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1. 텃 골 .

오늘의 쉼터 2011. 5. 19. 20:14

1 . 텃 골

 


일세를 풍미하다 세상을 떠난 영웅호걸의 탄생과 죽음에는

늘 호사 문구가 따라 다니게마련이었다.

그럼으로써 일개 범부와 확연히 차별이 되고,

영웅호걸의 공적이 돋보이며 감히 범접치 못할 신인(神人)이라는 걸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문구란 이렇다.

영웅이 죽었을 때는 대략 이렇지 않을까?

 

 

그날 밤, 난데없이 천둥 벼락이 번쩍이더니 메마른 하늘에 우박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영웅호걸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한 듯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 어찌 아깝지 않으랴. 사천만 민족이 부둥켜 울고,

아비 잃은 자식의 심정이 어찌 이보다 더한 슬픔을 가져올까 보냐.


예로부터 영웅의 탄생이란 그 기후부터가 달랐다.

오랜 가뭄이 계속돼 저마다 하늘을 우러러 원망 섞인 말투를 던지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외양간에 매어 있던 송아지가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고,

먹장구름이 동편에서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김 진사 댁 며느리의 진통이 거의 끝나갈 때쯤 '으앙!' 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니 이 어찌 길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삼국유사'에서부터 시작해 이인직의 신소설(新小說)에까지 어김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탄생에는 이런 문구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그 탄생이 별로 신기하지 않아서인가.

아무튼,

그의 탄생은 위와 같이 뻑적지근하지도 않고 남의 이목(耳目)에 회자될 정도로 요란하지도 않았다.

 


1876년 8월 29일(음력7. 11). 나라가 망할 것을 대비하여

하늘에서 이 민족을 지켜갈 지도자를 주셨음인지

나라가 망한 날짜가 된 8월 29일에 태어났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 (金淳永)과 모친 현풍 곽(郭)씨 낙원(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이명(異名)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流),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 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평생 동안 가장 많이 썼던 이름은 구(九),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김구'라고 부른다.

젊은 시절, 가끔씩 창수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으나 그리 많이 사용치는 않았다.  

 

 

김구의 가문은 신라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金自點)의 난으로

일가친척이 모두 멸문지화를 당해, 서울 부근으로 이사를 했다가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4대에 걸쳐서 그곳에서 터를 잡았다.

김구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다.

어머니는 참담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한 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김구는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친한 말동무나 같이 놀아 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 그리고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데 한 역할을 했다

 

1879년, 김구의 나이 4세 때, 천연두를 앓게 되었다. 의료시 설이 전무하고,

있어 봤자 고작 재래식 한의원이 전부인 당시 천연두는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낫기만 하면 뭘 하는가,

천연두 걸리면 모조리 죽게 마련인데 하는 말이 떠돌 정도로,

천연두는 열에 아홉은 죽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천연두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그 후 천연두 흔적은 평생토록 그의 얼굴을 점령했다.

 

  당시의 우리 어른들 가운데 얼굴이 곱지 않았던 분들이 꽤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천연두 자국이었다.

  우두를 발명한 지석영 선생의 힘이 그때까지 미치지 못했던지

천연두는 물러가긴 했지만, 그 흔적을 깊게 남겼다.

그러나 얼굴은 이렇게 원형을 상실했어도, 형형한 눈빛은 어린 나이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다른 소년들과 확연히 구별이 되었다.

 

  1884년, 아홉 살이 됐을 때 비로소 국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찌들대로 찌든, 양반의 후손인 김구에게 있어서

이 배움이란 것이 그저 남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김구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그의 부모가 종조, 재종조, 삼종조 등이

강령군 삼가리란 곳으로 이주를 한 뒤 거기서 살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을 그는 나이가 어지간히 들어서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김구가 살던 집은 가난한 상인(常人)의 집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일가 하나 없는,

삥 둘러쳐진 산 가운데 아래 마을이었다

가끔씩 호랑이가 나타나 아이들을 물어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날 정도로,

 대낮인데도 적막과 괴괴한 공포감이 감돌던 마을이라 여간 심심하지가 않았다.

