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3.인간의 대지 - 쌩 떽쥐뻬리

오늘의 쉼터 2011. 5. 18. 13:03

 

인간의 대지 - 쌩 떽쥐뻬리


[3] 비행기

기요메, 자네가 일하는 낮과 밤이 설사 압력계를 점검하고

자이로스코우프로 기체의 평형을 유지하고, 엔진의 숨결을 청진하고,

15톤의 금속을 어깨로 떠받치는 일로 흘러간다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네에게 부과된 문제들은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래서 자네는 단번에 시골사람의 그 고귀함과 쉽사리 맺어지는 것이다.

시인과도 같이 자네는 새벽의 예고를 즐길 줄도 안다.

고난의 밤의 심연 속에서 자네는 그 몇 번이나 저 창백한 꽃다발,

캄캄한 땅을 동녘에서 솟아오르는 저 광명이 나타나기를 희원했던가.

이 기적의 샘이 때로는 자네 앞에서 천천히 해빙하여

자네가 죽는 물로 체념했을 때 자네를 고쳐주곤 했다.

정교한 기계의 사용이 자네를 무미건조한 기술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급속한 기술의 발달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물질적인 재물만을 바라고 싸우는 사람은

누구나 삶에 보람이 있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쟁기와 같은 하나의 연장이다.

기계가 인간을 해친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당한 것과 그렇게 급속한 변화의 결과를 비판하는데 필요한

시간적인 거리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 역사의 20만 년에 비한다면 기계의 역사의 1백 년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겨우 이 광산이나 발전소의 풍경 속에 겨우 자리잡은 셈이다.

우리는 채 다 짓지도 못한 새집에 살기 시작한 셈이다.

우리 주위에서 인간 관계도, 노동 조건도, 풍속 습관도 모두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했다.

우리들의 심리조차도 가장 밑바탕으로부터 혼란되어 버렸다.

이별이니, 부재니, 거리니, 귀환이니 하는 개념의 말은

똑같아도 이미 같은 현실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오늘날의 세계를 파악하는데 있어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위해 만들어졌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거의 생활이 우리들의 본성에 부합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언어에 더 부합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진보의 하나하나가 간신히 우리가 체득해 가던 습관 밖으로

우리를 더욱더 멀리 쫓아내버렸고,

그리하여 우리는 고국을 떠나 아직 자기의 조국을 세우지 못한 이민들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가 아직 새 장난감에 감탄하고 있는 젊은 야만인들이다.

우리들의 비행기 경주도 이것 이외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저것은 보다 높이 올라가고, 이것은 보다 빨리 날아갈 뿐이다.

왜 그것을 날게 하는지를 우리는 잊고 있다.

경주 그 자체가 우선은 그 목적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식민지 군에게 있어 삶의 의의는 정복에 있다.

즉, 병사는 농부를 멸시한다.

그러나 이 정복의 목적은 이 농부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이 진보의 열광 속에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철도 부설이니, 공장 건설, 유정파기에 종사시켰다.

우리들은 이러한 건설이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칫 잊어버리기 쉽다.

정복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의 윤리, 도덕은 군인의 윤리. 도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을 해야 한다.

아직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새 집에 생명을 주어야 할 때다.

전자에 있어서의 진리는 집을 짓는 것이었고,

후자에 있어서는 거기 들어가 사는 데 있다.

우리들의 집은 아마도 조금씩 인간다워질 것이다.

기계조차도 완성되어 갈수록 그 역할이 주가 되고, 기계 자체는 몸을 감추게 된다.

인간의 온갖 생산적 노력, 그 모든 계산이며,

설계도 위에서의 모든 밤샘도 외면적인 현상으로는 모두가 단순화로 귀착되는 것 같다.

하나의 원주라든가, 하나의 용골, 또는 한 대의 비행기의 동체의 곡선을

차츰 풀어내어 여자의 유방이나 어깨의 곡선의 그 단순한 순수성을 갖게 하기까지에는

여러 세대의 경험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기사들이나, 제도사들, 연구실의 계산원들의 일도 외견상으로는

그 날개가 잘 눈에 띄지 않게 될 때까지,

동체에 붙인 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될 때까지

닦고 문지르고 연결을 가볍게 하고 날개의 균형을 잡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광물을 지니고 있는 암석으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히 활짝 핀 그 형태가 신비롭게도 결합된,

그러면서도 시와 같은 훌륭한 질을 갖춘 천성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완성이란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아무것도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발달의 극치에 다다르면 기계는 몸을 숨긴다.
발명의 완성은 이와 같이 발명이 없는 것과 종이 한 겹 사이이다.

