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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전-완판본

오늘의 쉼터 2012. 12. 25. 10:36

토끼전-완판본


천하의 모든 물 중에 동해와 서해와 남해와 북해 네 바다물이 제일 큰지라.
그 네 바다 가운데에 각각 용왕이 있으니 동은 광연왕(廣淵王)이요,
남은 광리왕(廣利王)이요,

서는 광덕왕(廣德王)이요,

북은 광택왕(廣澤王)이라.
남과 서와 북의 세 왕은 무사태평하되 오직 동해 광연왕이 우연히 병이 들어
천만가지 약으로도 도무지 효험을 보지 못한지라.

  하루는 왕이 모든 신하를 모으고 의논하되,

"가련토다. 과인의 한 몸이 죽어지면 북망산(北邙山) 깊은 곳에 백골이 진토에 묻혀
세상의 영화며 부귀가 다 허사로구나.

이전에 여섯 나라를 통일치지하던 진시황(秦始皇)도
삼신산에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인을 보내었고,
위엄이 사해에 떨치던 한무제도 백대(柏臺)를 높히 짓고 승로반(承露盤)에 신선의 손을
만들어 이슬을 받았으되 하늘 명이 떳떳치 아니하여 필경은 여산(廬山)의 무덤과 무릉침을
면치 못하였거늘 하물며 나같은 한쪽 조그마한 나라 임금이야 일러 무엇하리.
누대(累代) 상전(相傳)하던 왕의 기업(基業)을 영결(永訣)하고 죽을 일이 망연(茫然)하도다.

고명한 의원을 널리 구하여 자세히 진찰한 후에 약으로 치료함이 마땅하도다."

하고 하교(下敎)하여 가로되,

"과인의 병세가 심히 위중하니 경의 무리는 아무쪼록 충성을 다하여 명의(名醫)를
광구(廣求)하여 과인을 살려서 군신이 더욱 서로 동낙(同樂)하여 지내게 하라."

한 신하가 출반주(出班奏)하여 아뢰어 가로되,

"신은 듣자오니,

오나라 범상국(范相國)이며 당나라 장정군이며 초나라 육처사(陸處士)는
오나라와 초나라 지경에 제일되는 세 호걸이라 하오니,

세 사람을 찾아 문의하옵소서."

하거늘 모두 보니 선조 적부터 정성을 극진히 하던 공신인데 수천 년 묵은 잉어라.
왕이 들으시고 옳게 여기시어 근신(近臣)한 신하를 보내어 그 세 사람을 청하니
수일 만에 다 왔거늘 왕이 전좌(殿坐)하시고 세 사람을 인도하여 보실새 왕이
치사(致謝)하여 가로되,

"선생네들이 과인의 청함을 인하여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아니하시고 누지(陋地)에
왕림하시니 불안하고 감사하여 하노라"

세 사람이 공경 대답하여 가로되,

"생의 무리가 진세(塵世) 부생(浮生)으로 청운(靑雲)과 홍진(紅塵)을 하직하고
강산 풍경을 사랑하와 오초강산 궁벽한 곳에 임의로 왕래하며 무정한 세월을
헛되이 보내옵더니

천만 뜻밖에 대왕의 명을 받자오니 황송하옵기 가이 없사이다."

왕이 가라사대,

  "과인이 신수 불길하여 우연이 병든 지 지금 수 년이나 되도록

약 신세도 많이 하였건마는 범상한 의술이라 그러한지 종시 효험을 조금도 보지 못하오니,
선생은 죽게 된 목숨을 살려 주시기를 하늘같이 바라노라"

한즉 세 사람이 가로되,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약이오,

색은 사람의 수한(壽限)을 줄이는 근본이라.
대왕이 술과 색을 과도히 하시어 이 지경에 이르심이니 스스로 지으신 죄악이라
수원수구(誰怨誰咎) 하시오리까마는 혹은 이르되 사람의 소년 한 때 예사라 하오니
저렇듯이 중한 병이 한 번 들면 회춘하기 어려운 병이로소이다.
푸른 산에 안개 걷히듯 봄바람에 눈 슬듯 오장육부가 마디마디 녹아지니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다시 살아나도 용수(用手)할 수 없사옵고,
금강초와 불사약이 구산(丘山)같이 쌓였어도 즉효(卽效)할 수 없사옵고,
인삼과 녹용을 장복(長服)하여도 재물이 쌓였어도 대속(代贖)할 수 없고,
 용력(勇力)이 절인(絶人)하여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이리저리 아무리 생각하여도 국운이 불행하고 천명이 궁진(窮盡)하심인지

대왕의 병환이 평복(平復)되시기가 과연 어렵도소이다."

왕이 들으시고 정신이 산란하여 가로되,

"그러면 어찌할고? 죽을 자는 다시 살지 못하리로다.
이 세상 일년 일도(一到) 저같이 좋은 이삼월 도리화(桃李花)와 사오월에
녹음방초(綠陰芳草)와 팔구월에 황국단풍(黃菊丹楓)과 동지섣달 설중매화(雪中梅花)며,
저렇듯이 아리따운 삼천 궁녀의 아미분대를 헌 신짝같이 바리고 속절없이 황천객이 되오리니

그 아니 가련하오.

설혹 효험이 없을지라도 선생은 묘한 술법을 다하여 약방문(藥方文)이나 하나 내어 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노라."

하니 세 사람이 웃으며 가로되,

"생의 말을 들으실진대 방문(方文)이나 하여 올리리이다.

상한 병에는 시호탕(柴胡湯)이요,
음허화동(陰虛火動)에는 보음익기전(補陰益氣煎)이요,

열병에는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이요,
원기부족증에는 육미지탕(六味之湯)이요,

체증에는 양위탕(養胃湯)이요,
각통에는 우슬탕(牛膝湯)이요,

안질에는 청간명목탕(淸肝明目湯)이요,

풍증에는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이라.

천병만약에 대증투제(對症投劑)함이 다 당치 아니하옵고,
신효(神效)할 것 한가지가 있사오니 토끼의 생간이라.
그 간을 얻어 더운 김에 진어(進御)하시면 즉시 평복되시오리이다."

왕이 가로사대,

"어찌하여 그 간이 좋다 하느냐?"

대답하여 여쭈오되

"토기란 것은 천지 개벽한 후 음양과 오행(五行)으로 된 짐승이라.
병을 음양오행의 상극(相剋)으로도 고치고 상생(相生)으로도 고치는 법이라.
 토끼 간이 두루 제일 좋은 것이온데 더구나 대왕은 물 속 용신이시오 토끼는 산 속 영물이라.

산은 양이요 물은 음이올 뿐더러 그 중에 간이라 하는 것은 더욱 목기(木氣)로 된 것이온즉
만일 대왕이 토끼의 생간을 얻어 쓰시면 음양이 서로 화합함이라.
그럼으로 신효하시리라 하옵나이다."

하고 말을 마치고 하직하여 가로되,

"녹수청산(綠水靑山) 벗님네와 무릉도원(武陵桃源) 화류촌(花柳村)에서 만나기로

금석같이 언약하고 왔삽기로 무궁한 회포를 다 못 펴 드리옵고 총총히 하직하니
바라건대 대왕은 옥체를 천만 보중(保重)하옵소서."

하고 섬에 내려 백운산으로 표연히 향하더라.

  왕이 그 세 사람을 보내고 즉시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아 놓고 하교하여 가로되,

"과인의 병에는 토끼 생간이 제일 신효한 약이요
그 외에는 천만가지 약이 다 쓸 데 없다 하니 나를 위하여 뉘 능히 토끼를 살게 잡아 올꼬?"

문득 일원대장이 출반주하여 가로되,

  "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한 번 인간에 나아가 토끼를 살게 잡아오리이다."

하거늘, 모두 보니 머리는 두루주머니 같고 꼬리는 여덟 갈래로 돋힌 수천 년 묵고 묵은 문어라.

왕이 대희하여 가로되,

"경의 용맹은 과인이 아는 바라.

급히 인간에 나아가 토끼를 살게 잡아 오면 그 공이 적지 아니하리라."

하고, 장차 문성장군(文盛將軍)을 봉하려 할 즈음에,

문득 한 장수가 뛰어 내달아 크게 외쳐 가로되,

"문어야. 네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威風)이 약간 있다한들 제일 언변도 넉넉치 못하고

의사(意思)도 부족한 네가 무슨 공을 이루겠다 하며,

또한 인간 사람들이 너를 보면 영락없이 잡아다가 요리조리 오려내여 국화 송이며 매화 송이처럼

형형색색으로 갖추갖추 아로새겨 혼인 잔치 환갑 잔치에 크고 큰 상 어물접시 웃기거리로 긴요하고, 재자가인(才子佳人)의 놀음상과, 공문거족(公門巨族)의 식물상과, 어린아이의 거둘상과,

오입장이 남 술안주에 구하느니 네 고기라.

무섭고 두렵지도 아니하냐, 이 어림 반푼어치 없는 것아.

나는 세상에 나아가면 칠종칠금(七縱七擒)하던 제갈량(諸葛亮)과 같이

신출귀몰한 꾀로 토끼를 살게 잡아 오기 용이하다."

하거늘 모두 보니 그는 수천 년 묵은 자라이니 별호는 별주부라.

