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6. 남의 머리가 될 사람

오늘의 쉼터 2012. 12. 26. 00:33

6.  남의 머리가 될 사람

 

김구는 항시 나라가 망해 감을 느끼며 불안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마음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 진사의 사랑에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참빗이란 대나무를 깎아 만든 촘촘한 틈새의 빗으로, 당시만 해도, 필 용품이나 다름없었다.

머리를 다듬을 때 필요하다기보다,

머리칼 속에 숨어 있는 서캐를 솎아내는 데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참 벗이 많이 소용되었다.

김구가 보아하니 예사 장사치와는 다른 점이 엿보였다.

말하는 품과 행동하는 양태를 보아하니 떠돌이 장사치와는 확연히 달랐다.

참빗을 팔아 이문을 남기고, 그 이문을 가져다

가족의 생계에 보태려는 장사치와는 언행에서 차이가 났다.

참빗을 매개로 사람을, 사귀려 하는 사람 같았다.

 

김구는 먼저 인사를 청했다.

그러자 참빗장수가 자기소개를 했다

"소생은 남원군 이동(耳洞)에 사는 김형진(金亨鎭)이라고 합니다. “

김구보다 나이는 8, 9세 위였다.

김구는 김형진에게,

내 집에 가면 참빗을 많이 살 테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날 밤 김구는 김형진과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은 사람을 사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듣자하니 신천의 안 진사 어른이 학식도 있고 명망도 대단해서 찾아 뵈 온 것입니다.

다만 무슨 명분이 있어야 할 텐데 참빗을 핑계삼았지요."

김구가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그다지 남들보다 출중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슨 일을 해보고 싶겠다는 야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또 시국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이 있는 사람 같았다.

 

김구는 이튿날 김형진을 데리고 고 선생 댁을 방문했다. 고

선생이 사람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김형진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 보더니 김구를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사람이란 남의 머리가 될 사람이 있고,

남의 머리는 되지 못 해도 사람을 도와서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김형진)은 후자 쪽 사람이다."

 

김구는 이 사람과 여행하며 세상일을 살피고 갈 길을 예비해 아겠다고 생각했다.

김구는 집에서 부리던 말 한 필을 내다 팔아 2백 냥을 준비했다.

그리고 곧 김형진과 함께 청나라로 떠났다.

 

가는 길에 백두산(白頭山)이나 답파하고,

동삼성(東三省)을 거쳐 마지막으로 북경까지 갈 요량으로 출발했다.

 

동북삼성은 흔히 만주로 불리던 곳이다.

처음 도착지는 평양이었다.

김구는 곰곰이 생각했다.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신분이 있어야만 했다 김형진이 이야기했다.

 

"참빗장수 행세를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빗, 먹 , 붓, 타 산중에서 요긴한 물건을 삽시다."

흔히 말하는 방물장수였다.

두 사람은 여비를 털어 물건을 잔뜩 사고 등에 졌다.

평양에서 모란봉, 을밀대를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지나 고원, 정평, 함흥 감영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함흥으로 가는 도중, 강동의 어떤 야시장에서 나이 든 노인 주정뱅이에게 행패를 당한 적도 있었으나 김구는 꾹 참았다.

일찍이 한신(韓信)이 회음(淮陰)의 시정잡배들에게 당했던 고사(古事)가 생각났던 것이다.

 

 한신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는데,

젊었을 때 불량배들에게 그들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해서 다투지 않고 그대로 행했다는 고사였다.

 

  김구는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모처럼 만에 산천 경계를 구경하고,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기행 한 것을 기록에 남겼다.

 

그 기행문은 청나라 기행문을 쓴 박지원와 '열하일기(熱河 日記)'와 홍대용의 기행문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기행문으로,

당시의 평양 일대의 문물과 인심을 엿볼 수가 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소개하는 것은 당시의 풍물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그 기행문 중간에는 성 안팎에 있는 집이 5백여 호 정도 된다고 했다.

 

우리 동포는 단 한 집뿐인데,

남자 주인은 변발(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만주족의 풍속)을 하고 있고

부인은 한복 차림이었다.

이 사람은 만주어를 통역하는 이른바 통역관이었다.

