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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2

오늘의 쉼터 2011. 5. 14. 22:56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2

 

나는 그 밝고 고요한 세계 속에 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깔개에 지워지지 않는 자욱을 남긴 더러운 발을 하고 있었고
우리 집의 세계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가지고 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비밀과 불안을 가졌다 하더라도
오늘 내가 가져온 것에 비하면 모두가 장난이며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운명이 나를 쫓아와 두 손을 내게 뻗친 것이며,
이것으로부터는 어머니조차 나를 구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고,
또 어머니에게는 알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죄가 도둑질이건 거짓말이건
-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어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
그건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죄는 이도저도 아니라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나는 그를 따라갔던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이상으로 크로머에게 그러했던가?
무엇 때문에 그 따위 도둑질 이야기를 꾸며댔던가?
그런 짓이 진정 영웅적일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었을까?
이미 악마가 내 손을 잡고 있었고 적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동안 나는 더 이상 내 앞에 다가선 공포조차 느끼지 못한 채
무엇보다도 내 앞길이 이 순간부터 점차 내리막길이 되어
마침내는 암흑으로 이르고 있다는 확신에 몸을 떨었다.
지금의 이 잘못으로 인해 또 새로운 잘못을 저질러야 할 것이고,
누나들과 다정히 지내는 일이며
부모님께 드리는 인사와 입맞춤도 모두 거짓이라는 것,
그들에게 숨길 수밖에 없는 운명과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아버지의 모자를 보았을 때,
잠깐 어떤 믿음과 희망의 빛이 내 마음을 스쳤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말씀드려 아버지의 처분에 따라 벌을 받으면,
그리하여 아버지를 내 편이 되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의 참회, 괴롭고 가슴 아픈 시간,
용서를 비는 괴로운 탄원이 되고 말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미로운 위안처럼 느껴졌던가.
얼마나 아름다운 유혹이었던가.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비밀을 가지고 있고,
오직 내 스스로 감당해내어야 할 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일 것이었고,
이 순간부터 앞으로는 영원히 좋지 못한 길로 빠져들어
악한들과 비밀을 나누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며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는 어리석게도 어른인 체, 영웅인 체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로 일어날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께서내 신발이 젖은 것에 대해
꾸중을 하신 것은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꾸중으로 해서 아버지는 더 나쁜 사태를 깨닫지 못하셨고
나는 그저 그 비난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남몰래 다른 일에 그것을 연관시켜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묘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불꽃튀듯 일어났는데
그것은 예리하게 날이 선 반항감이었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해 우월감을 느낀 것이었고,
젖은 신발에 대한 잔소리는 아주 경멸스럽게 생각되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흡사 사람을 죽인 죄를 지은 판국에
빵 한 조각 훔친 것에 대해 심문받는 사람의 심정이었다.
그것은 추악하고 적대적인 감정이었지만
강하고 진한 매력을 가진 것이었고
이런 모든 생각들은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나를 내 비밀과 죄에 결박시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크로머는 경찰에다 나를 밀고했을지도 모르고,
비록 집안 사람들은 날르 한갓 철부지로 취급하고 있지만
내 머리 위에는 폭풍이 휘몰아쳐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순간이 일련의 체혐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하고 깊이 남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소년 시절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 가해진 최초의 톱질이었으니,
그 기둥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무너뜨려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감지되지 않는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우리들의 운명에 내면적이고본질적인 선이 그어져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톱질이나 균열의 흔적은 다시 아물고 잊혀지는 것이지만
가장 은밀한 마음의 암실 속에서 살아남아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문제를 잘 생각해서 난관을 타개해나갈
좋은 방도를 강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는 있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나는 저녁 나절 내내 변해버린 집안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벽시계와 책장, 성서와 거울,
책꽂이와 벽에 붙은 그림들이 내게서부터 작별을 고했고,
나는 내 생활의 온갖 좋은 점들이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채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젠 내 자신이 스스로 어둡고 낯선 세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한가운데로
새로운 흡인력을 가진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음을 느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의 맛을 보았고, 그 맛은 쓰디쓴 것임을 알았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며
놀라운 변화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기 때문이었다.
겨우 잠자리에 들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녁 기도가 최후의 죄를 사하는 불처럼 내 위에 쏟아졌고,
식구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 하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
곡조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담즙이며 독이었다.
아버지가 축도를 올리실 때도 나는 함께 기도를올릴 수가 없었고,
아버지가 마침내 - 우리와 함께 하옵시기를 -하고 기도를 끝냈을 때는
심한 마음의 경련이 나를 가족적인 단란함으로부터 갈라놓았다.

