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3.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의 쉼터 2011. 5. 18. 12:12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 

 
"손재주가 있다면서?"하고 나는 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옛날부터 프라(플라스틱)모델이랑 라디오 조립을 좋아했습니다,
온 집안의 망가진 것을 수리하며 돌아다녔지요. 오디오의 어디가 안됩니까?"
"소리가 나오질 않아."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앰프의 스위치를 넣고 레코드를 걸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맹수 같은 모양새로 오디오 앞에 앉아서 하나하나 스위치를 점검해 보았다.
"앰프 계통이군요, 그것도 내부가 잘못된 게 아니고."
"어떻게 알지?"
"귀납법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귀납법',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형 프리 앰프와 파워 앰프를 끄집어내 놓고
전선을 전부 뜯어, 하나하나 정성들여 점검했다.
그 동안에 나는 냉장고에서 버드와이저 캔을 꺼내 혼자서 마셨다.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겠지요."하고
그는 샤프 펜슬 끝으로 플러그를 건드려 보면서 말했다.
"글쎄, 옛날부터 줄창 마셨으니 잘 모르겠어. 비교할 길이 없거든."

"저도 조금 연습하고 있습니다."
"술 마시는 연습을?"
"예, 그렇습니다. 이상합니까?"
"이상하긴, 우선 백포도주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
커다란 잔에다 백포도주와 얼음을 넣고 거기다 페리에를 타고
레몬을 짜 넣어 마시는 거지. 난 쥬스대신 마시지만."

"시험해 보겠습니다. 옳지, 역시 이거였군,"
"뭐가?"
"프리와 파워 사이의 코넥팅 코드지요,
좌우 모두 핀 플러그가 뿌리부터 빠져 버렸군요.
이 플러그는 구조적으로 상하의 흔들림에 약합니다.
그런데 엉성하게 만들었네요.
이 앰프 요즘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 뒤를 청소할 때 움직였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바로 그거야."하고 그가 말했다.
"그거 오빠 회사 제품이죠?
그렇게 약한 플러그를 붙여 놓는 자체가 잘못이지."하고 여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만든 건 아니라구, 나는 광고를 만들고 있을 뿐이야."
하고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땜질 인두가 있으면 곧 되겠는데요, 있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나는 '없다.'고 했다.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제가 한달음에 사오겠습니다.
땜질 인두는 한 개쯤 있으면 편리하니까요."
"그렇겠지, 그런데 철물점이 어디 있더라?"하고 나는 풀이 죽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 그 앞을 지나서 왔으니까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나는 또 베란다로 얼굴을 내밀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앉아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죠?"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마음이 누그러지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핀 플러그의 수리가 무사히 끝난 것은 5시 전이었다.
그가 가벼운 보컬을 듣고 싶다기에 여동생은 훌리오 이글레시어스의 레코드를 걸었다.
훌리오 이글레시어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맙소사 어떻게 그 따위 두더지 똥 같은 것이 집에 있었지?
"형님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십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한다구."하고 나는 심통스럽게 말했다.
"그밖에는 블루스 스프링스턴이라든가 제프 벡이라든가 도어즈라든가, 그런거지."
"다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이런 느낌의 음악입니까."
"대개 비슷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금 그가 속해 있는 프로젝트 팀이 개발중인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 이야기를 했다.
철도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되돌리는 운전을 하기 위한
다이어그램을 순간적으로 계산하는 시스템인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까, 확실히 편리하긴 하겠지만,
그 원리는 핀란드어의 동사 변화만큼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적당히 받아넘기면서 줄창 여자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휴일에는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시고,
어디서 식사를 하고, 어느 호텔에 들어갈까, 뭐 그런 것이었다.

나는 필시 나면서부터 그런 것이 구미에 맞았다.
프라 모델을 만들고 전차의 다이어그램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편에 있듯이
나는 이런저런 여자와 술을 마시고 그녀들과 자는 것이 좋았다.
그런 것은 꼭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숙명과도 같은 것일거다.

내가 네 병째 맥주를 거의 다 마셨을 무렵에 저녁 준비가 되었다.
메뉴는 스모크 서본과 버시 소워즈, 스테이크, 샐러드와 프라이드 포테이토였다.
평소나 다름없이 여동생이 만든 요리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샤브리를 따서 혼자 마셨다.