 

부근에 심 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고 해서 김구 일행이 찾아보았다.

심 생원이라는 사람은 겨우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아편을 빨아대서인지 가죽에 뼈만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곳을 다니다 보니 가장 얄미운 것이 호통사(통역)들이었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청일 난리를 피해 낯설고 물 설은 이곳으로 이주해 건너왔다.

 

  이들은 중국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속 험악한 곳만 택해서 화전을 일구고

조와 강냉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런데 호통사들은 중국어 몇 마디를 배워 갖고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동포들에게 별별 무리한 짓들을 감행하고 있었다.

벼룩에 간을 내먹는 천벌 받을 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동포들에게

인간으로 차마 하지 못할 짓을 서슴지 않고 했다.

일찍이 지주 밑에서 마름(소작인 감독)을 하던 자들의 행패보다

가히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여자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돈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는 등 악행을 자행하고 다녔다.

 

  김구는 어떤 집에서 우리 한복을 입고 머리를 길게 땋은

처녀 한 명이 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 처녀의 부모가 사윗감을 구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눈치 챈 호통사는 중국인에게 빚을 갚지 못하는 대신

그 처녀를 중매해 주겠다고 나서, 처녀의 부모를 강제로 위협하여

그 중국인에게 보낸 것이라고 했다.

 

김구가 돌아다닌 곳은 통화(通化).환인(桓仁).관전(寬旬).임강(臨江).집안(輯安) 등이었다.그런데 어디서나 이들 호통사의 행패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는 무논(水田)이라곤 없었다.

 

 본래 땅이 비옥해서 잡곡은 무엇이나 잘되었다.

물론 비료도 뿌릴 필요가 없었다.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다른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좋을 정도로 토지가 비옥했다.

 

여기서는 바다가 멀리 떨어져 있어선지 소금이 제일 귀했다.

이 지역에 들어오는 소금은 모두 의주(義州) 방면으로 들어오는데 물길도 수천리 씩 되었다.


곳곳에 두서너 집, 또는 여남은 집까지 모여 산림을 개간하고, 오막살이를 짓고 사는데,

인심이 좋아서 한 국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면 모두들 반가워했고 후대를 했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가난한 생활을 피하여 온 사람들이었다.

갑오년 청일전쟁 때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간혹 한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도 있었다.

 

 또는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주도하여 관군에게 쫓기다가 이쪽으로 온 사람들,

공금을 유용하다가 발각돼 쫓겨 온 사람들이었다.

 

  땅의 위치로 말하자면 파저 강(姿緖江) 좌우에 옛날 고구려 시대의 장군 설인귀,

연개소문의 관루(管壘) 흔적이 그대로 있었고, 도처에 천연적인 요새가 있었다.

 

그 천연요새들은 김구가 보기에도 거의 완벽한 것들이었다.

수많은 군사들이 쳐들어와도 끄떡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한 곳에 비각(碑閣)이 있었는데, 비문을 보면 '삼국충신 임경업의 비'라고 쓰여 있었다.

 

 근처에 있는 중국 사람들 중 병든 사람이 있으면

이 비각에 와서 빌면 병이 낫는다고 알정도로, 임경업이란 인물은 중국에서도 알아주었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친명배청 정신으로 일관하다가,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인조의 친국(직접심문)을 받고 죽었다.

 

 김구의 선조인 김자점은 임경업의 절대 후원자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이 연루될까 봐 죽일 것을 건의 했다

 

임경업과 김자점의 이야기는 그 후 많은 설화, 전기의 형태로 내려오고 있고,

무속세계에서는 임경업 장군을 가장 위세 있는 신으로 받들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잡귀를 쫓고 병을 낫게 해준다고 믿고 있다.

김구가 이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김이언(金利彦)이란

사람이 용기가 대단히 뛰어나고 학식도 풍부하다고 전해졌다.

 

일찍이 심양자사(주지사)가 그의 용력을 높이 사서 준마 한 필과

'삼국지(三國志)' 한 질을 주었고,

청나라 고급장교들에게 후대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김이언이,

소문에 의하면 청나라의 원조를 받아서 의병 (義兵)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김구는 이런 김이언을 찾아보기로 했다.

