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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3.

오늘의 쉼터 2011. 5. 15. 09:33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3.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한에서는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충실해야겠지요.”
그녀는 엄숙한 어조로 내 말을 보충해주었다.
비애가,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 속에
그대로 죽고 싶은 열렬한 소원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물이---
얼마나 오랜 동안 나는 울지 않았던가! ---
억누를 길 없이 흘러나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성급히 얼굴을 그녀에게서 돌려 창가로 걸어가서는
눈물에 흐려져 보이지 않는 눈으로 화분의 꽃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워진 포도주잔처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애군요!
물론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산이 충실한 대로 있다면 당신이 바라듯이
언젠가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는 거예요.”

나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한 뒤 다시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겐 두서너 사람의 친구가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두서넛밖에 안 되는 극소수지만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이랍니다.
그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르지요.
당신도 원한다면 나를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녀는 나를 문가로 데리고 가서 문을 열고 정원을 가리켜 보였다.
“바깥으로 나가 보면 막스가 있을 거예요.”
높다란 나무 아래에서 나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또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나뭇가지에서 방울져 떨어져내렸다.
나는 천천히 강기슭을 따라 멀리까지 뻗어 있는 정원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데미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웃옷을 벗은 채 정원의 정자 안에 매달아놓은
모래 주머니 앞에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나는 발을 멈추었다.
데미안은 아주 멋있어 보였다.
널따란 가슴, 야무지고 남성적인 머리,
긴장된 근육으로 치켜든 두 팔은 강하고 단단해 보였고
근육의 움직임이 파문이 이는 샘물처럼
허리와 어깨와 팔의 관절을 휘감고 있었다.

”데미안!” 나는 그를 불렀다.
“거기에서 뭘 하고 있나?”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연습을 하고 있다네.
난 그 조그만 일본인하고 씨름을 하기로 했거든.
그 사람은 고양이처럼 날쌔고 빈틈이 없단 말이야.
그러나 나를 그렇게 맘대로 다루지는 못할 거야.
그에게 빚진 아주 사소한 굴욕적인 일이 있었다네.”
그는 속옷과 웃옷을 걸쳤다.
”벌써 우리 어머니를 만나뵈었나?”
”그래 데미안, 자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분이시더군!
에바 부인!
그 이름은 정말 완전히 그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야.
모든 존재의 어머니 같단 말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그 이름을 안단 말인가?
이봐, 그렇다면 자넨 자랑할 만하네.
어머니가 처음 만나서 이름을 가르쳐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이날부터 나는 그 집에 아들이나 형제처럼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방문하기도 했다.
현관을 들어서며 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면,
아니 멀리서 정원의 키큰 나무들이 나타나기만 해도
나는 흡족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는데 현실 속에는
거리와 집, 사람과 시설, 도서관과 강의실 들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 집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전설과 꿈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각과 대화에서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이었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나는 단지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결단코 행복한 사람들의 식탁이나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축제에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더라도 부러워하거나 향수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나는 차츰 ‘표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한 냉정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표지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상스럽다든가,
혹은 미쳤다든가, 위험스럽다고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닫고 있는 자들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갈수록 완전해지는 깨달음을 위해 경주되는 것이지만
그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에의 탐구는
그들의 의견이나 그들의 이상과 의무,
그들의 생활과 행복의 기준을 군중의 그것에
점점 더 밀착시키려고 애쓰는 데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고, 그곳에도 힘과 위대성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우리들 표지를 지닌 자들은 새로운 것,
고립된 것, 미래의 것을 지향하는 자연의 의지를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들은 다만 고집의 의지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인류란---
유지되고 보호받아야 할 완성된 그 무엇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우리 모두가 그것을 향한 도중에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법칙이 적혀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그런 아득한 미래인 것이었다.

