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태훈 진사
김구는 정 선생과 함께 텃골 본가로 돌아와
모처럼 만에 부모님을 뵈었다. 당시 왜병들은 죽천장에 진을 쳤고,
동학당을 수색중이라 김구의 부모는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는 매우 위험하다 경군과 왜군이 매일같이
검색을 다니고 있으니 멀리 가서 화를 피하거라."
하룻밤을 묵고 나서 정 선생이 김구에게 권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청계동의 안 진사에게 가봅시다."
그러나 김구는 주저했다.
그것은 안 진사가 자신을 받아들일는지 알 수도 없으련만
받아들인다 해도 패잔병으로서 대하기는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정 선생은 이런 김구의 심경을 알기나 하듯 이야기했다.
"김 접장의 마음을 알고 있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오.
안 진사는·그런 좁은 그릇의 인물은 아니오.
안 진사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소.
안 진사가 밀사를 파견한 것은 군사적인 원조나 계략이 있어서라기보다
나이 어린 형의 담대한 기개를 아껴서요.
생명을 보존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던 것이오."
김구가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겼다.
안 진사(安進士)란 사람을 문득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 진사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비록 동학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지만,
마음속으로는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안태훈이란 인물과 그 아들 안중근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안태훈은 진해현감을 지낸 순흥 안씨 (順興 安氏) 인수(仁壽)의 셋째 아들로 해주에서 태어났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8,9세 때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했고,
13,4세 때 과거 공부와 사율변려체를 읽혀 선동(仙童)이라 불렸다.
중년에 진사시 (進士試)에 합격하고,
1884년 갑신년(甲 申年)에 박영효에 의해 외국에 보낼 국비 유학생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유학이 좌절되었다.
그러자 입신 공명하는 일을 포기하고 가족을 이끌고 청계동 산골로 이주했다.
1894년에 척양 왜 척을 표방하고 봉기한 동학군이 황해도에 까지 그 세력을 확대해 오자,
안태훈은 동학도들의 혹행을 견디기 어려워 자기 가족들과 원근의 포수 등을 규합 의병을 일으켜서
청계산에 진을 치고 동학군을 격파했다.
그때 벌써 전투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친 안중근 의사는
당시의 상황을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때 동학당의 괴수 원용일(元容日 )이 그의 도당 2만여 명을 이끌고
기세도 당당하게 쳐들어오는데,
깃발과 창과 칼이 햇빛을 가리고 북소리, 호각소리,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의병은 그 수가 70여 명을 넘지 못하여 세력의 강약이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과 같아
모든 사람들이 겁을 먹고 어찌할 줄 몰랐다.
때는 12월 겨울이다. 갑자기 동풍이 불고 큰비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키 어려워지자
적병은 갑옷이 모두 젖어 찬 기운이 몸에 배어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한 10리쯤 되는 마을로 진을 몰려 밤을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내 아버지는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기를,
'만일 내일까지 앉은자리에서 적병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면,
적은 군사로 많은 적군을 대항하지 못할 것은 필연한 일이다.
오늘밤으로 먼저 나가 적병을 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명령을 내렸다.
닭이 울자 새벽밥을 지어먹고 정병(精兵) 40여 명을 뽑아 출발시키고,
남은 정병들은 본동(本洞)을 수비하게 했다.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서
선봉 겸 정탐 독립대가 되어 수색하면서 적병 대장소(大將所)가 있는 지척에까지 다다랐다.
숲 사이에 숨어 엎드려 적진 형세의 동정을 살펴보니,
기폭이 바람에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에 치솟아 대낮 같은데 사람과 말들이
소란하여 모두가 기율(紀律)이 없으므로, 나는 동지 들을 돌아보며 이르되,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다.'고 했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얼마 안 되는 열악한 군사로써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대답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 고 했다.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함부로 모아 놓은 질서 없는 군중에 불과하다.
우리 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기만 하면 저런 난당(亂黨)은
비록 백만 대중이라고 해도 하나도 겁낼 것 이 없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뜻밖에 쳐들어가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방략대로 쫒으라고 했더니
모두들 응낙 하여 계획을 완전히 끝냈다.
호령 한 마디에 일곱 사람이 일제히 적진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더니
포성은 벼락처럼 천지를 진동하고, 탄환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적병은 별로 예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고,
몸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손에 깃발도 들지 못한 채 서로 밀치고 밟으니,
산과들로 흩어져 달아나므로 우리는 이긴 기세를 타고 폭격했다.