  문어가 그 말을 듣고 분기가 대발하여 긴 꼬리 여덟 갈래를 샅샅이 엉벌리고
검붉은 대가리를 설설이 흔들면서 소리를 지르니 물결이 뛰노는 듯,

웅어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어 가로되,

"요마(요마)한 별주부야, 내 말 잠깐 들어 보아라,
포대기 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장부를 저희(沮戱)할 줄 뉘 알았으리오.
진소위(眞所謂) 범 모르는 하룻강아지요,

수레 막는 쇠똥벌레로구나.
네 죄를 의논하고 보면 태산도 오히려 가볍고 황하수(黃河水)가 도리어 얕다 하겠으니
그것은 다 그만 덮어 두고 첫 문제로 네 모양을 볼작시면 사면이 넓적하여 나무접시 모양이라.
작고 못 생기기로 둘째 가라면 대단 싫어할 터이지.

요따위 자격에 무슨 의사가 들어 있으리오.
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너를 보면 잡아다가 끓는 물에 솟구쳐서 자라탕을 만들어
동반(東班) 서반(西班) 세가자제(勢家子弟) 구하나니 네 고기라. 무슨 수로 살아오랴?"

자라가 가로되,

"너는 우물 안 개구리라.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알지 못하는도다.
지나(支那)에서 세상을 주름잡던 초패왕(楚패王)도 해하성(垓下城)에서 패하였고 유럽에서
각국을 응시하던 나파륜(拿破崙)도 해도(海島) 중에도 갇혔는데 요마한 네 용맹을 뉘 앞에서

번쩍이며, 또는 무슨 지식이 있노라고 내 지혜를 헤아리느냐. 참으로 내 재주를 들어보아라.

만경창파(萬頃蒼波) 깊은 물에 기엄둥실 사족을 바투 끼고 긴 목을 움치며 넓적이 엎드리면

둥글둥글 수박이오 편편납작 솥뚜껑이라.
 나무 베는 목동이며 고기 잡는 어부들이 무엇인지 모를 터이니
장구하기는 태산이오 평안하기는 반석이라. 남 모르게 다니다가 토끼를 만나 보면
어린아이 젖국 먹이듯 뚜장이 과부 호리듯 이 패 저 패 두루 써서 간사한 저 토끼를
두 눈이 멀겋게 잡아올 것이요,
 만일 시운이 불행하여 못 잡아 오는 경우이면 수궁에 돌아와서 내 목을 대신하리라."

문어 할 수 없이 주먹 맞은 감투가 되야 슬쩍 웃으며 뒤통수를 툭툭 치고 흔들흔들

달아나거늘 만조백관이 주부의 의사와 언변을 한없이 칭찬하더라.

자라가 다시 엎드려 왕께 아뢰어 가로되,

"소신은 물 속에 있는 물건이옵고 토끼는 산 속에 있는 짐승이온즉 그 형용을 자세히 알 수 없사오니
화공을 패초(牌招)하시와 토끼 형용을 그려 주옵소서"

하는데 용왕이 옳게 여기어 화공을 패초하시니,
지나로 이르면 인물 그리던 모연수(毛延壽)와 대 잘 그리던 문여가(文與可)며,
조선으로 이르면 산수 그리던 겸재(謙齋)와 나비 잘 그리던 남나비며,
그 외에 오도자(吳道子) 김홍도(金弘道)와 같이 유명한 여러 화공들이

제제(濟濟)히 등대(等待)하거늘,
왕이 명하여 토끼의 화상을 그려 들이라 하시니,
 화공들이 전교를 듣고 한 처소로 나와 보니  각색 제구 찬란하다.
고려자기 연적이며 남포청석(藍浦靑石) 용연(龍硯)이며 한림풍원(翰林風月) 해묵(海墨)이며

중산 황모 무심필과 백릉설한(白綾雪寒) 대장지(大壯紙)며, 청황적백 녹자주홍 여러가지
 물감이 전후좌우에 벌려 있더라.

  이에 화공들이 둘러 앉아서 토끼 화상을 그리는데 각기 한 가지씩 맡아 그려
토끼 한 마리를 만들어 내는데, 하나는 천하명산 승지(勝地) 간에 경개(景槪) 보던
저 눈 그리고, 또 하나는 두견 앵무 지저귈 때 소리 듣던 저 귀 그리고,
또 하나는 난초 지초 등 온갖 향초 꽃 따먹는 입 그리고, 또 하나는 방장 봉래 운무 중에
냄새맡던 코 그리고, 또 하나는 동지섣달 설한풍(雪寒風)에 방풍(防風)하던 털
그리고, 또 하나는 만학천봉(萬壑千峰) 구름 깊은 곳에 펄펄 뛰든 발 그리니,
두 눈은 도리도리, 앞다리 짤막, 뒷다리 길쭉, 두 귀는 쫑긋, 뛸듯뛸듯 천연한 토끼라.

  왕이 보시고 크게 기뻐하사 모든 화공에게 각기 천금씩 상급하고 그 화본을 자라를 주며,

  "어서 길을 떠나라."

하신대, 자라 재배하고 화본을 받아 들고 이리 접고 저리 접쳐 등에다 지자하니
수침(水沈)이 될 것이라.
이윽히 생각다가 움친 목을 길게 늘려 한 편에 집어 넣고 도로 움츠리니
전후가 도무지 염려 없는지라.

  용왕이 신기히 여기사 친히 잔을 들어 권하여 가로되,

  "경은 정성을 다하여 큰 공을 이루어 수이 돌아오면 부귀를 한가지로 하리라."

하시고 즉시 호혜청(互惠廳)에 전교하시어 전곡(錢穀)의 다소를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별주부에게 사송(賜送)하시니, 별주부 천은에 대단히 감격하여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만조백관을 작별한 후, 집에 돌아와 처자를 이별할 때, 그 아내가 당부하여 이르되,

"인간은 위지(危地)니 부디 조심하여 큰 공을 세워 가지고 수이 돌아오시기를

천만 축수(祝手) 하옵나이다."

하거늘, 자라가 대답하되,

"수요장단(壽夭長短)이 하늘에 달렸으니 무슨 염려가 있으리오.
돌아올 동안 늙으신 부모와 어린 자식들을 잘 보호하라."

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소상강(瀟湘江)과 동정호 깊은 물에 허위둥실 떠올라서
벽계산간(碧溪山間)으로 들어가니 이 때는 방출화류(放出花柳) 좋은 시절이라.

  초목군생(草木群生) 온갖 물건들이 다 스스로 즐거움을 가져 있으니,
작작(灼灼)한 두견화는 향기를 띠었는데

얼숭얼숭 호랑나비는 춘흥을 못 이기어서 이리저리 흩날리고,

청청한 수양 늘어진 시냇가에 날아드는 황금같은 꾀꼬리는
벗 부르는 소리로 구십춘광(九十春光)을 희롱하고,

꽃 사이에 잠든 학은 자취 소리에 자주 날고,

가지 위에 두견새는 불여귀(不如歸)를 화답하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

 방울새 떨렁, 물떼새 찍걱, 접동새 접둥, 뻐국새 벅, 까마귀 골각, 비둘기 국국 슬피 우니

근들 아니 경(景)일소냐.
천산과 만산에 홍장(紅粧) 찬란하고 앞 시내와 뒤 시내에 흰 깁을 펴인 듯,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는 천고의 절개요,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순식간 봄이라.
기괴한 바윗돌은 좌우에 층층(層層)한데 절벽 사이 폭포수는 이 골 물 저 골 물
합수(合水)하여 와당탕퉁텅 흘러가는 저 경개 무진(無盡) 좋을시고.

  그 구경 다하고 나무수풀 사이로 들어가면 사면으로 토끼 자취를 살피더니
한 곳을 바라보니 각색 짐승 내려온다. 발발떠는 다람쥐며, 노루 사슴 이리 승냥이
곰 도야지 너구리 고슴도치 사지주지 원숭이 범 코끼리 여우 등이 담비 성성이라.
좌우로 오는 중에 토끼 자취 알 수 없어 움친 목을 길게 늘여 이리저리 휘둘러 살피더니
후면으로 한 짐승 들어오는데 화본과 방불(彷佛)하다. 토끼 보고 그림 보니
영낙없는 네로구나. 자라 혼자 마음에 매우 기뻐하여 진가(眞假)를 알려할 때
저 짐승 거동 보소. 혹 풀도 뜯적이며 싸리순도 뜯적이며 층암절벽 사이에 이리저리
뛰어 뺑뺑 돌며 할금할금 강똥강똥 뛰놀거늘 자라 음성을 높혀서 점잖게 불러 가로되,

"고봉준령(高峰峻嶺)에 신수도 좋다. 저 친구, 그대 토선생이 아니신가?
나는 본시 수중호걸이러니 양계에 좋은 벗을 얻고자 광구터니 오늘이야 산중호걸 만났도다.

기쁜 마음 없지 못하여 청하노니, 선생은 아모커나 허락하심을 아끼지 아니하실까 하나이다."

하니, 토끼 저를 대접하여 청함을 듣고 가장 점잖은 체하며 대답하되,

"거 뉘라서 날 찾는고.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이 강산 경개 좋은데,

날 찾는 이 거 뉘신고.

수양산(首陽山)에 백이숙제(伯夷叔齊)가 고비 캐자 날 찾는가,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영천수에 귀 씻자고 날 찾는가.
부춘산(富春山) 엄자릉(嚴子陵)이 밭 갈자고 날 찾는가,
면산(면山)에 불탄 잔디 개자추(介子推)가 날 찾는가.
한 천자의 스승 장량(張良)이가 퉁소 불자 날 찾는가,

상산사호(商山四皓) 벗님네가 바둑두자 날 찾는가.

