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두 개의 세계 - 1
내가 열 살 때,
우리가 살던 아담한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무렵의
체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 시절의 갖가지 일들이 내게 향기로이 밀려오고,
어두운 골목길이며 밝은 집과 탑, 시계 소리와 사람들의 얼굴,
아늑하고도 따뜻한 느낌이 가득 찬 방,
비밀과 유령에 대한 공포가 가득 찬 방들의 추억이
슬픔과 쾌적한 전율로 내 마음을 뒤흔든다.
따뜻한 좁은 방, 집토끼, 가정부, 가정 상비약, 말린 과일의 향기가 풍겨온다.
거기에는 두 개의 세계가 서로 엇갈리고 있었고
두 개의 극단으로부터 낮과 밤이 밀려왔다.
그 하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주 좁은 것이었으며
사실은 아버지 어머니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세계의 대부분은 내게 아주 친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근엄함,
모범, 엄격한 가르침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는 부드러운 빛, 밝음과 맑음이 함께 하고 있었으며
온화하고 다정스런 말씨, 깨끗한 손, 말쑥한 옷차림,
훌륭한 예절이 깃들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아침마다 찬송가가 불려졌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이 세계에는 미래에까지 이르는 선함과 곧은 길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참회, 관용과 선의,
사랑과 존경,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밝고 맑고 아름다우며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이 세계의 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우리들의 집 한가운데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으며,
다른 냄새를 풍기고 다른 말씨를 쓰며 다른 약속을 하고 다른 요구를 했다.
이 두 번째의 세계에는 가정부라든가 직공들이 속해 있었다.
귀신 이야기며 추한 소문이 있었다.
거기에는 당치도 않은 일, 요사스러운 일,
끔찍스런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들이 흘러넘쳤고
도살장과 형무소, 주정뱅이와 싸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 쓰러진 말, 강도, 살인, 자살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 이러한 모든 아름답고도 무서운 일들이,
거칠고 어둠침침한 일들이 바로 주위에서, 옆 골목과 이웃집에서 일어났고,
경찰이나 불량배가 거리를 휩쓸고, 주정뱅이가 자기 여편네를 두들겨 팼으며
저녁이면 젊은 처녀들이 공장에서 쏟아져나오고
노파들이 사람에게 마술을 걸어 아프게 만들기도 했으며
강도들이 숲속에서 살았고 방화범이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도처에서 이 또 하나의 격정적인 세계가 넘쳐흐르고 악취가 풍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 집을 제외한 도처에서.
그것은 참으로 황홀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속한 세계에 평화와 질서, 안정, 의무와 책임,
용서와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여러 가지의 일들,
소란스럽고도 황홀하고 어둡고 파괴적인 일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한달음에 어머니의 품으로 달아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 두 개의 세계가 그토록 가까운 이웃에 있고
그토록 가깝게 맞붙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리 집 가정부인 리나는 저녁 기도를 올릴 때,
안방 문가에 앉아 깨끗이 씻은 손을 빳빳하게 다름질한 앞치마에 단정히 모으고
맑은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 찬송가를 부를 때는 틀림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이며 우리들의 세계인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엌에서, 또는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머리가 없는 난장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때라든가,
혹은 작은 구멍가게에 있는 푸줏간에서 이웃집 여자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리고 다른 세계에 속했으며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든 일들이 바로 그러했다. 내 자신조차도 그러했다.
분명히 나는 밝고 바른 세계에 속해 있었으며 내 부모님의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눈과 귀를 어떤 쪽으로 돌려도 거기에는 다른 세계가 있었다.
나는 다른 세계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설사 그런 사실이 내겐 낯설고 언짢은 일이라 해도,
그래서 그 세계에서는 보통 꺼림칙한 양심의 가책과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따금 무엇보다 즐겨 금지된 세계에서 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밝은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이 없는,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세계로 돌아오는 것처럼 여겨진 적도 흔히 있었다.
물론 내 자신의 삶의 목표가 부모님처럼 되는 일이며
비할데 없이 밝고 맑은 훌륭한 절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너무나 멀었다.
거기에까지 이르자면 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학업을 계속하고 시험을 치러야 했지만
길은 한사코 다른 캄캄한 세계의 옆이 아니면 그 한가운데를 통해 갔고
그 세계에 아주 머물거나 어쩌면 그 속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운명에 빠져버린 방탕한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무척 열중해서 읽었다.
거기에서는 아버지와 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언제나 구원이며
옳은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옳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편으론 악
한이나 방탕아들에 관한 대목에 나는 더 흥미를 느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방탕아가 회개를 하고 다시
밝은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불만스럽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고 되도록이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긴 했었다.
어쨌든 그런 종류의 생각이란 단지 희미한 공상으로나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의 하나로 마음의 맨 밑바닥에 깔려 있을 뿐이었다.
