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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2

오늘의 쉼터 2011. 5. 14. 23:07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2

 

 

이 꿈과 관련해서 나는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데미안에 대한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내게 나타난 것은 이상스럽게도 또 꿈속에서였다.
나는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는 학대받고 압박받는 꿈을 꾸었는데
내 무릎을 짓밟은 것은 크로머가 아니라 데미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고 신기한 것은
크로머가 내게 그런 짓을 했을 때는 고통과 혐오감을 느낄 뿐이었는데
데미안에게서는 불안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이 꿈을 두 번이나 꾸었는데,
그러고나서는 다시 크로머가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꿈속에서 겪은 일과 실제로 겪은 일을 확실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여간 크로머와 나의 괴로운 관계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좀도둑질로 그에게 진 빚을 다 갚았을 때도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나의 도둑질에 대해서도 환히 알고 있었다.
크로머는 내가 돈을 갖고 올 때마다 어디서 났는지를 물었는데
그로인해 나는 더욱 단단히 그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걸 일러바치겠다고 나를 위협했고
나는 두려워 떨었지만 그래도 애초에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몹시 괴로왔지만 모든 일에 대해 후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으며
어떤 때는 이런 일이 필연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불길한 운명이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미루어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도 나의 이런 상태에대해 무척 고민하셨을 것이다.
낯선 영혼이 나를 덮쳐와 나는 이미 단란한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잃어버린 낙원에대해서처럼 견딜 수 없는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어머니에 의해서는 주로 나쁜 아이로보다는 아픈 아이로 취급을 받았는데
실제의 상황은 누나들의 태도에서 잘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무척 너그러웠지만 나를 극도로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나의 상태에 대해 한탄하기보다는 동정해야 하지만
나를 악이 내재하는 미치광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족들이 나를 위해 이제까지 드리던 기도와는 다른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기도가 헛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괴로움을 던져버리고 싶은 간절한 희망과
진정으로 뉘우치고 싶다는 소망을 격렬히 느끼는 적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아버지 어머니께 똑바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용서를 빌면 친절히 받아들여지고 따뜻히 위로받고 동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이해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이 진정한 나의 운명인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탈선으로 취급해버리고 말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열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내 처지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본질을 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사상으로 변화시킬 줄 알게 된 어른들은
단지 아이들에게는 이런 사상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심지어는 아이들은 경험조차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평생에 그때처럼 그렇게 절실한 체험을 하고
그때처럼 그렇게 고민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는 크로머로부터 성의 광장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물에 젖어 쉴새없이 떨어지는
축축한 밤나무 잎들을 발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로머에게 주려고
과자 두 조각을 옆구리에 숨겨 왔었다.
나는 어느새 이렇게 어느 모퉁이 같은 데서
때로는 퍽 오랫동안 크로머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슨 불가피한 일을 감수해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그것을 감수했다.

드디어 크로머가 왔다.
오늘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는 내 갈비뼈를 두어 번 쥐어박고는 기분좋은 듯이 낄낄거렸고
과자를 빼앗더니 내게 축축한 담배를 권하기까지 했는데
물론 나는 그것을 피진 않았다.
아무튼 그는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친절하게 굴었다.

”그렇지.” 헤어지려는 차에 그가 말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두는데 다음 번엔 누나를 데리고 나와.
나이 많은 누나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미처 대답도 못하고 서 있었다.
놀란 모습으로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내 말 못 알아듣겠니? 네 누나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알아듣겠어 크로머.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난 할 수가 없어. 누나도 따라 오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지금 그가 한 말이 계략이고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그런 짓을 했는데 무슨 불가능한 일을 요구해서
내 기를 꺾어놓고는 나를 꼼짝도 못하게 얽어
다른 요구에 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또 돈을 몇 푼 더 구해다 바치든지
아니면 다른 선물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잘 생각해보란 말이야. 난 너의 누나랑 사귀고 싶은 거야.
언젠가 다음번에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넌 그저 누나를 산책에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그곳으로 갈 테니까. 내일 내가 다시 휘파람을 불게.
그때 다시 이 일을 의논해보자구.”