그리고 기계에 있어서도 눈에 띄는 장식은 점점 사라지고

바닷물에 닦여진 조약돌처럼 자연스러운 물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가 사용되면서 차츰 제 자신을 잊혀지게 된다는 것도 또한 찬양할 만한 일이다.

전에 우리는 비행기에서 복잡한 공장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엔진이 돌아간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

우리가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처럼,

엔진도 마침내 돌아간다는 자기의 기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주의력을 도구에 빼앗길 필요는 없게 됐다.

도구 너머로, 도구를 거쳐서 우리가 찾아내는 것은 자연,

정원사의, 항해자의, 또는 시인의 그 자연이다.

조종사는 날기 시작하자마자 물과 공기와 접촉하게 된다.

엔진이 전개되고, 기체가 벌써 바다를 가르며

단단한 파도소리를 억누르고 징처럼 울릴 때,

그는 자기의 허리의 동요로써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느낀다.

이 15톤의 물질 속에 비상을 가능케 하는 그 성숙이 준비되고 있음을.

조종사는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면 차츰 그의 손바닥 안에 이 힘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조종간의 금속성 기관은, 이 선물이 그에게 주어짐에 따라 그의 힘의 전달자가 된다.

이 힘이 무르익으면 꽃을 따기보다도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조종사는 비행기를 물에서 떼어서 대기 속에 얹어놓는 것이다.

 

[4] 비행기와 지구

(1)
비행기도 틀림없이 하나의 기계지만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분석의 기구인가!

이 기구는 우리에게 땅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

길이란 사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를 속여 왔다.

우리는 자기의 백성을 찾아 보고 그들이 자기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했다는 저 옛이야기 속의 여왕과 비슷하다.

그의 신하들은 여왕을 속이려고 행차하는 길에

훌륭한 장식을 세우고 사람을 사서 춤을 추게 했다.

여왕은 그 가느다란 길밖에 자기 나라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넓은 들판에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자기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오랫동안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걸어왔다.

길은 불모의 땅이나, 바위나 사막을 피해서 인간의 욕망에 따라 샘에서 샘으로 간다.

길은 농부들을 곡간에서 밀밭으로 이끌어가고, 외양간 문턱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가축을 받아다가 새벽빛 속의 개자리 밭에 풀어 놓는다.

길은 이 마을을 저 마을과 결합시킨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저기로 결혼하니까.

그리고 길 중의 하나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험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아시스를 즐기기 위해 수십 번을 우회한다.

이렇게 달콤한 거짓말과도 같은 길의 굴곡 하나하나에 속아서

여행하는 동안 잘 관개된 많은 땅과, 과수원과, 목장들을 보아 온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감옥의 모습을 아름답게 생각해 왔다.

이 지구를 우리는 기름지고 부드러운 것으로만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시력은 예민해졌고, 우리는 무자비할 만큼 발전을 했다.

비행기로 우리는 직선을 배웠다.

이륙하자마자 우리는 물 먹이는 곳이나 외양간으로 기울어지는 길들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구부러져가는 길들을 버린다.

이때부터 정든 굴종에서 벗어나고 샘에 대한 욕망에서 해방되어

우리는 먼 목표를 향해 기수를 돌린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직선탄도의 높이에서 본질적인 바탕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위와 모래와 소금의 집적이며,

그곳에는 가끔 생명이 폐허의 구덩이에 돋아난 한줌의 이끼처럼

여기저기에 꽃을 피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짜기 속을 미화하고,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후의 혜택을 받는 꽃밭처럼 피어나 있는

이 문명을 조사하면서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로 바뀐다.
과학자가 실험기구를 통해 보듯이 비행기 창을 통해 인간을 관찰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읽고 있는 것이다.

(2)
마젤란 해협을 향하는 조종사는 갈레고스강의 조금 남쪽에서

오래된 용암 분출구 위를 나아가게 된다.

이 잔해는 20미터 두께로 평야를 짓누르고 있다.

이어서 그는 둘째 분출구, 셋째 분출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땅이 솟아오른 곳마다,

2백 미터쯤의 젖꼭지 같은 같은 야산 하나마다

모두 옆구리에 분화구 흔적을 가지고 있다.