악마를 생각할 때도, 그것이 변장하고 있건
아니면 본래의 모습으로 있건 언제나 저 아래에 있는 거리나
혹은 시장통이나 요리집 따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었고
결코 우리들의 세계 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나의 누나들 역시 밝은 세계에 속해 있었다.
누나들은 처음부터 나보다는 훨씬 더
부모님께 가까이에 있는 존재처럼 생각되었고
나에게 비하면 훨씬 착하고 몸가짐이 바르고 나쁜 점이란 없었다.
물론 누나들에게도 다소의 결점이나 나쁜 버릇은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 같진 않았고, 무엇보다도 나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의 경우 악마와의 만남은 아주 답답하고 괴로운 것이었으며,
나에겐 어두운 세계가 훨씬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누나들은 부모님과 같이 칭찬을 받고 공경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누나들과 싸움을 했을 때도 시간이 지나 양심에 비추어보면
언제나 내가 나빴고 싸움 건 쪽이었기 때문에 용서를 비는 것도 항상 나여야 했다.
누나들을 욕하는 것은 부모님과 선과 도덕을 모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지낼 수는 없어도 더 할 나위 없이 불량한
거리의 부랑아들과 어울릴 수는 있는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는 밝은 날에 누나들과 함께 노닌다든가
훌륭하고 품위있는 빛 속에 있는 자신을 본다든가 할 때는
흐뭇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천사라면 마땅히 그러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것이었고
밝은 음악과 향기로운 냄새 속에서
크리스마스와 행복에 싸여 있는 천사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달콤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 그러한 날이 내게 오기란 얼마나 드문 일이었던가.
때로 나는 허락되어 있는 어린애다운 좋은 놀이를 하고 있다가도,
누나들에게 괴퍅한 성미를 참지 못해 싸움을 걸었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몹시 화가 치밀어 거친 행동을 하고
나오는 대로 막말을 하는 가운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후회스러운 욕설을 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으례 후회로 가득 차
초라하고 어두운 심정으로 보내는 몇 시간이 계속되고,
용서를 빌어야만 하는 고통스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이 지나면 다시 밝은 빛과 다툴 것 없는
조용하고 고마운 행복의 몇 시간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같은 반의
시장과 산림관의 아들이 가끔 내게 놀러오곤 했다.
둘 다 다소 난폭한 아이들이긴 했지만 선량하고 안정된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들이 늘 경멸해 마지않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몇몇 이웃 아이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명에 대해서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수업이 없던 어느 날 오후 - 아마 내가 열 살쯤 되던 해였던 것 같다 -
나는 이웃에 사는 두 아이와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어떤 큰 아이 한 명이 다가왔다.
열 세 살쯤 되는 힘이 세고 난폭한 아이로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복점을 하고 있었지만
술주정뱅이였고 가족 모두 평판이 좋지 않은 형편이었다.
나는 이 프란츠 크로머를 잘 알고 있었고 내심 그를 두려워했으므로
그가 우리들에게 끼어든 것이 꺼림책했다.
그는 벌써 어른처럼 행동했는데
젊은 직공들의 말투며 걸음걸이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다리목에서 기슭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이지 않는 다리 기둥 뒤로 돌아갔다.
아치 형의 다리 기둥과 천천히 흘러내리는 냇물 사이의 기슭은
온통 쓰레기, 유리 조각, 녹슨 철사뭉치,
그밖의 잡동사니들로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물론 곧잘 쓸 만한 물건들이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프란츠 크로머가 시키는 대로
주변을 헤집고 다니다 찾아낸 잡동사니들을 그에게 보여야 했다.
그러면 크로머는 그중 쓸 만한 것을 골라
호주머니에 집어넣거나 물속으로 팽개치거나 했다.
그는 납이나 놋쇠, 주석으로 만든 물건이 없는지 조심해서 찾아보라고 했고,
그런 것은 모든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는데 뿔로 만든 낡은 빗도 챙겨넣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렸는데,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신다면
그와 노는 것을 말리실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가 프란츠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한패로 취급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하듯이 대해주는 것이 오히려 기쁘기도 했다.
그가 명령하면 우리는 복종했는데 그것은 마치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내가 프란츠와 함께 어울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침내 우리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었다.
프란츠는 물에다 침을 뱉으며 어른처럼 행동했는데
그는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서 마음대로 아무것에나 맞출 수가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들은 우리 또래의 학생답게 여러 가지 허풍을 늘어놓거나
나쁜 짓을 한 것을 자랑스럽게 으스대거나 했다.
나는 잠자코 있으면서도 내가 그러는 것이
크로머의 노여움을 사게 되지나 않을까 몹시 두려웠다.
