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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8

오늘의 쉼터 2011. 5. 2. 00:33

 

사씨남정기 8

 

 

유한림이 배를 향하여 빨리 배를 대어서 사람 살려 달라고 구원을 청하였다.

배를 젓던 묘혜가 백빈주 물가로 배를 대려고 하자 사씨가 당황해서 묘혜를 말리면서,
"저 사람의 음성이 남자인데 이상한 남자를 이 배에 태워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묘혜는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급한 인명이 천금보다 귀중한데 목전에 죽을 사람을 어찌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급히 배를 저어서 물가로 대었다.

유한림이 배에 뛰어오르면서 애원하였다.
"도적놈들이 내 뒤를 쫓아오니 빨리 배를 저어 주시오."
조금만 늦었으면 유한림은 추격하던 동청의 부하 관졸에게 잡힐 뻔하였다.

체포 직전에 뜻하지 않은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본 괴한들은 호통을 치며 배를 불렀다.
"배를 도로 돌려 대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린다!"
그러나 묘혜는 못 들은 척하고 배를 저어 그들의 추격을 피해갔다.
"그 배에 태운 놈은 살인한 죄인이다.

계림태수께서 잡으라는 놈이니 그놈을 잡아오면 천금 상을 주신다."
유한림은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놈들이 보통 도적이 아니고

동청이 보낸 관졸임을 분명히 알았다.

머리끝이 새삼스럽게 쭈뼛해지고 전신에 소름이 끼친 유한림은 묘혜를 향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한림학사 유연수로서 살인한 죄가 없는데

저 도적놈들이 공연히 꾸며서 하는 소리입니다."
묘혜는 유한림이 선량한 사람인 줄로 알았으므로

도적들을 비웃는 듯이 닷줄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하였다.


창오산 저문 날에 달빛이 밝았으니
구의산의 구름 개는데 저기 가는 저 속객은
독행 천리 어디를 부질없이 가는가

 

유한림은 사지(死地)에서 뜻밖에 구해 준 배 안의 두 사람의 여자,

그 중의 늙은 여자가 부르는 이 노래의 의미도 알아들을 경황이 없었다.

이때 배 안에 담장소복으로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유한림을 보더니

놀랍고 반가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유한림이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보니 자기의 아내 사씨가 분명하지 않은가.
"부인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것이 웬일이오!"
유한림은 뜻밖에 만난 부인에게 인사한 후에

자연 나오는 탄식은 부인에 대한 자기 불찰의 후회와 사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제 무슨 낯을 들어 부인을 대하겠소.

부끄럽고 마음이 괴로워서 할 말이 없소.

그러나 부인은 정신을 진정하고 이 어리석은 연수의 불명을 허물하시오."


하고 설매에게 갓 듣고 온 소식을 마치 자백하듯이 말하였다.

즉 사씨 부인이 집을 떠난 후에 교씨가 십랑과 공모하고

방예로 저주한 일이며 또 설매가 옥지환을 훔쳐 내다가

냉진과 더불어 갖은 흉계를 꾸민 말을 다 하였다.

사씨 부인이 남편의 이런 뉘우치는 말을 듣고 감사하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한림께 이런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면 죽어도 어찌 눈을 감았겠습니까?"
하고 흐느껴 울었다.

 

한림이 또 설매를 꼬여서 장지를 죽이고 춘방에게 미루던 말과,

동청이 엄승상에게 참소하여 자기가 죽을 뻔하였다는 말과

교씨가 집안의 보물을 전부 가지고 동청을 따라간 경과를 알리자

사씨 부인은 기가 막혀서 묵묵히 울고만 있었다.

유한림은 부인이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야속히 여기는

분함을 풀지 않고 대답도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더욱 가슴이 답답하였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자식 인아가 죄도 없이 부인의 품을 잃고

아비도 모르게 강물 속의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으니 어찌 견딜 수 있겠소."
하고 탄식하는 유한림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사씨 부인은 처음부터 너무 놀라워서 말도 못하고 있었다가

유한림의 이런 말을 다 듣자 외마디 비명을 올리고 기절하고 말았다.

