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2.

오늘의 쉼터 2011. 5. 14. 23:31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2.


얼마 동안 나는 야크겔트 부인의 문방구에는 가지도 못했는데,
그 여자를 보면 알폰스 베크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날 것이었고
그러면 내 얼굴이 무참하게 새빨개지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새로운 패거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독학 이질적인 존재라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더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가 없었다.
이젠 폭음을 하고 터무니없는 장담을 해대는 일이 정말로
내게 한 번이라도 즐거웠던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상 나는 술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고통스런 결과를 당했다.
만사가 다 강제적이었다.
그밖에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몰랐으므로 그저 하던 그대로 계속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인 것을 무서워했고,
노상 마음이 그리로 향해가는 온화하고 수줍은 내적인 자작이 두려웠으며
빈번히 엄습해오는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었다. ---
그것은 진실한 친구였다.
내가 좋아하는 동급생이 두 서너 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실한 축에 속해 있었고
나의 악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에게도 비밀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모두들 나를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희망없는 불량학생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나의 행동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누차 혹독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으나
마침내는 퇴학 처분을 받게 되리라고들 기대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착한 학생은 아니었고,
이러한 방탕한 생활을 더 이상 지탱해갈 수는 없다고 느끼면서도
애써 그러한 악행을 고집해감으로써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듦으로써
신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해줄 수 있는 길은 너무도 많다.

신은 그때 나와 함께 이런 방탕의 길을 갔던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더러운 것, 찐득거리는 것, 깨어진 맥주잔과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이며 보낸 밤들 속에서 나는 몽유병자처럼 쉴새없이 괴로와하면서도
구역질나고 더러운 길을 기어다니고 있었던 내 모습을 본다.

주에게로 가는 도중에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 찬
뒷골목의 진흙탕 속에 빠져버리는 그런 꿈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그런 지경이었다.
보잘것없는 짓을 함으로써 나는 더욱 고독하게 되었고,
나와 나의 유년 시절 사이엔 냉혹한 시선으로 망을 보는 문지기가 버티어 선
굳게 닫힌 낙원의 문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자신에의 향수의 처음이었으며 그 사실의 깨달음이었다.

사감 선생님으로부터 경고의 편지를 받고 아버지께서 성○○시에 오셔서
예기치 않게 내 앞에 나타나셨을 때 나는 기겁을 하고 몸에 경련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그 겨울이 다갈 무렵 두 번째로 오셨을 때,
이미 나는 냉담하고 무심해져 있었고,
꾸중을 하셔도, 당부를 하셔도, 어머니를 상기시키셔도 나는 예사로 들어넘겼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는 몹시 노여워하시며 만일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불명예스럽고도 모욕적으로 퇴학을 시켜서 감화원에 집어넣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실 테면 하시라지! 아버지께서 떠나가신 후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버지께서는 내게서 아무런 약속도 듣지 못하셨고
내게로 통하는 길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러한 일이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 나에겐 상관이 없었다.
주막집에 앉아서 지껄여대는 따위의 기이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방식으로
나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이 내 항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갔고
때때로 사태는 이런 식으로 파악되곤 했다---
만약 세상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보다 더 나은 자리, 보다 더 가치있는 일을 부과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필경 자멸하고야 말 것인데,
그 책임은 마땅히이 세상이 져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 해의 성탄절 휴가는 정말 불쾌했다.
나를 보신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나는 키가 한층 커졌고 야윈 얼굴은 생기없이 축 늘어진데다
눈 언저리엔 염증이 나서 잿빛으로 찌들어 처량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갓 나기 시작한 코 밑의 엉성한 수염 자국과
최근에 쓰기 시작한 안경이 나를 한층 낯설어 보이게 했다.
누나들은 뒤에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만사가 불쾌했다.
서재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도 불쾌하고 입맛이 썼으며
두서너 명의 친척과 나눈 인사도 그러했으며
무엇보다도 불쾌했던 것은 성탄절 전야였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후 이날은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온 날이었고,
축제와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qahslarhk 나와의 유대를 거듭 새롭게 해주는 저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성탄절에는 매사가 닫답했고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여태껏 해오신 대로 아버지께서는
‘그들은 그곳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노라’하는
들판의 목동에 관한 복음서의 귀절을 봉독하셨고,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누나들은 기쁨에 넘쳐 선물이 놓인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에는 즐거운 기색이 없었고
얼굴은 늙고 피곤해 보였으며 한결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보였다.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괴롭고 거북하게 느껴졌다.
선물과 축복, 복음서와 불이 밝혀진 트리조차 그러했다.
꿀을 바른 과자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긋한 추억의 짙은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전나무의 향기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이 밤과 축제일이 한시빨리 끝나기를 초조히 기대했다.