나와 함께 있던 두 아이는 처음부터 내게서 멀어져 아예 크로머에게 붙었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외톨이였으며 내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태도가
그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인데다 훌륭한 가문의 아들인 나를
프란츠 크로머가 좋아할 리가 없었으며
내 친구들도 여차하면 나를 못본 체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불안한 나머지 나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꾸며대기 시작했다.
나는 대담하게도 도둑 이야기를 꾸며대었고 그 영웅적인 도둑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시내에서 동떨어진 외진 물방앗간 옆 과수원에서 한 친구와 같이
밤중에 사과를 한 자루나 훔쳐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흔해빠진 사과가 아니라
래넷 종과 금빛 팔멘 종 좋은 최고급 사과만 훔쳤다고 말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잠깐 동안의 어색함을 피해 이런 거짓말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거짓말은 곧잘 그럴 듯하게 할 수가 있었다.
금방 이야기를 끝내면 혹시나 더 난처해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나는 더욱 솜씨를 부렸다.
한 사람이 밑에서 망을 보는 동안
한 사람은 나무 위에 올라가 사과를 따서 아래로 던졌다.
결국엔 자루가 너무 무거워 둘이서 들고 올 수가 없어서
반쯤은 남겨놓고 갔다가 반 시간쯤 뒤에 다시 가서 가져왔다는 말까지 했다.
이야기를 다 끝냈을 때 나는 약간의 박수까지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아이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무표정했지만
크로머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날카롭게 나를 훑어보더니 위협하는 투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야.”
”틀림없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그럼, 틀림없이 했어.”
나는 지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맹세할 수 있어?”
나는 겁이 덜컥 났지만 계속 그렇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맹세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결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좋아.” 크로머는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조금 뒤
크로머가 돌아가자고 말했을 때 무척 기뻤다.
다리 위에 이르자 난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머뭇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혼자 서둘 건 없어. 어차피 집으로 가는 길은 같잖아.”
프란츠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도 나는 감히 도망칠 수가 없었고
그는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윽고 우리 집 대문이 보이고 육중한 놋쇠 손잡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창문과 어머니 방의 커튼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저절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밝고, 평화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뒤어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프란츠가 뒤따라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안마당쪽으로만 햇빛이 들어오는 서늘하고 침침한 타일 복도에서
프란츠는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팔을 붙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서둘 건 없어.”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팔을 잡은 그의 손 힘이 무쇠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가슴을 쳤다.
급히 지금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면 누군가 달려나와
나를 구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먼저 물었다.
”뭐 대수로운 건 아냐. 잠깐 네게 뭘 물어보려는 것뿐이야.
굳이 다른 아이들이 들을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 대체 무슨 이야기를 또 해야 하니? 난 올라가봐야 해. 알겠어?”
”넌 알고 있잖아, 방앗간 옆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를.”
프란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몰라. 난 그저 방앗간집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프란츠가 한쪽 팔로 내 몸을 감아 바짝 낚아챘기 때문에
바로 코 앞에 그의 얼굴이 닥아와 있었다.
심술궂은 시선과 악의에 찬 웃음을 띤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 내가 가르쳐주지.
사과를 도둑맞고 있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야.
게다가 훔쳐 간 사람을 알려주면 2마르크를 주겠다고
주인이 말했다는 것도 난 알고 있어.”
”뭐라구? 아, 맙소사!”
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넌 설마 주인에가 말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나는 확실히 느꼈다.
그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에게 있어 배신 따위는 결코 죄책감을 느낄 만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으니까.
”가서 말하지 말라구?”
프란츠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이봐, 넌 내가 2마르크 짜리 지폐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위조화폐라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뭐야.
난 가난뱅이란 말야. 너처럼 돈 많은 아버지를 가진 것도 아니겠다,
내가 왜 2마르크를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겠니.
그 주인은 아마 조금 더 줄지도 모르는데 말야.”
프란츠는 갑자기 나를 놓아주었다.
우리 집 현관은 더 이상 평화나 안정의 향기가 풍기는 곳이 아니었고,
나를 감싸고 있는 세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주인은 나를 도둑놈이라고 고발하겠지.
사람들은 이 일을 아버지에게 말할 것이고
어쩌면 경찰이 날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혼돈스런 세계에 존재하는 갖가지 공포가 나를 위협해 왔다.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맹세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에게 돈을 주지 않는 한 위기를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다 샅샅이 훑어 보았다.
사과 하나, 칼 한 자루도 내겐 없었다.
그때 불쑥 시계 생각이 났다. 낡은 은시계였다.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가지고 다닐 뿐이었지만
옛날 할머니 적부터 전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시계를 끄집어내었다.
”크로머, 제발 나를 일러바치지는 말아줘.
그래서 네게 좋을 게 뭐가 있니?
내가 이 시계를 줄게. 자, 좀 봐. 난 정말 가진 게 없어서 그래.
