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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1

오늘의 쉼터 2011. 5. 14. 23:04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1

 


내 고민으로부터의 구원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왔고,
그것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일이 내 생활 속에 들어왔는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학교에 새로 전학온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우리 마을로 이사온 부유한 미망인의 아들이었는데
소매 둘레에 검은 상장을 두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상급 학년이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고
나 역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묘한 아이는 겉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보여 누가 봐도 소년같지 않았다.
우리들 어린 소년 사이에서 그는 마치 어른처럼
색다르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므로 호감을 받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같이 놀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더욱이 싸움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선생님을 대할 때의
그의 어른스럽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는 막스 데미안이라고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때때로 합반을 하곤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어느 날 우리는 큰 교실에서 합반 수업을 하게 되었다.
데미안의 반과 함께였다.
우리들 하급생들은 성서 이야기를 들었고 상급생들은 작문을 지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자주 데미안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상스럽게 나를 매혹시켰으며
나는 이 총명하고 밝고 비범해 보이는 얼굴이 주의 깊게
그리고 지혜롭게 자기의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전혀 과제를 하고 있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았고
독창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보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내게 썩 호감을 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에 대해 나는 일종의 저항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너무 초연해 보였고 냉담했다.
그의 태도는 도전적으로 느껴질 만큼 자신만만했으며
눈은 마치 어른 같은 표정을 띠고 있었으며
- 그런 것을 아이들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

다소 슬픔이 어린 듯하면서도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쉴새없이 그를 쳐다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 어떤 사랑스러움이랄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어쩌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그 당시 그가 학생으로서 어떤 모습이었던가를 회상해보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점에서 평범한 아이들과는 달리
철저히 이색적이고 개성이 강했으며
그 점이 남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했던 것이라고.
-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그것은 마치 농부의 아들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변장한 왕자와도 같이,
어색한 농부의 옷차림을 하고 또 행동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는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제각기 흩어져 가버리자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물론 그는 우리들이 하는 것처럼 평범한 인사말을 건네왔지만
너무 어른스럽고 점잖게 들렸다.

”우리 좀더 함께 갈 수 있는 거니?” 그는 친절한 태도로 물었다.

나는 기뻐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 집이 어디쯤인지를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아, 거기?” 그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그 집이라면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너희 집 현관 위의 독특한 장식물이 내 흥미를 끌었거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곧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우리 집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 집 대문의 아치위에 초석으로서 일종의 문장이 새겨져 있긴 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납작해져서
가끔 새로 칠을 하긴 했어도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그 문장은 우리 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난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나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그건 아마새이거나 그와 비슷한 무늬일 거야.
그런데 퍽 낡아서 잘 알아보기 힘들 건데.
우리 집은 옛날에 어느 수도원의 소유였었대.”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잘 살펴봐. 그런 옛 문장은 퍽 흥미로운 것이야.
내가 보기엔 매처럼 보였어.”

우린 계속 함께 걸었는데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그가 웃었다.

”그래, 아까 수업 시간에 우린 한 반에 있었지.” 그는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이마에 표지를 달고 다닌 카인의 이야기를 배우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니? 어때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니?”

물론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이 배워야만 하는 과목 중 어느 하나도 내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꼭 어른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데미안은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얘, 나까지 속일 필요는 없어.
그러나 그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 배우는 다른 어떤 것보다
좀 생각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
선생님은 실제 거기에 대해선 별로 가르치지 않으셨지.
그저 신이나 죄 같은 상식적인 이야기밖에은 안하셨으니까.
그러나 난 이렇게 생각해---.”

 

우리는 곧 조그만 교외의 주막집에 마주앉아
다소 미심쩍은 맛의 포도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언지 새로운 맛이 느껴지긴 했다.
나는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곧 취하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의 내부의 창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고 세계가 그 속에 비쳐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참으로 무섭게도 오랫동안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멋지게 해치웠다!

베크는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마침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아주 근사한 녀석,
재주있는 녀석이라 불렀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켰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나이많은 선배에게서
제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날뛰었다.

나는 독창력있는 녀석이라고 한 그의 말은
내 마음속에 감미롭고도 독한 포도주처럼 스며들었다.
세계는 새로운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사상은 수백의 세찬 샘처럼 솟구쳤으며 영혼과 불이 나의 내부에서 불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멋지게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리스인과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베크는 나로 하여금 정사에 대한 고백을 들으려 애를 썼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만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혼자서만 느끼고, 만들어내고,
공상해온 것은 나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술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베크 자신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일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평범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알폰스 베크는 열 여덟살쯤 되었을 뿐이지만 벌써 경험이 많았다.
모든 경험 가운데서도 베크는 특히 처녀들이란
아름다운 일이나 은근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경험을 하였는데
물론 그것은 좋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었다.