이윽고 동이 텄다.
적병은 그 제사 우리 형세가 외롭고 약한 줄을 알아차리고 사면에서 에워싸고 공격하므로
세가 극히 위급해져서, 좌충우돌해 보았으나 몸이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등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며 한 부대 군사들이 달려와 충돌하자,
적병이 패하여 달아나 포위망이 풀려 빠져나오게 되니
그것이 바로 본진의 후원 병들이 와서 응원 접전해 준 것이다.
두 진이 합세하여 추격하자,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멀러 도망하고,
전리품을 거두니 군기(軍器)와 탄약이 수십 바리(獻)요,
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군량은 천여 포대요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 의병들은 한 사람의 손해도 없어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세 번 부르며
본동에 개선하여 본도 관찰부에 급히 승첩보고를 했다.
이로부터 적병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다.
그러나 안태훈 진사의 의병이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인 천여 포대의 곡식이
그 이듬해인 1895년에 문제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안 진사는 천주교와 접촉하게 되었다.
소유권 분쟁이 일어난 문제의 전리품 곡식은, 절반은 당시 탁지부(度支部) 대신 어윤중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선혜청 당상 벼슬을 지낸 민영준의 것이므로 두 사람에게 반환하라는 요청이 왔다.
그러나 안태훈이 그 곡식을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이므로 두 사람이 관여할 바 아니라고 일축하자,
당대의 세력가들인 어윤중과 민영준은 잃어버린 자기들의 곡식을 찾기 위해 안태훈을 모함하려고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안태훈이 상경하여 2, 3차 재판을 했으나 끝내 판결을 보지 못했다.
어윤중은 '의병을 일으켜 동학군을 무찌른 국가의 큰 공신인안태훈을 표창하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모함할 수 있느냐.'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던 1896년(고종 33년)
친일파라 하여 친러파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민영준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안태훈을 해치려 하여 쫓기는 몸이 된 안태훈은,
성당으로 피해 들어가 프랑스인 신부들의 보호를 받게 되어,
거기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신부들의 강론을 듣고 성서를 읽었다.
안태훈 일가는 이렇게 되어 천주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천주교의 지도자가 되어
청계동을 비롯한 인근 일대의 주민들에게 포교(布敎)를 하게 되었다.
안태훈의 아들 안중근, 안명근 등도 입교, 프랑스인 신부 빌렘에게 영세를 받았다.
김구와 정 선생은 안태훈을 찾아가기 위해 그날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 입구에 도착했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한 요새와 같은 곳으로,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민가는 40여 채 정도로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동네 앞에는 한 줄기 긴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옆 암벽에는 안 진사가 친필로 쓴 글씨가 음각되어있었다.
동천이란 내 (川)가 흐르는 경치 좋은 명산으로서,
자고로 신선들이 살았다는 곳을 말한다.
동네 어귀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파수병에게 물었다
"안 진사 댁은 여기서 얼마나 되오?"
그러자 그 파수병은 미리 안 진사에게 내락을 받았는지 김구 일행을 안내했다.
파수병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의려소(義旅所), 즉 안 진사 댁으로 안내했다.
의려소라고 쓴 글씨는 안 진사의 것이었다. 문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그 안에는 한 칸의 초가 정자가 있었다. 평소에는 이곳에서 안 진사와 그의 형제들이
술을 마시거나 시를 지으면서 소일한다고 했다.
안 진사의 6형제는 장남이 태진, 2남이 태현, 3남이 태훈, 4남이 태건, 5남이 태민, 6남이 태순 등이었다.
파수병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안 진사는 본채 마루에서 일행을 반갑게 영접했다.
예에 따라 일행은 안 진사에게 절을 올렸다
"됐소. 김 석사(金碩士)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벗어난 후 심히 우려되어 매우 걱정이 되었소.
사람을 놓아 탐색을 했으나 계신 곳을 모르더니 이렇게 찾아 주어 반갑기 그지없소."
김 석사란 말은 벼슬 없는 선비를 높이 예우하는 말이다.
안 진사가 다시 물었다
"부모님이 모두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디 편하게 계실 곳이라도 있습니까?"
김구는 속으로 이 사람은 분명 대인(大人)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인은 사람을 볼 줄 안다고 하는데,
비록 입장은 다르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니 여간 호감이 가지 않았다.
김구가 겸손히 답했다.
"달리 계실 곳이 없어서 아직 본동에 계십니다."
그러자 안 진사는 즉시 곁의 오일선(吳日善)을 불렀다.