 

그가 가버리자 희미하게나마 그의 말뜻이 짐작되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어린애였지만 우리들이 좀더 나이가 들면
어떤 비밀스런 야릇하고 금지된 짓을 서로 할 수 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나는 갑자기 그것이 얼마나 망측스런 일인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따위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내겐 또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인가.
크로머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보복 해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내겐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고, 아직도 괴로움은 충분치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지극히 암담한 심정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른 채 텅 빈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새로운 고민, 새로운 압박감이 나를 덮쳐왔다.

그때 누군가가 시원스럽고도 깊이있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가 따라와서는 한쪽 손으로 나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것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붙잡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난 또 누구라고.” 나는 불안을 감추며 말했다.
“사람을 놀라게 해도 분수가 있지.”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때만큼 그의 눈빛이 어른의 우월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그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오래 전부터 우린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미안해.” 그는 점잖고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래, 그렇지만 놀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얘,

네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깜짝 놀란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호기심을 가지게 되겠지.
정말 수상하게 여겨질 만큼 네가 잘 놀란다고 생각할 거고,
사람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잘 놀라게 되는데, 하고 생각할 거란 말야.
겁쟁이는 언제나 두려워하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난 네가 원래부터 겁쟁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지 않니? 아, 물론 네가 영웅이라는 건 아니야.
네가 두려워하는 무엇인가가 있단 말이야.
네가 무서워하는 누군가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건.
내가 두려운 건 물론 아니겠지? 안 그래?”
”아냐, 아냐, 넌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것 봐, 틀림없어. 그렇지만 넌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지?”
”난 잘 모르겠어‥‥‥. 제발 그만둬. 날 어쩌자는 거야?”
그는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빨리빨리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옆얼굴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가령 말이야.”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네게 호의를 가지고 있어. 하여간 넌 날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난 네게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어.
그건 무척 재미있고, 너도 무언가를 거기서 배울 수가 있을 거야.
자, 잘 들어봐!
나는 가끔 독심술이라고 하는 걸 시험하곤 해.
거기 무슨 요술이 있는 건 아닌데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주 신기해 보이거든.
그것으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가 있으니까 말야.
자, 우리 한번 시험해보자. 내
가 너를 좋아하거나 혹은 흥미를 갖고 있다고 치는 거야.
그래서 이젠 네 마음속이 어떤가를 알고 싶어진 거야.
난 이미 그것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야. 난 너를 깜짝 놀라게 했었지.
따라서 넌 잘 놀란단 말야.
그건 곧 네가 두려워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있다는 증거야.
어째서 그럴까? 사람은 누구 앞에서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런데도 그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자기를 지배하는 힘을 그 누군가에게 맡겨버린 때문이야.
예를 들어 네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거야.
그러면 그 사람은 너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것이 되는 거야,
알겠니? 분명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니?”

나는 어쩔 줄 몰라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엄숙하고 영리해 보였고
또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정답다기보다는 오히려 엄격해 보였다.
정의나, 혹은 그와 비슷한 무엇이 그의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마법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알아듣겠니?”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독심술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건 극히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
예를 들자면 언젠가 우리가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했을 때에
네가 날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난 제법 확시라게 말해줄 수가 있어.
그런데 그건 지금 상황과는 관계가 없어.
넌 한 번쯤은 내 꿈을 꾸었으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얘긴 이제 그만 두자.
넌 무척 영리해. 대부분의 아이들은 멍청한데.
나는 때때로 내가 믿고 있는 영리한 아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너도 물론 괜찮겠지?”
”그래, 괜찮아. 하지만 난 네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걸 뭐.”
”그럼 다시 그 재미나는 실험으로 되돌아가볼까?
우린 어떤 소년이 잘 놀란다는 것과---
그는 누군가를 아주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아마 그는 이 누군가와 매우 불쾌한 비밀이 있는 모양이란 말야.---
대략 들어맞지?”

