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3 장 도 둑 - 2
’독심술’이란 말을 꺼내어 오래 덮어두었던
크로머와의 사건을 상기시킬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아주 미묘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수년 전에 그가 내 생활에 개입했었던 그 일에 대해서는
그나 나나 아주 은근히 암시하는 일조차 없이 지내왔다.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아니면
서로가 상대편이 그 일에 대해선 깡그리 잊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은 상태였다.
한 두 번쯤 함께 거리를 걷다가 크로머를 만난 적도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지도 않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럼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니?” 나는 물었다.
“넌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으면서도
또 사람이 그의 의지를 어느 곳에 집중시키면
자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어.
그건 서로 일치되지 않는 말인걸.
내가 내 의지를 지배할 수 없다면 내 의지를 임의로 집중시킬 수도 없지 않겠니?”
그는 내 어깨를 쳤다.
그건 내가 그를 즐겁게 해주었을 때 그가 하는 행동이었다.
”좋아, 그걸 질문해줘서.”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항상 묻고 의심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 문제는 지극히 단순해.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한 부나비가 자기의 의지를 별이라든가
또는 그밖의 어디엔가 집중시키려고 한다면 그건 불가능해. 단지---
그 부나비들은 애당초 그런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그것들은 오직 그들을 위해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절대로 가져야 하는 것만을 찾기 때문이야.
그렇게 할 때만이 믿을 수 없는 일조차 성공하게 되는 거야. ---
그럴 때에 그들은 그들 외에 다른 어떤 짐승도 가질 수 없는
불가사의한 육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거야.
우리들은 분명히 짐승들보다는 더 많은 활동의 영역과 흥미를 갖고 있어.
하지만 우리들 역시 퍽 좁은 범위 내에 머물러 있도록 제약을 받고 있어서
그 이상을 성취하긴 힘들어. 나는 틀림없이 이것저것 상상할 수는 있고,
무조건 북극에 가고 싶다든가 하는 공상을 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 소원이 정말 내 자신의 내부에 충분히 깃들어 있고,
나의 전 존재가 그것에 의해 가득 차 있을 때에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고
충분히 강하게 바랄 수도 있는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네가 너의 내부에서 요구하는 바를 시험해보기가 우섭게 잘 될 것이고,
너의 의지를 훈련 잘 된 망아지처럼 다룰 수가 있을 거야.
가령 내가 지금 목사님이 앞으로는
안경을 쓰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안 되는 말이야.
그건 단순히 장난에 불과할 뿐이지. 지난 가을에 말이야,
나는 내가 앞쪽에 있는 내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
확고한 요구를 가졌었는데 그건 아주 잘 되었어.
그때 마침 이름 순서로 보아 내 앞에 앉아야 하는 애가 나타난 거야.
그는 쭉 앓고 있다가 학교에 다시 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어.
내가 비켜주었지. 그건 내 의지가 기회를 잡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 나는 말했다.
“나에게는 그 당시 그게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었어.
우리가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 때부터 넌 내게 점점 가까이 왔지.
그런데 그건 왜 그랬니?
처음부터 바로 내 곁에 앉은 것이 아니라 몇 번은 내 앞자리에 앉았었잖아.
그렇지 않니?
그건 어째서니?”
”맨 처음 내 자리를 옮기려고 했을 때는 나 스스로도 어디에 앉고
싶은 것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야.
난 그저 뒤쪽으로 가고 싶다고 느꼈을 뿐이었어.
네 곁에 앉으려는 것이 내 의지였엇지만 처음엔 그것이 의식되지 않았던 거야.
동시에 너의 의지도 함께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네 앞에 앉았을 때 나는 내 소원이 이제 반쯤은 충족되었다고 느꼈어.
내가 네 곁에 앉는 것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 거야.”
”하지만 그땐 새로 들어온 학생이 없었을걸.”
”그랬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 나는 단순히 내가 원한 바를 행했을 뿐이야.
아주 쉬운 방법으로 네 곁에 앉은 거야.
나와 자리를 바꾸었던 아이는 그저 좀 이상하게 여겼을 뿐 상관하지 않았거든.
목사님은 필경 한 번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거야.
요컨대 목사님은 나와 관련이 있을 때마다 은연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을 거야.
내 이름이 데미안이고, 이름에 D자가 있는 내가
뒤쪽의 S자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엇을 거란 말이야!
그러나 나의 의지가 자꾸 그 의혹에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에
그의 의식 속에까지 배어들진 않았어.
그는 여러 번 무엇인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는
나를 쳐다보고 연구하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그런 때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을 나는 알고 있어.
매번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거의 모든 사람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왠지 불안해지는 거야.
만약 네가 누군가에 대해 무엇을 이루려 할 때는
가자기 그의 눈을 흔들리지 말고 응시해봐.
그때 그가 하나도 불안해 하지 않으면 그 일을 단념하는 것이 좋아.
그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니까 말야.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어.
난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어.”
”그게 누구니?” 나는 재빨리 물어보았다.