 

한림이 황급히 구호하여 부인이 정신을 차리자

한림은 실의 상태에 빠진 부인을 위로하려는 듯, 

또는 요행을 바라는 듯이,
"설매의 말을 들으니 인아를 차마 물에 던져 죽이지 못하고

길가의 숲속에 숨겨 두었다 하니 혹 하늘이 도우셨으면

어떤 고마운 사람이 데려다 길러 주고 있을지도 모르니

만나지 못하더라도 어디서든지 살아 있기만 해도 내 죄가 덜할까 하오."
사씨 부인이 흐느껴 울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설매의 그 말인들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설사 숲속에 넣어 두었더라도 어린 것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서로 죽은 줄 알았다가 만난 부부는 반갑기보다도 어린 인아의 생사로,

새로운 슬픔에 사로잡혀서 오열하였다.
"아까 강가의 소나무를 깎고 쓴 필적을 보니

부인이 물에 빠져 죽은 유서가 분명하므로

슬픈 회포를 제문으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고혼이나마 위로하려고 하다가

마침 동청이 보낸 자객놈들을 만나서 데리고 오던

동자의 잠을 깨울 새 없이 쫓겨서 강가까지 왔으나

앞에 물이 막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 부인의 배로 생명의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하여 마지 않는데,

도시 부인은 어떻게 이곳에 와서 나를 구해 주었소?"


"제가 선산 묘하에 있을 적에 도적이 위조 편지를 하여

제가 속아서 납치될 뻔하였으나 시부님께서 현몽하셔서

모년 모월 모일에 배를 백빈주에 대령하고 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오늘이 바로 그때 분부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득히 잊고 있었던 것을 저 스님께서 기억하시고 있어서

오늘 배를 타고 왔더니 과연 한림을 위급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저 묘혜 스님은 우리 양인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아까 보셨다는 소나무의 유서를 쓰고 물에 뛰어들려고 했을 때에도

저 묘혜 스님이 구해다가 스님 암자에 지금까지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유한림이,
"우리 부부는 묘혜 스님의 힘으로 살았으니, 그 태산 같은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고 묘혜를 향하여 사례한 뒤에,
"지금 생각하니 묘혜 스님은 원래 서울에 계시던 스님이 아니십니까?"
"호호, 소승의 일을 한림께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만 하겠습니까.

당초에 우리 혼사를 담당해 주시고 이제 또 우리 부부를 구해 주시니

하늘이 우리 부부를 위하여 스님을 이 세상에 내신가 하옵니다."
묘혜가 유한림의 감사에 사양하면서,
"한림과 부인의 천명이 장원(長遠)하시기 때문이지 어찌 소승의 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말씀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빨리 소승의 암자로 가셔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하고 묘혜가 배를 젓기 시작하자 순풍이 불어서 순식간에 암자 있는 섬에 도달하였다.

 

수월암에 이르러서 묘혜가 객당을 소제하고 유한림을 맞아들이고 차를 대접할 때

사씨를 모시던 유모와 시녀가 유한림을 뵈옵고

일희일비의 주종(主從)의 회포를 금하지 못하였다.

유한림이 부인을 보고 말하기를,
"이제 호구의 환은 벗어났으나 의지할 곳이 없고

가업이 황폐하였으니 무창으로 가서 약간의 전량을 수습하여

앞일을 정한 후에 서울로 올라가서 가묘를 모시고

전죄(前罪)를 사코자 하니 부인이 나를 버리지 않으면 동행하기 바라오."
"한림께서 저를 더럽다 하시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역명하겠습니까.

제가 선산을 떠날 적에 친척을 모아서 가묘를 개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옛일을 죄로 생각한 것은 없으나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출거지인이 다시 입승하는데 예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 내가 너무 급하게 생각한 모양이오.

내가 먼저 가서 묘를 모셔오고 다시 소식을 수소문한 후에 예를 갖추어서 데려 가리다."