굴원(屈原)이가 물에 빠져 건져 달라 날 찾는가,
시중천자 이태백(李太白)이 글 짓자고 날 찾는가.
주덕송(酒德頌) 유령(劉伶)이가 술 먹자고 날 찾는가,
염락관민(濂洛關민) 군현들이 풍월 짓자 날 찾는가.
석가여래(釋迦如來) 아미타불 설법하자 날 찾는가,
안기생(安期生) 적송자(赤松子)가 약 캐자고 날 찾는가.
남양초당(南陽草堂)에 제갈선생 해몽하자 날 찾는가,
한 종실 유황숙(劉皇叔)이 모사 없어 날 찾는가.
적벽강(赤壁江) 소동파(蘇東坡)가 선유(船遊)하자 날 찾는가,
취옹정(醉翁亭) 구양수(歐陽修)가 잔치하자 날 찾는가."

두 귀를 쫑그리고 사족을 자주 놀려 가만히 와서 보니,
둥글넙적 거뭇편편하거늘 고이히 여겨 주저할 즈음에 자라가 연하여 가까이 오라 부르거늘,

아모커나 그리하라 하고 곁에 가서 서로 절하고 잘 앉은 후에, 대객(待客)의 초인사로
당수복(唐壽福) 백통(白筒)대와 양초(兩草) 일초(日草) 금강초(金剛草)며 지권연(紙卷煙)
여송연(呂宋煙)과 금패 밀화 금강석 물부리는 다 던져두고 도토리통에 싸리순이 제격이라.
자라가 먼저 말을 내되,

"토공의 성화(聲華)는 들은 지 오랜지라 평생에 한 번 보기를 원하였더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호걸을 상봉하니 어찌하여 서로 보기가 이다지 늦느뇨?"

한즉, 토선생이 대답하되,

"세상에 나서 사해를 편답(遍踏)하며 인물 구경도 많이 하였으되
그대 같은 박색은 보던 바 처음이로다. 담구멍을 뚫다가 학치뼈가 빠졌는가
발은 어이 뭉둑하며, 양반 보고 욕하다가 상투를 잡혔던가 목은 어이 기다라며,
색주가에 다니다가 한량패에 밟혔던지 등이 어이 넓적하고,
사면으로 돌아보니 나무접시 모양이로다. 그러나 성함은 뉘댁이라 하시오?
아까 한 말은 다 농담이니 거기 대하여 너무 노여워 하지 말으시기 바랍니다."

하거늘, 자라가 그 말을 듣고 마음에 불쾌는 하지마는 마음을 흠뻑 돌려 눅진눅진이
참고 대답하되,

"내 성은 별이요, 호는 주부로다.
등이 넓기는 물에 다녀도 가라않지 아니함이요,
발이 짧은 것은 육지에 다녀도 넘어지지 아니함이요,
목이 긴 것은 먼 데를 살펴봄이요,
몸이 둥근 것은 행세를 둥글게 함이라.
그러하므로 수중에 영웅이요,
수족(水族)에 어른이라.
세상에 문무겸전(文武兼全)하기는 나뿐인가 하노라."

토끼 가로되,

"내가 세상에 나서 만고풍상(萬古風霜)을 다 겪다시피 하였으되
그대같은 호걸은 이제 처음 보는도다."

자라 가로되,

  "그대 연세가 얼마나 되관대 그다지 경력이 많다 하느뇨?"

토끼 가로되,

"내 연기(年紀)를 알 양이면 육갑을 몇 번이나 지내였는지 모를 터이오.
소년 시절에 월궁에 가 계수나무 밑에서 약방아 찧다가 유궁후예(有窮后예)의 부인이
불로초(不老草)를 얻으러 왔기로 내가 얻어 주었으니 이로 보면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은 내게 시생(侍生)이오,
팽조(彭祖)의 많은 나이 내게 대하면 구상유취(口尙乳臭)오 종과 상전이라.
이러한즉 내가 그대에게 몇십 갑절 할아비 치는 존장(尊長)이 아니신가."

자라가 가로되,

"그대의 말이 참 자칭 천자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도다.
아모커나 나의 이왕한 일을 대강 말할 것이니 좀 들어 보아라.
모르면 모르거니와 아마 놀래기가 십상팔구 될 걸.
어찌 그러한고 하니, 반고씨(盤固氏) 생신날에 산곽(産藿) 진상 내가 하고,
천황씨(天皇氏) 등극하실 때에 술안주 어물진상 내가 하고,
지황씨(地皇氏)의 화덕왕(火德王)과 인황씨(人皇氏)의 구주(九州)를 마련하던
그 사적을 어제까지 기억하며, 유소씨(有巢氏)의 나무 얽어 깃들임과 수인씨(燧人氏)의
불을 내여 음식 익혀 먹는 일을 나와 함께 지내였고,
복희씨(伏羲氏)의 그은 팔괘(八卦)로 용마(龍馬) 하도수를 나와 함께 풀어냈고
공공씨(共工氏)가 싸우다가 하늘이 무너져서 여와씨(女와氏)가 오색 돌로 보첨(補添)할 제
석수 편수 내가 하고, 신농씨(神農氏)가 장기 내고 온갖 풀을 맛보아서 의약을 마련할 제
내가 역시 참견하고, 헌원씨(軒轅氏)가 배 지을 제 목방패장 내가 하고,
탁록(탁鹿) 들에서 치우(蚩尤)가 싸울 적에 돌기를 내가 천거하여 치우를 잡게 하고,
금천씨(金天氏)의 봉조서(奉調書)와 전욱씨(전頊氏)의 제신(制臣)하던 술법 내가 훈수하고, 고신씨(高辛氏)의 자언기명(自言其名)하던 것을 내 귀로 들어 있고,
요임금의 강구(康衢)노래 지금까지 흥락하고, 순임금의 남풍가(南風歌)는
어제 들은 듯 즐거워라.
우임금의 구년 홍수 다스릴 제 그 공덕을 내가 찬성하고,
탕임금의 상림(桑林) 들에서 비 빌던 일이며,
주나라 문왕 무왕과 주공의 찬란하던 예악문물이 다 눈에 역력하고,
서해 바다 태평양에 유갔다가 굴원이 명라수에 빠질 적에 구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유한(有恨)이라.
이로 헤아려 보면 나는 그대에게 몇백 갑절 왕존장(王尊長)이 아니신가?
그러나 저러나 재담은 그만두고 세상 재미나 서로 이야기하여 보세."

토끼 가로되,

"인간 재미를 말하고 보면, 형이 재미가 나서 오줌을 졸졸 쌀 것이니
더 둥글넓적한 몸이 오줌에 빠져서 선유하느라고 헤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 아니 불쌍한가?"

자라가 가로되,

  "어찌하였던지 대강 말하라"

토끼 가로되,

"심산 풍경 좋은 곳에 산봉우리는 칼날같이 하늘에 꽂혔는데 배산임류(背山臨流)하여
앞에는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이요, 뒤에는 하운(夏雲)이 다기봉(多奇峰)이라.
명당에 터를 닦고 초당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이오 반칸은 명월이라.
흙섬돌에 대사리짝이 정쇄(精灑)하기 다시 없다. 학은 울고 봉은 나는도다.
뒤 뫼에서 약을 캐고 앞내에서 고기 낚아 입에 맞고 배부르니
이 아니 즐거운가?
청천에 밝은 달이 조요하되, 만학천봉에 홀로 문을 닫혔도다.
한가한 구름은 그림자를 희롱하니 별유천지비인간이라.
몸이 구름과 같이 세상 시비 없고 보니 내 종적을 그 뉘 알랴.

  추위가 지나가 더위가 오니 사시(四時)를 짐작하고, 날이 가고 달이 오니 광음을 나 몰라라. 녹수청산 깊은 곳에 만화방초(滿花芳草) 우거지고, 난봉과 공작새의 서로 부르는 소리
이 봉 저 봉 풍악이오, 앵무새와 두견새며 꾀꼬리의 소리 이 골 저 골 노래로다.
석양에 취한 흥을 반쯤 띠고 강산풍경 구경하며 곤륜산(崑崙山) 상상봉에 흔 구름을 쓸어치고 지세 형편 굽어보니 태산은 청룡이오 화산은 백호로다.
상산은 현무 되고 형산은 주작이라. 소상강과 팽려택으로 못을 삼고,
황하수와 양자강 무제의 백량대는 눈가에 의의하다.

  적벽강(赤壁江)의 무한한 경개를 풍월로 수작하고, 아미산의 반달 빛은 취중에 희롱하며,
삼신산에 불로초도 뜯어 먹고 동정호에 목욕도 하다가 산 속으로 돌아드니,
층암은 집이 되고 낙화는 자리 삼아 한가히 누웠으니,
수풀 사이 밝은 달은 은근한 친구 같고, 소나무에 바람 소리 은은하거늘 돌베개에 높이 누워 취흥으로 잠을 드니 어디서 학의 소리 잠든 나를 깨올세라.
이윽고 일어나 한산(寒山) 석경(石徑) 빗긴 길에 청려장(靑黎杖)을 의지하고 이리저리
배회하니 흰 구름은 천리나 만리에 덮여 있고 밝은 달은 앞 시내와 뒤 시내에 얹혔더라.
산이 첩첩하니 삼(산은 청천 밖에 떨어지고, 물이 잔잔하니 이수는 백로주에 갈라져) 있도다. 도도한 이 내 몸이 산수간에 누웠으니 무한한 경개는 정승 주어도 아니 바꾸고 노닐러라.