그는 흔히 깊은 생각에 잠겼을때의 버릇인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는 시선을 돌리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몹시 궁금하였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때 그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와 대단히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며
집으로 데리고 간 적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여러 번 그런 시도를 하고
나의 의지를 집중시키는 노력을 해보았다.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소용이 없었고 성공할 수도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선 감히 데미안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내가 소원한 바를 그에게 고백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데미안 역시 묻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신앙심에는 많은 틈이 생겼다.
나의 생각은 데미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긴 했지만
전혀 불신자인 다른 동급생들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불신자가 몇몇 있긴 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는 건 가소롭고 인간답지 않은 일이며
삼위일체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 따위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인데
아직도 이런 촌스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결코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다.
나 또한 다소의 의혹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내 유년 시절의 전 체험을 통해
나의 부모님이 영위하고 있는 것 같은
경건한 생활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무가치한 일도, 단지 위선일 뿐임도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 여전히 가장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데미안만이 성서적 이야기와 교의에 대해 보다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유희적이고 공상적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에게 제시한 해석에 나는 언제나 흔쾌히, 즐겁게 따랐다.
확실히 많은 생각들이 나에겐 지나치게 거부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카인에 대한 문제 역시 그러했다.
언젠가 한 번은 견신례 수업중에
그 이상 더 대담할 수는 없으리라고 할 수 있는 견해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선생님은 골고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옛날부터 아주 인상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예수 수난일 같은 때에
아버지께서 수난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다음이면 이 고난에 찬
아름답고 창백하고 무시무시하면서도 무섭게 발랄한 세계,
즉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나는 열렬히 감동되어 살았었다.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신비에 가득 찬
세계의 어둡고 힘찬 고난의 광채가 경이로운 선율로
내 마음에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느꼈다.
오늘에도 역시 나는 이러한 음악 속에서 또 모든 ‘비장한 행위’ 속에서
모든 시와 예술적인 표현의 본질을 느끼곤 하였다.
그런데 데미안은 그 수업이 끝나갈 무렵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싱클레어, 뭔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읽어봐.
그리고 혀로 그 맛을 음미해봐. 좀 김빠진 맛이 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
두 명의 도둑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언덕 위엔 세 개의 십자가가 위풍도 당당히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잔악한 도둑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감상적이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그는 죄인이고 누가 봐도 수치스런 행동을 하던 자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개심을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무덤을 코 앞에 두고서 그 따위 후회가 무슨 소용이 되니?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한갓 감상적이고도 교화적인 배경을 가진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야.
만약 나더러 두 도둑 가운 데 한 명을 친구로 고르라고 한다면,
적어도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상대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이 눈물을 찔끔거리는 개종자를 택하진 않을 거야. 단연코 다른 도둑을 택하겠지.
그는 사내 대장부며 개성이 잇는 자이기 때문이야.
그는 자기 처지에서 본다면 단지 아름다운 유혹처럼 느껴질 뿐인
개종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거야.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던 거고 최후의 순간까지
이제까지 그가 손잡고 있던 악마에게서 비겁하게 손을 놓진 않았거든.
그는 적어도 특이한 인물이야.
특이한 사람들은 성서 속에서는 흔히 손해를 보게 되거든.
아마 그도 역시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되지 않니?”
나는 깜짝 놀랐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얼마나 상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개성없이 그저 듣고 읽기만 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데미안의 이 새로운 견해는 숙명적으로 들렸는데,
그것은 내가 고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관념을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었다.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온갖, 내가 가장 신성하다고 생각해온 것을 전부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내가 미처 한마디도 하기 전에 내가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네 생각은 벌써 알고 있어.” 그는 단념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한갓 옛날 이야기에 불과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
하지만 여기엔 이 종교가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잘 나타나 있단 말이야.
구약이나 신약 속의 신의 모습은 아주 완전하고 훌륭하지만
그것이 본래 나타내야 할 모습이 아니란 것이 문제라고 생각되는 거야.
신이란 선하고, 고귀하며 마치 아버지의 존재와 같이
아름답고도 높으면서도 다감한 것이다---
라는 것은 아주 정당한 견해야!
그러나 세상에는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하고 있단 말이야.
이 다른 부분은 전부 악마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세상의 이러한 부분의 전부,
즉 세상의 절반은 은폐당하고 묵살되어버리고 있는 거야.
신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찬양하면서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적인 생활은 전적으로 묵살하고, 악마적인 것,
죄많은 것으로 단죄해버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신성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도식적으로 분리된 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반만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를 말이야.
우리는 신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얘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돼.
그래야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내부에 악마까지도 내재시키고 있는 신,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 앞에서도 사람들이
그 앞에서 의례적으로 묵인할 필요가 없는
그런 신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는 그의 본성과는 반대로 대단히 흥분되어 있었으나
곧 진정되어 미소를 짓더니 더 이상 추궁하는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소년 시절의 깊은 의혹을 그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말한 공인된 신적인 세계와 금지된 악마의 세계에 관한 생각은
바로 나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었다.
두 개의 세계, 또는 세계의 두 부분에 관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관한 내 자신의 생각과 말이다.
나의 문제가 곧 모든 사람의 문제이며 모든 생명과 사색의 근본이 되는
문제라는 의식이 무슨 성령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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