거만한 베스비어스 산과는 달리 이것은 들판 위에 늘어선 유탄 포의 포구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지금은 변해버린 풍경속에서, 수천 개의 화산들이 서로 호응하듯 불을 뿜으면서

지하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울려대던 당시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정적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제 사람들은 검은 빙하로 장식된, 영원히 잠잠해진 땅위를 비행한다.

그러나 더 멀리 더 오래 된 화산들은 벌써 황금빛 잔디를 입고 있다.

가끔 그 우묵하게 파인 곳에는 나무 한 그루가 낡은 화분 속의 꽃처럼 자라고 있다.
황혼빛 속에서 평야가 짧은 풀로 꾸며져 공원처럼 사치스러워지고,

이제는 그 거대한 둘레에서나 겨우 불거질 뿐이다.

산토끼 한 마리가 뛰어 가고, 새 한 마리가 날아 오른다.

이 별 위에, 좋은 흙반죽이 쌓인 새로운 지표를 마침내 생명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뿐따 아레나스 조금 못미친 곳에 마지막 분화구들이 솟아올라 있다.

편편한 잔디밭이 화산들의 기복을 따라 펼쳐져 있다.

이제는 그 화산들도 평온하기만 하다.

갈라진 곳마다 잔디의 부드러운 아마실로 꿰매져 있다.

지면은 편편하고, 경사는 완만하여 사람들은 그 화산으로서의 기원을 잊어버린다.

이 잔디밭이 구릉 옆구리의 어두운 상혼을 지워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쪽의 세계 최남단의 도시 뿐따 아레나스 원시의 용암과

남극의 빙하 사이에서 우연히 약간의 진흙에 의지해서 이 도시는 존재한다.

시커먼 분출구에서 그리도 가까운 곳이어서, 사람들은 한층 더 인간의 기적을 느끼게 된다.

얼마나 이상한 만남인가!

어떻게, 또 왜 인간이라는 길손들이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살 수 없는

이 가식의 정원을 하나의 지질학적 시대,

하고 많은 날 중에서 축복 받은 이 하루에 찾아오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저녁의 아늑함 속에 착륙했다.

뿐따 아레나스여! 나는 샘물 가에 기대서서 소녀들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두어 걸음 앞에 서서 나는 인간의 신비를 더욱 느낀다.

생명이 생명과 그렇게도 쉽게 결합되고, 바람의 침대 속에서도 꽃들은 꽃들과 섞이며,

한 마리의 백조는 다른 모든 백조와 알게 되는 이 세상에서

홀로 인간들만이 그들의 고독을 쌓고 있다.

얼마나 커다란 공간이 그들 사이의 마음의 통로를 가로막는 것을,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눈을 내리뜨고 혼자 미소지으며 이미 귀여운 교태와 거짓을 품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저 소녀에 대해서 누가 무엇을 알 수 있으랴?

그녀는 한 애인의 생각과, 목소리와, 침묵으로써 하나의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그 애인 말고는 모두가 야만인이었다.

나에게는 그녀가 어느 떠돌이 별에 있는 것보다도 더 자기의 비밀과, 습관과,

자기 추억의 즐거운 메아리 속에 갇혀 있는 듯이 느껴졌다.

화산에서, 잔디밭에서, 또는 바다의 소금물에서

어제 막 태어난 이 소녀가 벌써 반은 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뿐따 아레나스여! 나는 어느 샘물 가에 기대 서 있다.

노파들이 물을 길으러 온다.

그녀들의 일생의 비극에 대해서 나는 지금 그 하녀의 몸짓밖에는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사내 아이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달랠 길 없는 한 예쁜 아이로밖에는 내 기억 속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방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제국"에는 끝내 들어갈 수 없다.

얼마나 초라한 무대장치 속에서

인간의 원한과 우정과 기쁨의 거창한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가?

아직도 식지 않은 용암 뒤에 위태롭게 서 있으면서,

벌써 뒤에 덮쳐올 모래와 눈사태에 위협받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이 영원에 대한 동경을 어디서 찾아낸 것일까?

그들의 문명은 취약한 도금에 불과하다.

화산이, 새로운 바다가, 모래바람이 그것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뿐따 아레나스 시는 보오쓰(프랑스의 곡창 지방)의 땅처럼

속속들이 기름지게 느껴지는 진짜 땅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서도 다른 곳처럼 삶이란 사치이며,

인간의 발 밑에는 깊이 있는 땅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뿐따 아레나스에서 10킬로 미터 되는 곳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늪이 있다는 것을,

왜소한 나무들과 나지막한 집들에 둘러싸인,

농가 앞마당의 웅덩이처럼 보잘것없는 그 늪은 이상스럽게도 밀물 썰물이 있다.