온 겨우리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방학이 되기 직전에 나는 교사회로부터 심한 경고를 받았고
제명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았었다.
더 이상 이런 생활을 지속시켜갈 수는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나는 데미안에게 특별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성○○시로 간 초기에 나는 그에게 두 차례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학 동안에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 알폰스 베크와 만났던 그 교외의 공원에서 봄이 시작될 무렵,
가시울타리가 푸릇푸릇해지기 시작할 그때
나는 우연히 한 소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불쾌한 생각과 걱정에 휩싸여 혼자 터덜거리고 있는 차이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돈은 끊임없이 모자랐고
친구들에게 빌어 쓴 액수는 점점 불어나서 집에서 돈을 타내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지출 명목을 생각해 내야 했다.
여러 군데의 가게에는 담배나 기타 다른 외상 물건값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거리들이 아주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이곳의 생활이 끝장이 나서 내가 물속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감화원에 끌려갈 지경이 되면
이런 일쯤이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노상 그런 저런 종류의 아름답지 못한 일에
직접적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나를 몹시 억압하고 있었다.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나는 봄날의 공원에서
내 마음을끄는 한 젊은 처녀를 만났던 것이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우아한 차림을 한 그 여자는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그런 느낌의 여자를 좋아했으므로 당장에 그 여자에 대한 공상을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성숙하고 우아하고 윤곽이 잘 정리되어 보였으며,
벌써 완전한 귀부인의 자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내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교만함과 처녀다움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마음에 둔 여자에게 접근하는 일에 성공해보지 못했으며
이 여자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상은 과거의 어느 소녀들보다 더 깊었고
그 짝사랑은 내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돌연 다시금 내 앞에는 고귀하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영상이 나타났다
나의 내부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나 충동도
경건함과 숭배하고자 하는 소원만큼 깊고 열렬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단테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영국판의 그림에서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고
그 그림의 복제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 초기파의 화풍으로 그려진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갸름하고 긴 얼굴에 영혼이 깃든 손과 표정,
길쭉길쭉한 사지에 날씬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끈 처녀도 모습에 있어서는 날씬한 자태와
소녀다운 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얼굴 표정에서
다소 정신화된 점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림의 여자와 비슷하였지만 전적으로 유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기의 모습을 세워놓음으로써 성스러운 전당을 열어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주막집 순례와 밤의 싸움질로부터 소원해졌다.
나는 다시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이러한 돌발적인 전향으로 나는 숱한 조소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사랑할 대상, 사모할 대상을 가지게 된 것이었으며
이상이 되살아났고 예감과 신비롭게 아롱진 어스름이 생활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여타의 조소에 무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비록 숭배하는 영상의 하인이나 노예로서일망정
내 자신 속에 깃들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감동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금 나는 무너져버린 생활의 폐허 속에서
‘밝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시작했으며
마음속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완전히 밝은 세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들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이 되었다.
지금 내가 영위하고자 하는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나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머니나 책임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과는 달랐으며
거기에는 책임감과 일종의 자기 억제력이 요구되었으며
새롭게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자기 봉사였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 와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애썼던
성적인 욕구도 이 성스러운 불 속에서 정신과 예배로 정화되어갔다.
더 이상 음침하고도 흉측한 것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신음하면서 지낸 밤들, 음란한 생각 앞에서의 심장의 고동,
금지당한 문 앞에서 엿듣던 소리,
온갖 음탕한 짓거리들도 다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이 모든 것들 대신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모신 제단을 마련하였고
그 여자에게, 또한 정신과 여러 신들에게 나를 바쳤다.
음침한 세계 속에서 찾아온 삶의 대가를 밝은 세계의 제물로 바쳤다.
나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라 청순함이었으며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었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되었다.
나는 내 몸에 젖어 있던 나쁜 생활 습관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먹고 마시는 일에서나
이야기나 옷차림까지도 여기에 부합되도록 신경을 썼다.
나는 아침마다 냉수 마찰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대단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진실되고 품위있는 행동을 했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천천히 위엄있게 걸으려고 애썼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마음은 그만큼 신에의 봉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서 나는 한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국판 베아트리체의 초상이
그녀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던 점이 일의 발단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내 나름으로 그려보려고 애썼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갖고 나는 내 방에
---최근에 나는 독방을 쓰게 되었다---

