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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1.

오늘의 쉼터 2011. 5. 15. 09:27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1.  


휴가중에 나는 몇 해 전 데미안이 그의 어머니와 살고 있었던 집에 가보았다.
한 늙은 부인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부인에게 말을 건네고,
이야기 중에 이 집이 지금은 그 부인의 소유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데미안의 가족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 부인은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자
그 부인은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가죽 표지를 한 앨범 한 권을 찾아와
데미안의 어머니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거의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 조그마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심장의 고동이 정지한 듯한 충격을 느꼈댜.
-그것은 내 꿈의 모습이었다!

내 꿈의 얼굴이 바로 그 여자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자기 아들을 닮은, 모성적인 표정과 엄격함과 깊은 정열을 지닌
바로 그 키가 크고 거의 남자와 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의 모습,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친근하고도 접근하기 힘든,
데몬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운명인 동시에 애인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바로 이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의 꿈의 모습이 이 지상에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자 격렬한 기적을 본 것 같은 충격이 나를 스쳐갔다!

저런 얼굴의 여자가,
내 운명의 표정을 지닌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더욱이 그 여자는 데미안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곧 여행을 떠났다.
이상야릇한 여행이었다!
나는 마음내키는 대로 끊임없이
이 여자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여자를 생각나게 하고 이 여자를 연상하게 만들고 이 여자를 닮은,
마치 뒤엉킨 꿈속에서처럼
나를 낯선 도시의 골목길로,정거장으로,
열차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만을 만나는 그런 날이 있었다.

또한 나의 찾아 헤맴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날도 있었다.
그럴때면 나는 어느 공원이나, 호텔의 정원이나,
역의 대합실에서 망연하게 앉아 있곤 했으며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나의 내부에서 소생시키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도 부끄럽고 무상한 짓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 번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다만 낯선 곳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
십여 분쯤 눈을 붙일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취리히에선가는 한 여자가 나를 따라온 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예뻤지만 약간은 철면피한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여자가 마치 공기인 것처럼 아무런 느낌 없이 걸어갔다.

다른 여자에게 한 시간 동안이라도 관심을 보내느니
차라리 당장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의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앞당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초조감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한 번은 어느 정거장에서, 인스부르크라고 생각되는데,
막 떠나는 기차의 창가에서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며칠 동안을 비참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그 모습이 다시 꿈속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추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는
창피스럽고 처량한 심정이 되어 곧장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삼 주일 후 나는 H대학에 입학했다.
만사가 다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수강한 철학사에 대한 강의는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허무하고 기계적이었다.
모든 것은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이 일정했고,
서로들 똑같이 행동하고 소년티를 못벗은 얼굴에 나타나는
과장된 쾌활성은 너무나 암담하게 공허하여 구입한 완제품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왔다.
온종일을 나를 위해서 바치면서 교외의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안락하게 지냈다.
내 책상 위에는 두서너 권의 니체가 놓여 있었다.
그와 더불어 살고,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끼며
그를 그토록 쉴새없이 몰아댄 숙명을 느끼며 그와 더불어 괴로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차없이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나는 가을 바람에 나부끼듯 시내를 건들거리며 다녔다.
어느 음식점에선가 대학생들이 단체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는 담배연기가 자욱이 넘쳐나오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세찬 파도처럼 흘러넘쳤지만
조금도 흥겹지 않았고 생기가 없이 단조로왔다.
나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두 곳의 학생 주점에서는 면밀하게 훈련된 청춘의 쾌활성이
밤의 대기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집단이 있고, 어디를 가도 모임이 있고,
어디를 가도 운명의 발산과 군중 속으로의 도피가 있었다!

나의 뒤에서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의 한 토막을 들을 수 있었다.
”흑인 마을의 청년들의 집과 똑같지 않소?” 한 사람이 물었다.
“모든 것이 합치되는군요. 문신까지도 아직 유행이랍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젊은 유럽의 모습입니다.”

그 음성이 내게는 이상스럽게도 경고하는 것처럼---
귀에 익숙하게 울려왔다.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한 명은 자그마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일본인이었는데
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다소 검은 얼굴이 미소를 띠고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다른 남자가 다시 말을 했다.
”그런데 당신네 일본에서도 역시 더 나을 것이라곤 없겠지요.
군중에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드문 법이니까요.
여기에도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즐거운 놀라움으로 내게 와 닿았다.
나는 그 이야기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데미안이었다.
바람이 부는 밤에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와 일본인을 뒤따라 가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데미안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즐겁게 들었다.

