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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5.

오늘의 쉼터 2011. 5. 15. 09:37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5.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채 가만히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거실에서 나는 에바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는데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가 창문을 스쳐 지나가자 눈부신 하얀 빛이 흔연히 사라졌다.
”저는 막스에게 갔었어요.” 나는 성급하게소곤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가 잠을 자는 건지
아니면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옛날에도 한 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읍니다만은.”

”물론 그 애를 깨우지는 않으셨겠죠?” 그녀는 황급히 물었다.
”예, 그는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지 않았어요.
저는 곧 되돌아 나왔어요.
에바 부인,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제게 말씀해주실 수는 없으세요?”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싱클레어. 아무 일도 없으니까요.
그 애는 명상에 잠겨 있는 거예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한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함께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실 안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정신을 혼미스럽게 만드는 히아신드의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문 위에 걸린 나의 새 그림을 쳐다보기도 하며서
오늘 아침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상스러운 그림자를 답답하게 호흡했다.
이것이 무엇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에바 부인은 곧 되돌아왔다.
빗방울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에 방울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에게 몸을굽히고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에 입을 맞추었다.
나에겐 그 물방울이 눈물 같은 맛으로 느껴졌다.
”그에게 가 보고 올까요?”
나는 소곤거리는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연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린애 같은 짓 마세요, 싱클레어!”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마력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크게 나무랐다.
“지금은 가세요. 나중에 다시 오세요.
지금은 당신과 아무런 이야기도할 수가 없군요.”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시내를 지나 산으로 달려갔다.
흩날리는 가는 빗방울이 나를 향해 다가왔고
구름은 무엇엔가 억눌린 듯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나지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바람이라곤 거의 불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잠시 동안 태양이 강철 같은 잿빛 구름 사이로
파리하게 때론 눈부시게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는 누런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이 잿빛의 벽에 걸리고 몇 초 동안 바람이
이 누런 구름과 잿빛 하늘로 하나의 형상을, 한 마리의 거대한 새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 새는 푸른 혼돈으로부터 뛰쳐나와서는 훨훨 날개를 치면서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자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가 우바과 뒤섞여 쏟아졌다.
짤막하지만 엄청나게 무서운 천둥소리가 빗발에 얻어맞은 풍경 위에서 울려왔다.
그러더니 곧 다시 햇살이 비쳐들고 갈색의 숲 너머에 있는
가까운 산 위에 희미한 눈이 어슴푸레 비현실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흠뻑 젖은 채 마에 밀려서 몇 시간 후에 되돌아오자
데미안이 손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실험실에는 가스 불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사방에 흩어져 있어
그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 볼 수 있엇다.
”앉게.” 그는 의자를 권했다.
“자네는 피곤할 거야. 지긋지긋한 날씨야.
자넨 바깥에서 몹시 헤맨 모양이군, 곧 차를 가져 올 거야.”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이군.” 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그저 약간 뇌우가 친 것만은 아니지!”
그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자넨 무엇을 보았나?”
”응, 구름 속에서 잠깐 동안이지만 하나의 형상을 보았다네.”
”무슨 형상을?”
”한 마리의 새였어.”
”그 새매? 그것이었나? 자네의 꿈의 새 말이야?”
”응, 내 새매였어. 그것은 누렇고 굉장히 컸었네
곧 검푸른 하늘로 날아들어가버렸다네.”

 

데미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가정부가 차를 가져왔다.
”자, 싱클레어, 차를 들게.
---나는 자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우연히? 그런 것을 우연히 볼 수가 잇을까?”
”그렇지, 우연히 볼 수는 없겠지.
그것은 무엇인가 의미하고 잇을 거야.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나”
”아니, 나는 다만 그것이 변화를, 운명의 한 걸음을 뜻한다고 느낄 뿐이네.
나는 그것이 우리들 모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는 성급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운명의 한 걸음이라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똑같은 꿈을 나도 꾸었다네,
어머니도 어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예감을 느끼셨다고 하시더군
---나는 사다리를 타고 어떤 나무 줄기엔가 탑엔가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네.
내가 위에 올라가서보니까 그곳은 넓은 평야였는데,
온 나라가, 도시나 마을 할 것 없이 모두 불타고 있는 것이었어.
나는 아직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네.
아직도 도든 것이 뚜렷하게 파악되진 않으니까.”
”자네는 꿈을 자네와 관련시켜서 해석하나?” 나는 물었다.
”나와 관련시켜서? 그야 물론이지.
자기와 관련되지 않는 꿈을 꾸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렇지만 그 꿈은 나 혼자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니었네.
거기에 대해선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동요를 보여주는 꿈과 매우 드물긴 하지만
온 인류의 운명을 암시해주는 꿈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네.
물론 그런꿈은 드물게밖에 꾸지 않네만.
그것이 예언이고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은
아직 한 번도 꾸어 본 적이 없다네.
그런꿈은 해석이 너무 애매하지.
그렇지만 나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닌
어떤 꿈을 꾸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네.
다시 말하자면 그 꿈은 과거에도 여러 번 꾸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옛날의 다른 꿈에 속해 있는 것이네.
이 꿈들은 싱클레어,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겠지만
그것들에게서 내가 예감을 얻고 있는 그런 꿈들이란 말일세.
우리들의 세계는 정말 부폐되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멸망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일을 예언할 근거가 될 순 없는 거지.
그러나 나는 여러 해 전부터 그것들로부터
이 세계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고 결론지우거나,
느끼거나, 혹은 자네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도 좋네만,
하여간 그와 같은 것을 느끼는 그런 꿈을 꾸어왔다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약하고 아슬아슬한 예감이었지만
갈수록 뚜렷하고 강해지는 것이었네.
아직도 나는 나와도 관련이 있는 어떤 크고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다 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싱클레어, 우리들이 여러 번 이야기했던 일을 우리는 경험하게될 걸세!
이 세계는 스스로 혁신하려 하고 있는 것이라네.
죽음의 냄새가 나네. 죽음 없이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올 수 없는 법이니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몸서리처지는 일이로군.”

나는 깜짝 놀라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꿈의 나머지 부분을 내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나?”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탁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네.”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여기에 같이 있었군! 설마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녀는 다시 싱싱해져서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어머니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아이에게 다가오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우리들에게로 왔다.
”우리는 슬퍼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우리는 그저 이 새로운 표지에 대해 좀 추측해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물론 그것엔 아무런 표지도 안 붙어 있어요.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오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결국은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작
별을 고하고 혼자 거실을 지날 때 풍겨온 히아신드의 향기가
시들고 무미한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한 자락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덮쳐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