 

차갑고 깊은 피로에 싸여 나는 내 방으로 갔다.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따뜻함과 안도감이 부드럽게 나를 감쌌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고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께서는 여느 때처럼 잘 자라는 밤인사를 해주셨고,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는 아직 방안에 남아 있었으며
어머니가 든 촛불의 가느다란 빛이 아직도 문 틈으로 새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다시한번 내게 와주실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알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다정하게 입맞춰주시고는 물으시겠지,
다정하고도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물으시겠지,
그럼 나는 울 수 있을 것이고 목구멍에 걸려 있는 돌덩이가 녹아 버릴 것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나는 용서를 빌리라.
그러면 모든 것은 다 해결되고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 틈으로 비쳐들던 촛불의 빛이 다 사라져버린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낮의 사건을 상기하였고 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똑똑하게 그를 보았다.
그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에는 야비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이젠 도저히 피할 길 없다는 절망감이 커져왔고
그 얼굴은 더 크고 흉측하게 변해갔고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내가 군 꿈은 크로머와 오늘의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누나와 내가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주위에는 온통 휴일의 평화와 환히가 있을 뿐이었다.
밤중에 선뜻 잠이 깨었을 때조차도 그 행복감의 뒷맛을 느낄 수 있었고
누나들의 흰 여름옷이 햇빛에 반짝이던 모습이 눈에 선했으나
어느 한순간 나는 천상의 낙원에서 현실로 굴러떨어져
다시 사악한 적의 눈과 마주쳤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서 이렇게 늦도록 아직 잠자리에 있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고 어디 아프나고 걱정을 하시자 나는 구토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간의 이득을 보았다.

조금 아픈 덕분에 아침나절 내내 카밀레 차를 마시면서
잠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옆 방에서 어머니가 청소하시는 소리,
또 리나가 복도 바깥에서 고기 장수와 흥정하는 소리를 재미있어 하면서 들었다.
수업이 없는 오전은 어떤 환상의 세계나 동화 속의 세계 같았고
햇빛은 찬란하게 방안을 비췄지만
학교의 초록색 커튼에 가리워진 그런 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조차 흥미가 없었으며
뭔가 박자가 틀려버린 소리 같았다.
그래, 만약 내가 지금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렇지만 난 가끔 그랬던 것처럼 단지 약간 아플 뿐이었고,
이 정도 아픈 것으로는 아무 일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학교를 결석할 수 있는 핑계는 될 수 있지만
열 한 시에 시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크로머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친절한 간호도 이번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귀찮고 괴로울 뿐이었다.
나는 잠든 척하고 누워서 여러가지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모든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어쨌든 나는 열 한싱는 시장엘 가야만 했다.
그래서 열 시쯤 일어나 머리가 좀 덜 아프다고 했다.
이럴 경우 다시 자리에 눕던지 학교를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학교 가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돈 한품 없이 크로머에게 갈 수는 없었다.
내 작은 저금통에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안에 든 돈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돈으로 크로머를 만족시키기는 어림도 없었지만
한푼도 없이 가는 것보다는 그것이라도 갖고 가서
크로머를 달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양말 바람으로 살그머니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
책상 속에 든 내 저금통을 꺼내 왔을 때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러나 어제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심장의 거친 고동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계단에서 처음으로 저금통을 살펴보고
그것이 잠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금통을 듣는 일은 쉬웠다.
가는 양철격자를 부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저금통을 부수었을 때는 무척 슬펐다.
이것으로서 나는 최초의 도둑질을 한 셈이었다.
그때까지는 사탕이나 과일을 몰래 꺼내 먹은 정도의 일밖엔 없었다.
비록 내 저금통이었지만 나는 지금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나는 크로머와 그가 속한 세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는 것과
자꾸만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악마가 나를 잡아간다 해도 되돌아설 길이 없었다.

나는 불안에 떨면서 돈을 세어보았다.
저금통에 들어 있었을 때는 제법 많이 든 것 같더니
막상 손에 쥐어진 것은 형편없이 적은 돈이었다. 65페니였다.
나는 현관 옆에다 저금통을 감추어놓고 돈만 꼭 쥐고는
이전에 현관을 나설 때와는 영 다른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누군가 이층에서 부르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도망쳐 나왔다.

아직 십 분 정도 시간이 있었으므로 나는 지름길을 일부러 피해
골목길을 통해 처음보는 것 같은 구름 아래를, 나를 바라보는 집들을 지나
나를 의심쩍게 바라보는 것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걸어갔다.
언젠가 학교 친구가 가축시장에서 1달러를 주운 일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신에게 내게도 그런 행운을 주십사고 기도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미 기도할 권리가 없는 놈이었다.
이제 와서 기도를 아무리 해도 저금통이 이전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멀리서 프란츠 크로머가 나를 알아보고는
나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어왔다.
내 곁에 가까이 온 그는 명령하는 듯이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쉬트로 거리로 천천히 걸어내려가
다리 건너의 작은 골목 끝에 있는 새로 지은 집 앞에서 멈춰섰다.
거기에는 일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고
문도 창문도 없이 담들만이 민숭민숭하게 서 있었다.