 

  낮에 그의 부모가 남의 농사일을 봐주거나 해산물을 뜯으러 돌아다니다 보니

김구는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요즘 같으면 야 만화책이나 텔레비전이라도 있어서 심심풀이가 되겠으나

첩첩 산중 외딴 오두막에 딱지 한 장 갖고 놀 것이 없으니

시간이 마냥 지루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김구는 근처 마을 신풍(新豊)의 이 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툭하면 소일했다.

그런데 오두막집에서 외롭게 지내던 김구는

그쪽 아이들이 여간 깔보고 텃세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옛날의 텃세란,

땅마지기가 조금 있거나 그럴듯한 족보에 이름 함자가 적혀 있는

퇴락한 양반의 자식새끼들이 더했다.

 

 어느 날이었다.

김구는 벌거벗은 몸으로 그 집의 사랑방에 가서 스스럼없이 놀다가곤 했는데

그쪽 집 아이들의 마음에 텃세가 발동되어선지 작당을 하여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 가운데 나이깨나 든 아이가 시비를 걸었다.

 


"야, 이 해주 놈아!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들어와 놀아! 상놈 같으니!"

하며 발길로 그의 배꼽 근처를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사타구니께가 얼얼하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막내아들 녀석도, 초록은 동색이란 듯,

한패거리가 되어서 합세해 김구를 두들겨 팼다.

 

  김구는 이들에게 어이없이 얻어맞고 엉금엉금 기어서 집에 와 생각하니

여간 분하지가 않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흠씬 두들겨 맞은 김구는 그들의 소행이 여간 괘씸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모두 찔러 죽일 생각으로 부엌에서 녹슨 식도(食刀)를 들고

쏜살같이 그쪽 집으로 갔다.

아무래도 정문으로 가면 발각당할 것이 우려돼

뒤쪽 문으로 몰래 들어 가다가 그만 그쪽 집안의 처녀에게 발각 당했다.

조그만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씩씩거리며 칼을 품고 들어오는 품이

여간 수상쩍지 않아 저희 오라비들에게 얼른 고했다.

 

  "오빠, 저 녀석이 또 왔어요. 칼까지 들고. 나와 봐요."

  그러자 김구 보다 두어 자나 더 큰 오라비들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타나

함부로 걷어차고 칼까지 빼앗았다.

느닷없는 역습 에 오히려 매만 맞은 꼴이었다.

김구는 칼까지 뺏기고 집에 돌아와서는 혹시나 부모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까 봐 가슴을 두근거리며 숨어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의 전기(傳記)작가는 아마도 이렇게 기록하지 않을까?

 


7~8세 소년 김구는 나이답지 않게 삼손 같은 괴력 (怪力)으로 10여 명이 넘는

무리들을 혼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 (首長)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무릇 사람이란 힘을 아껴 쓰고, 옳은 일에 써야 하느니라.

이때부터 그의 호방하고도 영웅적인 기질이 싹트고 있었으니

이건 필시 예삿일이 아니었다.

 

또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이었다. 집에 혼자 남은 김구는 무척 심심했다.

이렇다 할 놀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두커니 혼자 있으면 배가 더 고픈 법이었다.

이때 문 앞으로 엿장수가 지나갔다.

"헌 유기나 숟가락이 있으면 갖고 나오시오."

 

김구는 엿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어른들한테 들은 ‘엿장수는 아이들 고추 떼어 간다.'는 말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문을 단단히잠가 두고 엿장수를 불렀다.
 

  "아저씨 , 여기 좀 보세요."

  그리고 창호지에 주먹만한 구멍을 냈다.

  김구는 성한 숟가락은 엿장수에게 필요 없는 줄 알고

 아버지가 사용하던 좋은 숟가락을 발로 짓밟아 찌그러뜨렸다.

 

놋쇠라서 숟가락은 금방 반토막이 났다.

그는 숟가락의 절반만 문구멍을 통해 엿장수에게 내밀었다.

엿장수는 그 숟가락 값만큼 엿을 잘라 주었다.

엿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왔다.

 

  김구는 엿을 먹다 말고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버님 , 엿이 먹고 싶어서 숟가락을 부러뜨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을 하면서 ,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거라. 또 그랬다간 엄벌 하겠다."