  동녘 둔덕에 올라 휘파람 부니 한가하기 측량 없고, 앞 시내를 굽어보며 글 지으니 흥미가 무궁하다. 오동(梧桐)에 밝은 달은 가슴에 비취고, 양류에 맑은 바람 얼골에 불어 있다. 청풍명월이 그 아니 내 벗인가. 병 없이 성한 이 내 몸이 희황세계(羲皇世界)에 한가한 백성이 되니, 중도 아니며 속한(俗漢)도 아니요, 오직 평지의 신선이라. 강산풍경을 임의대로 희롱한들 그 뉘라서 시비하랴.

  이화 도화 만발하고 푸른 버들 휘여진대 동서남북 미색들은 시냇가에 늘어 앉아 섬섬옥수를 넌짓 들어 한가로이 빨래할 제, 물 한 줌 덤벅 쥐어다가 연적같은 젖통이를 슬근슬쩍 씻는 양은 요지연(瑤池宴)과 방불(彷佛)하고, 어진 오월이라 단오일에 녹음방초 우거지고 녹의홍상(綠依紅裳) 미인들이 버들가에 그네 매고 짝지어 추천하는 모양 광한루(廣寒樓) 경개가 완연하다. 풍류호걸 이 내 몸이 저러한 절대가인(絶對佳人) 구경하니 아마도 세상 재미는 나뿐인가 하노라."

자라가 이르되,

"허허 우습도다. 우리 수궁 이야기 좀 들어보소. 오색 구름 같은 곳에 진주궁과 자개 대궐 반공(半空)에 솟았는데 일월이 명랑하다. 이 가운데 날마다 잔치요, 잔치마다 풍류로다. 연꽃 같은 용녀들은 쌍쌍이 춤을 추며 천일주와 포도주며 금강초 불사약을 유리병과 호박잔에 신선하게 담고 담아, 대모소반(玳瑁小盤) 받쳐다가 앞앞이 늘어 놓고 잡수시오 권할 제 정신이 상활(爽豁)하고 심정이 황홀하니 헛장단이 절로 난다. 아미산에 반 바퀴 달과 적벽강의 무한한 경개며, 방장 봉래 영주산을 역력히 구경하고 선유하며 돌아올 제, 채석강, 양자강, 소상강, 동정호, 팽려택, 대동강, 압록강을 임의로 왕래하니, 흰 이슬은 강 위에 비껴 있고 물빛은 하늘을 접하였도다. 한들한들한 돗대는 만경창파를 업수이 여기는 듯, 떨어진 노을은 외따오기와 같이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일세.

  삼강(三江)으로 옷깃 삼고 오호(五湖)로 띠를 하니 오나라 초나라도 동남으로 터져 있고, 만형을 당기우고 구월을 이끄니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 있구나. 평평한 모래에 기러기는 떨어지고 흰 갈매기 잠들 때라. 지극히 슬픈 퉁소로 어부사(漁父詞)를 화답하니 깊은 구렁에 숨은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에 있는 과부를 울리는도다. 달이 밝고 별은 드문드문한데 가막까치 남쪽으로 날아간다.

  이 적에 순임금의 두 아내 아황(娥皇) 여영(女英)의 비파 소리는 울적함을 소창(消暢)하고 길 건너 장사하는 계집아이의 부르는 후정화(後庭花) 곡조는 이 회포를 자아낸다. 한 밤에 은은한 쇠북 소리 한산절이 그 어디며, 바람편에 역력한 방망이 소리는 강촌이 저기로다. 초나라 강과 오나라 물에서 고기잡는 어부들은 애내곡(애乃曲)을 화답하고, 금못과 옥섬에 연 캐는 계집들은 상사곡(相思曲)을 노래하니, 아마도 별건곤(別乾坤)은 수부(水府)뿐이로다.

  그러나 나의 말은 다 정말이어니와 그대 하는 말은 백 가지에 한 가지도 취할 것 없이 흉한 말은 감추고 좋은 말만 자랑하니, 그 형식으로 꾸며냄을 내 어찌 모르리오. 그대 신세 생각하니 여덟 가지 어려움을 면하기 어렵도다. 두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들어 보라.

  동지섣달 엄동(嚴冬)절에 백설은 흩날리고 층암절벽 빙판되며 만학천봉 막혔으니 어디 가서 접족(接足)할까. 이것이 첫째로 어려움이오.

  돌구멍 찬 자리에 먹을 것 전혀 없어 콧구멍을 핥을 적에 냉한 땀이 질질 흘러 사지(四肢)가 불평할 제 팔자 타령 절로 나니 이것이 둘째로 어려움이오.

  오뉴월 삼복 중 산과 들에 불이 나고 시냇물이 끓을 적에 산에서는 기름내고 털끝마다 누린내라. 짧은 혀를 길게 빼고 급한 숨을 헐떡일 제 그 정상이 오죽할까. 이것이 셋째로 어려움이오.

  춘풍이 화청한 때 풀잎이나 뜯어 먹자 하고 산간으로 들어가니 무심 중에 독한 수리 두 쭉지를 옆에 끼고 살 쏘듯이 달려들 제 두 누에 불이 나고 적은 몸이 솟구쳐 바위틈으로 들어갈 제 혼비백산 가련하다. 이것이 넷째 어려움이오.

  천방지축 달아나서 조용한 데 찾아가니 매 쫓는 사냥꾼은 높은 봉에 우뚝 서서 근력 좋은 몰이꾼 시켜 냄새 잘 맡는 사냥개를 워리 하고 부르면 동에도 가며 서에도 가며 급히 쫓아올 제, 발톱이 뭉그러지며 진땀이 바짝 나니 이것이 다섯째 어려움이오.

  죽을 뻔한 후에 사냥 포수 일자총을 들어메고 길목에 질러 앉아 잔철 탄환 장약하여 염통 줄기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길 적에 꼬리를 샅에 끼고 간장이 말라지며 간신히 도망하여 숨을 곳을 찾아가니 죽을 뻔한 댁이 그대 아닌가. 이것이 여섯째 어려움이오.

  알뜰히 고생하고 산림으로 달아드니 얼숭덜숭한 천근 대호(大虎) 철사 같이 모진 수염 위엄있게 거스리고 웅크려서 가는 거동 에그 참말 무섭도다. 소리는 우뢰같고 대가리는 왕산(王山)덩이만하며 허리는 반달같고 터럭은 불빛이라. 칼 같은 꼬리를 이리저리 두르면서 주홍 같은 입을 열고 써레 같은 이빨을 딱딱이며 번개 같이 날랜 몸을 동서남북 번뜩이며 좌우로 충돌하여 이 골 저 골 편답하며 돌도 툭툭 받아 보며 나무도 똑똑 꺾어 보니 위풍이 늠름하고 풍채도 씩씩하여 당당한 산군(山君)이라. 제 용맹을 버럭 써서 횃불 같은 두 눈깔을 번개 같이 휘두르며 톱날 같은 앞발을 떡 벌리고 숨을 한 번 씩하고 쉬면 수목이 왔다 갔다 하고 소리 한 번 응하고 지르면 산악이 움죽움죽할 제 정신이 아득하니 이것이 일곱째 어려움이오.

  죽을 것을 면한 후에 평원 광야로 달아드니 나무 베는 목동이며 소 먹이는 아이들은 창검과 몽치를 들고 달려들어 제잡답(除雜談)하고 치려할 제 목구멍에 침이 말라 지향없이 도망하니 이것이 여덟째 어려움이라.

  이렇듯 궁곤(窮困)할 제 무슨 경황에 삼신산에 가 불로초를 먹으며 동정호에 가 목욕할꼬. 그대의 말은 다 자칭 왈 영웅이라 함이니 그 아니 가소로운가. 아마도 실없는 중 땅강아지 아들 자네로세. 그러나 이것은 실없는 농담이니 과히 노여워 하지는 말으시오."

토끼가 다 들은 후에 할 말이 없어 하는 말이,

"소진(蘇秦) 장의(張儀) 구변(口辯)인지 말씀도 잘도 하고, 소강절(邵康節)의 추수(推數)인지 알기도 영험하다. 남의 단처(短處) 너무 발각 말으시오. 듣는 이도 소견 있소. 만고(萬古) 대성(大聖) 공부자(孔夫子)도 진채액(陳蔡厄)에 욕보시고, 천하장사 초패왕(楚패王)도 대택(大澤) 중에 빠졌으니, 화와 복이 하늘에 있고 궁하고 달함이 명수(命數)에 달렸거늘, 그대는 수부에서 여간 호강깨나 한다고 산간처사로 붙여 있는 나를 그다지 괄시하니 무슨 까닭인지 도무지 알 수 없노라."