"형님은 어떻게 전자 제품 회사에 취직을 하셨는지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기에 대해 별로 취미도 없는 것 같은데."
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텐덜로인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면서 물었다.

"오빠는 대개 유익하고 사회적인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자리는 어디라도 관계없는 거죠.
공교롭게 거기 연줄이 닿아서 들어갔을 뿐이에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맞았어."하고 나는 힘차게 동의했다.
"머리 속엔 노는 일밖에 없어요.
뭔가 진지하게 탐구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제로라고요."
"여름 날의 베짱이."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을 삐딱하게 보고 즐기고 있다구요."
"그건 아닌데. 남의 일과 내 일은 별개의 문제야.
나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정해진 열량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구.
남의 일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 삐딱하게 보지도 않고,
확실히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을 훼방놓거나 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별 볼일 없다니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필시 가정교육이 잘 되어 있다.

"고맙네."하고 말하며 나는 포도주 잔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약혼을 축하하네, 혼자만 마셔서 안됐지만."
"식은 10월에 올릴까 합니다. 다람쥐도 곰도 부르지 못하지만,"
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그거 마음에 두지 말게나."하고 나는 말했다.
어이쿠, 이 녀석 농담도 하는군.

"그래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지? 할인 요금으로 갈 수 있을 테지?"
"하와이"하고 여동생이 간결하게 말했다.

 

그 다음 우리는 비행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안데스 산중의 비행기 조난 사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을 뿐이라서 그 이야기를 했다.

"사람 고기를 먹을 때에는 비행기의 듀랄루민 파편 위에다 고기를 올려 좋고,
태양 볕에 익혀서 먹는대."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식사 중에 어떻게 그따위 얘기를 할 수 있죠?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어요?
다른 여자아이를 꼬일 때도 식사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나요?"하고
여동생이 손을 멈추고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형님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손님을 초대한 꼴과 같았다.

"기회가 없어서."하고 나는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어린 여동생 시중도 들어주어야 했고, 오랜 전쟁도 있었고."
"전쟁, 어떤 전쟁이죠?"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쓸데없는 농담이에요."하고 여동생은 드레싱을 뿌리면서 말했다.
"그래, 쓸데없는 농담이야.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구.
나는 성격이 편협한데다 양말도 제대로 빨아 신지 않았으니
함께 살아도 좋다는 생각을 해주는 멋진 여자아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네.
자네하고 달라서 말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양말이 어떻다구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그것도 농담이죠. 양말정도는 내가 매일 빨아 준다구요."
하고 여동생이 지친 목소리로 설명했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1초 반동안 웃었다.
이 다음에는 3초쯤 웃겨 주자고 나는 결심했다.

"하지만 동생과는 줄창 함께 사셨지 않습니까?"하고 그는 여동생 쪽을 가리켰다.
"그거야 여동생이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오빠가 멋대로 놀아도 내가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짜 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진짜 어른들의 생활이란 말이지,
진짜 생활이란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죠.
하긴 오빠와 함께 지낸 5년간의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자유롭고, 속 편하고. 하지만 최근에 와서 이런 것은 진짜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생활을 실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빠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고 있고, 진지하게 말하려 해도 이죽거릴 뿐이고."

"소극적일 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오만한 거예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소극적이고 오만하고. 소극적인 것과 오만의 되돌리기 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지."
하며 나는 포도주를 따르면서 와타나베 노보루를 향해 설명했다.

"알 것 같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말하자면 동생과 제가 결혼하면 그 말인데-
역시 형님도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친구 중에 착한 아이가 있는데,
소개해 줄까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아직 위험 천만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자리를 거실 쪽으로 옮겨 커피를 마셨다.
여동생은 이번엔 윌리 넬슨의 레코드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훌리오 이글레시어스보다는 조금 괜찮았다.

"저도 사실은 형님처럼 서른 가까이 까지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여동생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와타나베 노보루는 나에게 털어놓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자 왠지 결혼하고 싶어졌습니다."
"괜찮은 애지. 다소 고집이 있고 변비 증세가 있지만,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결혼한다는 거 어쩐지 두려워지는군요."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 생각하면 뭐 두려울 게 있겠나.
나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그만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나서 나는 여동생 곁으로 다가가 잠시 근처를 산책하고 오겠다고 했다.