"자네가 이 석사의 부모님을 모셔오게. 총 가진 병사 30명을 데리고 빨리 출발하게
그리고 가산까지 모두 옮겨오게."
이렇게 명령하고 근처의 가옥 한 채를 매입해 주었다.
김구는 이렇게 되어 청계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안 진사의 호의는 각별했다.
김구의 나이 스무 살,을미년(1895 ) 2월이었다.
"김 석사는 지금부터 안심하고 이곳에서 지내시오.
내가 없더라도 내 동생들이 매일처럼 찾아오니
그들과 어울려 시도 짓고 책도 읽으시오.
다행히 내 동생들은 글을 좀 아니,
사귀어 두는 것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오."
안 진사의 여섯 형제는 앞서도 이야기했거니와 태진, 태현, 태훈, 태건, 태민, 태순 이었는데 ,
모두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높은 선비들이었다.
안 진사는 가끔씩 김구에게 말을 걸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김구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악의가 깃들여져 있지 않고, 자애로운 마음이 넘쳐나 있었다.
김구는 자신이 배우지 못하고 마소처럼 뛰면서 살아온 것이
이 집안의 누가 될까봐 몸가짐을 단단히 했다.
안 진사는 술을 몹시 좋아했는데, 혼자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포군(砲軍)들과 어울려 같이 마시고 씨름도 하면서 즐겼다.
포군 두 사람이 씨름을 하는데 ,
한 사람은 키가 크고 힘이 셌으나 또 한 사람은 약골이었다.
그런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안 진사는 김구에게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
김구가 대답했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 질 것 같습니다 "
"창수(김구의 아명)가 보기에 그런가? 그 이유는?"
"아까 씨름할 때 키 큰사람의 바지가 떨어져 볼기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기운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볼기에 정신이 가서 집중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김구의 예견은 적중했다.
김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을 본 안 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수의 말이 맞군."
그 이후부터 안 진사는 김구를 더욱 사랑하고 아꼈다.
안 진사는 아들 셋을 두었다.
맏아들 중근(重根)은 당년 열여섯인데 장가를 들어선지 상투를 틀어 맸다.
그는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메고 다니기 편리하게 개조한 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매일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인근에서도 소문난 명사수였다. 그리고 눈빛은 영기(英氣)가 흘렀고, 어른스러웠다.
나는 새를 맞혀 떨어뜨리고, 달리는 짐승을 잡아 메고 오기 일쑤였다.
사냥 때는 숙부인 태건 씨와 늘 동행을 했는데,
인근 산에서 잡은 노루와 고라니 등을 군사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진사의 여섯 형제는 거의 술과 독서를 좋아했다. 짐승을 잡아 오면 반드시 한데 모였고,
그 외에도 인근의 최 선달, 고 산림, 오 주부 등도 청해 나눠 먹었다.
김구는 원래 술 마시고 시를 읊조리는 데 아무런 재주가 없었다.
아니, 이들에 비해서는 하수(下手)나 다름없어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잡아 온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는 꼭 끼었다.
안 진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두터웠고, 서로 존경해서 남들 보기가 아름다웠다.
또 그는 조카와 자식들에게 공부를 철저히 시켰다
그래서 아들과 조카들을 위해 서재를 만들었다.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끝을 땅아 늘어뜨린 정근(定根), 공근(恭根)에게는 글을 읽어야 사람이 된다고 재촉했지만,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하지 않는다고 질책하지 않았다.
그것은 안 진사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진사의 여섯 형제는 모두가 시문에 뛰어난 문사(文士)들이었지만,
문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유약한 점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안 진사는 글에 대한 천재였지만, 남을 압도하는 눈빛이 하늘을 찌를 듯했고,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조정의 대관들도 처음에는 시골구석에서 글이나 읽는 서생에 불과한 안 진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악평을 했으나, 한번 그를 대한 사람은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김구는 이런 안 진사를 흠모했다.
안 진사의 용모는 수려했지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술이 과해서 늘 코끝이 발갛게 달아 있었다.
안 진사의 집에 모이는 시객들은 안 진사가 지은 율시(律誇) 등을 외우는데,
그 시들이 김구가 생각하기에 모두 명작 같았다.
김구가 평생 동안 잊지 않았던 안 진사의 시가 있었다.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疇錫求生無跡去)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夕蚊寧死 有聲來)
이 시는 안 진사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등 삶을 좇아 소리 없이 피신한 경우와,
죽을 줄도 모르고 날뛰는 동학교도(?)를 양반적 입장에서 풍자한 것으로 보였다.