자라가 가로되,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끼리 좋은 도리로 서로 권하려 함이노라. 옛글에 일렀으되 위태한 방위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있지 말라 하였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이같이 분요(紛擾)한 세상에서 사느뇨. 이제 나를 만나 계제(階梯) 좋은 김에 이 요란한 풍진을 하직하고 나를 따라 수부에 들어가면 선경도 구경하고, 천도(天桃) 반도(蟠桃) 불사약과 천일주(千日酒) 감홍로(甘紅露) 삼편주(三鞭酒)를 매일 장취(長醉)하고, 구중궁궐(九重宮闕) 같은 높은 집에 무산선녀 벗이 되어 순임금에 오현금(五絃琴)과 왕대욱의 옥퉁소와 춘면곡(春眠曲) 양양가(襄陽歌)를 시시로 화답하는데, 악양루(岳陽樓) 경개도 보며, 등왕각(藤王閣)에 잔치하고, 황학루(黃鶴樓)에서 글도 지으며, 봉황대에서 술도 먹고, 태평건곤 마음대로 노닐 적에 세상 고락 꿈 속에 붙여두고 조금이나 생각할까?"

토끼 그 말 듣고 수상이 여겨,

  "어허 싫다."

하고 고개를 흔들면서 가로되,

"그대 말은 비록 좋으나 아마도 위태하지. 속담에 이르기를 노루 피하면 범 만난다 하고, 불가대명(佛家大命)은 독안에 들어가도 못면한다 하였으니, 육지에서 살다가 무슨 외입으로 공연스레 수궁에 들어가리오. 수궁 고생이 육지 고생보다 더하지 말라는데 어디 있으며, 또는 제일 당장 첫째 고생이 두 콧구멍 멀겋게 뚫렸지만 호흡을 통치 못할 터이니 세상 만물이 숨 못쉬고 어이 살며, 사지가 멀쩡하여도 헤엄칠 줄 모르거니 만경창파 깊은 물을 무슨 수로 건너갈꼬. 팔자에 없는 남의 호강을 부질없이 심욕(心慾)내어 이 세상을 하직하고 그대를 따라 수궁에 들어가다가는 필연코 칠성(七星)구멍에 물이 들어 할 수 없이 죽을 것이니, 이 내 목숨 속절없이 고기 배때기 속에 장사지내면 임자 없는 내 혼백이 창파 중에 고혼이 되어, 어하(魚蝦)로 벗을 삼고 굴삼려(屈三閭)로 짝을 지어 속절없이 되게 되면, 일가 친척 자손 중에 그 뉘라서 나를 찾을까. 아무리 백천만 가지로 생각하여도 십분에 팔구분은 위태한 걸. 콩으로 메주를 쑤고 소금으로 장을 담는다 하여도 도무지 곧이 들리지 아니 하니 다시는 그따위 말로 권치 말라."

자라가 웃으며 가로되,

"그대가 고루하기 심하도다.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알지 못하는구려. 옛글에 하였으되 강의 먼 곳을 한 갈대로 건너간다 하였으니 이러므로 조주(潮州)의 선비인 여선문(餘善文)은 광묘궁에 들어가서 상량문 지어주고, 천하 문장 이태백은 고래를 타고 달 건지러 들어가고,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약수(弱水) 삼천리를 건너가서 대장경을 내어 오고, 한나라 사신 장건(張蹇)이는 뗏목을 타고 은하수에 올라가서 직녀의 지기석(支機石)을 주워 오고, 서왕세계(西往世界) 아란존자(阿蘭尊者)는 연잎에 거북을 타고 만경창파를 임의로 헤쳤으니, 저의 목숨이 하늘에 달렸거든 공연히 죽을손가. 대장부 되어 나서 이대도록 잔망(孱妄)할까? 대저 군자는 사람을 못 쓸 곳에 천거하지 아니 하나니 어찌 그대를 못쓸 곳에 지시하리오.

  맹자 가라사대 군자는 가히 속을 듯한 방술로 속인다 하고, 또 어지러운 나라에 있지 아닐 것이라 하였으니, 이 점잖은 체모에 부모의 혈육을 가지고 반 점이나 턱이 바이없는 거짓말을 하겠나. 천금상에 만호후(萬戶候)를 봉하고, 밥 위에 떡을 얹어 준다 할지라도 아니하려든, 하물며 아무 해(害)도 없고 이(利)도 없는 일에 무슨 억하심정으로 위태한 지경에 빠지게 하리오.

  또는 그대의 상을 보니 미색이 누릇누릇 헷득헷득하야 금빛을 띠었으니 이른바 금생어수(金生於水)라. 물과 상생이 되어 조금도 염려 없고, 목이 길다라니 고향을 바라보고 타향살이 할 기상이오, 하관(下觀)이 뾰족하니 위로 구하면 역리(逆理)가 되어 매사가 극란(極難)하되, 아래로 구하면 순리가 되어 만사가 크게 길할 것이오, 두 귀가 희고 준수하니 남의 말을 잘 들어 부귀를 할 것이오, 미간이 탁 틔여 화려하니 용문에 올라 이름을 빛낼 것이오, 음성이 화평하니 평생에 험한 일이 없을 것이라. 그대의 상격(相格)이 이와 같이 가지가지 구격(俱格)하니, 일후의 영화부귀가 무궁하여 행락으로는 당명황(唐明皇)의 양귀비(楊貴妃)며, 한무제의 승로반이오, 팔자로는 백자천손 곽자의(郭子儀)오, 부자로는 석숭(石崇)이오, 풍악으로 요임금의 대황곡과 순임금의 봉조곡과 장자방의 옥퉁소가 자재(自在)하고, 유시로 사마상여(司馬相如) 거문고에 탁문군이 담을 넘어 올 것이오, 또는 농락수단으로 말하고 보면, 언변에는 육국 종횡하던 소진 장의에게 양두(讓頭)할 것 전혀 없고, 경륜에는 팔진도(八陳圖)로 지휘하던 제갈량이 바로 적수에 지나지 못할 것이니, 이러한 기골 풍채와 경영 배포가 천고에 제일이오 당시에 독보할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영웅호걸이나, 그대가 마치 팔팔 뛰는 버릇이 있음으로 본토에만 묻혀 있어서는 이 위에 여러가지 복락을 결단코 한 가지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전일과 같이 곤란한 재앙만 돌아올 것이오, 본토를 떠나 외지로 뛰어 가야만 분명코 만사여의할 것이니, 내 말을 일호라도 의심치 말고 이번 이 계제 좋은 김에 나와 한가지 수부로 들어가기를 한 말로 결단하라. 정말이지 나와 같이 친구 잘 인도하는 사람을 만나 보기도 그대 평생 처음일 걸. 토선생댁에 참 복성(福星)이 비취었나니."

토끼 가로되,

"나의 기상도 이와 같이 출중하거니와 형의 관상하는 법 신통하도다마는 대저 수요궁달(壽夭窮達)이라 하는 것이 뚝 다 상설(相說)로 되는 일이 없나니, 치부할 상이면 태산 상상봉 백운대 꼭대기에 누웠어도 석숭의 재물이 절로 와서 부자 되며, 장수할 상이면 걸주(桀紂)의 포락(泡烙)하는 형벌을 당하여도 살아날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제 상만 믿고 행신(行身)하다가는 패가망신이 십상팔구 되느니라."

자라가 가로되,

"그대는 저물도록 무식한 말만 하는도다. 누구든지 자기 관상대로 되는 것이니, 실한 증거가 있으니 융준용안(隆準龍眼) 한태조는 사상의 정장(亭長)으로 창업한 임금이 되셨고, 용자일표(龍姿逸飄) 당태종은 서생으로서 나라를 얻고, 백면대이(白面大耳) 송태조는 필부로서 천자 되고, 금반대 채택(蔡澤)이는 범수(范수)를 대신하여 정승이 되었고, 그외 여러 영웅호걸들이 무비(無比) 다 관상대로 되었으니 왕후와 장상이 어찌 씨가 있다 하리까?

  옛말에 일렀으되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어찌 범의 새끼를 얻으리오 하였으니,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자기 일신 사업을 할진대, 되면 좋고 아니 되면 말자 하고 노질부질하여 볼 것이지, 그까진 것 무엇이 무서워서 계집아이 태도처럼 요리 빼끗 조리 빼끗 저무도록 시간만 허비하리요. 그대가 바위 구멍에 홀로 있어 무정한 세월을 보내고 초목과 같이 썩어지면 거 뉘라서 토처사가 세상에 나 있는 줄 알겠느냐. 이는 형산에 흰 옥이 진토 중에 묻힌 모양이니, 영웅호걸이 초야에 묻혀 있어 때를 만나지 못함이라. 도토리와 풀잎이며 칡순과 잔디 싹이 그다지 좋은가? 천일주와 불사약에 비하면 어떠하며, 돌 구멍 찬자리에 벗 없이 누었음이 또한 그리 좋은가? 분벽사창(粉壁紗窓) 반쯤 열고 운문병풍(雲紋屛風) 그림 속에 원앙금침 비단 요에 절대가인 벗이 되어 밤낮으로 희롱하는 그 행락(行樂)에 비할진대 과연 어떠하겠느냐? 그대의 하는 말은 졸장부의 말이오, 나의 하는 말은 당당한 정론 아닌가? 만단(萬端)으로 호의(狐疑)를 가지고 유예미결(猶豫未決)하는 자는 자고로 매사불성(每事不成)하는 법이라.

