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 7
"모두 하늘이 정하신 운수입니다.
부인과 소승이 잠시 인연이 있었으나 어찌 이런 곳에 계시겠습니까?"
사씨 부인이 묘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민망스러운 말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하겠습니까마는
집을 떠나 있으매 집에 남은 인아의 신세가 외로운 것이며
그 생사조차 모르고 또 근자에는 한림의 심정이 변한데다가
집안의 요인(夭人)이 있어서 나를 해치고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한림의 신상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던 중 내가 시부님 묘하에 있을 때
시부님 영혼이 현몽하셔서 일러주신 말씀이 육 년 사월 십오 일에
배를 백빈주에 대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그때 급화를 만날는지 모르겠습니다."
"유한림은 오복이 구전지상(具全之相)이요,
유문은 적덕지가이매 어찌 요화가 오래 침노하겠습니까?
그리고 백빈주의 급한 사람을 구하라 하신 말씀을 때를 어기지 말고 구하십시오.
유상공은 본디 고명하신 분이었으니까 영혼인들 어찌 범연하시겠습니까?"
사씨 부인도 묘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수월암에 머물러서 세월을 보냈으나
그냥 한가롭게 놀지 않고 바느질과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절의 신세를 보답하였으므로 묘혜도 기뻐하고 부인을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때 교씨가 본실의 지위로 정당에 거처하면서 가사를 총괄하매
간악이 날로 더하여 비복들도 교씨의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사씨의 인자한 대우를 그리워하며 슬퍼하였다.
교씨는 아래로는 비복을 학대하고 위로는 간악한 십랑과 공모하여
한림의 총명을 흐리게 하는 요물들을 집안에 끌여들여서 집안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교씨는 유한림이 조정에 입번할 때는 그 틈을 타서
동청을 백자당으로 청하여 음란한 추행으로 밤을 새웠다.
교씨가 그날밤에도 동청을 데리고 백자당에서 자고 날이 밝으매
동청은 외당으로 나가고 교녀는 수색으로 피곤하여 늦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유한림이 출번으로 집에 돌아와서 정당에 이르매, 교씨가 보이지 않았다.
시비에게 물으니 백자당에 있다는 대답이었다.
유한림이 곧 백자당으로 가서
아직도 전날 밤의 난잡한 몸매로 자고 있는 것을 보자 힐문하였다.
"왜 여기서 자는 거요?"
"요즘 정당에서 자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기운이 좋지 않아서 어젯밤에 여기서 잤습니다."
"그대 역시 그 방에서 자면 몽사가 흉하던가.
나도 잠만 들면 꿈자리가 번잡하여 정신이 혼침하고
입번으로 나가서 자면 편안해서 이상하더니
그대 역시 그렇다니 복술 잘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물어보는 것이 어떨까?"
교씨는 백자당으로 숨어서 동청과 간통한 사실을 유한림이 알아챌까 겁내던 차에,
유한림이 그런 말을 하므로 안심할 뿐 아니라
굿이라도 하라는 유한림의 뜻이라 좋은 기회라고 기뻐하였다.
이때 황제가 서원에서 기도를 일삼으며 미신에 빠져 있으므로
가의태우 서세가 상소하여 간하고 간신 엄승상을 논핵하자
황제가 대로하여 서세를 삭직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이에 대하여 유한림이 서세의 충성을 변호하고 그를 구하려고 상소하였으나
황제가 역시 질택하시고 신하에게 조서를 내려서,
"이후로 짐의 기도를 막는 자가 있으면 참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도관에 도진인(都眞人)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한림과 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도진인이 유한림을 문병차 방문해 왔다.
유한림이 사람을 다 보낸 뒤에 진인만 머무르게 하고 내실로 데리고 가서
이 방에서 자면 흉몽을 꾸게 되니 무슨 악귀의 장난이냐고 물었다.
진인이 방 안의 기운을 살피더니,
"비록 대단치 않으나 역시 기운이 좋지 않소이다."
하고 하인을 시켜서 벽을 뜯고 방예물의 목인(木人) 여러 개를 꺼내서 유한림에게 보였다.
유한림이 대경실색하자 진인이 껄껄 웃고,
"이것은 굳이 사람을 해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시첩이 유한림의 중총(重寵)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 소행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방예로 사람의 정신을 미란케 하는 계교니까
이것만 없애 버리면 다른 염려는 없습니다."