   하며 질책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김구는 아버지가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넣어 두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원래 엽전이란 가운데 구멍이 들려 있는 법, 이 구멍 안에 실을 꿰어 길게 연결하면 들고 다니기가

아주 편리했다.

 김구는 이 돈을 꺼내 마치 휘장 두르듯 차고 떡집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그만 작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작은할아버지는 필시 이 돈이 아버지 돈이고,

김구가 돈을 훔쳐 가지고 나온 것이라 짐작하고 물었다.

 

  "너 이 녀석,이 돈 갖고 어디 가느냐?"

  '떡 사먹으러 가요."

  "네 아비가 보면 큰 매 맞는다. 어서 집에 갖다 두거라."

  작은할아버지는 김구가 걸머메고 있는 돈을 빼앗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김구는 내심 화가 났다. 먹고 싶은 떡도 먹지 못하고 돈까지 뺏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구가 집에 돌아오자, 먼저 돌아온 아버지가 벼락같이 화를 내면서 다짜고짜 빨랫줄로

그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 들보에 달아매고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말려 줄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마침 김구를 무척 아껴 주던 재종조부인 장련(長連) 할아버지가 지나가다가

김구의 맹렬(?)한 비명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동갑이었지만 항렬이 높아 아버지도 어려워하였다.

 

아버지는 말리는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였지만 할아버지는 불문곡직하고

김구를 풀어 주었다.

"이 어린것을 이다지 무지하게 다루면 쓰겠나."

하면서 매를 빼앗아 아버지를 대신 매질했다.

 


  김구는 장련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장련 할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것이 시원했다.

그 할아버지는 김구 소년을 등에 업고 들로 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주었다.

그 길로 김구를 업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너 앞으로 우리 집에서 살지 않으련?"

김구는 그러고 싶었으나 한편 아버지가 걸렸다.

그는 여러 날 그 할아버지의 집에 묵으면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훗날 재종조부는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해주 본향의 장지로 운구할 때 바퀴 달린 상여가 동원되었던 기억이 오랫동안 남았다.

 

김구의 소년 시절은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 시대에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나지지리 고생을 하던 기억,

그것은 그 또래 소년들이 늘 상 경험하던 것이었다.

김구는 그렇다고 잘살고 있는 남들을 그리 부러워하지 않았다.

 

1882년,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강령군 삼가리로 이주했던 친척들이

한 집 두 집 텃골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 역시 삼촌의 등에 업혀서 돌아왔다 고향에서 그의 부모는 농사를 지었다.

그의 아버지 순영은 학식이라야 겨우 이름 석자 쓸 변변치 않은 실력이었지만,

성격이 남달리 호방하고 악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또 힘이 장사여서 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마셔댔으며,

술에 취하면 그곳의 토호인 양반, 강씨와 이씨들을 닥치는 대로 트집 잡아

 때려 1년에 여러 차례 관아에 구금되는 소동을 일으켰다

 

  당시의 풍속은 사람이 얻어맞으면, 때린 사람의 집에 데려다

열흘이고 보름이고 눕혀 두고 생사를 기다리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의 집에는 늘상 한 달에 몇 명씩 거의 죽게 된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방에 번듯이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의 부친이 사람을 잘 구타한 것은 주벽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 때문인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처럼 강한 자가 약 한 자를 괴롭히는

'꼴' 을 보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근의 양반들은 그의 아버지를 은근히 멀리 했고 상놈들은 경외하였다.

김구는 아버지의 이런 호걸적인 기질을 닮기도 한 것 같다.

김구 소년에게 처음으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인 1884년 할아버지 장례식이 그것이었다.

그때 삼촌 준영이 술에 만취되어 장례 일을 돌보는 호상인들을 이유 없이

모조리 두들겨 팼다.

양반들도 김구의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양반들은 이런 일이 아주 예외였다.

 생색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준영은 이런 양반들을 모조리 두들겨 팼다.

김구는 이때를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종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다행히 힘줄은 손상되지 않아 준영 삼촌은 불구가 되진 않았다.