  옛날에 한신(韓信)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다가 팽구(烹狗)의 화를 당하고, 대부 종이 범려(范려)의 말을 들었던들 사금의 환이 없었으리니, 내 어찌 전에 일을 증험(證驗)하여 후에 일을 도모치 아니하리오. 이제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후일에 나를 보고저 하려다가는 그대의 고(故) 고조(高祖)가 다시 살아 와도 정말 할 수 없으리니, 때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느니라. 후회하면 무엇하리오. 세상인심은 처음 좋아하다가 나중 되면 헌 신 같이 버리거니와, 우리 수부는 동무를 한 번 천거하면 시종이 여일하니 발천(發闡)하기 이렇게 좋은 곳은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

토끼 이 말을 들으니 든든하기가 태산쯤 되는지라. 마음에 한 반턱이나 속아 고수이 듣고 밑구멍이 옴질옴질하여 쌩긋쌩긋 웃으며 가로되,

"내 형을 보매 시체(時體) 사람은 아니로다. 의량(意量)이 넓고 선심이 거룩하여 위인이 관후하니 평생에 남을 속일손가? 나같은 부생(浮生)을 좋은 곳에 천거하니 감격하기 측량없으나 수부에 들어가서 벼슬이야 쉬울소냐."

자라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내념(內念)에 생각하되,

  '요놈 인제야 속았구나.'

하고 흔연히 대답하여 가로되,

"그대가 오히려 경력이 적은 말이로다. 역산(歷山)에 밭 가시던 순임금도 당요(唐堯)의 천자 위(位) 수선(受禪)하고, 위수(渭水)에 고기 낚던 강태공도 주문왕의 스승 되고, 산야에 밭 갈던 이윤(伊尹)도 탕임금의 아형(阿兄) 되고, 부암에 담 쌓던 부열(傅說)이도 은고종의 양필(良弼) 되고, 소 먹이던 백리해(百里奚)도 진목공의 정승 되고, 표모(漂母)에게 밥 빌던 한신이도 한태조의 대장 되었으니, 수부나 인간이나 발천하기는 일반이라. 이런 고로 밝은 임금이 신하를 가리고 어진 신하가 임금을 가리나니, 우리 대왕께서는 성신(誠信)하시고 문무하사 한 가지 능과 한 가지 지조가 있는 선비라도 벼슬 직책을 맡기시고, 닭처럼 울고 개처럼 도적질 하는 유라도 버리지 아니하시는지라. 이러하기로 나같이 재주 없는 인물로도 벼슬이 주부 일품 자리에 외람히 거하였거든, 하물며 그대같이 고명한 자격이야 들어가면 수군절도사는 따논 당상이지 어디 가겠나. 타작말 만한 황금인 덩이를 허리 아래에 빗겨 차고 안올림 벙거지에 동다리 구군복하고 동개 차고 등채 집고 집채 같은 준총 위에 높이 앉아 호강영 바람에 어라 게 물러 있거라, 앞뒤 별배며 에이 기록 좌우 기수 소리 어깨춤이 절로 나고, 장창 대검은 절렁 데그럭 쉬우 아료 소리에 호령이 절로 나리니, 이것이 대장부의 쾌활한 기상이오, 또한 신수 좋은 얼굴을 능연각(凌煙閣)에 걸어 두고 춘추에 빛난 이름을 죽백(竹帛)에 드리우리니, 이것이 기남자(奇男子)의 보배로운 영광이라.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바로 말이지 토끼 가문 중에 시조(始祖) 되기는 염려가 조금도 없을 터이니라."

토끼 웃으며 가로되,

  "형의 말은 흡사하나 어제 밤에 나의 꿈이 불길하여 마음에 종시 꺼림하도다."

자라가 가로되,

"내가 젊어서 약간 해몽하는 법을 배웠으니 아무커나 그대의 몽사(夢事)를 듣고저 하노라."

토끼 가로되,

"칼을 빼서 배에 대이고 몸에 피칠을 하여 보이니, 아마도 좋지 못한 정상을 당할까 염려하노라."

자라가 책망하여 가로되,

"너무 좋은 몽사(夢事)를 가지고 공연히 사념(思念)하는구려. 배에 칼을 대였으니 칼은 금이라 금띠를 띨 것이요, 몸에 피칠을 하였으니 홍포(紅袍)를 입을 징조라. 물망(物望)이 일국에 무거우며 명성이 팔방에 떨칠지니, 이 어찌 공명할 길한 꿈이 아니며 부귀할 좋은 꿈이 아니리오. 공자의 주공을 보고 귀인 성인의 꿈이요, 장자(莊子)의 나비 된 꿈은 달관의 꿈이요, 공명의 초당 꿈은 선각의 꿈이요, 그외 누구누구의 여간 굼이라 하는 것이 무비관몽(無非觀夢)이요 개시허몽(皆是虛夢)이로되, 오직 그대의 꿈은 몽사 중에 제일 갈 꿈이니 수궁에 들어가면 만인 위에 거할지라. 그 아니 좋을손가."

토끼가 점점 곧이 듣고 조금조금 달려들며 당상의 인(印) 꿈을 지금 당장 차는 듯이 희색이 만면하여 가로되,

"노형의 해몽하는 법은 참 귀신 아니면 도깨비오. 소강절 이순풍이 다시 살아온들 이에서 더할손가. 아름다운 몽조가 이미 나타났으니 내 부귀는 어디 가랴. 떼어논 당상은 좀이나 먹지. 그러나 만경청파를 어지 득달할고?"

자라가 대희하여 가로되,

"그대는 조금도 염려 말라. 내 등에만 오르면 아무리 걸주 같은 풍파라도 파선할 염려 전혀 없이 순식간에 득달할 터이니 그런 걱정은 행여 두 번도 마시오."

토끼 웃으며 가로되,

  "체면 도리상에 형을 타는 것이 대단 미안치 않소. 어찌하여야 좋을는지요?"

자라가 크게 웃어 가로되,

"형이 오히려 졸직(卒直)은 하도다. 위수에 고기 낚던 여상(呂尙)이는 주문왕과 수레를 한가지로 타고, 이문(里門)에 문지기 노릇하던 후영이는 신릉군(信陵君)의 상좌에 앉았고, 부춘산에 밭 갈던 엄자릉이는 한광무와 한 베개에 같이 누었으니, 귀천도 관계 없고 존비가 아랑곳가? 우리 이제 한 가지로 들어가면 일생 영욕과 백년고락을 한 가지로 지낼 것이니 무엇이 미안함이 있으리오?"

토끼 대희하여 가로되,

"형의 말대로 될 양이면 높은 은덕이 백골난망이겠노라. 이 세상 천하에 못 당할 노릇이 있으니 저 몹쓸 사람들이 일자총을 들러 메고 암상스러이 보채일 제, 송편으로 목을 따고 접시물에 빠져 죽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온 중, 나의 큰 아들놈은 나무 베는 아희에게 무죄(無罪)이 잡혀가서 구메밥을 얻어먹고 감옥에서 갇혀 있은 지 우금(于今) 칠팔년이나 되어도 놓일 가망 바이 없고, 둘째 아들놈은 사냥개한테 물려가서 까막까치 밥이 된 지 지금 수년이라. 그 일을 생각하면 갈수록 더욱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어찌하면, 이 원수의 세상을 떠나갈고 하며 주사야탁(晝思夜度)하옵더니 천만뜻밖에 그대 같은 군자를 만나 어두운 데를 버리고 밝은 곳으로 갈 터이니, 이는 참 하늘이 지시하시고 귀신이 도우심이라.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안다 하였으니, 나 같은 영웅을 형 같은 영웅 곧 아니면 그 뉘라서 능히 알리오? 하늘에서 내리신 영웅이 형 곧 아니었다면 헛되이 산중에서 늙을 뻔하였고, 나 곧 아니었다면 수중 백성들이 어진 관원을 만나지 못할 뻔하였도다. 이번 내길이 내게도 영광이어니와 수중에서 어찌 경사가 아니리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에서 내 재주를 내매 반드시 싸움이 있다 하더니 내게 당하여 참 빈말이 아니로다."

하며 의기가 양양하여 자라 등에 오르려 할 즈음에, 저 바위 밑에서 너구리 달첨지가 썩 나서서 하는 말이,

"토끼야, 너 어디 가느냐? 내 아까 수풀 곁에 누워서 너희 둘이 하는 수작을 처음으로부터 끝까지 대강 들었지만은 아마도 위태하지. 옛말에 위태한 지방에 들어가지 말라 하였고, 분수를 지키면 몸에 욕이 없다 하였으니, 저같이 졸지에 남의 부귀를 탐내고야 나중 재앙이 제 어찌 없을소냐? 고기 배때기에 장사지내기가 아마 십중팔구이지."

하거늘 토끼 말을 듣더니 두 귀를 쫑긋하며 시름없이 물러날 제, 자라가 가만히 생각하되,

'원수의 몹쓸 놈이 남의 큰 일을 작희(作戱)하니 참 이른바 좋은 일에 마(魔)가 드는 것이로군.'

하며 하는 말이,

"허허 우습도다. 그대가 잘 되고 보면 오히려 내가 술잔이나 얻어 먹는다 하려니와 죽을 곳에 들어가는 데야 더구나 내게 무슨 좋을 일이 있을손가? 달첨지가 토선생 일에 대하여 꽃밭에 불 지르려고 왜 저리 배를 앓노. 제 어디 실없는 똥 떼어 먹을 놈이 다시 그 일에 대하여 말할소냐."

하고 썩 떨떠리고 하는 말이,

  "유유상종이라더니, 모인다니 졸장부 뿐이라. 부귀가 저희에게 아랑곳 있나?"

하며 대단히 비방하고 작별하려 하니, 토선생이 생각하되,

'천우신조하여 천재일시(千載一時)로 좋은 기회를 만났으니 때를 잃지 아니 하리라.'