이 늪은 갈대와 뛰노는 아이들의 이렇듯 평화로운 현실에 감싸여 있으면서도

낮과 밤에 그 완만한 호흡을 계속하면서, 또 하나의 다른 법칙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잔잔한 수면 아래, 꼼짝 않는 얼음 밀,

단 한 척의 낡은 조각배 밑에서 달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소용돌이가 이 검은 덩어리 밑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소화작용이, 풀과 꽃의 가벼운 이불 밑에서

이 호수 주위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백 미터도 못되는 이 물웅덩이는 사람들이

인간의 대지 위에 든든히 자리잡고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이 도시 문턱에서, 어찌알랴, 바다의 맥박을 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하나의 떠돌이 별 위에 살고 있다.

이 별은 이따금 비행기의 덕분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근원을 보여준다.

달과 관계 있는 웅덩이가 숨겨진 친척 관계를 드러내 보이듯이...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한 다른 징후도 알았다.

쥐비 끝 부분과 시스레로스 사이를 사하라 사막의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고 있노라면

원추대 모4양의 사고가 드문드문 산재해 있는데

그 넓이는 백 보 정도에서부터 30킬로 미터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이다.

그 높이는 놀라울 만큼 한결같이 3백 미터이다.

그런데 높이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고원들은 어느 것이나

같은 색깔, 같은 흙의 결, 같은 절벽의 돌의 새김들을 보이고 있다.

모래 위에 홀로 솟아나와 있는 신전의 원주만으로도

붕괴되기 전의 식탁의 화려함을 보여주듯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이 모래 기둥들도

예전에는 하나로 되어 있었던 광대한 사구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카사블랑카와 다까르 간의 정기 항로를 개설하던 당시에는 기재가 취약해서 고장이니,

수색이니, 구출 작업이니 해서 우리는 종종 불귀순 지구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모래란 놈은 속임꾼이다. 단단하리라고 믿었다가는 파묻혀 버린다.

아스팔트처럼 단단해 보이고, 발뒤꿈치 밑에서 굳은 소리를 내는

옛 염전 광만 하더라도, 가끔 바퀴 무게로 내려앉아 버린다.

그러면 흰 소금 껍질이 갈라지고 그 밑은 시커먼 늪지의 악취를 풍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 사구의 편편한 표면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결코 함정을 숨겨두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보장은 알이 굵고 단단한 모래의 덕택이다.

그것은 자세히 보면 작은 조개껍데기들의 어마어마한 퇴적이었다.

그것들은 사구의 표면에서는 아직 제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만

능선을 따라 내려감에 따라 가루가 되어 엉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산기슭의 가장 오래된 퇴적층에서는 그것들은 이미 순수한 석회암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동료인 레느와 세르가 불귀순민들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있을 때,

모르인의 심부름꾼 한 사람을 내려놓기 위해 이 안전지대 하나에 착륙한 일이 있다.

나는 그를 그곳에 남겨 두고 떠나기에 앞서,

그가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나 하고 그와 함께 찾아보았다.

그런데 우리의 이 높이 쌓은 대는 어느 쪽에서나

나사 모양과 같은 주름을 지으며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착륙지를 찾아 이륙하기에 앞서 여기서 꽤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어쩌면 나는, 일찍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도 더럽힌 적이 없는

이 땅 위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는 어린애 같은 기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용감한 모르인의 불귀순민도 이 성과 요새를 공격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유럽사람도 일찍이 이 지역을 탐험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한의 순결한 모래를 밟고 섰다.

나는 이 조개껍데기 가루를 귀중한 황금인양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흘려보내며 반짝이게 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 정적을 깨뜨린 최초의 인간이었다.

태고 적부터 단 한 포기의 풀도 나게 한 적이 없는 이 북극의 빙산과도 같은 곳 위에서,

나는 바람에 불려 온 한 알의 씨앗처럼 생명의 최초의 증거였다.

별이 하나, 벌써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별을 골똘히 쳐다봤다.

나는 생각했다.
이 순백의 지면은 수천만 년째 오직 별들에게만 바쳐져 왔었다는 것을.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순결한 식탁보 그리고 이 식탁보 위,

내 앞에서 15내지 20미터쯤 되는 곳에 까만 조약돌 하나를 발견했을 때는

위대한 발견이라도 했을 때처럼 가슴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3백 미터 두께로 쌓인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지층 전채가 하나의 절대적인 증거인양

돌 하나라도 거기 있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의 완만한 소화작용에서 생겨난 규석들이

어쩌면 저 땅속 깊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기적이 그들 중의 하나를 이다지도 새로운 지표 위까지 올려 놓게 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나의 발견 물을 주워 들었다.