부인네들에게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그네들이 훨씬 그 점에 대해 영리하다는 것이었다.
가령 문방구 주인인 야크겔트 씨의 부인 같은 여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고
그 가게의 카운터 뒤에서 이제까지 있어온 일들을
어떤 책에도 적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멍청히 앉아 있었다.
물론 내가 야크켈트 부인을 사랑하게 될 리는 없을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이먹은 사람들에게는 나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샘이 흐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야기에는 약간의 거짓말도 섞여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했고
그가 말한 것은 내 생각 속에서의 사랑의 맛보다는
보잘것없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고 생활이며 모험이었던 것이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모두 실제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아주 일상적인 일처럼 취급하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다소 뜸해지고 활기를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천재적인 어린 녀석이 아니었으며
단지 어른의 말에 혹해 귀기울이고 있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수개월 동안의 나의 비참한 생활에 비한다면 천국에서의 일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주막에 앉아 있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미흡하나마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맛보았고 혁명의 징후를 감지했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스등의 곁을 지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고 사실 몹시 괴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외에 무엇인가 매력과 감미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반란과 방종이었고 생명력과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보고 새파란 풋나기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욕하긴 했지만 나를 끝까지 책임졌다.
그는 나를 반즘 떠매다시피 하여 기숙사까지 데리고 왔고
어찌어찌해서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
무사히 들키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말을 멈추고 웃음띤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가 재미있니?”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카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야.
우리들이 배우는 것은 대개 어느 면으로는
전적으로 진실이고 정당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을 선생님들이 가르치시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는 거야.
대개는 다른 면에서 볼 때 더 나은 의미를 갖게 돼.
예를 들자면 카인의 이야기만 해도 그래.
그의 이마 위의표지에 대해서도
우린 선생님의 설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점이 많거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어떤 사람이 다투다가 형제를 해치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그후론 겁을 먹고 양보하게 된다는 것도 가능하긴 해.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겁주기 위해 특별한 훈장까지 일부러 달았다면
이건 좀 우스운 일 아니니?”

”그래, 그건 그래.” 나는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문제가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달리 어떤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까?”
그는 내 어깨를 쳤다.

”아주 간단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것은 바로 표지야.
이것 봐, 만약 남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 무엇인가를 얼굴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누구 하나 감히 그를 건드리려는 사람이 없고,
그의 자식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남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단 말야.
추측이 아니라, 그들의 이마에 무슨
소인 찍힌 우표 같은 것이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닌 게 확실해.
세상에 그런 심한 일은 잘 없으니까.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무언지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에게 있고
평범한 사람들보단 좀 엄격하고 지혜로와 보이면서도
대담한 그 무엇인가를 그들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을 거야.
이 사람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웠던 거야.
이것이그가 ‘표지’를 지니게 된 내력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각자 자기 식으로 설명하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에에 편리한 대로 자기를 정당화시키고 싶어하거든.
사람들은 카인의 자식들이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표지를 훈장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전혀 그 반대로 해석한 거야. 이 표지를 가진 사람은 무섭다고 말한 거야.
또 사실 그러하기도 했겠지.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이들에겐 두려운 존재니까.
두려움을 모르는 강한 종족이 자기네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강한 종족에게 일종의 보복을 가한 거야.
그들이 두려워 떤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일종의 별명과 전설을 만들어서 붙였던 거지. 내 말 이해하겟니?”

”응, ---그건 다시 말하면---카인이 정말은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사실이 아니란 거지?”
”그렇다고 할 수도 잇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어.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일수록 사실에 가까워.
하지만 그 사실들이 언제나 사실 그대로 기록되고
옳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고는 볼 수 없는 거야.
간단히 말하자면 난 카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해.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단순하게 지껄여대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불과한 거야.
그렇지만 카인과 그의 자식들이 일종의 ‘표지’를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만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나는 대단히 놀랐다.
”그럼 동생을 죽였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믿니?”
나는 충격을 받아 이렇게 물어보았다.
”물론 사실이야. 분명히 그건 사실일 거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였던 거야.
그들이 정말 형제였던가 하는 것에는 의심이 가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점이 아니야.
결국 모든 사람들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거니까.
따라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인 것에 불과한 거야.
그것은 무척 영웅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러나 하여간 약한 자들은 두려움을 느꼈던 거야.
그들은 한탄했겠지.
그렇지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렇다면 왜 그들을 해치우지못하지?’
하고 물으면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
할 수가 없어. 그자들은 표지를 달고 있어.
신이 그들에게 표지를 주셨거든’ 하고 말한 거야.
대충 이렇게 해서 그 황당한 이야기가 날조되었을 거야.
아, 참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지. 그럼 잘 가!”

