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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2.

오늘의 쉼터 2011. 5. 15. 09:30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2.  


우리는 꽤 늦게서야 시냇가의 정원 앞에서 멈춰섰다.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네.” 데미안이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한번 방문해주게.
우리는 자네를 몹시 고대하고 있으니.”

기쁜 심정으로 나는 냉랭해진 밤공기 속에서 먼 귀로를 재촉했다.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주 즐거움을 나타내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나의 고독한 생활 사이에서 격리감과
때로는 조소에 가까운 대립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오늘 같은 침착성과 내밀한 힘으로
그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사소한 관계일 뿐인지를,
내게 있어서 그 세계는 이미 얼마나 멀리 사라져버렸는지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나는 내 고향의 관리들, 늙고 신분높은 신사들을 상기했다.
그들은 마치 행복한 낙원의 추억처럼
음주로 허송한 그들의 대학 시절에 대한 추억에 집착했고,
마치 시인이나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대학 시절의 이제는 사라져버린 ‘자유’를 예배하곤 했었다.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행여 자기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게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도록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기의 과거 시절 어느 곳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삼 년간 폭음을 하고 환성이나 지르다가 기어들어와서는
관청의 성실한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건 부패했다. 우리들의 나라는 부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학생들의 이런 바보짓마저 그밖의 수백 가지의 일보다는
좀더 영리하고 좀더 질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긴 했다.

멀리 떨어진 숙소에 도달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 모든 생각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내 온 정신은 오늘이 나에게 해준 한 가지 약속에
목을 늘이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술을 퍼마시거나 얼굴에 문신을 하거나
이 세상이 모조리 썩어 그 몰락을 기다리든 말든간에---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단 한 가지,
나의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마중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곤하게 잤다.
새로운 날이 나에게는 엄숙한 축제일로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유년 시절의 성탄절 축제 이래 경험하지 못한 그러한 날이었다.
나는 내심 불안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날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고,
주위의 세계가 변화하고, 기대하고 있으며,
연관에 차 있고, 엄숙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느낄 수 있었다.

소슬히 내리는 가을비조차 아름답고 고요하고
기꺼운 음악에 가득 차 있는 축제일의 분위기를 더하게 했다.
생전 처음으로 외부의 세계가
나의 내부의 세계와 순수하게 일치된 음향을 울리고 있었다. ---
영혼의 축제일이 시작될 것이었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어떤 집도 어떤 진열장도 골목의 어떤 얼굴도 나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은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있을 뿐이었지만
옛날의 눈에 익은 공허한 모습이 아니라
기대에 차 있는 자연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으며
운명을 맞아들일 준비를 경건하게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대축일의 아침에 나는 그런 세계를 보곤 했었다.
세계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의 내부 속에 들어가서 사는 일이나
외부의 것에 대한 의미는 내게서 멀어져버렸다.
눈부신 빛의 상실은 유년 시절의 상실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영혼의 자유와
성인이 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이 사랑스러운 빛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체념하는 데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은 단지
파묻히고 어둠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과
자유롭게 된 사람이나 유년 시절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으로서도
이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어린아이의 관찰의 내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황홀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막스 데미안과 작별을 고했던
교외의 정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높다랗고 비에 젖어 잿빛으로 보이는 나무들 뒤에 가려진 채
밝고 살기에 편하게 생긴 조그마한 집이 서 있엇다.
커다란 유리벽 뒤에는 높다란 꽃이 핀 관목들이 있었고
빛나는 유리벽 뒤에는 높다란 꽃이 핀 관목들이 있었고
빛나는 유리창 뒤에는
그림과 책이 줄지어 있는 컴컴한 방의 벽이 있었다.
현관은 곧장 난방이 잘된 작은 거실과 통해져 있었는데
흰 앞치마에 까만 옷차림의 말없는 늙은 가정부가
나를 안내해주었고 내 외투를 받아 걸었다.

그 여자는 나를 거실 안에 혼자 남겨두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내가 곧장 내 꿈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문 위쪽의 까만 나무 벽 위에 걸려 있는
검정 테의 액자 속에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려고 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나의 새였다.
나는 몹시 감동이 되어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 있었다. ---
마치 이 순간 내가 이제껏 행하고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해답과 실현으로써 내게 돌아오는 것처럼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번갯불처럼 빠른 속도로 수많은 형상이
나의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현관 문의 아치 위에 돌로 된 문장이 달려 있었던 고향의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두려움에 떨며 크로머의 속박에 얽혀 있던 어린 소년으로서의 나 자신,
조용한 기숙사의 한구석에서 동경의 새를 그리며
영혼이 제 스스로의 줄의 그물에 뒤얽혀 있던 청년으로서의 나 자신, ---
이 모든 것이, 이 순간에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나의 내부에서 다시 반향되고 시인되고 보답되고 승인되었다.