김구는 이 형벌로 삼촌이 범같이 소리 지르고 울부짖어서,

무서워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이때 김구의 어머니는 김구에게 간곡하게 타일렀다.

 

"이 집은 술이 탈이다. 술로 인해 모든 풍파가 일어난다.

 만일 너마저 술을 마신다면 나는 자살이라도 해서 그 꼴을 보지 않겠다. "

 

김구는 평생 동안 어머니의 말을 염두에 두고 이를 실천했다.

 

 

 

 

 

사람의 씨가 따로 있나?

 

 

김구의 가계 (家系)를 보면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으로서,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부마가 되어 그 8대 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翼元公)인데, 김구는 바로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시대의 공신이었고,

이조시대에 들어서도 대대로 글을 업 (業)으로 삼는 양반 가문의 혈통을 고수하다가,

이조 효종 때 이르러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 때문에 일족이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김자점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정치인으로, 인조반정(仁祖 反正)을 주도하여 영의정까지

올라 국권을 전횡했다.

그러나 1649년 효종 즉위 후 탄핵받고 파직 당하자 앙심을 품고, 조선 이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이라고 밀고하여 청군이 국경선에 배치되는 위기상황을 만들었다.

효종은 이 사태를 수습하고 난 후 김자점을 광양으로 유배 보냈다.

이듬해인 1651년 김자점은 또 다른 역모사건으로 아들, 손자와 함께 사형되었는데,

이를 두고 후세에서는 '김자점의 옥(獄)' 이라고 한다.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면서 대대로 살았다.

따라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상놈 행세를 했던 것이다.

양반의 문화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짓고 임야를 개척해 가면서 살다 보니

완전히 '상놈'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군제(軍制)에는 역둔토(驛屯土) 외에 군역전(軍役田)이란 토지가 있었는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이 토지를 경작하다가 유사시에 징병령에 따라 군에

나가는 제도였다.

김구의 선조들은 군 역전을 경작하다 보니 양반과는 멀어졌다.

김구가 살고 있는 텃 골 근처에는 진주 강(姜)씨, 덕수 이씨 등이 세도를 부리면서

살고 있었는데, 김구 선대는 두 토착 양반 세도 밑에서 한 번도 기피고 살 수가 없었다.

김구 집 안에 진주 강씨, 덕수 이씨의 처녀가 시집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두 성씨의 어린아이들도 김구 집안의 7,80대 노인들에게 하대 하며 '이랬다' '저랬다' 했고,

김구 집안의 어른들도 이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어린 김구는 이것이 늘 불만이었다.

  '사람의 씨가 따로 있는가, 도대체 이런 경우가 사람 사는 있는가. 이것은 잘못이다.

하물며 짐승도 먼저 낳고 나중에 낳는데, 먼저 태어난 짐승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사람이야 말할 수 있겠는가.'

  김구는 마음속으로 양반과 상놈에 대한 호칭부터 께름칙하게 생각했다.

몇 해 전의 일이었다. 새로 혼인을 맺은 집안이 있었다.

그런데 김구의 선대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에 갔던 길에 관(冠) 한 개를 사서 새 사돈을

보려고 집에 두었는데, 한밤중에 그 관을 쓰고 갔다가 양반에게 발각되어 호된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다시는 양반들이 보는 앞에서 그 관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김구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강씨, 이씨)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나요?

그리고 우리는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나요?"

 어른들이 대답했다.

 
 "사실은 침산(硝山) 강씨도 우리 선조만 못했다.

강씨 일문(一門)에 진사가 3명이나 생존하지 않았느냐.

오별남 이 진사 집도 그렇다. "


    "진사가 되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나요?"

김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집안 어른은, 이 녀석이 양반과 상놈에 대한 구별을

반드시 해명해야겠다는 어떤 결의가 들어있는 것을 간파했다.

집안 어른이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대체로 벼슬이란 절차가 있는 법이다.

신분은 양반이어야 하고, 학문을 열심히 연마하여 선비 소리를 듣게 되면

과거를 보고 합격해야 하는 것이다."