안 진사의 아버지 인수 씨는 12, 3세(世) 동안이나 해주부(府)에서 살았다.
진해현감을 역임한 뒤에 많은 재산을 친척들에게 나눠 주고 3백여 석,
먹고 살만한 것만 남겨 갖고서 산수가 수려한 청계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안 진사와 친했던 사람으로 김종한(金宗漢)이 있었는데,
김종한은 조선 말기의 문인이며 정치인이었다.
그는 경술국치가 있은 후 친일의 길을 걸었다.
안 진사는 김종한의 집에 다년간 머무르면서
김종한이 시관(試官)이었을 때 소과에 합격했다.
김구에게는 평생에 좋은 스승이 몇 분 있었다.
고능선(高能 善) 또는 고석로(高錫魯)라는 분이 그중 한 사람이다.
김구는 날마다 그분의 사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고능선은 나이가 50세가 넘어 보이고 기골이 장대했다
. 이때의 이야기를 김구는 그의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날마다 그 사랑에 다니며 노는데 일위 (一位) 노인의 연기(年氣)가 50여 세나 되어 보이고,
기골이 장대하고 의관이 심히 검소한 분이 종종 사랑에를 오면(안 진사 댁)
안 진사는 지극히 공경하여 수좌에 모시곤 했다.
하루는 진사가 나를 소개하여 그분에게 배알을 시키고 나서 나의 약력을 그분에게 고한다.
그분은 즉 고능선이라는 학자이나 사람들이'고 산림 (高山林) 고 산림'하고 부르더라.
고능선은 해주 사문 밖 비동(飛洞)에서 대대로 살았고,
중암 유중교의 제자이며 의암 유인석과 동문인,
당시해서 지방에서품행이 높기로 이름난 당대의 유명한 학자였다.
안 진사는 이런 고능선을 의병을 일으키던 초기에 모사(謀師)로 모셨다.
그리고 그 집안의 세간을 모두 가져와 청계동에 거주케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안 진사의 사랑에서 고능선을 만나 종일 함께 대화를 나눈 후 헤어질 때쯤
고능선이 이야기했다.
"창수 군, 내 사랑 구경 좀 하지 않겠나?"
김구는 감동했다.
이런 학식 높은 분의 사랑은 과연 어떤가, 자못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선생님 사랑에도 가서 놀겠습니다."
놀겠다는 것은 일종의 높은 분에 대한 하대 용어였다.
즉 스스로를 낮춰서 하는 이야기였다.
고능선과 같은 선비의 사랑에 가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동격(同格)이라야 걸맞기 때문에 그저 논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김구는 다음날 약속대로 고능선 선생 댁을 방문했다.
"오, 창순가. 어서 들어오게."
고 선생은 노안에 기쁜 빛을 띠고 두 손으로 맞았다. 그리고 맏아들 원명 (元明)을 불러서 ,
"자, 인사들 나누 . 김창수란 청년인데 영민한 사람이야. 했다."
원명은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그 됨됨이가 영민하게는 보였지만,
비범하고 너그러운 기질은 부친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둘째 아들은 성인이 된 후 사망하여 과부 며느리만 남아 있었고,
원명은 열대여섯 살 된 맏딸과 네댓 살 된 딸 둘을 두었다. 아들은 없는 것 같았다.
고 선생이 거처하는 사랑방은 작았는데, 방 안 가득히 책이 들어차 있었다.
벽에는 옛 선비들이 남긴 좌우명들과 선생 자신이 깊이 깨우쳐 얻은 글(心得書) 등을 붙여 놓았다.
고 선생은 '손무자(孫武子)'와 '삼략(三略)' 등의 병서(兵書)를 즐겨 읽는 것 같았다.
고 선생은 김구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자네가 매일 안 진사 사랑방에 다니며 놀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리 유익하지 못할 것 같네.
자네에게는 정신수양이 필요한데, 거기서는 정신수양에 필요한 것들이 갖춰 있지 않네.
매일 내 사랑에 와서 지내게."
김구는 선생의 말이 옳다고 생각됐다. 안 진사 댁 사랑에는 술판이 벌어져 취흥과 객기는 풍겼으나
학문에 대한 깊은 것은 없어 보였다.
"선생님이 이처럼 미천한 저를 너그럽게 받아 주시다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즐겁네. 날마다 내 사랑에 와서 나와 함께 세상사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하세."