나는 꿈속에서처럼 그의 목소리와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나는 그저 머리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니,
내 자신보다도 더 잘, 더 분명하게 알고 있다니!
데미안은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럼 내 말이 맞는 거구나.
나는 그렇게 추리해낼 수가 있었어.
그럼 질문은 하나 남은 셈이군.
조금 전에 너와 헤어진 그 애가 누군지 알고 있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비밀을 들키고 말았다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비밀은 밝은 곳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어떤 애 말이니? 나 밖엔 아무도 없었는데.”
그는 웃었다.
”말해봐!” 그는 웃으며 재촉했다.
“그 애의 이름이 뭐니?”
나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츠 크로머 말이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넌 정말 눈치가 빠른 애구나.
우린 친구가 될 만해. 이제 조금만 더 물어보자.
그 크로먼지 뭔지 하는 녀석은 아주 나쁜 애야.
녀석의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걸 뭐.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응 그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나쁜 애야. 악마 같은 녀석인걸.
하지만 그 녀석에게 들키면 안 돼.
제발 아무 말도 말아줘.
넌 그 녀석을 알고 있니? 크로머도 너를 알고?”
”진정해, 그 녀석은 벌써 가버리고 없으니까.
그리고 그 애는 나를 몰라. 아직은,
하지만 그 녀석에 대해 알고 싶어. 그 애는 국민학교에 다니니?”
”응.”
’몇 학년이니?”
’오 학년---하지만 아무 말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아무 말도 말아줘.”

”가만 있어봐. 네겐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녀석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줄 수가 없니?”
”해줄 수 없어. 그건 안 돼. 날 좀 내버려둬.”

그는 잠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유감이로구나.”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린 실험을 좀더 계속할 수도 있을 건데.
하지만 난 널 괴롭히고 싶지 않아.
그런데그 녀석을 네가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조금도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
그렇지 않니? 그 따위 두려움은
괜히 우리 자신을 망치게 만드는 것이니까 한시바삐 벗어나야 돼.
네가 진정한 사내 대장부가 되려면
그 따위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알겠니?”

”물론 네 말이 옳아‥‥‥.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걸 머.
정말 모를거야. ‥‥‥”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난 널 더 잘 안다는 걸 너도 봤지 않니.
그 녀석에게 빚이라도 진 거야?”
”그래, 그렇기도 해. 하지만 그게 제일 큰 문제는 아니야.
그걸 말할 순 없어. 절대로. 말할 수 없어.”
”만일 그 녀석에게 빚진 돈을 내가 대신 갚아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니?
난 갚아줄 만한 돈이 있어.”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제발 부탁이야. 아무에게도 그런 말은 말아 줘.
한마디도!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무척 불행해지고 말 거야.”
”날 믿어, 싱클레어. 넌 언젠가는 그 비밀을 내게 털어놓게 될 거야.”
’절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성급하게 외쳤다.
”너 좋을 대로 해.
난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아마 내게 이야기해줄 거라고 생각해.
물론 네 스스로 말이야.
설마 나도 너에게 크로머 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렇지 않아.
하지만 넌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 아무것도 몰라.
난 그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뿐이야.
나는 절대로 크로머가 한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아.
그건 믿겠지? 너는 내게 빚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데미안이 그런 것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점점 더 궁금하게 여겨졌다.

’이젠 집으로 가야 해.”
그는 이렇게 말하며 빗발 속에서 거칠게 짠 모포로 만든 외투깃을 여몄다.
”우린 벌써 많은 것을 이야기했으니까 한마디만 더 할게.
너는 그 녀석으로부터 벗어나야 해.
다른 도리가 없으면 그 녀석을 때려 죽여버려!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난 무척 놀라고도 유쾌해 할 거야. 나도 널 도와줄게.”

갑자기 새로운 불안이 나를 덮쳐왔다.
카인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고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일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좋아.” 막스 데미안이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가, 우린 틀림없이 그 녀석을 해치우게 될 거야.
때려 죽이는 것이 가장 간단하긴 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가장 최선인 법이거든.
네가 그 녀석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건 하나도 좋은 일이 못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