  김구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아버님께 서당에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그의 아버님은 오랫동안 양반들의 텃세에 주눅이 들어,

서당 같은 곳에서 김구가 잘 적응할 것인가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시큰둥하게,


"이 마을에는 마땅한 서당이 없다. 다른 동네에 서당이 더러 있지만,

그쪽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어쩌다 용케 서당 훈장이 받아준다고 해도 양반자제들이 괄시 할 테니

그 꼴을 견디겠느냐?"

하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글쎄다. 한번 궁리를 해보자꾸나."

 


이렇게 하여 김구의 아버지는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들을 모아서 서당 하나를 만들었다.

수강료로는 쌀과 보리를 모아서 가을에 주기로 했다.

서당훈장은 청수리(淸水里)의 이 생원이었다.

이 생원은 양반이었지만 글이 신통치 않아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잘 팔리지 않는 삼류 강사였다.

양반의 훈장으로서는 자격미달로 김구 또래의 '상놈' 선생이 된 것이다.

어린 김구는 이 생원이 훈장으로 오기 전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교육다운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김구로서는,

비록 양반들이 경원하는 이 생원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김구의 집 앞으로 키가 크고 수염이 넉넉한 옥양목 두루마기 차림의

이 생원이 나타났다.

외양으로 보아 학자다운 풍모가 엿보이는 노인이었다.

김구의 아버지가 먼저 큰절을 올리고 김구를 불렸다.

  "창암아, 선생님께 절하여라. "

  창암은 김구의 또 다른 아명 (兒名)이었다.

  김구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서 큰절을 올리고 살포시 이 생원을 올려다보았다.

이 생원의 기품 있는 얼굴이 드러나자,

그는 속으로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 생원이 마치 신선이나 하느님처럼 거룩해 보인 것이다.

 

그날부터 서당이 열렸다.

김구는 훈장인 이 생원의 뒷바라지를 꼼꼼히 해주었다.

이때 김구의 나이 열두 살,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나이였다.

 

 

 

'마상봉한식 (馬士逢寒食)'

이 다섯 글자가 김구가 태어나서 처음 접한 글귀였다.

'마상 봉한 식' 이란 말은 중국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의 한시로 서

'길거리에서 한식을 만나다(途中寒食)'의 첫 구절이었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다'라는 뜻이었다.

김구로서는 어렵고도 신기한 구절이었다.

뜻이야 어찌되었건 너무나도 기뻐서 외우고 또 외웠다.

상놈의 자식으로서 이런 고급 글귀를 접한다는 것이 더 없는 영광 같았다.

 

서당이 개원된 지 3개월,

김구의 집에서 서당은 인근 산동(山洞)의 신 존위의 사랑으로 옮겨갔다.

그는 아침이면 밥 구럭 을 메고 집까지 오가면서 끊임없이 글을 외웠다.

그의 또래 가운데 간혹 머리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좀 나은 자도 있었지만

김구가 늘 우등이었다.


그러나 반년쯤 후,

신 존위와 훈장인 이 생원 사이에 갈등이 생겨,

결국 이 생원은 신 존위의 사랑방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요즘 같으면 별것도 아닌 이유였겠지만,

식량이 어려운 그 시절에 이 생원이 식사를 때 없이 많이 한다는 것도 눈총 받는 일었다.

 

이 생원을 식욕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쫓아냈지만 내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김구는 공부를 잘하는데, 신 존위의 손자는 머리가 지지리 나빠서

공부를 잘 못한다는 시기심 때문이었다.

이 생원은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김구에게 이런 당부를 했었다.

 

  월강(月講) 전날이었다.

월강이란 한 달에 한 차례씩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네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못 외우는 것처럼 아는 것도 모른다고 하여라."

 


  김구가 훈장의 말대로 아는 것도 짐짓 못 외우자,

그날 신 존위는 기분이 무척 흡족했다.

신 존위의 손자가 장원 (壯元)을 했기 때문이다.

신 존위는 손자가 장원을 해서인지 그날 닭을 잡고 술상을 차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신 존위는 훈장을 해고하고 말았다.

요즘 시대에 비천한 사람이 늘 하는 야비한 행위였다.

 


어느 날, 김구가 아침 일찍 훈장네 집으로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훈장이 김구 집으로 찾아왔다.