혹시나 자기와 뜻이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구 일행은 따로따로, 혹은 함께 김이언의 비밀 주소를 알아냈다.

강계군 서문(仁風縷)의 바깥으로 80여 리를 가서,

압록강을 건너면 통칭 황성이란 곳이 있는데,

근처에 삼도구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김이언의 비밀 주소지였다.

 

  김구는 참빗장수로 위장했다.

김구가 생각한 것은 김이언이 정말 의병을 도모할 사람인가,

혹은 무슨 술책을 부려 백성을 기만하고, 난리를 꾸미는 사람은 아닌가,

탐지하자는 것에 있었다.

 

김구는 김형진과 함께 가려 했으나 따로따로 가는 것이 신분상 유리할 것 같았다.

길을 가던 중, 압록강을 백 여리 남겨 놓았을 때 문득 청나라 무관을 한 사람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엉덩이에 관인(官印)이 찍힌 말을 타고, 머리에는 마라기를 쓰고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 앞에 다가가 말머리를 잡았다.

말을 더 이상 전진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구는 청나라 말을 잘 하 지 못하기 때문에 취지서(趣旨書) 한 장씩을 써서 간직하고 다녔다.

청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취지서를 내보였다.

취지서는 한문으로 돼 있었는데, 당시 중국사람 가운데 한문을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김구는 그 무관에게 취지서를 내 보였다.

취지서는 자신의 뜻을 한문으로 써서 알리는 글이다.

무관은 취지서를 읽고 말에서 내리더니,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쳐 우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시오?"

  김구가 묻자 그 무관은 계속 울음을 터드렸다

  "왜 그러시오? 당신은 한국 사람도 아닌데 왜 우시오?"

 

  무관은 김구의 취지서 가운데의 한 줄(痛彼侵敵與我 不共難 天之讐)

(애통하도다.저들 왜적은 나와 함께 결코 살 수 없는 원 수이다)를

가리키며 김구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

김구는 그제 야 이 사람이 필시 연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필담(筆談)을 했다.

 

먼저 무관이 물었다.

  "묻겠소. 어째서 일본이 그대의 원수요?"

  김구가 필담으로 적었다.

 

  "일본은 우리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했소.

국가의 원수일 뿐 아니라 대대로 우리 백성을 찬탈한 용서받지 못할 원수요."

  김구는 무관이 통곡하는 이유를 물었다.

 

  "당신은 나와는 초면인데 왜 이 글귀를 보고 울고 있소?"

  무관이 대답했다.

 

  "지난 갑오년 평양전투(청일전쟁 때 평양에서 치른 치열한 전투를 말함)에서

전사한 서옥생(徐玉生)의 아들이 나요.

강계 관찰사에게 부탁해 부친의 시신을 찾아 달라고 했는데 , 그로부터 전갈이 왔소."

 

  "전갈이오?"


  "그렇소. 부친의 시신을 어렵게 찾았다는 것이오.

그런데 가서 보니 부친의 시신이 아니었소. 그래서 이렇게 되돌아오는 것이오."

 

  "실망이 컸겠소."

  그러자 무관이 눈물을 흘리면서 저간 사정을 털어놓았다.

 

  "내 집은 금주(錦州)요.

내 부친은 집에서 부리던 사병 (私兵) 1천 5백 명 가운데 1천 명을 이끌고 참전했소.

참전한 군인 1천 명은 부친과 함께 전사를 했소.

현재 집에는 5백여 명밖에 군인이 남아 있지 않소."

  무관은 군벌의 아들이었다.

 

 

중국에서는 관군이 있고, 개인이 키우던(?) 사병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사병을 소집, 전투에 임한다.

무관의 아버지 서옥생도 그런 군벌의 하나였다고 추정된다.

 

  "재산은 넉넉하오."

  무관의 성은 서씨이고 부인의 나이는 몇 살이며 자녀는 몇 명이라고

김구에게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서옥생의 아들이라면 규장각 자료에 의하면 서경장(徐敬章)이다.

김구는 서경장에게 평양 보통문 밖 들녂에서 보았던 비(碑)를 이야기해 주었다.