하고 그 목인들을 곧 불살라 버리라고 권하였다.
"유한림의 미간에 혹기가 가득 차 있고 집안의 기운이 또한 좋지 않습니다.
이때는 주인이 집을 떠나라고 술법에 나와 있으니 조심하여 제액(除厄)하십시오."
"삼가 명심하리다."
유한림이 괴이하게 여기고 진인에게 후사하여 보냈다.
유한림은 진인의 신기한 도술에 경탄한 뒤에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집안에 이런 일이 있으면 사씨를 의심하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사씨도 없고 방을 고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요물이 나왔으니 반드시 집안에 악사(惡事)를 꾸미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사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원래 이 일은 교씨가 십랑과 공모한 계교였는데
교녀가 동청과 백화당에서 동침한 사실을 숨기려고 창졸간에 꾸며댄 핑계인데
그 내실에서 자면 꿈자리가 나쁘다고 한 것이 도진인의 도술로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한림이 비록 교씨의 짓인 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신이 흐려졌으나
지금 비로소 전일의 총명이 다시 소생한 셈이었다.
유한림은 머리를 숙이고 과거 사오 년 동안 지낸 일을 곰곰이 반성하고
비로소 악몽을 깬 듯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이때 마침 장사로부터 고모 두부인의 편지가 왔다.
그런데 두부인은 아직도 사씨를 집에서 쫓아 내보낸 사실도 모르고
사씨의 일을 신신당부한 사연이 더욱 간절하게 유한림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고모께서 사씨를 축출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의아스럽다.
그리고 사씨가 결코 방탕하지 않으므로 옥지환 사건도 어떤 자의 농간이 아닌가.'
하고 새삼스럽게 의심하게 되었다.
눈치가 빠른 교씨는 유한림의 기색이 전과 달라진 것을 보고
그 기위가 늠름해진 유한림에게 감히 요괴로운 수단을 피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씨를 음해한 계교가
탄로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동청에게 상의하였다.
"요즘 유한림의 기색을 보니 그전과는 아주 딴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 양인의 관계를 눈치챈 듯하니 어쩌면 좋겠어요?"
"우리 관계를 집안의 비복들이 모를 리 없으되
지금까지 유한림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부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지금 갑자기 기운을 잃고 약해지면 참소하는 자가 많을테니
그렇게 되면 죽어도 묻힐 땅이 없을 것입니다."
"사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아요.
나는 여자라 좋은 궁리가 나지 않으니
당신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서 우리 두 사람의 화를 면하게 해주어요."
교씨가 간부 동청에게 매달려서 애원하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옛말에 남이 나를 해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해치라 하였으니
좋은 기회를 노려서 한림의 음식에 독약을 섞어서 먹여 죽이고 우리 둘이 백년해로합시다."
간악한 교씨도 이 끔찍한 계획에는 한참 동안 침울하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유한림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잡혀 죽으리라는 두려움에서,
"결국 그럴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면 큰일이니 둘이만 극비로 일을 진행시킵시다."
교씨와 동청이 이런 끔찍스러운 음모를 하는 줄도 모르고 유한림은
마음이 울적해서 친구를 찾아다니며 한담이나 하며 기분을 풀려고 하였다.
하루는 교씨와 동청이 유한림이 없는 틈을 타서 깊은 밤에 숨어서 은근히 정을 나누고
역시 유한림 해칠 계획을 상의하다가
동청이 책상 서랍에서 우연히 유한림이 쓴 글을 얻어 보게 되었다.
동청이 그 글을 읽어 보다가 희색이 만면해지더니,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백년가우가 되게 해주실 테니 부인은 아무 걱정 말아요."
교씨가 의아하여 동청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그게 정말이오? 무슨 좋은 징조가 있나요?"
"요전에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서
짐의 기도 행사를 금하려고 간하는 자는 참하라 하여 계신데,
지금 다행히 한림이 쓴 이 글을 보니 엄승상을 간악소인에 비하여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가 되는 글을 갖다가 엄승상에게 보이면
엄승상이 황제께 알려서 엄형에 처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양인은 마음 놓고 백 년을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이 좋아라!"