훈장은 김구의 아버지에게 섭섭한 말을 했다.

  "시일이 수상하여 이렇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소.

여러 가지 제반 사정은 묻지 말아 주시오.

자제분의 머리가 총명하니 훗날 좋은 선생 모셔다가 더욱 학업에 전념케 하시오."

 

김구는 이 말에 눈물을 흘렀다.

자신의 무식한 눈을 뜨게 해준 훈장이었다.

남들은 훈장의 글 실력이 미진하다고 따돌림 했 지만,

김구로서는 처음으로 대하는 문화적인 접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그 후에도 몇 차례 '돌림선생' 을 모셔와 공부를 했다.

돌림 선생이란 일종의 글 강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전신불구가 되었다.

평소의 과도한 약주가 화근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김구는 공부도 못 하고 아버지 병 수발을 들어야만 했다.

가난한 살림에 의사와 약을 대야 하니 가산이 금방 탕진되었다.

'용한' 한의사의 '특수치료로 아버지의 병세는 다소 호전되었으나

비뚤어진 입은 그대로였고, 그래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한쪽 팔과 다리는 여전히 마비였다. 중풍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돈이 없어 훌륭한 의사를 모셔오지 못했다.


"얘야, 한집의 기둥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의 아버님을 살려야 할 것 아니냐."

 


  어머니의 말인즉,

두 사람이 문전걸식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병을 완쾌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은 가산을 모두 처분했다.

가산이라야 쓰러져 가는 집과, 부엌에 걸려 있는 솥 같은, 요즘 같으면

 내다 놔도 집어 가지도 않을 물건들이었다.

부모님은 김구를 큰 어머니 댁에 맡겨 두고 떠나셨다.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김구는 사촌 네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무리 사촌들이 잘 해준다고 해도 부모님의 품만 같은가.

사촌들과 송아지 고삐나 끌고 산허리나 밭두렁에서 세월만 보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김구는 속으로 이런 생활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농촌 사람의 일생이란,

태어나자마자 큰 공부는커녕 논과 밭에서 평생 동안 일하다 죽는 것이 상례로 돼 있었다.

사람이란 이것 말고도 할 일이 더 있다고 생각한 김구는 나이가 한두 살 쯤 더 되자

이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 후 김구는 사촌의 집을 나와 부모님을 따라서 신천, 안악 장련으로 떠돌아다니다

장련에서 부모님은 김구를 재종조의 누이 집에 떼어놓고 할아버지 대상(大祥)을 지낸다며

텃골로 돌아갔다.

장련의 재종조의 누이 집에서 김구는 농사일을 거들었다.

인근에 구월산(九月山)이 있었다.

구월산으로 김구는 나무꾼이 되어 돌아다녔다.

김구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키가 유난히 작았기 때문에,

지게를 지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지게만 돌아다니는 꼴이었다.

  김구는 나뭇짐을 지고 서당 근처를 지날 때마다,

서당 안에서 들려오는 아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하,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는구나. 사람의 일생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김구는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가끔씩 탄식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무꾼 생활이 얼마나 단조롭고, 동물적인 생활인 가를 의식했다.

사람이란 우선 배워야 하고, 배움이란 머리를 깨치는 것이고,

머리가 깨쳐야 사람답게 한평생을 지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얼마 후 부모님이 장련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기력은 많이 회복되었다.

  "얘야, 내 비록 몸은 부자유스럽지만 너 하나만큼은 꼭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김구의 아버지는 자신은 비록 배우지 못해 무식했지만,

아들만큼은 본래 양반의 혈통을 받아 공부를 시키면 양반 자제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시키기에는 생활과 환경이 여의치 못했다.

  고향에 돌아가도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친척들이 조금씩 추렴하여 겨우 목에 풀칠을 하고, 김구는 뜻한 대로

다시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책은 빌려서 볼 수 있지만 먹과 붓은 사서 써야만 했다.

김구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에게 품팔이를 해서 먹과 붓을 대주었다.

김구의 나이 열넷,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다.