"10시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테니 둘이서 실컷 즐기라구, 시트도 갈았겠다."
"이상한 쪽에만 정신을 파는군요."

여동생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내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 곁에 가서,
이웃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오겠는데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무척 즐거웠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놀러 오십시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고맙네."하고 나는 상상력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말했다.
"차는 가지고 가지 말아요. 오늘은 많이 마셨으니까."
나가는데 여동생이 말했다.

"걸어갈게."하고 나는 말했다.

근처에 있는 바에 들어간 것은 8시 조금 전이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서 IW 하퍼의 온 더 록을 마셨다.
카운터 속의 텔레비전에서는 거인과 야쿠르트의 야구 중계를 방영하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고 그 대신 신디 로퍼의 레코드가 걸려 있었다.
피처는 니시모토하고 오바나인데, 득점은 3대2로 야쿠르트가 이기고 있었다.
무음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야구 중계를 바라보면서 온 더 록을 석 잔 마셨다.
9시가 되자 3대3의 동점인 채 7회 후반에서 야구 중계가 끝났다.
그러자 텔레비전도 꺼졌다.

내 자리 하나 건너 옆자리에 가끔씩 여기서 만나는
스무 살 안팎의 여자아이가 앉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중계가 끝나자 나는 그녀와 야구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기는 거인의 팬인데, 어느 팀을 좋아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무 팀이면 어떠냐고 나는 대답했다.
단지 시합 자체를 보는 것이 좋다고.
"그런 게 무슨 재미일까?
그런 식으로 야구를 보면 열중할 수 없잖아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열중 안해도 좋아. 어차피 남들이 하고 있는 일인걸."

10시가 되자 나와 그녀는 그 바를 나와서, 좀 더 편안한 의자가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거기서 또 위스키를 마시고, 그녀는 글라스 호퍼를 마셨다.
그녀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나도 아닌게 아니라 취해 있었다.
11시가 되자 나는 그 여자를 바래다 줄 겸
그녀의 아파트로 가서 당연한 일처럼 섹스를 했다.
방석과 차를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을 꺼요."하고 그녀가 말하기에 나는 불을 껐다.
창으로는 커다란 니콘 광고탑이 보였고,
옆집으로부터는 텔레비전의 프로 야구 중계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어두운데다 상당히 취해 있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것은 섹스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페니스를 움직여 정액을 방출하는 것뿐이다.

적당히 간략화한 한바탕의 행위가 끝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잠이 들어서,
나는 제대로 정액도 닦지 못한 채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옷과 뒤섞여 있는
나의 폴로셔츠와 바지와 팬티를 찾아내는 것은 적잖은 고생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취기가 한밤중의 화물열차처럼 급격하게 나의 몸 속을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지독한 기분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사나이처럼 몸이 삐걱거렸다.
술을 깨려고 자동 판매기의 쥬스를 한 병 마시자마자 나는 위 속의 것을 전부 토해냈다.
스테이크랑 스모크 서본이랑 레터스랑 토마토의 잔해들이었다.

아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술을 마시고 토하다니, 도대체 몇 년 만일까?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더욱 나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서 나는 불쑥 와타나베 노보루와 그가 사온 땜질 인두를 생각했다.

"땜질 인두 하나쯤 있으면 편리하니까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말했다.

건전한 생각이지, 하고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자네 덕분에 드디어 우리 집에도 땜질 인두가 생겼군.
하지만 그 땜질 인두 탓으로 거기는 나의 집이 아닌 양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내 성격이 편협한 탓이겠지.

내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물론 현관 옆에 오토바이의 모습을 없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4층까지 올라가 자물쇠를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개수대 위에 조그만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 나머지는 캄캄했다.
여동생은 지쳐서 먼저 자버린 모양이다. 그 기분 알 만하다.

나는 유리잔에다 오렌지 쥬스를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
그리고 나서 샤워실로 들어가 비누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땀을 씻어내고 정성스레 이를 닦았다.
샤워실에서 나와 세면장의 거울을 보자
스스로도 오싹하리만큼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마지막 전차의 시트에서 볼 수 있는 추한 주정뱅이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
피부는 거치고 눈은 움푹 꺼지고 머리에는 윤기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세면장의 전깃불을 끄고
목욕 타월을 한 장 허리에 두른 모양새로 주방으로 돌아와 수돗물을 마셨다.
내일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되면 또 다음날 생각하자.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간다.