하고 자라에게 달려들어 두 손을 덥석 쥐며 하는 말이,

"여보시오, 별주부. 천하 사람들이 별 말을 다한다 하여도 일단 내 말이 제일이온대, 형이 어찌하여 이다지 그리 경솔하시오?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살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가시옵시다."

하거늘 주부가 가로되,

  "형의 마음이 굳건하여 변개 아니할 양이면 내 어찌 태를 조금이나 부리리오."

하고, 토끼를 얼른 등에 얹고 물로 살짝 들어가 만경창파를 희롱하며 소상강을 바라보고 동정호로 들어갈 제, 토끼가 흥에 겨워 혼자 하는 말이,

"홍진자맥(紅塵紫陌) 장안 만호에 있는 벗님네야. 사람마다 가사(假使) 백년을 산다 하여도 걱정 근심과 질병 사고(四苦)를 빼고 보면 태평 안락한 날이 몇 해가 못 되는 것이라. 천백 년을 못살 인생 아니 놀고 무엇하리. 소상 동정의 무한한 경개를 나와 함께 노자세라."

이렇게 세상을 배반하며 흥을 겨워 가는 형상 칼 첨자(籤子)에 개구리요, 대부등(大不等)에 뱀이라. 의뭉할손 별주부요, 미욱할손 토끼로다. 토끼의 허한 말을 꿀같이 달게 듣고, 서왕세계 얻자 하고 지옥으로 들어가며, 첩첩청산 버려 두고 수중고혼(水中孤魂) 되러 가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붉은 고기 한 덩이로 용왕에게 진상간다. 일개 자라의 첩첩이구(첩첩利口)에 그 약은 체하던 경박한 토끼가 속았구나.

  자라가 의기양양하여 범이 날개 돋친 듯, 용이 여의주 얻은 듯이 기운이 절로 나서 만경창파를 순식간에 들어가니 내리라 하거늘, 토끼 내려 사면을 살펴보니, 천지가 명랑하고 일월이 조요한데, 진주로 꾸민 집과 자개로 지은 대궐은 반공(半空)에 솟았으며, 수 놓은 문지게와 깁으로 바른 창이 영롱 찬란한지라. 마음에 홀로 기뻐 제가 젠 체하더니 이윽고 한 편에서 수근쑥덕하며 수상한 기색이 있는지라.

  토끼 혼자 하는 말이,

'무너져도 솟을 구멍 있다 하나, 참 나야말로 속수무책이로구나. 그러하나 병법에 이르기를 죽을 땅에 빠진 후에 살고 망할 때에 든 후에 잇다 한지라. 이런고로 천하에 큰 성인 주문왕은 유리옥을 면하시고, 도덕이 높은 탕임금은 한대옥을 면하시고, 만고성인 공부자도 진채의 액을 면하신지라. 천고영웅 한태조도 영양에 에움을 벗어났으니, 설마하니 이 내 몸을 왼통으로 삼킬소냐.'

아무커나 차차 하는 거동 보아 가며 감언이구(甘言利口)와 신출귀몰한 꾀로 임시변통 목숨을 보전하되, 공명이 남병산에 칠성단 모으고 동남풍 빌던 수와 백등 칠일에 진평(陳平)이 화미인하던 꾀를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내어 가지고, 사족 바싹 웅크리고 죽은 듯이 엎드렸더니, 홀로 전상에서 분부하되,

  '토끼를 잡아들이라.'

하거늘, 수족 물고기 일시에 달려들어 토끼를 잡아다가 정전(正殿)에 꿇리고, 용왕이 하교하여 가로되,

"과인이 병이 중한데 백약이 무효하더니, 천우신조하여 도사를 만나매 이르되, 네 간을 얻어 먹으면 살아나리라 하기로 너를 잡아왔으니, 너는 죽기를 슬퍼 말라."

하고, 군졸을 명하여 간을 내이라 하니, 군졸이 명을 받들고 일시에 칼을 들고 날쌔게 달려들어 배를 단번에 째려 하거늘, 토끼 기가 막혀 달첨지 말을 돌이켜 생각하나 후회막급이라.

'대저 약명을 일러 주던 도사놈이 나와 무슨 원수런가? 소진의 구변인들 욕심 많은 저 용왕을 무슨 수로 꾀어내며, 관운장(關雲長)의 용맹인들 서리 같은 저 칼날을 무슨 수로 벗어나며, 요행 혹 벗어난다 한들 만경창파 넓은 물에 무슨 수로 도망할가? 가련토다 이 내 목숨 속절없이 죽었구나. 백계무책(百計無策) 어이하리.'

하며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문득 한 꾀를 얻어가지고 마음을 담대히 하여 고개를 번듯 들어 전상을 바라보며 가로되,

  "이왕 죽을 목숨이오니 한 말씀이나 아뢰옵고 죽겠삽나이다."

하고 아뢰되,

"토끼 족속이란 것은 본시 곤륜산 정기로 태여나서, 일신을 달빛으로 환생하와 아침 이슬과 저녁 안개를 받아 먹고, 기화요초(琪花瑤草)와 좋은 물을 명산으로 다니면서 매양 장복하였음으로 오장육부와 심지어 똥집 오줌통까지라도 다 약이 된다 하여, 막걸리 오입장이들을 만나면 간 달라고 보채이는 그 소리에 대답하기 괴롭사와, 간 붙은 염통 줄기 채 모두 다 떼어내어 청산유수 맑은 물에 설설이 흔들어서, 고봉준령 깊은 곳에 깊이깊이 감추어 두고 무심 중 왔사오니, 배 말고 온 몸을 모두 다 발기발기 찢는다 할지라도, 간이라 하는 것은 한 점도 얻어 볼 수 없을 터이오니 어찌하면 좋을는지? 저 미련하온 별주부가 거기 대하여 일언 사색(辭色)이 반 점도 없었으니 아무리 내가 영웅인들 수부의 일이야 어찌 아오리까? 미리 알게 하였더라면 염통 줄기까지 가져다가 대왕께 바쳐 병환을 회춘하시게 하고, 일등공신 너도 되도 나도 되어 부귀공명 하였으면 그 아니 좋았겠는가? 만경창파 멀고 먼 길 두 번 걸음 별주부 너 탓이라. 그러나 병환은 시급하신데 언제 다시 다녀올는지, 그 아니 딱하오니까?"

용왕이 듣고 어이없어 꾸짖어 가로되,

"발칙 당돌하고 간사한 요놈. 네 내 말을 들어라 하니, 천지 사이 만물 가운데에 사람으로 금수까지 제 뱃속에 붙은 간을 무슨 수로 꺼내었다 집어넣었다 하겠는고? 요놈 언감생심(焉敢生心)코 어느 존전(尊前)이라고 당돌히 무소(誣訴)로 아뢰느냐. 그 죄가 만 번 죽어도 남지 못하리라."

하고, 바삐 배를 째고 간을 올리라 하거늘, 토끼 또한 어이없어 간장이 절로 녹으며 정신이 아득하여, 가슴이 막히고 진땀이 바짝바짝 나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죽을 밖에 다시 수가 없도다.

'이것이 참 독에 든 쥐요 함정에 든 범이라. 그러하나 말이나 단단히 한 번 더 하여 보리라.'

하고 우환 중이라도 흔연한 모양을 가지고 여쭈오되,

"옛말에 일렀으되, 지혜로운 자 천 번 생각하는데 한 번 실수할 때가 있고, 우매한 자가 천 번 생각하는데 한 번 잘할 때가 있다 하였는지라. 이러므로 미친 사람의 말도 성인이 가리어 들으시고 어린아이 말도 귀담아 들으라 하오니, 대왕의 지극히 밝으신 지감(知鑑)으로 세세히 통촉하여 보시옵소서. 만일 소신의 배를 갈랐다가 간이 있으면 다행이어니와 정말 간이 없고 보면 물을 데 없이 누구를 대하여 간을 달라 하오리까? 후회막급 되실 터이오니, 지부왕(地府王)의 아들이요 황건역사(黃巾力士)의 동생인들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황천길을 무슨 수로 면하오며, 또한 소신의 몸에 분명하온 표가 하나 있사오니 바라건대 밝히 살피사 의심을 푸시옵소서."

용왕이 듣고 가로되,

  "이 요망한 놈, 네 무슨 표가 있단 말이니?"

토끼 아뢰되,

"세상 만물의 생긴 것이 거의 다 같사오나 오직 소신은 밑구멍 셋이오니 어찌 유(類)와 다른 표가 아니오리까?"

왕이 가로되,

  "네 말이 더욱 간사하도다. 어찌 밑구멍 셋이 될 리가 있느냐?"

토끼 가로되,

"그러하시면 소신의 밑구멍의 내력을 들어 보시옵소서. 하늘이 자시(子時)에 열려서 하늘 되고, 땅이 축시(丑時)에 열려 땅이 되고, 사람이 인시(寅時)에 나서 사람 되고, 토끼가 묘시에 나서 토끼 되었으니,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생풀을 밟지 않는 저 기린도 소자출(所自出)이 내 몸이오, 주려도 곡식을 찍어 먹지 아니하는 봉황도 소종래(所從來)가 내 몸이라. 천지간 만물 중에 오직 토처사가 본방(本邦)이라. 이러므로 옥황상제께옵서 순순히 명하옵시되 토처사는 나는 새 중에 조종(祖宗)이요 기는 짐승 중에 본방이라. 만물 중에 제일 자별(自別)하니 신체 만들기를 별도히 하여 표를 주자 하시고, 일월성신 세 가지 빛을 응하며 정직강유(正直剛柔) 세 가지 덕을 겸하여 세 구멍을 점지하셨사오니, 보시면 자연 통촉하시리이다."

