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3 장 도 둑 - 3
나 자신의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생활과 견해가 위대한 이념의 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불안하면서도 경건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무엇인가를 증명해주고
가벼운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썩 기꺼운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가혹하고도 떫은 맛이 있었다.
그 속에는 인생에 대한 책임이, 나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며
인생을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느낌들을 이야기하면서 데미안에게
유년 시절부터 갖고 있던 ‘두 개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나의 가장 내면적인 감정이
그의 견해에 공명하고 있으며 또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이런 감정을 악용한다든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이야기에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면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눈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에는 내가 직시할 수 없는 어떤 묘하게 짐승 같은,
시간을 초월하여 나이를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언제 한번 더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난 네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너 또한 네가 생각한 바를 전부 살아보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
건 좋지 않아.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는 거야.
넌 이미 너에게 ‘허용된 세계’가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야.
그러면서도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다는 절반의 세계를 은폐하려고 애썼던 거야.
그런 시도는 성공할 수가 없어. 이미 생각을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야.”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하지만” 나는 외치다시피 말했다.
“사실상 금지된 추악한 것들도 이 세상엔 존재하고 있어.
너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단념할 수밖엔 없을 거야.
난 살인이라든지 다른 온갖 가능한 죄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내 스스로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
”그런 것들을 오늘 모두 해결할 수는 없어.” 막스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넌 살인을 하거나 소녀를 능욕해서는 안 돼.
그건 분명히 안 되는 일이야.
너는 아직도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라고 불려지는 것을
너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데까지는 못갔어.
단지 진리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을 감지한 것뿐이야.
다른 부분들을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넌 한 일 년 전부터
너의 내부에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었던 건데,
그런 건 흔히 다른 어떤 충동보다 강하기 때문에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는 거야.
그리스 사람이나 다른 민족들은 우리와는 반대로 그러한 충동을
일종의 신성한 것으로 취급해서 굉장한 축제를 벌이고 그것을 신봉햇어.
‘금지된 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변경될 수도 있는 거야.
오늘에라도 목사님 앞에서 결혼을 하면 누구나 당장 여자와 잘 수 있잖아.
다른 민족은 우리와는 달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역시 다르단 말야.
그러므로 우리들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자기에게 그러한 것을 제각기 자신의 힘으로 찾아야 하는 거야.
실제로는 금지된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대악당이 될 수 있는 일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그것은 단지 편의상의 문제에 불과해!
안일해서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판정해낼 수 없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금지된 것에 복종하고 말지.
그것이 쉽거든.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내부에서 그 금지된 것을 스스로 느끼기도 한단 말이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도 그들에겐 금지되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겐 금지되어 있는 일이 그들에겐 허용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야.
요컨대 사람은 각자 독자적이 되어야 하는 거야.”
그는 갑자기 자기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후회하기라도 하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때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매우 유쾌해 보이고
자기의 생각을 닥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젠가 말했듯이 ‘그저 지껄이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은
죽어도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서 내가 진정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울러 약간의 오락적인 기분과 재치있는 농담을 즐기는 듯한 기분,
다시 말하자면 완전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에 쓴 ‘완전한 진지함’이란 귀절을 다시 읽어보니,
내가 데미안과 더불어 경험했던 사춘기의 체험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다시 생각난다.
마침내 견신례를 받는 날이 가까워졌고,
종교 수업의 마지막 몇 시간에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것은 목사님이 생각하시기엔 매우 중요한 대목이었기 때문에
그는 애를 많이 썼고, 신성한 느낌과 기분이 우리들에게도 잘 전해졌었다.
그런데 마지막 두서너 시간밖에 남지 않은
문답 수업 시간에 내 생각은 딴 곳을 헤매고 있었다.
내 친구에 관해서였다.
교회 사회로의 엄숙한 입문이라 할 견신례를 준비하는 동안
내게 있어서의 이 반 년 동안의 종교 수업의 가치는
목사님의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데미안 가까이에서 그의 영향 속에서 지낸 일에 있다는 생각이
피할 도리 없이 엄습해왔다.
이제 나는 교회가 아니라 아주 다른 것에,
즉 사상과 개성의 교단에 입회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은 어떻든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고
데미안이 대표자이거나 사도로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어떻든간에 나는 견신례의 의식만은
진심으로 경건하게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새로운 생각과는 거의 조화될 수 없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원하던 바를 하고 싶었고 그 소원은 간절했다.
그 생각은 가까워오는 교회의 의식에 대한 생각과 결부되어
결국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의식을 치르겠다고 결심을 했다.
내게 있어서 그 의식은 데미안에 의해 열려졌던
사색의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해야 했던 것이다.