 

  "서옥생 전망처(徐玉生戰亡處)란 비를 일본인들이 세웠소.

아마도 그대의 부친은 일본인들에게도 그 전공을 높이 평가받은 것 같소."

  "그렇습니까?"

 

  서경장은 김구의 말에 반색했다.

그는 김구의 나이를 묻고, 김구의 나이가 자기보다 아래인 것을 알자 금방,

 

  "그대를 '띠디' 라고 부르겠소."

하고 자기더러는 '꺼거'라고 써 보였다.

띠디는 아우이고 꺼거는 형이다 의형제를 맺자는 것이었다.

김구는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사람 됨됨이가 고급스럽고 천하지가 않았다.

그는 김구가 짊어지고 있는 봇짐을 자신의 말안장에 달아매었다.

김구를 등 뒤에다 태운 후 말채찍을 휘둘렀다. 말이 달렸다 금주를 향해서였다.

 

  "그대가 복수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냅시다."

  김구는 미안한 마음에 걸어서 가겠노라고 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여기서 10리쯤만 가면 관마(官馬)를 탈수가 있소."

구는 곰곰이 생각했다.

서경장과 어울리다 보면 그의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겠고,

그렇다면 중국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먼저 길을 떠난 김형진에게 이 사실을 알릴 길이 없었다.

 

 또 김이언이란 인물이 의병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그 자세한 내용도 궁금했다.

그래서 무작정 서경장의 집으로만 갈 수가 없는 처지였다.

 

  김구는 말에서 내렸다.

  "꺼거(형)여 내가 고국의 부모를 이별한지 1년이 넘었지만 소식을 모르고 있소이다.

또 나라 안에서 명성황후가 참변을 당한 후 국내의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소.

그래서 하는 말이오."

 

  "그것은 내가 수소문해 주면 될 것이 아니겠소."

  "후의는 고맙지만 내가 직접 고국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승낙을 받고

다시 그대의 집으로 가겠소."

 

  서경장은 대단히 아쉬워했다.

김구 같은 좋은 인재를 놓친다는 것이 섭섭했던 것이다.

원래 중국인들이란 마음에 와 닿는 사람에겐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믿는 습성이 있다.


  "동생의 사정이 그러시다면 더 이상 붙잡지 못하겠구려.

어서 속히 고국의 부모를 본 후에 다시 나와 만납시다."

  서경장은 김구의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서경장과 헤어져 김구는 대엿새 후에 삼도구란 곳에 도착했다.

그는 이 집 저 집 참빗장수로 행세하면서 김이언의 동정과 그 부하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 결과 대략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이언은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반면에 자신감이 지나쳐 다소 교만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거리감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력이 뛰어나서 그의 나이 50여 세에 심양에 있는 500 짜리 화포를 앉은자리에서

너끈히 양손으로 들어올렸다고 한다.

김구가 보기에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용기가 부족한 것 같았다.

 

차라리 김이언보다는 그의 동지가 조금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산(楚山)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이란 사람이 그보다는 의리도 있고,

협객 기질도 있으며 계책도 잘 꾸민다고 생각되었다.

 

김이언은 의병운동의 수령이 되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 변으로는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의 포수를 비밀히 모집하고,

바깥쪽으로는 청국 연강 (沿江) 일대의 이주민 포수(엽총이 있는 자)를 모집했는데

이들의 숫자가 3백여 명이 되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대의명분을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어머니가 왜군 낭인에게 피살된 것은 국민 전체의 치욕이다.

이를 가만히 앉아서 좌시할 수가 없다."


  그는 글을 잘 몰라서 글을 잘 아는 김규현에게 격문을 지어 뿌리게 했다.

이른바 복수 의병이었다.

 

 당시에는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의병이 꽤 많이 일어났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에는 김구와 김형진도 참가했다.

 

 김구는 비밀리에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매입하여 등에 지고

압록강을 건너가기로 했고, 초산, 위원 등지에 들어가 포수를 모집하기로 했다.

 

이들이 거사한 때는 11월 초, 압록강은 이미 결빙이 되어 있었다.

삼도구에서 행군하여 얼음 위로 강을 건너 강계 성까지 바로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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