"그는 그러하오나 한림의 외로운 몸이

또 도적의 무리를 만나시면 위태하니 조심하여 가십시오.

동청이 폭도를 보내어 잡지 못하였으므로 필연 다시 잡아 죽이려고 할 것이 분명하니

한림은 성명을 바꾸고 변복으로 가십시오."


유한림이 사씨 부인의 염려가 옳다 하고 혼자 떠나서

여러 날만에 고향땅 무창에 이르러서 약간의 재산을 수습하고

선산을 수축하고 노복을 시켜서 농업을 경영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동청은 교녀를 데리고 계림태수로 도임해 가다가 악양루 부근에서

유한림이 은사를 받고 귀양이 풀려서 행주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장정 수십 명을 급히 보내어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교씨와 함께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유연수가 무사히 서울로 가면 우리 죄상을 황제께 아뢰고

원한을 풀 것이니 어찌 방심하겠소?"
하고 심복부하의 관졸들에게 유연수를 극력 수색하여 잡으라고 엄명하였다.

그리고 사씨 학대에 공모하던 냉진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생각한 끝에 큰 벼슬을 한 동청을 찾아서 도움을 청하자,

동청이 환대하고 심복을 삼고 그의 간교로 갖은 악행을 하여

백성을 가렴주구하고 왕래하는 행인을 유인하여 독주를 먹여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리하여 남방의 사람들은 모두 동청의 학정을 저주하고

그의 고기를 씹으려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교씨는 계림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데리고 온 아들

봉추가 병들어 죽었으므로 역시 어미의 정으로 번민하였다.
큰 고을 계림에는 자연 관사가 많아서 분망하였다.

따라서 동청이 자주 관하 소현에 순행하여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청이 본아에 없는 동안은 불량배 냉진이 내외사를 다스리게 되어

세도를 부리는 한편 요부 교씨는 동청의 눈을 속이고 냉진과 간통하고 추태를 재연했다.

마치 유한림 집에서 유한림의 눈을 속이고

동청과 간통하던 버릇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동청은 자기의 지위와 재산을 더 얻으려는 수단으로

계림 지방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십만보화를 엄승상에게 뇌물로 바치려고

그의 생일축하 선물 명목으로 냉진에게 전달시켜 보냈다.

그런데 냉진이 서울에 와서 보니 이미 엄승상의 세도가 무너진 때였다.

황제도 그의 간악함을 깨닫고 관직을 삭탈하고 가산을 압수하는 소동 중이었다.

냉진은 깜짝 놀라서 그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였다.

자기의 보호자요 공모자인 동청의 죄악이 많은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으나

그의 배후에는 엄승상의 세도가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제 욕심에서 남을 이용만 하고 의리라고는 추호도 없는 냉진은

자기가 살아날 계교로 동청을 숙청시키는 공을 세우려고

등문고(登聞鼓)를 울려서 법관에게 민정을 호소하였다.

 

법관이 무슨 소송이냐고 묻자 냉진은 천연스러운 우국양민의 열변으로 진술하였다.
"저는 북방 사람으로서 남방에 다니러 갔다 왔습니다.

계림 지방에서는 태수 동청이 불인무의하여 학정을 일삼을 뿐 아니라

하늘을 속이고 무소불위하여 행인을 겁박하여 재물을 탈취하는 등 열두 죄목을 아룁니다."
법관이 냉진의 진술대로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께서 대로하고

금오관을 파견하여 동청을 잡아 가두라고 분부하고

따로 순찰관을 보내서 민정을 조사한즉 냉진이 고발한 사실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 학정을 일삼고 있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조정에는 이미 동청의 죄를 비호해 줄 엄승상이 숙청되었으므로 그를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간악한 동청이 아무리 간신의 세도를 믿고 갖은 악행으로 재물을

구산같이 쌓고 살기를 원하였지만 어찌 불의의 뜻대로 되리오.