"그러나 어찌 제가 그런 재질이 있겠습니까?"
"그건 배우면 되는 것이지 사람이란 날 때부터 재질이 있나."
고 선생은 미소를 띠었다. 김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역력히 보였다.
김구 역시 학문에 대한 욕구가 대단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이런 대학자를 만난 것도 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당시 그의 심리상태는 매우 절박했었다.
과거장에서의 실망스런 생각은 곧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그러다 보니 자신의 관상이 너무 못나서 슬픈 생각을 하다가 상서 (相書)를 읽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데 한 가닥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양을 쌓아야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수양을 쌓을 것인가.
여기에는 스승이 필요했다.
한때 동학당에 들어가서 수양을 쌓고 신국가, 신 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모두가 부질없는 것들 같았다. 패전한 장수가 되어 안 진사 댁의 기식자(寄食者)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내는 자신이 그리 대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고 선생을 만나니 마치 사슴이 샘물을 만난 격이었다.
김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 선생이 나를 이처럼 아끼고 사랑 하지만, 과연 나는 고 선생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선생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종전에 내가 했던 관상학이니 사주니, 과거니,
동학당 입당이니 하는 것들과 똑같아 버린다면 내 자신은 더 이상 구제할 것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생까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다.
김구는 고 선생에게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나이 이십에 불과 합니다.
이십 년 동안 살면서 허다한 실패를 했습니다. 이런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출발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잘 살펴보시고,
좋은 점이 있다면 사랑을 하여 주시고 교훈도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고명하신 선생님의 덕에 누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김구가 고 선생의 사랑방에 있는 동안 안 진사도 가끔씩 고 선생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데 모여서 고금의 일을 서로 논의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를 귀담아 듣는 김구의 기분은 매우 유쾌했다. 좋은 말과 좋은 글귀를 받아들이려는 김구의 마음은
늘 열려 있었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청계동에 거주하면서 처음에는 갈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주로 안 진사 사랑방에 가서 놀았다.
그런데 안 진사가 없을 때는 바깥에서 포군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서 싸움이라도 벌이고 싶었으나, 이것도 수양이라고 김구는 그저 꾹 참았다.
그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는 대략 이랬다.
"저 작자는 우리 안 진사님이 없었으면 벌써 썩어졌거나 죽었을 것이다.
아직도 저자는 접주님 소리를 들으면서 우쭐거리던 시절이 그리울걸."
"물론이지. 저자는 우리 같은 포군들은 버러지처럼 여기겠지."
그러다가 또 다른 자가 험한 말을 했다. 김구의 비위를 건드리기에 족한 말이었다.
"여보게, 그런 소리 아예 말게.
저자가 우리말을 귀에 담아 두었다가 동학이 다시 득세하면 우리를 그냥 놔두겠나."
김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꾹 참았다. 당장이라도 청계동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주인인 안 진사가 자신을 사람대접해 주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안 진사가 후대를 하는데,
무지한 포군들의 행동 때문에 화를 내면서 나름대로의 행동을 하는 것이
대인(大人)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 진사는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사랑방에서 잔치를 벌이고 흥취 있게 놀 때는 꼭 고 선생을 모셔왔고 김구를 합석시켰다.
술로나 글로나 나이로나, 겉모양(외모) 모든 것이 김구 보다는 월등한 안 진사가
김구를 동석시킨다는 건 김구로서는 큰 영광이나 다름없었다.
김구는 그 자리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 진사가 만일 사람을 차별하거나
김구를 하잘것없다고 생각 했다면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가 초청을 받고 조금 늦게 도착하면 꼭 안 진사는 포군이나 하인에게 일렀다.
"너희들 빨리 돼지 골 창수 서방님 모시고 와라."
안 진사는 김구를 포군들에게 서방님이라 호칭했다. 안 진사가 이처럼 김구를 후대하니,
자연 포군들도 김구를 만만치 않게 여겼다. 안 진사의 아우들도 종전과 다르게 김구를 대했다.
그들은 포군들이 김구를 비아냥거리거나 희롱하는 언사를 쓰는데도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이다.
군인들의 태도도 그전보다 무척 공손해졌다 그때 김구는 산기(疝氣)가 있었다.
이때 안 진사의 사랑방에 자주 오는 오 주부가 있었는데 오 주부는 그에게,
"사삼(沙蔘, 더덕)을 많이 먹으면 되네."
했다.