서당 선생도 등급이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대부분 김구가 대한 선생이란, 양반 자제를 가르칠 글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벼 열섬짜리, 다섯 섬짜리 선생이란 그저 그런 퇴물 선생이었다.

그러나 김구로서는 그 선생들이 모두 훌륭하게 보였다.

  김구의 아버지는 가끔씩 이렇게 말했다.

 


  "글해서 밥 벌어 먹기는 틀린 것 같다. 밥 벌어 먹기는 동냥아치의 장타령이 제일이다.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 에나 힘써라."

  실용문서 , 즉 시행문(時行文)이란 토지문권(土地文券) 정소장(程訴狀), 제축문(祭祝次),

혼서문(婚書丈),서한문(書輪戈)등인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요즘으로 치면

대서방이나 사법서사들이 쓰는 문서 작성 같은 것들이었다.

글 짧은 농민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습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구는 틈틈이 이런 글을 습득, 문중에서는 손꼽는 문사(文 士)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문중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문사로 통했지만, 김구의 글 실력이란

양반의 자제들에 비해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김구는 속으로 이런 글에 만족치 않았다.

이런 류의 글이란 놈의 신분을 다소 벗어나고,

문중 사람들에게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통감(通鑑)'과 '사략(史略)'에 나오는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통감'과 '사략' 은 모두 중국의 고서(古 書)였다. 이 책을 유심히 읽던 가운데,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라고 한 진승(陳勝)의 말이 눈에 번적 뜨였다.

진승은 진나라 말기의 장수로서 오광(吳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왕후장상이 따로 있느냐고 백성들을 선동했다고 한다.

또 '빨래하던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는 한신(韓信)의 사적 등을 생각할 때

김구는 양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유방(劉邦)의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 ' 는 어휘를 읽고서 김구는 큰 용기를 냈다.

문자를 익혀 가는 즐거움은 김구에게는 새로운 기쁨이었다.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 되어 그것이 늘 고민이었다.

 

 

 

  김구는 훗날 이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배운다는 것은 양반 상놈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과, 본래 양반과 상놈의 머리가

 따로 삼분지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확고히 들었다.

  이때 김구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동네에서 10여 리 떨어진 학명동(鶴鳴洞)이란 곳에 사는 정문재(鄭文哉) 씨는

원래 상민 이었는데, 지방에서 문명(文名)을 자랑하고 있어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더욱이 그 사람은 큰어머니와는 재종 남매간이었다.

정문재 선생 수하에는 젊은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어 시(誇)와 부(賦)를 지었으며,

한쪽에서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너 정 선생에게 가지 않으련? 거기 가면 학비도 면제되고 글공부를 많이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말에 김구는 뛸 듯이 기뻤다.

 매일 농사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깝던 차에,

아버지의 이야기는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김구는 새벽에 일어나 밥 구럭을 메고 고갯길을 쏜살같이 넘어,

그곳에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깨기도 전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와 한 (漢) ·당(唐) 시(誇)를 익혔고,

'대학(大學)', '통감' 등을 배웠다.

먹과 종이, 벼루가 없었기 때문에 글자 연습은 분판(粉板)이 고작이었다.

분판이란 분을 기름에 개어서 널조각에 발라 결은 것으로,

옛날 서당 아이들이 글자 연습할 때 주로 썼다.

 


  김구는 점차 학문에 눈을 떠갔다.

학문에 눈이 뜨이자 자신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다.

불교에서 말하듯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따라 인간은 죽게 되는데,

이 동안에 사람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가치 있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까 하는

생각이든 것이다.


  대부분의 농촌사람들이란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어 일 년 동안 빚을 얻은 돈을 갚고,

나머지 곡식으로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 갖고서는 사람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행복이란 잘 먹고 사는 것에 그친다고 생각했지만 김구 소년의 생각은 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야 개나 돼지 짐승도 똑같은 것이지만

사람은 조금 달라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어린 김구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큰 인물이 되고자 하는 어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설방 >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남의 머리가 될 사람  (0) 2012.12.26
5. 아아, 대한제국  (0) 2012.12.26
4. 안태훈 진사  (0) 2012.12.26
3.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0) 2012.12.26
2. 낙방 거사    (0) 201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