교녀가 반색을 하고 제 볼을 동청의 볼에 대고 문지르면서 음란한 교태를 부리며 시시덕거렸다.
"이번 계획이 공명정대한 나라의 위엄으로 처치하게 됐어요.
요전에 독살하려던 계획은 위험해서 걱정이더니 참 잘 됐어요.
역시 당신 말처럼 하늘이 우리 사랑을 도와 주신 거지요."
하고 음란한 행색이 더욱 해괴하였다.
동청은 교씨와 껴안고 뒹굴던 몸을 털고 일어서서
소매 속에 유한림의 글을 넣고 곧 엄승상 댁으로 가서 엄승상을 만났다.
"그대는 누군데 왜 왔는가?"
"저는 한림학사 유연수의 문객입니다마는
그 사람이 승상님과 나라에 반역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지 못하여 그 비행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엄승상은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한림의 약점을 알리러 왔다는 말에 귀가 번뜩 뜨였다.
"그래 그가 나를 어떻게 모해하던가?"
"그 사람의 의논을 들으면 항상 승상을 해치려고 하더니
어제는 술에 취해서 저에게 하는 말이 엄승상은 군부(君父)를 그르치는 놈이라고 욕하면서
모든 일을 송휘종(宋徽宗) 시절에 비하고, 황제께서 엄명을 내려서
간하는 상소는 못할지라도 글을 지어서 내 뜻을 풀리라 하고 이 글을 쓰기에,
글 뜻을 제가 물으니 승상을 옛날의 유명한 간신들에게 비유하였으며
짐짓 묘한 풍요(風謠)의 글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분격하고 이 글을 훔쳐서 승상께 드립니다."
하고 동청은 그럴 듯한 거짓말을 붙여서 참소하였다,
엄승상이 그 글 쓴 종이를 받아서 본즉 과연
천서와 옥배의 간악을 풍자해서 지은 글이 분명하였다.
엄승상이 잘 되었다는 듯이 냉소하고,
"흠, 유연수 부자만이 내게 항복하지 않고 음으로 양으로 나를 거역하더니
망령된 아이가 나라를 희롱하고 나를 원망하니 인제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하고 그 글을 가지고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찾아 만나고,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풀어져서 젊은 학자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심히 한심하옵니다.
이제 성상께서 법을 세워 계시매 감히 상소치 못하고
불출한 한림 유연수가 왕 흠약의 천서와 진원평의 옥배로 신을 욕하오니
신이야 무슨 욕을 먹어도 참을 수 있사오나 무엄하게도 성주를 기롱하오니
마땅히 국법을 밝혀서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까 하옵니다."
하고 국궁배례하고 유한림 필적의 글을 증거품으로 어전에 바치었다.
황제가 그 글을 받아서 보시고 대로하여
유연수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장차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이 소문에 놀란 태우 서세가 상소하였다.
그 전에 자기가 억울하게 엄승상에게 몰려서 귀양간 때에
유한림이 그를 구명하려고 상소하였다가 엄승상의 미움을 받던 결과라고 생각한 서세가,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유한림을 구하려는 정의감에서 올린 상서였다.
'성상께서 충신을 죽이려 하시는 그 죄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나
청컨대 그 글을 내리셔서 만조 백관에게 알리게 하오.'
황제가 서세의 상소문을 보시고,
"유연수가 천서와 옥배로써 짐을 기롱하니 어찌 사죄를 면하리오?"
이에 대하여 서세가 다시 아뢰되,
"이 글을 보오니 천서 옥배로 비유하여 성상을 기롱함이 분명치 않으며
한무제의 송인종(宋仁宗)은 태평지주라
유연수 죄를 입더라도 죽일 죄는 아닌데 어찌 밝게 살피지 않사옵니까?"
황제가 이 말에 침음하시자 좌우에서 간언이 일어날 기세를 보고
심중에 불평이 북받쳤으나 여러 조신의 이목을 가리우지 못하여 선심이나 쓰는 척하고,
"서학사의 말이 이러하오니 유연수를 감형하여 귀양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황제가 허락하시사, 엄승상은 유한림을 엄중히 경호하여
먼 북방의 행주 땅으로 귀양보내라고 유사에게 명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진유현령 동청은 고두재배(叩頭再拜)하옵고 수상 좌하에 이 글을 올리나이다.