깨끗한 종이와 그림물감과 붓을 챙겨두었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준비했다.
새로 사온 조그만 튜브 속에 든 색고운 템페라 물감이 나를 매혹시켰다.
지금에 와서도 처음으로 물감을 뽀얀 접시 위에 짰을 때의
그 빛깔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기억할 수가 있다.
그것은 불타는 듯한 크롬 옥시트 초록색이었다.
나는 신중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것을그려보려고 했다.
장식 무늬, 꽃, 작은 환상적인 풍경화, 교회 앞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실버들이 서 있는 로마의 다리 같은 것을 그렸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완전히 넋을 잃기도 하고
그림물감 상자를 처음 가지는 아이처럼 행보해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드디어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은 완전한 실패작으로 나는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때때로 거리에서 만나던 그 소녀의 얼굴을
마음속에서 생각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 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소녀를 그리는 것은 포기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림물감이나 붓이 이끌어가는 대로 얼굴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얼굴은 꿈에서 본 모습이었는데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시도를 계속해나갔다.
한 장 한 장 새로운 얼굴이 완성되어갈 때마다 그 모습은 한결 선명해졌고
결코 실제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소녀의 타입에 가까워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꿈꾸는 것처럼
붓으로 줄을 긋고 화면을 메워나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떤 모델을 생각하며 그린 것도 아니었지만 장난삼아 그려가는 동안에,
무의식중에 형상화되어간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이제까지 그린 어떤 얼굴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내게 말을 건네오는 한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얼굴은 이미 이전의 어느 소녀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오래 전부터 내가 그린 그림은 더 이상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고
머리칼도 그녀의 것과 같은 옅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이마는 단단하고 야무지게 보였고 입술은 붉게 타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딱딱하고 가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인상적이고도 신비스러운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내가 완성시킨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어떤 야릇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신의 초상의 일종이거나 신성한 가면처럼 보였고
절반은 남성적이고 절반은 여성적이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가 엿보였으며 남 모르는 생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것 같았고
나 자신 속에 존재하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어느 누구와 닮아 있었긴 했지만
누구와 닮았는지를 알 순 없었다.

이 얼굴은 얼마 동안 나의 모든 생각 속에
살아 움직이고 나와 함께 생활을 나누었다.
나는 그것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혹시라도 누가 보고 나를 놀려대는 것은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자되기가 무섭게 그 그림을 꺼내어 그것과 사귀었다.
저녁엔 그 그림을 침대 맞은편 벽지 위에 핀으로 꽂아놓고는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으며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시절, 나는 어린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야 꿈들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영상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