단단하고 까맣고 주먹만하고 금속처럼 무겁고, 눈물 모양을 한 이 조약돌을.

사과나무 밑에 펼쳐진 식탁보 위에는 사과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별아래 펼쳐진 식탁보 위에는 별가루밖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어떠한 운석도, 내가 주워든 이것만큼 명백하게 자기 근원을 보여준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쳐들며 극히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다.

이 하늘의 사과나무에서는 다른 사과들도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을 떨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을 떨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수십만년 이래 아무도 그것들을 흩뜨려 놓지 않았을 거니까.

또 그것들은 다른 물질들과 조금도 뒤섞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당장 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탐사에 나섰다.

 

내 가설은 실증되었다.

나는 대략 1헥타르에 돌 하나 꼴로 내 발견 물을 주워 모았다.

어느 것이나 응결된 용암의 그 형상, 언제나 까만 다이아몬드의 경도였다.

나는 이리하여 이 별의 우량계 위에 서서 수천만 년의 시간의 축도 속에서

이 느린 불의 소나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지구의 둥그런 등 위에,

이 자기를 띤 식탁보와 별들 사이에 한 인간의 의식이 서 있어,

이 별의 비가 거울에 비치듯이 그의 인식에 비쳐 나왔다는 그것이다.

광물의 층 위에 한 꿈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보니 꿈 하나가 생각난다...

또 한 번은, 모래가 두껍게 쌓인 지방에 불시착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빛 언덕들은 달빛에 그 밝은 쪽 경사면을 향하고 있었고,

어두운쪽 경사면은 빛의 분계선까지 솟아 올라 있었다.

그늘과 달빛의 이 적막한 선대 위에는

작업이 끝난 뒤의 평화와 함정의 침묵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밤하늘의 연못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별들의 연못을 향하여 어느 모래 산 위에 누워 있었으니까.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 심연과 나 사이에 붙잡을 나무 뿌리 하나 없고,

지붕 하나 나뭇가지 하나 없기 때문에 나는 벌써

몸을 의지할 곳을 잃고 잠수부처럼 추락에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지는 않았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뒤꿈치까지 나는 땅에 붙들려 매어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내 몸무게를 대지에 내맡기고 있는 데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인력이 나에게는 사랑처럼 지고의 힘으로 느껴졌다.

나는 대지가 내 허리를 받쳐 주고,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들어올리고, 나를 밤의 공간 속으로 옮겨 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커브를 돌 때 마차에 착 달라붙게 하는 것과 같은

중력으로 내가 이 지구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깨로 떠받쳐 주는 듯한 든든함과 안전감을 맛보았으며

내 등밑에 내가 탄 이 배의 휘어진 갑판을 느꼈다.

나는 내 몸이 실려가고 있다는 의식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에

설령 힘을 내려고 안간힘 하는 물질들의 한숨이나,

항구로 돌아오는 낡은 범선들의 신음소리,

역풍에 시달리는 작은 배들의 날카롭고 긴 외침소리 등이

땅 밑에서 들려 왔다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꺼운 대지 속에서는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량감은 내 어깨에 조화 있게 떠받쳐져 영원히 변함없을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죽은 조역형수의 시체가 추를 달고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듯이 분명히 이 나라에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사막 속에 홀로 떨어져 반도들의 습격에 위협받으면서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알몸으로, 내 생활의 중심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침묵에 의해 격리되어 있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중심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모르인들이 내일이라도 나를 학살하지 않는다면,

여러 날과 주일과 달들을 허비해야 하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다만 숨을 쉰다는 흐뭇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죽어야 할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안에 꿈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꿈들은 샘물처럼 소리도 없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처음에 나는 나를 가득 채워주는 이 흐뭇함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거리에는 목소리도 모습도 없었지만 무언가 존재한다는 느낌,

아주 가까이 있어서 벌써 반쯤은 집착되는 우정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나는 눈을 감고 내 기억의 환희에 나를 내맡겼다.

그것은 어디인지 모르는, 검은 전나무와 보리수와 우거진 넓은 정원이었고,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낡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이 여기서 멀든 가깝든,

또 그 집이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든 없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꿈의 역할을 해주고,

그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나의 하룻밤을 가득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미 모래 벌판에 추락한 불쌍한 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 집 냄새의 추억이 가득 차 있는 그 현관의 서늘함이 가득 차 있는,

그 활기를 띠게 하던 목소리들이 가득 찬 이 집의 어린아이였다.