사삼을 캐기 위해 고 선생의 아들 원명과 함께 약초 캐는 괭이를 둘러메고 뒷산에도 오르고,
바위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매일 고 선생 댁에서 놀다가
밥도 선생과 같이하고, 밤 깊고 인적이 깊은 밤에는 고 선생과 국사(國事)를 논했다. 고 선생이 말했다.
"나라는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네, 종전에 망하는 것은 토지와 백성은 그냥 놔두고
군주 자리만 뺏는 것으로 망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네. 한마디로 망국(亡國)이네."
"망국이라뇨?"
김구가 물었다.
"망국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주권을 모두 뺏기고, 뺏어 가는 쪽에서 삼켜 버리는 것이네.
우리나라도 필경 왜놈에게 망하게 되었네."
하며 고 선생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김구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김구는 동학도에 입도 했을 때 올바른 도를 알고자 했고,
인격을 높이 사고자 했을 뿐이지, 나라가 망하고 흥하고 하는 생각은 전혀 갖지 않았던 것이다.
고 선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소위 조정대신들은 외세에 영합하여 이득이나 취하려고 하고 있고,
러시아와 친해 자기세력이나 보전하려 하는 관리가 대다수이네."
"러시아?"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였다. 김구는 그때까지만 해도 왜놈들이 나라를 찬탈하려 한다는 것만 알았지,
러시아나 영국 같은 나라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 나라에는 많은 강대국들이 들어와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등.......이들은 우리나라 보다 훨씬 문화가 앞선 강대국들이네."
"강대국들?"
"그렇다네. 나라는 점차 망해 가는데 최고의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벼슬하지 않는 지조 있고
덕망 있는 학자)들은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네. 이들은 구국의 경륜도보이지 않고,
그저 뒷짐만 지고 방관하고 있네. 행동하지 않는 학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김구는 고 선생의 이야기에 놀랐다. 나라가 망하게 됐다니 무슨 말인가? 고
선생은 김구가 자신의 말뜻을 못 알아차린다고 여겼던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일반 백성들이 의(義)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들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가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네.
지금 왜놈의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궐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倭國)으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만고천하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보국(報國)하는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김구는 고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김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 선생에게 물었다.
"망하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까?"
"기왕에 망할 나라를 망하지 않게 힘써 보는 것이 백성의 도리이네.
지금 조정의 대신들은 무조건 외세에 영합하여 자기 이익들만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네.
청국과 연합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작년에 청나라는 일본에 패했으니 언젠가 일본에게 복수할 것이 뻔하네.
적당한 인재가 있으면 청나라에 가서 사정도 조사하고 큰 인물과 연락해서
후일 한 목소리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한데, 자네가 한번 가 보지 않겠나?"
김구는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고 선생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자신은 무식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같이 무식한 사람이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고 선생은 인자하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네만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면
청나라의 학계, 정계 등에 뛰어들어 활동할 수 있을 것이네."
김구는 그제서야 흔쾌히 약속했다. 고 선생의 안목은 과연 대단하다고 믿었다.
"자네가 떠나고 나면 부모님이 외롭고 쓸쓸할 테니,
자네 아버님과 내가 우리 사랑에 모여 이야기나 하고 시간을 보내겠네."
김구는 고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안 진사가 마음에 걸렸다.
"안 진사님과도 의논을 해볼까 합니다.
고 선생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안 진사의 의향을 대충 짐작하고 있네.
그 사람은 천주학을 해볼 마음이 있는 것 같네.
만일 그와 같이 서양 오랑캐를 의뢰할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일일세.
안 진사에 대한 태도는 후일 결정이 날 것이네. 출국 문제는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네.
다만 안 진사는 확실한 인재이니 자네가 청국에 가서 여러 곳을 섭렵해 보고,
그 결과 좋은 기회가 생기면 그때가 상의해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이번 일은 절대 비밀에 부치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김구는 고 선생의 이런 말이 처음부터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
선생이 함부로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던지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 순간부터 운명의 또 다른 길을 개척하게 됐다.
개척이라기보다 세상에 대해 눈을 떴다고 볼 수 있다.
나라가 무엇이고 조국이 무엇인가, 김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펼쳐질 미래에 대해서 다소 두려운 마음으로,
기대와 희망을 가져 보기도 했다.
'소설방 >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남의 머리가 될 사람 (0) | 2012.12.26 |
---|---|
5. 아아, 대한제국 (0) | 2012.12.26 |
3.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0) | 2012.12.26 |
2. 낙방 거사 (0) | 2012.12.26 |
1. 텃 골 . (0) | 2011.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