소생이 미한한 정성을 다하여 승상을 섬기고자 하되,
이 고을이 산박하며 재화가 없으므로 마음과 같지 못하오니
재정과 산물이 풍부한 남방의 수령을 시켜 주시면 더욱 정성을 다할 수 있을까 하옵니다.'
엄승상이 이 기회에 수단가인 동청을 아주 심복부하로 만들려고
곧 남방의 웅읍(雄邑)의 수령으로 영전시키려고 곧 황제에게 진언하였다.
"진유현령 동청이 재기과인하므로 큰 고을을 감당할 만하오니
성상께서 적소에 써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경이 보는 바가 그러하면 각별히 큰 고을의 수령으로 승진시켜서 그의 재능을 발휘하게 하라."
하고 곧 허락하셨다.
이때 마침 계림태수의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엄승상은 곧 동청을 금은보화가 많이 나는 고을로 영전시켰다.
그리하여 제 뜻대로 재물이 풍부한 계림의 태수가 된 동청은 교씨를 데리고 부임하여
더욱 탐관오리의 수완으로 백성의 고혈을 수찰하기에 분망하였다.
때마침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는 나라의 큰 경사가 있었으므로 유학사도 사은(赦恩)을 입었다.
그러나 곧 서울 본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척친이 있는 무창으로 향하였다.
여러 날 길을 가다가 장사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가 마침 여름의 염천이라, 더위로 여행이 어려웠다.
피곤한 몸의 땀을 식히려고 길가의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전후사를 생각하였다.
'내 신령의 도움으로 삼 년 동안의 귀양살이에서도 심한 수토병도 면하였고,
또 천사(天赦)를 입어서 돌아가게 되었으니 북경의 처자를 데려다가 고향에 두고
생을 어옹(漁翁)이 되어 성대의 한가한 백성으로 지내면 얼마나 즐거우랴.'
하고 외로운 몸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북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인성이 들리더니 붉은 곤장을 든 관졸과
각색기치를 든 하인들이 쌍쌍이 오면서 길을 치우라고 호통을 하였다.
유한림이 무슨 어마어마한 행차인 줄 짐작하고 몸을 얼른 부근 숲속으로 숨기고 보니
한 고관이 금안백마 위에 높이 타고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지나고 있었다.
유한림이 그 말을 탄 사람을 자세히 본즉,
분명히 자기 집에서 집사로 일하던 그 간악한 동청이었다.
"아니 저놈이 어떻게 높은 벼슬을 하고 이 지방을 행차해갈까?"
의심하고 일행의 거동을 살펴보니, 그 기구가 자사(刺使)가 아니면 태수의 지위임이 분명하였다.
'아하, 저 간통스러운 놈이 천하의 세도가 엄승상에게 아부하여 저런 출세를 하였구나.'
하고 더욱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동청이 탄 백마가 지나간 뒤에 곧 이어서 길 치우라는 관졸의 호통이 들리더니
채의시녀 십여 명이 칠보금덩을 옹위하고 지나갔다.
그것이 동청의 처의 일행이라고 짐작한 유한림은 그 행렬이 다 지나간 뒤에
다시 큰길로 나와서 한참 가다가 주점에 들러서 점심을 사 먹었다.
이때 맞은편 집에서 여자 한 명이 나오다가
주점에서 점심을 먹는 유한림을 보고 놀라면서 물었다.
"유한림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와 계십니까?"
유한림도 놀라서 그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 여자가 다름 아닌 사씨의 시녀였던 설매였다.
"나는 이제 은사를 입고 귀양이 풀려서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마는
너는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 그래 그동안 댁내가 평안하냐?"
"대감님, 이리로 오세요."
설매는 황망히 유한림을 사람 없는 장소로 모시고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그동안 댁에서 겪은 일을 다 아뢰겠습니다.
한림께서는 아까 지나간 행차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동청이 무슨 벼슬을 하고 가는 모양이더라."
"뒤에 가던 가마 행차는 누구로 아셨습니까? 동해수를 기울여도 씻지 못할 원통한 일입니다."
"그야 필경 동청의 내자일 게 아니냐?"