그는 속절없이 잡혀 와서 장안 네거리에서 요참의 형을 받았으며

백성에게 도적질한 재산을 몰수한 황금이 사만 냥이요,

그밖의 재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냉진은 동청을 배반한 덕으로 제 죄를 면하였을 뿐 아니라,

동청이 엄승상에게 보내던 뇌물 십만 냥을 고스란히 착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청의 덕을 볼 때에 간통하던 교녀를 데리고 당당한 부부행세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울에서 살기에는 뒤가 켕겨서 멀리 산동으로 피해 갔다.

산동으로 가는 도중에 어떤 여관에서 탕남음녀는 술에 만취하여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들을 태우고 가던 차부 성대관이란 놈이 본디 도적놈이었으므로

냉진의 행장에 큰 돈 냄새를 맡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날밤에 냉진의 재물을 송두리째 훔쳐 가지고 도망해 버렸다.

냉진과 교녀는 함께 잠을 깬 후 도적맞은 것을 알고 애고하고 한탄할 따름이었다.


이때 황제가 조회를 받고 각 읍 수령의 불치를 탐문하시는 중

동청의 죄상 보고를 듣고 통탄하시며,
"이런 도적을 누가 그런 벼슬에 천거하였는고?"
"엄승상의 천거로 진유현령에서 계림태수로 승진시켰던 것입니다."
하고 승상 석가뇌가 보고해 올렸다.
"그렇다면 이 한가지로 미루어 보면 엄승상이 천거한 자는 모두 소인이요,

그가 배격하던 자는 모두 어진 사람임을 가히 알 수 있다."
하시고

 

엄승상의 잔당은 모두 벼슬을 삭탈하고 엄승상의 질시로 몰려서

귀양갔거나 좌천되었던 신료를 다시 초용하여 관기를 일신하였다.

이번의 큰 인사이동으로 가의대부 호연세로 도어사를 삼으시고

한림학사 유연수로 이부시랑을 삼으시고 또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천하에 구하셨다.

 

이때 외해랑이 급제하여 문벌의 영화를 보전하였으니

그는 유한림의 부인 사씨의 남동생이었다.

사씨 부인이 두부인을 찾아서 남방의 장사로 향할 때

두총관은 이미 이직하고 서울로 돌아갈 때에 두부인도 함께 상경하였다.

사공자는 서울에서 그런 줄도 모르고

또 누님이 장사로 가다가 중간에서 낭패한 사실도 전혀 모르고

배를 얻어 타고 장사로 가려던 참에

서울의 조보를 보고 두총관이 순천부사로 영전된 것을 알았다.

마침 과거 시행의 시일이 멀지 않아 있게 되었으므로

두부인이 상경하기를 기다리며 과거 공부를 하다가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마침 순천부사로 승진된 두총관이 부임준비차 상경하였다.

사공자는 곧 누님의 소식을 물었으나 무사는 소식을 모른다고 눈물을 머금고 슬퍼하였다.
사공자는 누님이 장사로 가다가 중도에서 낭패하고 진퇴유곡하여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누님 소식을 알려고

물가에 가서 두루 찾았으나 생사를 모른다는 소식을 두부인께 보고하였다.

 

"그때 그곳의 어떤 사람 말로는 어느 해 유한림이 그곳에 와서

사부인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필적을 보고 슬퍼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려고 하다가 그날 밤에 도적에게 쫓겨서 어디로 간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조정에서 유한림을 다시 벼슬에 영전시키려고 찾으나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오니 기쁨이 도리어 더욱 슬픔이옵니다."
"그렇다면 한림은 살지 못하였을 듯하다."
하고 두부인이 여러 사람을 보내서 사방으로 탐문하자

유한림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많다는 보고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사공자가 행장을 차리고 악양루 근처의 강가에 이르러서

극진히 누님과 유한림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행방이 묘연하여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단념은 하였으나 남양 지경이 장사와 멀지 않으니

도임한 후에 찾으려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유한림은 이름을 고치고 모든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그의 신분을 알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유한림은 고향에서 비복에게 농사를 열심히 짓게 하고

그 수확의 일부를 군산사로 사씨 부인에게 보내고

소식을 알아오라고 일러 보내었더니 다녀온 동자가 돌아와서,


"부인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런데 약주관아에서 방을 붙이고 한림을 찾고 있습니다.