그와 다시 한번 열띤 토론을 벌인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문답 수업 시간이 시작되기 바로 전이었다.
내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분명 조숙하고 잘난 척하며
대드는 내 이야기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우린 너무 많이 지껄이고 있어.”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약삭빠른 이야기는 아무 가치가 없어. 조금도 없단 말이야.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갈 뿐이야.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다는 건 죄악이야.
사람이란 마치 거북이처럼
자기 자신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나서 곧 우리는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는 수업에 열중하려고 애썼는데
데미안도 나를 방해하진 않았다.
잠시 후 나는 그에게서 무슨 독특한 것, 공허하달까 냉정하달까,
어쩌면 그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이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똑바르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보였다.
무엇인가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그로부터 나와서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은 떠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눈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물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눈은 단지 물끄러미 열려 있을 뿐
내부의 세계가 아니면 아득히 먼 세계를 향해 있었다.
완전한 정지 상태로 그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엇고 거의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은 마치 나무나 돌로 새겨놓은 것 같았다.
얼굴은 창백하여 돌처럼 보였다. 갈색의 머리칼만이 가장 생기를 띠고 있었다.
두 손은 자기 앞의 걸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마치
돌이나 과일 같은 물체처럼 생기가 없고 고요하며
창백하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강력한 생명를 감싸고 있는 야무지고 질 좋은 깍지처럼 보였다.
그 광경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하마터면 큰 소리로 그렇게 외칠 뻔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매혹된 눈빛으로 그의 창백하고 굳어버린 가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야말로 데미안의 본질임을 느꼈다.
나와 함께 걷고 이야기하던 이제까지의 그는 단지 데미안의 절반,
즉 때론 배역을 맡아주고 내게 잘 맞추어 호의로 협조해주던
데미안의 절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데미안은 이처럼 굳어 있고, 고색창연하고, 짐승 같기도 하고,
아름다우며 차갑게 죽어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는
견줄 데 없는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절대 고요의 이 공허,
이 에테르와 별이 가득한 하늘, 그리고 고독한 죽음!
지금 그는 완전히 자기의 내면으로 몰입했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전율했다.
이렇게 고독한 적은 없었다.
그와 나는 전혀 무관한 존재였고, 그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세상의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보다 내게서 더 먼 곳에 있었다.
나 외의 누구도 그를 보는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는 오싹하고 모서리칠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주의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석상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파리가 한 마리 그의 이마 위에 내려앉더니 천천히 코와 입술로 내려왔다.
---그는 주름살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어디에, 그는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는 하늘에 있는 것일까? 지옥에 있는 것일까?
그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끝나고 다시 되살아나 숨쉬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이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혈색이 돌고 그의 손은 다시 움직였지만
그의 갈색 머리칼은 윤기를 잃어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후 여러 날 동안 침실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연습을 하는 데 몰두했다.
꼿꼿한 자세로 걸상에 앉아 눈을 한곳에 고정시키고
부동자세를 한 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
그리고 그때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저 나는 몹시 피곤해지기만 했고, 눈꺼풀이 가꾸 가려울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견신례를 받았지만
거기에 대한 중요한 기억이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 시절은 산산이 부서져 나의 주위에 떨어져내렸다.
부모님께서는 일종의 낭패를 느끼시는 표정으로 나를 대하셨다.
누나들은 아주 낯선 존재가 되었다.
냉담함이 예전의 감정과 기쁨 사이를 비집고 들어 그것을 왜곡시키고 퇴색시켜버렸다.
정원은 향기를 잃고 숲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않았으며
세계는 무슨 골동품의 재고정리장처럼 무미견조하고 매력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뿐 책은 단지 종이조각이었고 음악은 소음에 불과했다.
가을이되면 나무의 주위에는 낙엽이 떨어지게 마련이었지만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비가 나무를 적시고 혹은 햇빛이 혹은 서리가 내리고,
나무의 내부에서는 생명이 서서히 위축되고 깊숙이 움츠러든다.
그러나 나무는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인 것이다.
휴가를 지낸 후 나는 다른 학교에 가기 위해 난생 처음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때때로 유난히 다정하게 내게 가까이 오셔서 미리 이별을 고하시고
내 마음속에 사랑과 향수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게 하려고 애쓰셨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다. 나는 혼자였다
'종합상식 > 문학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2. (0) | 2011.05.14 |
---|---|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1. (0) | 2011.05.14 |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3 장 도 둑 - 2 (0) | 2011.05.14 |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3장 도 둑 - 1 (0) | 2011.05.14 |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3 (0) | 2011.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