"많이 늦었네요."하고 어둑한 속에서 여동생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 마시고 있었어?"
"오빤 너무 과해요."
"알고 있어."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어 손에 들고, 여동생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이따금 맥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바람이 베란다 화분의 잎을 흔들고, 그 저편에는 멍청하게 반달이 보였다.

"말해 두지만 하지 않았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뭘?"
"뭐든지, 마음에 걸려서 할 수 없었다구요."
"헤에."

나는 반달이 떠 있는 밤에는 어쩐지 말이 없어진다.

"뭐가 걸렸느냐고 묻지 않아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뭐가 걸렸는데?"하고 나는 물었다.
"이 방이. 이 방이 마음에 걸려서 여기서는 할 수 없어요, 나는."
"흐응."
"아니, 어쩐 일이에요? 몸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피곤해, 나라고 피곤하지 않을까?"

여동생은 잠자코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등받이에다 목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오빠, 우리 때문에 피곤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아니야."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말하기에 지쳤다, 그거에요?"하고 여동생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동생 쪽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어, 오늘 내가 오빠한테 좀 심한 말을 했잖아요?
이를테면 오빠 자신에 대해서라든가, 오빠와의 생활에 대해서라든가..."
"아니야."
"정말?"
"너는 요즘 줄곧 옳은 말만 했지. 그러니 신경 쓸 거 없다구.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지?"
"그가 돌아가고 나서 줄고 여기 앉아서 오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좀 지나친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고, 오디오의 스위치를 넣어
작은 소리로 리치 바이라크 트리오의 레코드를 걸었다.
한밤중에 취해서 돌아왔을 때 늘 듣는 레코드였다.

"좀 혼란스러워. 생활의 변화 따위에 대해서 말이야.
기압의 변화와 마찬가지야.
나도 내 나름대로 얼마만큼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야."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빠한테 대들어서요?"
"다들 누군가에게 대들고 있어.
하지만 만약 네가 그 중에서 나를 뽑아 대들고 있다면,
그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다구."
"때때로 어쩐지 굉장히 무서워요. 앞날의 일들이."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을 생각하도록 해. 그럼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면 돼."
하고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될지 모르겠네요."
"잘 안되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하면 돼."

여동생은 깔깔 웃었다.

"오빠는 옛날이나 다름없이 묘한 사람이야."하고 동생이 말했다.
"이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하고 나는 맥주의 풀링을 따면서 말했다.
"좋아요."
"그말고 앞에 몇 남자하고 잤지?"

동생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손가락을 두 개 내보이며 말했다.

"두 사람."
"한 사람은 동갑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연상의 남자였지?"
"그걸 어떻게 알죠?"
"상식이지."
하고 말하며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라고 무작정 놀고 있는 건 아니라구, 그 정도는 알아.
"표준이라는 건가요?"
"건전하다, 그거지."
"오빠는 몇 여자하고 잤어요?"
"스물여섯 명. 요전에 세어봤지. 생각나는 것만 스물 여섯명.
생각나지 않는 것이 열 명쯤 있을지 몰라. 일기에 적어 두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여자하고 자요?"
"몰라, 어디선가 끝을 맺어야 하겠는데, 나 스스로도 계기를 잡지 못하는 거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 다음에도 말없이 나름대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멀리서 오토바이의 배기음이 들렸는데, 그것이 와타나베 노보루일 까닭은 없었다.
이미 새벽 1시였다.

"있잖아요,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와타나베 노보루?"
"그래요."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 구미에 맞지 않고 복장에 대한 취향도 약간 동떨어진 건 있지만"
하고 조금 생각하고 나서 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하기야 한 집안에 한 사람쯤 그런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오빠가 좋아요.
하지만 세상 사람이 다 오빠 같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돼버리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나머지 맥주를 마시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시트는 새것이라 청결했고 주름 하나 없었다.
나는 그 위에 몸을 눕히고, 커튼 사이로 달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눈을 감자 졸음은 어두운 망처럼 소리 없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나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