에바 부인과 막스와 나를 제외하고도
그밖의 여러부류의 탐구자들이 가깝거나 멀거나간에
우리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특이한 길을 걸어 가며
개별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색다른 의견과 의무에 집착해 있었는데
점성술가와 카발라 학파나 톨스토이의 신봉자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섬세하고 수줍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과
새로운 교파의 신봉자들과 인도적인 수도의 구도자들과
채식주의자들과 그밖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비밀스런 삶의 꿈을 아껴주는
경의를 갖고 있다는 것 외의 어떤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도 과거 속에서 신과 새로운 구원의 영상에 대한
인류의 탐구의 흔적을 찾아내고 때로는
피스토리우스의 그것을 연상시켜주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훨씬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책들을 가져와서 고대 언어의 원서를 해석해주었고,
고대의 상징물이나 의식의 도해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이 소유했던 이상이란
결국 모두가 무의식적인 영혼의 꿈과 손으로 더듬어가면서
그 속에서 자기의 미래의 가능성의 예감을 추구하고자 한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대 세계의 그 이상스러운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신들의 무리에서부터
기독교적인 개종의 여명에 이르기까지를 섭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교가 고독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고해에서
민족과 민족으로 옮겨간 변천의 궤적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이 수집한 모든 자료를 통해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비평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고,
방대한 노력으로 강력하고도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극도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현대 유럽에 대한 비평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은 온 세계를 얻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여기에도 물론 약간의 희망과 구제론의 신자와 고해자가 있었다.
유럽을 개종시키려는 불교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톨스토이 신봉자와 그밖의 여러 종파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이들 교의들의 어느 것도 상징 이외의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우리 표지를 지닌 자들에겐 미래의 형성에 대한
아무런 염려도 책임지워져 있진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모든 교파와 모든 구제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려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들은 다만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온갖 일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무로서 또한 운명으로서 느낄 뿐이었다.

새로운 탄생과 현대의 붕괴가 가까이 와 있었고
그것을 이미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입 밖에 내든 안내든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여러 차례 나에게 말했었다.

“무엇이 올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무한히 오랫동안 쇠사슬에 매어 있는 짐승과 같아.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로 행할 행동은
필경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진 못할 거야.
그렇지만 이제까지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상 기만당하기만 하고
마비되어왔던 영혼의 진정한 고난이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게만 된다면
우리들이 지나온 길이나 돌아온 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야.
그러면 우리들의 날이 오는 거야.
세상 사람들의 지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우리는새로운 법률 같은 것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게 되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의지자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가서 그곳에 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서 필요하게 될 거야.

여보게, 모든 사람들은 만약 그들의 이상이 위협을 받게 된다면
아마 믿을 수 없을 만한 짓을 능히 해낼 용의가 있을 걸세.
그러나 새로운 이상이, 새롭고 아마도 위험스러우며
흉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성장의 움직임이 문을 두드릴 때
거기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그때에 거기에 있어서 함께 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인 거야.
그것을 위해 우리는 표지를 달고 있는 거니까---
공포와 증오를 일으켜 그 당시의 인류를 좁다란 전원에서
위험스러운 넓은 세계로 몰아넣기 위해
카인이 표지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네.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그들이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유능하고 활동적이었던 걸세.
모세와 부처가 그러했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그러했지.
그 사람이 어떤 파동에 휩쓸리는가,
어떤 극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선택 범위 내에 있는 일은 아닌 걸세.
만약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었다면
그는 영리한 지배자는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운명의 인물이 될 수는 없었을 걸세.

나폴레옹도, 케사르도, 로욜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랬던 거야!
사람들은 그것을 언제나 생물학적이며 진화론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네!
지구의 표면에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서 수서동물을 육지로,
육서동물을 물 속으로 밀어넣었을 때,
그런 새롭고도 전대미문의 일을 수행하고 새로운 적응에 의하여
자기들의 종족을 구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던 표본들이 있었다네.
그것이 그 이전에 자기의 종족 가운데서 보수적이고
보존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엇는지, 아니면 오히려
기이한 별종이며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과정 속에서 자기의 종족을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우린 그 점을 잘 알 수가 있다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하려는 거야!”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룰 때 에바 부인은 때때로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 이러한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견해를 펼치는 우리들 각자의
신뢰와 이해심에 가득 찬 경청자이자 반향이었는데
그러한 생각들이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비롯되어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가까이에 앉아 있다거나 때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성숙함과 영혼의 분위기에
한몫 끼는 일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나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나 혼돈이나 혹은 혁신이 일어나면
그녀는 곧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내가 잠잘 때 꾸는 꿈조차 나에게는 그녀로부터의 영감에 의한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자주 그녀에게 내 꿈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꿈은 그녀에겐 쉽게 이해가 가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그녀가 분명한 느낌으로 파악해낼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