옛날의 음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 음성은 옛날의 아름다운 안정감과 침착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를 압도하는 옛날의 힘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잘 해결되었다.
나는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교외의 거리 모퉁이에서 그 일본인은
데미안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느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데미안은 그 길을 되돌아 나왔는데
나는 거리의 한복판에 멈춰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나는 그가
단정하고도 탄력있는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갈색 비옷을 입고 가느다란 단장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전혀 흐트리지 않고 내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고
결단성 있는 입과 이마 위에 독특한 밝음을 지닌
옛날의 환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데미안!” 나는 불렀다.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여기 있었군,
싱클레어! 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있었나?”
”그것을 확실히 알진 못했지만,
그렇게 되기를 줄곧 바라고 있었다네,
자네를 오늘 저녁에 처음으로 만났지만,
자네는 그래, 언제나 우리를 뒤좇아왔었지 않나.”
”그럼 나를 바로 알아보았군?”
”물론이야. 자네는 확실히 변했어.
그러나 자네는 분명히 표지를 달고 있지 않은가!”
’표지라니, 무슨 표지?”
”자네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우리는 옛날에 그것을 카인의 표지라고 불렀었지.
그것이 우리들의 표지야.
자네는 언제나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네.
그래서 나는 자네의 친구가 된 거야. 지금은 그것이 더 뚜렷하게 되었군.”

”나는 그것을 몰랐어. 아니 애당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언젠가 나는 자네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네.
데미안, 그런데 나는 그 초상이 나와도 닮았다는 데 놀랐었네.
그것이 바로 표지였을까?”
”그것이 표지였지. 기쁘네.
자네가 여기에 와서!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자네의 어머니? 어머니도 여기 계신가?
그렇지만 나를 전혀 모르실 텐데?”

”아, 어머니는 자네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네.
자네가 누군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아마 자네를 알아보실 거야.
---자넨 오랫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더군.”

”물론 때때로 편지를 하려고 마음먹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더군.
나는 얼마 전부터 곧 자네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네.
난 매일같이 이 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내 팔을 끼고 걸어나갔다.
침착성이 그에게서 나와서는 나의 내부로 옮겨왔다.
우리는 곧 옛날처럼 지껄였다.
우리는 학창 시절과 견신례 수업과 또
그 당시의 휴가중에 있었던 그 불행했던 만남을 회상했다.
---단지 우리들의 사이를 밀접하게 연결해준 사건에 관해서만은,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서만은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우리는 기이하고도 예감에 가득 찬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데미안과 일본인이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고,
아울러 대학생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어쩌면 훨씬 동떨어진 내용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데미안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현시대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단합과 집단 행동이 지배하고 있을 뿐
아무데도 자유와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학생 단체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공동체는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불안과 도피와 절망감에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아 곧 붕괴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단합이란” 데미안이 말했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이러한 식으로 번창하는 것은 전혀 단합이 아니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로이 탄생되는 것인데
그것이 한참 동안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거야.
지금 단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거지.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해오고 있는 거야.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말이야!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내부의 알지 못하는 것에대한 두려움을 품은 자들만의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의 법칙이
더 이상 오늘날을 살아가는 데 접당하지 않다는 것과
자기들이 좇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로마 시대의 동판법 같은 것이라는 것과,
그들의 종교 그들의 도덕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거야.
유럽은 수백 년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그저 연구만 하고 공장만 세우고 있었거든!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드릴 줄도,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만족하게 있을 수 있는 법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학생 주점 같은 곳을 한번 들여다보렴!
혹은 부자들이 드나드는 오락장이라도! 절망적이야! ---
싱클레어. 어디서도 진정한 명랑함이란 없어.
그렇듯 불안에 가득 차서 모여든 사람들은
더욱이나 겁을 먹고 악의에 차서 아무도 남을 믿으려 들지 않는 거야.
그들은 이상이 아닌 이상에 매달려서는
새로운 이상을 세우는 모든 사람에게 돌맹이를 던져대는 거야.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느껴.
그것이 올 거야. 머지않아 틀림없이 올 거야!
물론 그것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하겠지.
노동자가 공장주를 때려 죽이거나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한다 해도 단지 소유주만 바뀔 뿐이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일이 헛된 일이라는 건 아냐.
오늘날의 이상의 무가치함을 증명해주는 셈이 될 거고
석기 시대의 신들을 제거해줄 거니까.
현재대로의 이 세계는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있으며 또 멸망하고 말 거야.”

”그럼 그땐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 우리도 아마 함께 멸망하겠지.
우리와 같은 자들도 맞아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 처리되는 것만은 아니야.
우리들에게서 남겨진 것이나
우리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의 주위에 미래이 의지가 결집될거야.
유럽이 얼마 동안 기술과 과학이라는 시장으로
떠들썩하게 눌러 덮었던 인간성의 의지가 결국엔 나타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인간성의 의지란 결코 국가나 민족,
단체나 교회 같은 오늘날의 공동체와는 같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거야.
자연이 인간에 대해서 원하는 바는 오히려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네나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거야.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고
니체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지.
이 중요한 흐름을 위해서는---
물론 그것은 매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공동체의 붕괴되어버릴 때에만 나타날 여지가 생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