그가 알트 거리로 구부러져 돌아가자
혼자 남겨진 나는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가버리자마자 이제까지 한 그의 이야기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실로 여겨졌다.
카인은 강한 사람이고 아벨은 겁쟁이였다니!
카인의표지가 훈장이라니!
그건 불합리한 이야기였으며 신에 대한 불경스럽고 방자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신은 어디에 계셨던 말인가?
신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아벨을 사랑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건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데미안이 나를 놀리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였다.
정말이지 굉장히 영리한 아이이긴 했다.
그리고 말도 조리있게 잘했고, 그렇지만 그렇게 ---아니다---.

 

나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나 어떤 다른 종류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또 오래 전부터 몇 시간, 아니 저녁 나절 내내
그렇게 씻은 듯이 프란츠 크로머의 존재를 잊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서에 적혀있는 카인의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보았지만
그 내용은 간단 명료했고,
그 속에서 특별한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짓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살인자들은 신의 애호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 그건 미친 소리였다.
내 마음을 깊이 끌어당겼던 것은 데미안이 모든 것은
쉽고 분명하다는 듯이 그렇게 훌륭하고 조리있게,
그런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것 뿐이었다!

내 자신 속에도 무언지 정돈되지 않고
무질서하기까지 한 것이 존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밝고 맑은 세계에 속해 있었으며
내 자신이 일종의 아벨이기도 했던 것인데
지금의 나는 너무도 깊숙이 ‘다른 세계’ 속에 굴러떨어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다, 나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한 가지 회상이 치밀어올라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하였다..

요즘의 이런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던 그 불쾌한 밤에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한 순간이나마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표되는
밝은 세계와 지혜의 이면을 단숨에 꿰뚫어본 듯이 멸시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카인이었고 이마엔 표지까지 달고 있었으면서도
수치심을 느끼기보단 훈장을 단 것처럼 으스대며
나의 죄악과 불행을 통해서 나는 아버지보다도,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도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경험이 어떤 분명한 사상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지극히 불행한 상태에서도 엉뚱한 긍지를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데미안은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해
아주 이상스런 방향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카인의 표지에 관한 해석도 그러했다.
어른스러운 그의 눈이 그때 어떻게 빛났던가!
그러자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스쳐갔다.
데미안 자신이야말로 일종의 카인이 아닌가?
그가 자신을 카인의 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그는 카인을 옹호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는 그러한 힘을 눈빛에 담을 수가 있을까?
경건하고 신의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들’ 즉
그 비겁한 사람들에 관해서 그는 왜 그렇게 빈정대듯이 말하는 것일가?
나는 이 생각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돌멩이 하나가 샘물에 떨어진 것이었고 이 샘은 나의 어린 영혼이었다.
한동안, 아니 매우 오랫동안 카인의 살인과 표지에 관한 문제는
인식과 의심과 비평에 대한 나의 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도 데미안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카인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전학생’에 대해 많은 소문이 나돌았다.
만약 내가 그 소문을 전부 들을 수 있었으면
그를 아는 데 퍽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데미안의 어머니가 퍽 부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절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며
그의 아들도 그렇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교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막스 데미안의 체력에 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싸움을 걸었다가 응하지 않자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던 자기 반에서
제일 힘 센 아이를 거뜬히 이겼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광경을 보았던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데미안은 단지 한손으로 그 아이의 멱살을 잡고 눌렀을 뿐인데도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항복하고는 도망을 쳤는데
며칠이나 팔을 못쓰더라는 것이었다.

하루 저녁 동안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 모든 소문들이 얼마간 무성하였고 그 동안은 굳게 믿어졌으며
언제나 흥분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그 정도의 소문에 만족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문이 돌았는데
그 소문에 의하면 데미안이 어떤 여자와 친근한 사이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란츠 크로머와 나는 변함없이 괴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며칠즘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나는 그에게 단단히 묶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꿈 속에서까지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고,
그가 실제로는 하지 않은 일까지도 나의 공상이 그로 하여금
꿈속에서 그런 일을 하도록 그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나는 그의 완전한 노에였다.
나는 현실에서보다 꿈속에서 -나는 몹시 꿈이 많은 아이였다 -
더 많이 살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힘과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있었다..
특히 나는 크로머가 나를 학대하고 내게 침을 뱉고 내 무릎을 짓밟으며,
더 나쁜 일은 나를 무서운 범죄로 유인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아니 유인했다기보다는 그의 강력한 힘에 의해
강요당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리라.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 꿈에서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잠에서 깨었는데,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이었다.
크로머가 칼을 갈아서 나에게 주었고
우리들은 가로수 뒤에 숨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몰랐었다.
누군가가 그곳으로 오자 크로머는 내 팔을 건드려
내가 찔러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여기서 나는 잠을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