"동태수의 그 내권이 바로 교낭자입니다.
소비도 일행을 따라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저 집에 들렀다가 뜻하지 않은 한림을 이렇게 뵈옵게 되었습니다."
유한림이 설매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한참 말을 못하다가 이윽고 설매에게 다시 물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좌우간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하라."
유한림이 비통한 안색으로 재촉하자, 설매가 흐느껴 울면서 호소하였다.
"소비는 하늘을 속이고 주인을 저버린 죄가 천지에 가득하오니
한림께서 관대히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 지난 일은 탓하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말하라."
"사씨 부인께서는 비복을 사랑하셨는데
불충한 소비가 우둔한 탓으로 교낭자의 시비 납매의 꼬임에 빠져서
사씨 부인의 옥지환을 훔쳐 내었으며 교낭자 소생 장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씨 부인에게 씌워서 축출케 하는 계교에 방조한 것이 모두 소비의 죄올시다.
그 근원은 모두 교낭자가 동청과 사통하여 갖은 추행을 일삼으면서
요녀 십랑과 공모하여 꾸민 간계였습니다.
한림께서 행주로 귀양가시게 된 것도
교낭자가 동청과 함께 엄승상에게 참소하여 꾸민 농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림께서 행주로 귀양가신 뒤에 교낭자는
동청을 따라 도망할 때도 형의 초상을 당하여
조상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댁에 있는 보화를 전부 훔쳐 가지고 갔습니다.
소녀는 비록 배우지 못한 비천한 계집이나 이런 해괴한 변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입니다.
또 교낭자의 투기와 형벌이 혹독하여 시비들을 악형으로 괴롭혔으매,
소비도 비록 한때 이용은 당했으나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목숨입니다."
하고 설매는 자기 소매를 걷고 팔뚝에 악형당한 흉터를 내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미천한 제 신세라 어미 품을 떠나서 호구지책으로 종의 몸이 되어서
그런 포악한 상전을 만났으니 누구를 원망하오며
제가 저지른 죄가 끔찍하오니 만 번 죽은들 어찌 속죄하겠습니까."
유한림이 설매의 보고와 참회하는 말을 듣다가 인아도 죽이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 크게 실성하고 아찔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유한림은,
"내가 어리석어서 음부에게 속아 무죄한 처자를 보전치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과 조상께 대하랴."
유한림이 탄식하자 설매는 인아를 죽이려던 경과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였다.
"교씨가 소비에게 인아 공자를 물에 넣어 죽이라는 명을 받고 강가에까지 갔었으나,
그때 비로소 소비의 잘못을 뉘우치고 차마 교씨 말대로 할 수가 없어서
길가의 숲에 숨겨 두고 가서 물에 넣었다고 거짓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혹 어쩌면 그 인아 공자는 어떤 사람이 데려다가 잘 기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렇게라도 되었으면제 죄의 만분지 일이라도 덜어질까 하고
공자의 생존을 신명께 빌어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한림이 약간 미간을 펴고,
"다행히 너의 그 갸륵한 소행으로 인아가 살았다면 너는 그 애의 생명의 은인이다."
"밖에 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으니 지체하면 의심받을까 겁이 납니다.
떠나기 전에 한 말씀 급히 아뢰고 가겠습니다.
어제 악주에서 행인을 만나서 들은 소식이온데 한림부인께서 장사로 가시다가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져 돌아가셨다는 말도 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도움으로 살아 계시다고 풍문이 자자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겠으니 한림께서 수소문하여 자세히 알아보시고 선처하십소서."
하고 설매는 밖에서 부르는 동행 시비를 따라서 급히 나가 버렸다.
설매가 교씨의 행렬을 쫓아가자 교씨가 의심하고 늦게 온 이유를 추궁하였다.
"낙마한 상처가 아파서 곧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핑계하였으나 교씨는 의심이 많고 간특한 인물이라
설매를 데리고 동행해 온 시비에게 다시 물었다.
"설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가 그 앞집의 주점서
어떤 관위를 만나서 한동안 이야기하느라고 이토록 늦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더냐?"
"행주 땅에 귀양갔다가 풀려서 돌아오는 유한림이었습니다."
교씨가 깜짝 놀라서 행차를 멈추고 동청과 함께 선후책을 상의하였다.