그 연고를 물어 보았더니 황제께서 한림을 초용하셔서 이부시랑을 제수하시고

사신을 적소 행주로 보내서 찾았으나 벌써 은사를 입고 돌아가셨으나

종적을 몰라서 각처에 방을 붙이고 한림을 찾는 중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복은 감격하였으나 한림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관원에게 고하지 못하고 빨리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달려왔습니다."


유한림은 동자의 이 소식을 듣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엄승상이 천권하면 내 어찌 이부시랑에 초용되리오.

내가 초용되었다면 엄승상이 쫓겨난 모양이구나.'
하고 무창으로 나가서 관청에 복명하자

관원이 크게 놀라서 급히 맞아 당상으로 인도하면서,


"황제께서 선생을 이부시랑으로 제수하시고

소명이 미급하시온데 이제 어디로부터 오십니까?"


"소생이 뜻하는 바가 있어서 신분을 숨기고 다니다가

황제께서 엄승상을 조정에서 몰아내시고 현자를 부르시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유한림은 무창 관원에게 이렇게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외로운 섬의 암자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부인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유시랑의 신분이 된 유연수는

빨리 상경하여 황제께 복명하려고 역마를 몰아 길을 재촉해 갔다.

유시랑이 남창부에 이르자 지방 장관이 명함을 드리고 인사하였다.

유시랑이 명함을 받아서 본즉 성명이 사경(謝敬)으로 되어 있으나

본인의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방 장관은 유시랑을 귀빈으로 영접하고 주찬으로 환대하였다.

그런데 그 관원의 얼굴에 수색이 가득 차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물으니,


"하관이 심중에 소회가 있어서 자연 기운이 없어 보인 모양이니 실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자기 누님을 한번 이별한 후에 생사를 모르고

매부 유한림의 종적도 묘연하다는 한탄을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유시랑이 비로소 그 지방 장관이 처남 사공자임을 알고 손을 잡고 탄식하였다.


"아 자네가 내 처남 아닌가. 내 얼굴을 자세히 보게."


남창부윤 사경이 놀라서 자세히 보니 분명히 매부 유한림이라,

반갑게 소매를 잡고 누님의 소식을 물었다.


"내가 우암하여 무죄한 누이를 집에서 내쫓아서

그 후에 갖은 억울한 고생을 시켰으니 자네 대할 면목이 없네."


"지난 일은 하는 수 없습니다. 누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묘혜 스님의 구원을 받고 지금 군산사에 잘 있으니 염려 말게."


"누님이 생존해 있는 것은 매형님의 복입니다. 묘혜 스님의 은혜는 백골난망입니다."


"자네는 너무나 마음을 상하지 말게. 천은이 호대하시매

다 갚기 어려운데 나의 박덕으로 이런 영복을 당하니 황송하기 그지없네."


하고 서로가 술잔을 나누며 끝없는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고 이별하였다.

 

유시랑은 서울로 나가서 황제께 사은하자 친히 불러 보시고

간신 엄승상에게 속아서 유시랑의 충성을 모르고 고생시킨 존후사를 후회하였다.

유시랑이 황송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성은이 이렇게 홍대하시니 미신이 황공무지하옵니다."


"경의 뜻이 굳어서 특히 강서백(講書伯)을 삼으니 인심찰직(仁心察職)하기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유시랑이 어전을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비복들이 나와서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당사가 황량하고 정자에 잡초가 무성하여 주인이 없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유시랑이 사당에 참배하고 통곡 사죄하고 고모 두부인을 찾아 사죄하매 부인이 흐느껴 울고,


"이 늙은 몸이 살았다가 현질이 다시 귀달(貴達)함을 보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러나 네가 조종향사를 폐한 지 오래니 그 죄가 어찌 가벼우랴."
"제 죄는 만 번 죽어도 부족하오나 다행히 부부가 다시 만났으니 죄를 용서하십소서."