젖어드는 눈으로 나는 나의 그림을 응시하며 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눈길을 내리뜨렸다.
새의 그림 아래 열려진 문 앞에 까만 옷을 입은
키가 큰 부인이 서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아들처럼 시간과 나이를 초월한,
활기와 의지에 넘친 얼굴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부인이
나를 향해 정답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길은 충족이었고 그 여자의 인사는 귀향을 뜻하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두 손을 뻗쳤다.
그녀는 굳건하고도 따스한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당신은 싱클레어지요.
나는 당장에 당신을 알아보겠어요. 잘 오셨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낮고 따스했고
나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그 음성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과
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을 들여다보고,
신선하고 성숙한 입과 표지를 달고 있는 넓고 기품 있는 이마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저는 한평생 길 위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녀는 아주 다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친밀한 두 길이 함께 뻗어 있을 때는
온 세계가 잠시 동안은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녀는 이곳을 찾아오는 동안 내가 느겼던 것을 말하였다.
음성이나 이야기 하는 태도가 아들과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전혀 딴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한결 성숙하게 느껴졌고
더 따스했으며 한결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옛날, 데미안이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도 전혀 다큰 아들이 있는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머리칼 위에 감도는 숨결은 젊고 감미로왔으며
황금빛의 살결은 생기있고 주름살이라고는 없었으며
그 입은 마치 꽃처럼 피어 있었다.
내가 꿈속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위풍있는 모습으로
그 여자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사랑의 행복이었고
그녀의 따스한 시선은 벅찬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나의 숙명이 내게 모습을 나타낸 그 새로운 영상이었고,
이젠 더 이상 엄격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았으며
너무나 성숙했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나는 새삼스레 결심을 할 필요도 없었고 아무런 기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고
그곳으로부터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가까이에,
행복의 나뭇가지에 그림자처럼 어려 있었고
온갖 열락의 정원에 의해 신선해진 약속의 나라를 향해 길게 뻗어져
멀고도 장한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길의 높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나의 앞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간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이 부인을 알고 그녀의 음성을 음미하며
그녀 가까이에서 숨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녀가 내게 있어서 어머니나 애인이나 여신이 된다 하더라도---
그녀가 단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나의 길이 다만 그녀의 길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나의 새매의 그림을 가리켰다.

”당신의 이 그림을 보내왔을 때처럼 막스를 기쁘게 한 적은 없었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내게도 물론 그랬지요.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 그림이 전해지자
우리는 당신이 우리들에게로 오고 있는 중임을 아았지요.
당신이 아직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말이에요,
싱클레어! 어느 날 데미안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마에 표지가 있는 애가 있어요.
그는 틀림없이 내 친구가 될 거예요 라고 말이에요.
그 애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쉽지가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있었답니다.
언젠가 한 번 당신이 휴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막스와 만난 적이 있었지요.
당신이 아마 열 여섯 살쯤 되었을 때일 거예요.
막스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더군요.---“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오, 맙소사. 그때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주었다구요?
그 당시는 내가 제일 비참했던 시절이었어요.”
”알아요. 막스는 내게 당신이 지금
최대의 곤란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또다시 공동체 속으로 도망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술집의 단골 손님이 되어 있기까지 하더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러나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의 표지가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을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요---그렇지 않았었나요?”

”네, 그랬었어요. 조금도 틀리지 않아요.
그 후 저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마침내는 지도자가 한 명 나타나 저를 도와주었지요.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저는 저의 소년 시절에
막스에게 왜 그렇게 결부되어 있어야 했던가,
왜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지요.
부인---어머니, 저는 그 당시
때때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까지 생각했었답니다.
누구에게나 그 길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그녀는 손으로 내 머리를
공기를 쓰다듬는 것처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태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요.
새도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애써야 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돌이켜 생각해보고 한 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었던가?
그러나 역시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었던가요?”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려웠어요.” 나는 꿈을 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꿈이 내게로 오기까지는 정말 어려웠어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는 거예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는 거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매우 놀랐다.
그것은 벌써 일종의 경고였을까?
벌써 그것은 방어였던가?
그러나 어떻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미 그녀에 의해 인도를 받고
목적 같은 건 묻지 않으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군요.” 나는 말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의 꿈이 계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저는 다만 그꿈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새의 그림 아래에서 저의 운명은 마치 어머니처럼,
어쩌면 애인처럼 저를 맞이해주었어요.
저는 그 운명에 속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