크로머는 일단 주위를 한 번 살펴본 후
문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담 뒤로 돌아가서는 나를 오라고 신호를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가지고 왔어?”
그는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움켜쥐고 있던 돈을 꺼내어 그의 손에 떨어뜨렸다.
마지막 5페니짜리 동전의 짤랑 하는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벌써 그는 그 돈이 얼마인지를 알아차렸다.

”65페니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는 겁먹은 태도로 대답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이젠 정말 한푼도 없어.”
”꽤 영리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비교적 온화한 어조로 나를 힐책했다.

”명예를 존중하는 남자들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해.
난 결코 네게 부당한 걸 요구하자는 게 아냐.
그런 니켈 돈 따윈 걷어치워. 너도 누군지 잘 알겠지만
그 사람은 값을 깎거나 할 사람은 아니야. 값은 정확하게 셈해 줄 거야.”
”하지만 내겐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
이건 내가 저금한 돈 전부야.”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냐. 하여튼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넌 내게 아직 1마르크 35페니 빚진 셈인데 언제 갚을래?”
”그래, 크로머. 꼭 갚을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일이든지 모래,
곧 더 많이 생길지도 몰라.

아버지한테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건 너도 알겠지.”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냐. 뭐 널 괴롭히려는 건 아냐.
다만 오전중에 그 돈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거지.
너도 알지, 난 가난해. 그런데 넌 나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고
아마 점심도 훨씬 맛있는 것을 먹었을 거야.
그렇지만 난 아무 말 않겟어. 좋아. 좀더 기다려주지.
모레 오후에 휘파람을 불면 그땐 다 가지고 나오는 거야.
내 휘파란람 소린 잘 알고 있겠지?”

그러고는 전에도 내가 종종 들어본 적이 있는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응, 알고 있어.”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다만 거래가 있었을 뿐
우린 서로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는 가버렸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만약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면 나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가끔 그 휘파란 소리를 들었다.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무슨 놀이를, 무슨 생각을 하건
그 휘파람 소리는 나를 따라다니며 내게 명령했으며,
끝끝내는 그것이 내 운명이 되어버렸다.

어느 조용하고 풍요한 가을 오후 내가 늘 아끼는 정원에나와 섰을 때
나는 보다 어리고 착하고 자유분방하고 잘 보호받고 있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 즐겨하던 놀이를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때 어디선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예기하고 있던
크로머의 휘파란 소리가 들려와서는
내 마음을 무서울이만큼 산란하게 흐트러놓았다.
그 휘파람 소리로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사라지고
공상은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또다시 협박자의 뒤를 따라 추악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는 곳에 가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그의 재촉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일이 계속된 것은 비록 수주일쯤이었지만
내게는 수년, 아니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다.

가끔은 리나가 요리대 위에 그냥 놓아둔 시장바구니에서 훔친 5페니나
1크로센(10페니)을가지고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크로머에게 욕을 먹고 멸시를 당했다.
나야말로 그를 속이고 다연히 줘야 할 그의 돈을 주지 않고
그에게서 돈을 도둑질해 가서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엇다.
평생을 통해 이때처럼 수난을 받은 적도,
이보다 더한 절망감, 이 이상의 굴욕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저금통은 장난감 돈을 넣어서 도로 제자리에 갖다두었고,
아무도 그 저금통엔 관심을 갖지도 않았지만
언제 발각당할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머니께서 가만히 내게 다가오실 때면 혹시 저금통에 관한 일을
묻지나 않으실까 해서 크로머의 휘파란 소리보다 더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한푼도 구하지 못한 채 그 악마에게 나타나는 때가 많아지자
그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그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를 대신해서 그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고,
십 분간 한쪽 다리로 뛰라고 한다든가
지나가는 사람의 웃옷에 종이조각을 붙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가책으로 나는 며칠 밤을
꿈에서도 시달리며 악마에게 쫓겨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결국 나는 병이 났다.
구토가 나고 곧잘 오한에 떨었으며, 밤엔 식은땀을 흘리고 열이 올랐다.
어머니께서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더욱 내게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내가 벌써 자리에 누었을 때 어머니께서 초콜렛 하나를 갖다 주셨다.
옛날 어렸을 적부터 내가 얌전하게 잘 지내면
잠이 잘 들도록 이런 것을 상으로 주시곤 했던 것이다.
지금 어머니가 여기 서 계시고 내게 초콜렛 한 조각을 내미시는 것이다.
나는 단지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어머니께서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아냐, 아냐. 아무것도 먹기 싫어.”
나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초콜렛을 내 머리맡에 놓으시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이튿날 어머니가 어젯밤의 일에 대해 캐물으시려 하자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한 번은 의사의 진찰을 받기도 했는데
그는 아침에 냉수욕을 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우리 집의 평화스러운 생활 속에서 나는 유령처럼 떨고 괴로와하며 지냈으며,
그런 상태는 일종의 정신착란이었다.

다른 사람과 생활을 함께 할 수도 없었으며
한순간도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지낸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종종 화를내시며 내게 이유를 물으셨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마음을 닫아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