두부인이 질부와 만났다는 말에 놀라운 기쁨을 참지 못하고,


"조카의 액운이 인제야 다하였구나. 옛날에 현인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인은 재화를 만난다 하니 너는 이제 회과자책(悔過自責)하겠느냐?"


유시랑이 전후사를 모두 고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간악에 속지 않고 근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같은 대악이 어찌 세상에 용납되겠습니까?"


하고 거듭 사과하였다.

이때에 모든 친척들이 유시랑을 찾아와서 하례하고 위로하였다.

 

"이것은 모두 가운이매 어찌 인력으로 막았으리오."


유시랑이 친척들과 하직하고 강서로 갈 제 그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

이때 사추관이 누님을 데려오겠다고 말하자

유시랑은 허락하고 자기는 강가에 가서 맞을 테니 먼저 떠나가라고 약속하였다.
동생 사추관은 미리 편지를 보내고 동정호의 섬 군산사에 이르니

사씨 부인이 미리 알고 기다리다가 만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수년 동안 그리던 정회를 푼 뒤에 유시랑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씨 부인이 편지를 받아 보니 남편은 방백을 하였는지라

감격하여 묘혜 스님에게 사은하고 유시랑이 보내 온 예물을 전하였다.
"이것은 모두 부인의 복이지 어찌 소승의 공이겠습니까?"

 

이윽고 작별하게 되자 사부인과 묘혜 스님이 마치 모녀의 이별같이 서로 슬퍼하였다.

사추관이 묘혜에게 재삼 은혜를 치하하자

묘혜 또한 재삼 사양하고 앞으로도 여러분의 복록을 불전에 축원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사추관이 객당에서 자고 이튿날 부인과 함께 발정하자

묘혜가 암자의 여러 승니와 산에서 내려와서 떠나는 배를 기쁨과 슬픔으로 전송하였다.

일행이 약속한 지경에 강가에 배를 대니 유시랑이 이미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금수채장(錦繡彩帳)이 강변을 덮고 환영하는 사람이 물가에 정렬하고 기다렸다.

시비가 새 의복을 사씨 부인에게 올리매 부인은 칠 년 동안이나 입었던

소복을 비로소 벗고 화복으로 갈아입고 부부가 상봉하니 세상에 희한한 경사였다.

 

여기서 뱃길로 강서로 행하여 고향집에 이르니 비복들이 감격으로 환영하였다.

유시랑 부부가 묘에 참배할 제 제문을 지어서 부부가 재합함을 보고하는 사의가 간절하더라.

이 소문을 들은 강서 지방의 대소관원이 모두 유시랑을 찾아와서

예단을 드려 하례하고 또 사추관에게 하례하였으며,

유시랑은 큰 잔치를 베풀어서 빈객을 접대하였다.
사씨 부인은 남편을 만나서 다시 유가의 주부가 되었으나

새로운 슬픔이 있으니 아들 인아의 생사 소식이었다.

사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인아의 행적은 묘연하여 알 길이 없었다.

어느덧 신년을 맞으며 부인이 유시랑에게 은근히 술회하였다.


"그전에 제가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가사가 탁란하였던 일을 회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고 제 나이도 사십에 이르러서

생산하지 못한 지 십 년이라 밤낮으로 큰 걱정입니다.

 후손을 위하여 다시 숙녀를 얻어 생남의 길을 마련할까 합니다."


"후손을 위하여 소실을 권하는 부인의 뜻은 고마우나

그 전에 교녀로 말미암아 인아의 생사를 알지 못하매

통입골수(痛入骨髓)한데 어찌 또다시 잡인을 집안에 들여놓겠소?"


부인이 한숨을 짓고,


"제가 시랑과 동서 삼십 년에 일점 혈육이던 인아의 생사를 모르고

아직 사속(嗣屬)이 없으니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뵈오리까?"


