 바야흐로 동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동학 전쟁, 또는 동학혁명의 간단한 개요를 적고 넘어가기로 한다. 원래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란 자는 탐욕이 많은 관리였다. 접주인 전봉준은 이런 농민들의 사정에 분개 , 마침내 1894년 3월 21일에 봉기했다.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일(淸日)에게 군사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도리어 경복궁에 무단침입, 친일내각을 세웠다.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은 일본의 입김 아래 개혁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6월 말,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의 발발이었다. 8월 17일, 일본은 평양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외세가 이렇게 판을 치는데도 무기력한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전봉준과 동학군은 9월 12일 마침내 2차 기병을 시도했다. 동학군은 공주를 손에 넣고 곧장 서울로 진격을 할 태세였다. 그런데 의외로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이 먼저 공주에 입성했다.

  동학군이 늦어진 이유는 전쟁을 원치 않는 동학의 북접 교단의 비협조 때문이었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의 1차 봉기 때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두어 한국 최초의 농민 자치를 실행 한 것은 전적으로 남접 동학군의 힘이었다. 남접과 달리 북접의 구성원은 중농 (中農) 이상이 많아 그만큼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오히려 남접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최시형은 마지못해 합류를 허락했다. 그때가 9월 하순,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었으니 ,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끈 셈이다.

 

 

11월 9일,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동학군 주력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란 곳은 견준산과 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치라고도 한다. 물밀듯 올라오는 동학군에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학군의 패색이 짙어갔다 장렬한 싸움이었다. 횐 옷 입은 학군의 주검들이 꽃 사태가 되어 흩날렸다.

 

 

 

  수많은 비도(匪徒)가 4, 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 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군이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갔다. 시체가 쌓이고 피가 내를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학군은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겼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함에 따라 역량이 반감되어 있었다. 게다가 관군 측의 전투 장비는 훨씬 우수했다.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동학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봉준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동학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정부군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 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백양사에 숨어들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 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

  그러나 12월 2일, 순창에서 전봉준은 상금에 눈먼 옛 동지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서울의 일본 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 후 조선 법무가문으로 넘겨져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5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3월 29일, 재판장은 부대시 참(不待時斬)을 선고했다. 전봉준은 무릎을 치고 일어서며 외쳤다.

  "정도(正道)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전봉준은 그날 교수대에서 스러져 갔다. 그와 그를 따른 동학군이 바란 세상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무엇을 위해 그들은 그처럼 열렬히 싸웠을까?

  그것은 이랬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의 무리를 엄정한다.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칠종천인(七種賤人)의 차별을 개선하고 백성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용한다. 무명잡세를 폐지한다. 관리채용은 인재위주로 한다. 왜와 통하는 자는 엄정한다.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分作)한다.


  

  체포된 전봉준은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서울에 쳐들어온 후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는가?"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간(惡奸)관리들을 축출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몇 사람의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하고, 우리는 곧장 농촌에 돌아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죽기 전 전봉준은 한 수(首)의 시를 지어 자신의 회한을 풀었다.

 

 

  시래천지 개동력 (時來天地皆同力)

  운법영 웅부자모(運法英雄不自謀)

  애 민정의 아무실 (愛民正義我無失)

  애국단심수유지 (愛國丹心誰有知)

 

 

  이를 풀이하면 아래와 같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인가.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누가 알리.

 

 

  한편 김구는 해월 선생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귀로에 그들은 속리산을 구경하고 약간의 여흥을 가졌다. 돌아오는 도중 곳곳에서 흰옷을 입고 칼을 찬 동학당을 만났다. 동학당들은 훈련된 군사들이 아니어서 모든 것이 서툴러 보였다. 농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서광이 비쳤다.

  광혜원 장(場)에 도착하니 수만의 동학군이 진영을 차리고 행인들을 검사했다. 그곳에서 낮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짚신을 삼고 있는 모습이었다. 양반들 같았다.

  "저들은 도대체 무엇 하는 것이오?"

  김구가 묻자 곁의 동료가 대꾸했다.

 


  "저들은 평소에 동학당을 못살게 하던 양반들입니다. 저들이 잡혀와서 그 벌로 동학군의 짚신을 짜고 있는 것입니다."

  길가에 늘어선 동학군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을 일일이 조사했다. 요즘에 흔히 말하는 일제 검색이었다. 동학군은 김구 일행 의 증명서를 보고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 증명서란 해월 선생이 써준 부적이었다.

  부근의 촌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밥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밥을 지어 도소(都所)로 보내는데 밥이 무수히 많았다. 동학군을 먹이기 위한 밥이었다. 도소란 군사정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동학당이 몰려와 집회하는 모습을 본 농민들은 겁이 나서 낫을 버리고 도망을 가기도 했다.

  동학군들은 그들에게 ,

  "괜찮소. 우리는 여러분들을 해치지 않소."

하고 선수 쳤으나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얼마 전까지 동학군들은 이들처럼 벼를 베던 농민들이었다.

  경성을 지나는데, 벌써 경군(京軍)이 삼남지방을 향해 행군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경군이란 서울의 군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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