이걸 가져, 은으로 만든 거야, 아주 고급이야.
물론 좀 고쳐야 되긴 하지만.”
그는 싱긋 웃으며 시계를 큰 손으로 받아쥐었다.
그 손을 보며 나는 그의 손이 내게 대해 얼마나 난폭하며
얼마나 엄청낙 깊은 적의를 갖고 있는지,
내 생활과 평화를 파괴하려 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은시계란 말이야.” 나는 무력하게 떨며 말했다.
”은이면 무슨 소용이야, 낡아빠졌는데.
그렇게 좋은 거면 너나 고쳐 가지렴.”
경멸에 가득 찬 말투였다.
”하지만, 프란츠.”
나는 그가 그대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봐. 우선 이 시계를 받아줘.
정말 은으로 만든 거야. 은이라구, 진짜야.
난 가진 게 이것밖엔 아무것도 없단 말야.”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넌 내가 누구에게 가려는지 잘 알겠지.
경찰에 가서 말해줘도 돼. 난 순경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몸을 돌려 가버리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일이 그런 식으로 되어선 안 된다.
그가 이대로 돌아가버릴 경우 벌어질 온갖 일들을 감당해야 할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프란츠,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겠지. 너 농담이지?”
나는 초조한 나머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걸했다.
”물론 농담이야, 하지만 그러려면 넌 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프란츠. 어떻게 하면 되겠니?
말을 좀 해봐. 네가 시키는 데로 할게.”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기분나쁜 웃음을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
그는 짐짓 사람좋은 태도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 거 아냐?
나는 2마르크를 벌 수 있는 거야.
또 그것을 쉽게 포기할 만큼 부자도 아니고 말야.
그쯤은 너도 알겠지. 하지만 넌 부자야,
시계도 갖고 있잖아. 내게 2마르크만 주면 돼.
그러면 만사 조용하게 해결되는 거야.”
난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2마르크라니!
그건 내가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10 마르크나 100 마르크, 1000 마르크와 같은 것이었다.
내겐 돈이 없었다.
어머니께 조그만 저금통을 맡겨놓은 것이 있었고
그 속엔 아저씨가 오셔서 주셨을 때나, 아니면 비슷한 다른 기회에 생긴
10페니 짜리 동전이나 5페니 짜리 동전 몇 개가 들어 있긴 했었다.
그것 외엔 한푼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 나이엔 아직 용돈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푼도 가진 게 없어. 돈이라곤 정말 한푼도.
그렇지만 다른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난 인디언 책도 가지고 있고 병정들이며 콤파스도 있어. 그걸 갖다 줄께.”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부탁했다.
크로머는 대담해 보이는 입술을 심술궂게 씰룩거리다가
땅바닥에 침을 퉤퉤 뱉았다.
”웃기지 말아! 쓰레기 따위를 내게 주겠다는 거야 뭐야?
콤파스라고? 더 이상 날 화나게 만들지 말고 돈을 내놔!”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걸.
돈은 구할 수가 없어.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단 말야.”
”정 그렇다면 내일까지 여유를 주지. 내일 2마르크를 가져와.
학교를 마친 후에 아래 시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 되는 거야. 만약 돈을 안 가지고 오면 그땐 정말 큰일날 줄 알아.”
”그렇지만 어디서 그런 큰 돈을 구하란 말야?
정말 어떻게도 안 되면 어쩌지? 아아---“
”돈은 너희 집에 얼마든지 있잖아.
그 다음에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럼 내일 학교 마친 후에 보자. 알았지?
만약 안 가지고 오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그는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침을 한 번 더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의 생활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대로 어디론지 영영 도망쳐버릴까,
아니면 물에라도 빠져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확실한 형체를 갖고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캄캄한 현관 맨 윗층계에 쪼그리고 앉아
불행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장작을 가지러 가려고 광주리를 들고 내려오던 리나가
그렇게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식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리문 옆의 옷걸이에 아버지의 모자와 어머니의 양산이 걸려 있엇다.
이런 것들을 보자 우리 집의 분위기와 애정이 내게 물밀 듯 밀려왔고,
나의 마음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그리운 고향 집의 방 풍경과 향기를 다시 만났을 때와 같은
감탄과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속해 있는 밝은 세계였으며
나는 죄를 가득 짊어진 채 낯선 물결 속에 깊숙이 잠겨
모험과 죄악에 몸을 맡기고, 적에게서 협박을 받고,
위협과 불안과 치욕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된 자갈이 깔린 고급 현관 바닥,
가구 위에 걸린 커다란 그림,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누나의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더 그립고 부드럽고 소중하게 여겨졌지만,
이미 더 이상 그런 것들은 내게 위안이 될 수 없었으며
확실한 내 것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엄한 질책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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