"그러나 부인의 연기가 아직 단산할 때가 아니니 그런 불길한 말을 하지 마시오."


"상공은 그런 고집은 마시고 제 말을 들으십시오."


하고 묘혜 스님의 질녀가 현숙하고 또 귀자(貴子)를 둘 팔자라

하면서 유시랑의 첩으로 삼으라고 굳이 권하였다.

유시랑은 사씨 부인의 성의에 마지 못하여 묘혜 스님의 질녀라는 여자의 근본을 물은 뒤

부인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허락하였다.


"또 청할 일이 있습니다."


부인이 말을 바꾸어 남편에게 상의하였다.


"노복이 충성으로 나를 시중하다가 조난한 뱃속에서 죽었으니

그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겠으며, 또 황릉묘가 황폐하였으니 중수해야겠으며,

또 묘혜 스님의 암자가 있는 군산동구에 탑을 세워서 모든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유시랑이 부인의 청은 마땅히 하여야 할 사은의 지성이라 하고

모두 많은 재물을 희사하여 시설하였다.

묘혜 스님은 유시랑 부부가 보낸 후한 금백으로 곧 수월암을 중수하고

군산동구에 탑을 신축하여 부인탑이라고 불렀다.

특히 황릉묘를 장엄하게 중수하고 노복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관곽을 갖추어서 다시 후장을 지내준 데 대하여

사씨 부인의 기특한 뜻을 세상이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사씨의 사동이 황릉묘지기에게 중수 비용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회룡령 땅에 들러서 묘혜 스님의 질녀를 찾아갔다.

 

이때 그 낭자가 그 전에 알았던 사씨 부인의 사동을 보고도 채 알지 못하고 물었다.

"총각은 어디서 어떻게 또 이곳에 왔소?"


"낭자는 왜 나를 몰라보십니까?

연전에 사씨 부인을 모시고 장사를 가던 길에

댁에서 수일간 신세를 진 사환입니다."

"아참 그랬군. 내가 몰라뵈서 미안했어요. 사씨 부인은 안녕하신지요?"


사동이 그 후에 지낸 사씨 부인의 사실을 대략 전하자

낭자는 사씨 부인이 누명을 벗고 시가로 돌아가서 잘 계시다는 말과

그것이 모두 낭자의 고모님 묘혜의 공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인사가 끝난 뒤에 사환은 사씨 부인이 보낸 편지를 낭자에게 내놓았다.

임낭자가 감격하고 봉을 떼어 보니 사연이 매우 간곡하였으므로

사씨 부인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벌써 칠 년 전에 설매가 인아를 차마 물 속에 던지지 못하고

가만히 강변의 숲 속에 놓고 간 뒤에 인아가 잠을 깨어

아무도 없으므로 큰소리로 앙앙 울고 있었다.

이때 마침 나경으로 장사차 지나가던 뱃사람이 우는 어린아이를 찾아가 보니

얼굴 생김이 비범하고 가엾어서 배에 싣고 가다가

갈 길이 멀고 남경 가서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기로,

도중의 연화촌에서 인아를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운 곳에 내려놓고 갔었다.

이때 마침 임가의 아내 변씨가 꿈을 꾸었는데

문 밖에 이상한 광채가 비치었으므로 놀라서 깨니 꿈이었다.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들은 남편 임씨가 급히 울 밖으로 나가서 본즉

용모가 잘난 어린아이가 울고 있으므로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 변씨가 하늘의 꿈을 통해서 자기에게 준 귀동자라고 기뻐하고 고이 길렀다.

그러다가 변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임낭자가 친동생같이 기르고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용모가 고운 임낭자가 부모를 다 잃고 외롭게 지내게 되자

동정도 하고 탐도 나서 여러 군데서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낭자는 고모 묘혜 스님이 장차 귀한 몸이 되리라던 말만 생각하면서

시골 농부의 집으로 출가하기를 원하지 않고 장차 재상의 부인이 될 것만 믿고 있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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