용왕이 나졸을 명하여 적간(摘奸)하라 하니 과연 세 구멍 분명한지라. 왕이 의혹하여 주저하거늘, 토끼 여쭈오되,

"대왕이 어찌 이다지 의심하시나이까? 소신 같은 목숨은 하루 천만 명이 죽사와도 관계가 없삽거니와, 대왕은 만승(萬乘)의 귀하신 옥체로 동방의 성군이시라 경중(輕重)이 판이하오니, 만일 불행하시면 천리강토와 구중궁궐을 뉘에게 전하시며, 종묘사직과 억조창생을 뉘에게 미루시렵나이까? 소신의 간을 아무쪼록 갖다가 쓰시면 환후(患候)가 즉시 평복(平復)되실 것이오, 평복되시면 대왕은 무려(無慮)히 만세나 향수하실 것이니, 어언간 소신은 일등공신이 아니 되옵나이까? 이러한 좋은 일에 어찌 일호나 기망(欺罔)하여 아뢰올 가망이 있사오리까?"

하며 첩첩이구로 발림하며 용왕을 푹신 삶아내는데, 언사가 또한 절절이 온당한지라. 이 고지식한 용왕은 폭 곧이듣고 자기 생각에 헤아리되,

'만일 제 말과 같을진대 저 죽은 후에 누구에게 물을손가? 차라리 잘 달래어 간을 얻음만 같지 못하다.'

하고, 토끼를 궁중으로 불러 올려 상좌에 앉히고 공경하여 가로되,

  "과인의 망녕됨을 허물치 말라."

하니, 토끼가 무릎을 싹 쓰러뜨리고 단정히 앉아 공손히 대답하여 가로되,

"그는 다 예사올시다. 불우의 환과 낙미의 액을 성현도 면치 못하거든 하물며 소신 같은 것이야 일러 무엇하오리까? 그러하오나, 별주부의 자세치 못하고 충성치 못함이 가엾나이다."

문득 한 신하가 출반주하여 가로되,

"신은 듣사오니 옛글에 일렀으되, 하늘이 주시는 것을 받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앙화(殃禍)를 받는다 하오니, 토끼 본시 간사한 짐승이라. 흐지부지 하다가는 잃어버릴 염려가 있을 듯 하오니, 원컨대 대왕은 잃어버리지 마옵시고 어서 급히 잡아 간을 내어 지극히 귀중하신 옥체를 보중케 하옵소서."

하거늘, 모두 보니 이는 수천 년 묵은 거북이니 별호는 귀위선생(龜位先生)이러니, 왕이 크게 노하여 꾸짖어 가로되,

"토처사는 충효가 겸전한 자이라. 어찌 허언이 있으리오. 너는 다시 잔말 말고 믈러 있거라."

하시거늘, 귀위선생이 무료히 물러나와 탄식을 마지 아니하더라.

  왕이 크게 잔치를 배설하여 토처사를 대접할 새, 오음육율(五音六律)을 갖추고 배반이 낭자하매, 서왕모(西王母)는 술잔을 차지하고 연비는 옥소반을 받들어 드릴 적에, 천일주와 포도주에 신선 먹는 교리화조(交梨火棗)로 안주하고, 백낙천(白樂天)의 장진주사로 노래하며, 무궁무진 권할 적에 한 잔 또 한 잔이라. 병 속 건곤(乾坤)에 취하여 세상의 갑자를 잃어버리는도다. 토끼 제 마음에 생각하되,

'만일 내 간을 내어 주고도 죽지만 아니할 양이면 내어 주고 수부에 있어 이런 호강 아니할고.'

납작이 엎드리니, 날이 저물어 잔치를 파하매 용왕이 토처사를 향하여 가로되,

  "토공이 과인의 병만 낫게 하시면 천금상에 만호후를 봉하고 부귀를 한가지로 누릴 것이니, 수고를 생각지 말고 속히 나아가 간을 갔다가 과인을 먹이라."

하니, 토끼가 못먹는 술을 취한 중에 혼자말로,

  '한 번 속기도 원통하거든 두 번조차 속을까?'

하며 대답하여 가로되,

"대왕은 염려 마옵소서. 대왕의 거룩하신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저 하오니, 급히 별주부를 같이 보내어 소신의 간을 가져오게 하옵소서."

이 때에 날이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정에 나오는지라. 시신을 명하여 토처사를 사관으로 보내매, 토끼 사관으로 돌아와 본즉 백옥 섬돌이며 황금 기와요, 호박(琥珀) 주추며 산호 기둥에 수정발을 높이 걸고, 대모(玳瑁) 병풍 둘러치고 야광주로 촛불 삼고, 원앙금침 잣벼개와 요강 타구 재떨이를 발치발치 던져 두고, 오동복판 거문고를 새 줄 엊어 세워 놓고, 부용(芙蓉) 같은 용녀들은 맑은 노래와 맵씨 있는 춤으로 쌍쌍이 희롱하니, 옛날에 주 무왕이 그림 속에 서왕모와 희롱하는 듯, 옥소반에 안주 담고 금잔에 술을 부어 권주가로 권권(拳拳)하니, 토처사 산간에서 이러한 승경을 어찌 보았으리오.

  밤에 즐겁게 놀고, 이튿날 왕께 하직하고 별주부의 등에 올라 만경창파 큰 바다를 순식간에 건너 와서, 육지에 내려 자라에게 하는 말이,

"내 한 번 속은 것도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거든 하물며 두 번까지 속을소냐. 내 너를 다리뼈를 추려 보낼 것이로되 십분 용서하노니 너의 용왕에게 내 말로 이리 전하여라. 세상 만물이 어찌 간을 임의로 꺼내었다 넣었다 하리오. 신출귀몰한 꾀에 너의 미련한 용왕이 잘 속았다 하여라."

하니, 자라가 하릴없어 뒤통수 툭툭 치고 무료히 회정(回程)하여 들어가니,

용왕의 병세와 별주부의 소식을 다시 전하여 알 일이 없더라.

  토끼 별주부를 보내고 희희낙락하며 평원 광야 너른 들에 이리 뛰며 흥에 겨워 하는 말이,

'어화 인제 살았구나. 수궁에 들어가서 배 째일 뻔하였더니,

요 내 한 꾀로 살아와서 예전 보던 만산풍경 다시 볼 줄 그 뉘 알며,

옛적 먹던 산 실과며 나무 열매 다시 먹을 줄 뉘 알소냐.

좋은 마음 그지없네.'

작은 우자를 크게 부려 한참 이리 노닐 적에, 난데 없는 독수리가 살 쏘듯이 달려들어

사족을 훔쳐들고 반공에 높이 나니, 토끼 정신이 또한 위급하도다.

  토끼 스스로 생각하되,

'간을 달라 하던 용왕은 좋은 말로 달랬거니와, 미련하고 배고픈 이 독수리야 무슨 수로 달래리오.'

하며 창황망조(蒼黃罔措)하는 중 문득 한 꾀를 얻고 이르되,

"여보 수리 아주머니! 내 말을 잠깐 들어 보오.

 아주머니 올 줄 알고 몇몇 달 경영하여 모은 양식 쓸 데 없어 한이러니,

오늘로서 만남이 늦었으니 어서 바삐 가사이다."

  수리 하는 말이,

"무슨 음식 있노라 감언이설로 날 속이려 하는냐?

내가 수궁 용왕 아니어든 내 어찌 너한테 속을손가?"

토끼 하는 말이,

"여보 아주머니, 토진(吐盡)하는 정담을 들어보시오.

사돈도 이리할 사돈이 있고 저리할 사돈이 있다 함과 같이 수부의 왕은 아무리 속여도

다시 못 볼 터이어니와, 우리 터에는 종종 서로 만날 터이어늘

어찌 감히 일호라도 속이리오.

건너 말 이동지가 납제(臘祭) 사냥하느라고 나를 심히 놀래기로 그 원수 갚기를 생각더니,

금년 정이월에 그 집 맏배 병아리 사십 여수를 둘만 남기고 다 잡아 오고,

제일 긴한 것은 용궁에 있던 의사 주머니가 내게 있으니,

 아주머니는 생후에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오니 가지기만 하면 전후 조화가 다 있지만은,

내게는 다 부당한 물건이요

아주머니한테는 모두 긴요할 것이라.

나와 같이 어서 갑시다. 음식 도적은 매일 잔치를 한대도 다 못 먹을 것이오,

의사 주머니는 가만이 앉았어도 평생을 잘 견디는 것이니,

이 좋은 보배를 가지고 자손에게까지 전하여 누리면 그 아니 좋을손가?"

한즉, 이 미련한 수리가 마음에 솔깃하여,

  "아무려나 가 보자."

하고 토끼 처소로 찾아가니,

토끼가 바위 아래로 들어가며 조금만 놓아 달라 하니 수리가 가로되,

  "조금 놓아주다가 아주 들어가면 어찌하게?"

토끼 말이,

  "그리하면 조금만 늦춰 주오."

하니 수리 생각에

  '조금 늦춰 주는 데야 어떠하랴.?'

하고 한 발로 반만 쥐고 있더니,

토끼가 점점 들어가며 조금 하다가 톡 채치며 하는 말이,

  "요것이 의사 주머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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