연못 속의 개구리 울음소리까지도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다.

나 자신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사막의 맛이 어떤 부재들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개구리조차 울지 않는 이 천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침묵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내게는 이런 천 가지 부호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다. 나는 이미 모래와 별들 사이에 머물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이 배경으로부터는 차디찬 메시지밖에는 받지 못했다.

전에 내가 이런 배경으로부터는 얻었다고 믿었던 영원에 대한 동경도,

나는 이제 그 근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의 화려하고 큰 장롱들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 장롱 문이 빠끔히 열려 있어서 눈 같이 흰 시트가 채곡채곡 개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문이 빠끔히 열리며 눈같이 찬 피륙들이 보였다.

늙은 가정부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노상 살펴보고 펼쳐 보고,

다시 개켜 놓고, 세탁한 속옷들을 다시 세어보곤 하면서

이 집의 영구성를 위협하는 어떤 불길함의 징조가 보일 때마다,

 "아이구 하느님, 이걸 어쩌나!" 하고 소리치면서 달려가

램프 불 밑에서 눈이 벌개 가지고 그들 제단 보의 실 올을 고치고,

돛대가 3개인 범선의 돛만큼이나 근 백포를, 자기보다도 큰 사람,

하느님이나 그의 배에라도 쓰려는지 열심히 꿰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을 위해 한 페이지만 더 써야겠다.

내가 첫 번 비행에서 돌아왔을 때, 할멈이여,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났다.

비늘을 한손에 들고, 무릎까지 흰 천 더미 속에 파묻혀,

해마다 주름살이 더하고 백발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손은 우리들의 숙면을 위해서 구김살없는 시트를,

수정 그릇과 빛의 축제 같은 우리들의 만찬을 위해서

솔기 없는 식탁보를 마련하고 있는 당신을.

나는 바느질 방으로 당신을 찾아가 당신 앞에 앉아서

당신을 감격시켜 주기 위해, 세상을 향해 당신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당신을 놀려 주기 위해, 죽을 뻔했던 내 모험들을 들려주곤 했었다.

당신은 말했었지.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어릴 적부터 내가 곧잘 속옷에 구멍을 냈었다고...

"아이구! 이걸 어쩌나! 걸핏하면 무릎을 깼고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붕대를 감아달라고 했었다우. 마치 오늘밤처럼 말야."

"아니야, 아니라니까, 할멈.

지금 내가 돌아온 것은 정원 안쪽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끝에서야.

그래서 나는 고독의 쓰디쓴 냄새를,

뜨거운 모래의 회오리 바람을, 열대지방의 번쩍이는 달을 데리고 온 거야!"

그러자 당신은 말하는 것이었다.
"아암, 사내애들은 뛰고 뼈를 부러뜨리고 하면서

자기가 아주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거라우."

"아니야, 아니라니까, 할멈. 나는 이 정원보다도 훨씬 먼 곳을 보고 왔단 말야!

그 따윈 사막이나, 화강암이나, 처녀림이나,

큰 늪 가운데 갖다 놓으면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대뜸 총부리를 겨눠대는 땅이 있다는 걸 할멈은 알아?

얼어붙은 밤에, 지붕도 없이, 침대도 없이,

이불도 없이 잠을 자는 사막이 있다는 것을 할멈, 알기나 해...."

그러자 당신은 소리쳤었지.
"어휴, 야만인!"

성당의 하녀의 신앙을 움직일 수 없듯이 나는 이 할멈의 신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눈멀게 하고, 귀머거리로 만든 그의 미천한 운명을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이 밤, 사하라의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벌거숭이로 내팽개쳐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속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자기를 띠고 있건만, 이 중력이 나를 땅에 잡아 매어 놓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력이 나를 나 자신에게로 데려온다.

나는 그 많은 것들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내 중력을 느낀다.

나의 꿈은 이 모래언덕보다도,

저 달보다도, 여기 있는 모든 존재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아아! 집의 소중함은 그것이 우리들을 감싸 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또 그 벽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우리들 마음 속에 그리도 많은 포근함을 축적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이 샘물처럼 꿈들이 태어나는 이 안보이는 덩어리를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사하라, 나의 사하라여!

너는 이제 털실을 잣는 한 할멈 덕분에 아주 황홀해져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