동청도 대경실색하고,
"그놈이 죽어서 탸향 귀신이 될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오니
만일 다시 득의하면 우리는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건장한 관졸 수십 명을 뽑아서 유한림의 목을 베어 오면 천금의 상을 주리라고 명하였다.
이런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본 설매는 교씨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고
뒤로 가서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으므로 교씨는 그년 잘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때 유한림은 설매로부터 기막힌 소식을 듣고 힘없는 걸음으로 가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음부의 간교한 말을 듣고, 현처를 멀리하여 자식을 보전하지 못하고
일신이 이처럼 표박하게 되었으니 만고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처자를 보겠느냐.'
하고 악주에 이르러 강가를 배회하면서 부근 사람들에게
그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씨의 소문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유한림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끈덕지게 수소문하다가 어떤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어느 해 어느 달 어떤 부인이 시녀 두어 명을 데리고 악양루에서 밤을 지새고
강가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 후의 일은 모르겠다고 알려 주었다.
유한림은 그것이 필경 사씨로서 물에 빠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더욱 절망하고 슬퍼하였다.
유한림은 그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사방으로 배회하다가
큰 소나무 껍질을 깎아 거기에 큰 글씨로 쓴 것을 발견하였다.
'모년 모일 사씨 정옥은 이곳에서 눈물을 뿌리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유서를 발견한 유한림은 깜짝 놀라서 통곡하다가 그대로 기절하였다.
시동이 황망히 구원하여 한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탄식하였다.
"부인이 그 현숙한 덕행으로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억울한 물귀신에게 제사라도 지내서 위로하리라."
하고 제문을 지으려 하자 마음이 아득하여 눈물이 앞을 가려서 붓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때에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진동하였다.
놀라서 문을 열고 보니 장정 수십 명이 칼과 창을 들고서 들이닥치면서 외쳤다.
"유연수만 잡고 다른 사람은 상하지 말라!"
유한림이 놀라서 뒷문으로 도망쳐서 방향도 없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마치 그물을 벗어난 물고기 같고 함정에서 뛰어나온 범같이 정신없이 도망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앞길이 막히고 바다 같은 큰 물이 가로놓였으므로
정신이 아득하여 진퇴가 극히 어려웠다.
"유연수가 이 물가에 숨었으니 샅샅이 뒤져서 잡아라!"
뒤에서 추격하는 괴한들이 호통을 쳤다.
유한림은 이제는 잡혀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였다.
"내가 선량한 처자를 애매하게 학대하였으니 어찌 천벌을 받지 않으랴.
남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져서 스스로 죽으리라."
하고 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문득 배 젓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유한림이 그 뱃소리 나는 곳을 찾아 허둥지둥 가면서,
'어떤 사람이 나의 위급한 몸을 구해 주려는 것일까.'
하고 요행이라도 있기를 하늘에 빌었다.
동정호 섬에 있는 수월암의 묘혜 스님은
사씨 부인을 보호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씨에게,
"부인, 오늘이 사월 보름날인데 그 전에 하시던 말을 잊으셨나요?"
하고 물었다.
사씨는 세상과 인연이 없는 섬 속의 한가로운 암자에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체력이 필요없는 생활이라,
그 중대한 사월 보름날의 일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금년 사월 보름날에 배를 백빈주에 매고 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는 예언을 시부님 영혼이 가르치셨다 하셨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어서 백빈주로 배를 저어 가십시다."
사씨 부인은 그날 황혼에 배에 올라 백빈주로 저어 가면서
급해서 이 배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히 여기면서도
반가운 사람이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들자
자연 자기 신세의 슬픈 회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유한림이 뱃소리가 가까워 오는 강가로 내려가면서
물 위를 보니 어떤 여자가 일엽편주를 저어 구슬픈 노래를 탄식처럼 부르며 오고 있었다.
그 노래의 귀절이 유한림에게 들려왔다.
창파에 달이 밝으니 남호의 흰 마름[白濱]을 캐리로다
꽃이 아름다워 웃고자 하되 배 젓는 사람 슬퍼하는도다
이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또 다른 여자의 노래도 들렸다.
물가의 마름을 캐니 강남의 날이 저물었네
동청에 사람 있어 고인을 만나리로다
다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