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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8. / 켄트 너번

오늘의 쉼터 2011. 5. 8. 16:52

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8. / 켄트 너번

 

 

18. 남자와 여자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는 젊은 미국인이었고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규모가 큰 개인사업을 하고 있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까밀로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가 이란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서히 가까워졌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른 저녁에 아직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남아있는 마을 주변을 산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지역광장이나 샘물가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음료수를 마시거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것은 대화와 우정의 시간이며,
잡담과 구애의 시간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날 저녁 까밀로는 나에게 그의 친구 레자가
저녁 산책을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레자는 떠들썩하고 환상적이며, 항상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큰 특징은 커다란 웃음이었지만,
진지한 문제를 논의할 때면 지나치게 바보스러웠다.

우리는 달이 투스칸 언덕을 넘어 떠오를때, 산책을 시작했다.
전기불이 켜지기 시작하자 주위의 윤곽들이 선명해졌고
심지어 작은 거리들까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 앞에 세명의 여자가
유럽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레자가 내 팔목을 잡고는 조용하게 속삭였다.
"이걸 봐!"
그는 여자들에게 달려갔고 재빨리
그녀들의 앞에서 땅을 짚고 오른쪽으로 재주를 넘었다.
그는 마치 동물원에서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처럼 보였다.
그 여자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커다랗게 웃고는 이탈리아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까밀로는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놀라서 물었다.
"네가 하는 짓이 도대체 뭐니, 레자?"
"오! 여자들,"
그는말했다.
"그들은 그런 걸 좋아해."

레자의 생각은 틀렸다.
여자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밝은 분위기에서라면 여자들이 그런 행위에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건 여자들을 성적 추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고양이와 쥐의 성행위 광경이라는
곤혹스러움으로 만드는 것으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고양이로 연출될 뿐이다.

레자처럼 터무니없이 행동하는 남자는 물론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여자라는 존재를
남자에 종속된 존재로 낮추기에 열중한다.
너는 그런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픽업트럭의 남자, 엘리베이터 안의 사업가,
거리의 구석에 서있는 젊은 녀석들은 -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고,고함을 지르기도 하며,
몸 구석구석을 훔쳐보고,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말을건다 -
일반적으로 단지 그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슬프고 난처한 일이다.
이런 유치하고 역겨운 짓들은 모두 여자에 대한
우리의 필사적인 눈독들임을 나타내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 눈독은 본성이다.
여자는 태초로부터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에 붙어다니고,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를 격노케 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하고, 원하지 않게 되길 원한다.
우리는 그들을 평등하게 다루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남녀관계들의 어떤 부분에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성적 차이의 메아리가 남아있다.
이러한 메아리는 아마도 현실일 것이지만,
그 차이들이 우리 남자와 여자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 토대를 형성할 수는 없다.
여러 세기동안 - 아마 영원히 - 여자는
우리의 성적 차이에 의해 결정된 기대치 이하에서 노동할 것이다.
이제 그들의 불만은 공통적인 목소리로 터져 나온다.
여자들은 그들의 문제를 주장할 힘을 가졌고,
우리 남자들은 모두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반드시 돌아보아야만 한다.

우리 남자의 문제는 더이상 의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여자라는 존재의 생리적 기능들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남자의 스치는 눈길에 비춰질 자신을 보기 위해
평생의 삶을 소비하는 그들의 심리적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어진 제한에 구속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그리고 세상에서 그녀의 역할이 여자라는 성적 동질성에 의해
색깔지워짐으로써 삶이 시작되는 사람에게
가득 찬 욕구불만이 어느 정도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자들이 자신만을 위해 여자의 삶의 한계를
마음대로 한정할 수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는 것,
혹은 심지어 남자들의 눈독과 욕망의 그늘 아래에다
그들과의 관계를 교활하게 한정하는 것,
그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쌓인 분노의 불속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우리는 남자로서, 여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부정당해 온 삶의 영역을 탐구할 동안에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그냥 놔둘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약 분노와 욕구불만의 지점으로
여자들을 몰고 가는 태도와 몰지각의 선상에 우리가 서있다면,
우리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럭하는 게 필요하다.
우리 남자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레자를 찾아내 없애는 게 필요하고,
무의식적으로 여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저지르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자임을 먼저 보고 인간임을 나중에 보는
남성 우월주의의 낡은 습성을 찾아낼 필요가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파트너가 될 필요가 있을 때,
파트너가 되는 방법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게 필요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되어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공통적 문제에 있어서의 동질성,
그리고 각각의 성적특질에 있어서의 차이점이 드러내는
중요성에 동의할 수있는 공통적 바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무슨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어디에서 차이점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모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두 - 남녀 똑같이 - 두쌍의 눈을 통해서 서로 반대편을 본다.
한 쌍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를 본다.
다른 쌍은 욕망과 사랑과 성적 긴박감에 활기를 띠게하는
신비스러운 "다른 성"을 본다.
우리는 이 두가지 시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배운다.
오랫동안 실현이 지연된 남녀간의 평등을 향한 현재의 논의는
남녀간의 동질성을 공표하는 노력이라는 미묘한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분명 남자와 여자는 똑같지 않다.
우리가 각각의 본성과 남녀간의 차이가 가지는
중요성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는 평등하지만,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인간 경험의 전체를 함께 형성하는)
방정식에서는 서로 반대항이다.
이 그 본적인 차이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해하다.

우리는 남녀간의 공통점을 주장하는 것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싸우게 될지라도
이 미스테리를 똑바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다.
남녀간의 역동성은 항상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도전은 그러한 역동성이
남자의 기대치 아래에 종속됨이 없이도
여자의 포현방식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그리고 여자에 대한 기대치를 한정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남자 자신에게 묻는 일이  없는 생활의 환경을 발견하는 시도이다.

너는 이것을 해결할 기회를 가진 세대에 속해 있다.
너는 새로운 종류의 남자다움을 정의할 기회를 가졌다.
만약 네가 이 일을 잘 해낸다면,
그것은 남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값싸게 만드는 일 없이,
그리고 여자는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식의 자유라는 말로
자신을 덧없이 둘러싸는 일 없이 이룩되는 남자다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남자가 그들의 몸짓과 말,
그리고 가장 잘 계획된 행동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남자다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원숭이 춤을 연상케 하는
레자같은 남자를 이끌지 않는 남자다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남자가 누구인가 하는
생리적 정서적 복잡함을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이고,
우리 남자의 성적 동질성에 토대하는 행동에 대한
어색한 표준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세계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함께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고, 두려움 없이
그리고 판단없이도함께 일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축복받은 세계, 비난과 변명 그리고
차별의 근거가 되는 성적차이의 증명되지 않은 가정이 없는 세계이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들릴 것이고,
사실 기적이 일어나길 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건 언제 어디서도 시작될 수 있는 거란다.
픽업 트럭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거리의 모퉁이에서도,
그것은 너와 네친구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있다.

여자는 일찍이 평등을 위해 자신들이 해야할 부분을 행해왔고,
그 길이 거칠고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자는 이제야 시작했고, 그 길이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시대가 되는가를 다투는 일이다.
역사적 교훈중의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우리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너를 선택했다.
네 도전은 남자답게 그 문제에 부딪치는 것이다. 원숭이처럼이 아닌.

 

 

19. 사랑에 빠짐

우리가 왜 사랑에 빠지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굉장히 신비스럽단다.
우리는 그것이 언제 오는지도 알지 못한다.
왜 어떤 사랑은 깊어지고, 어떤 사랑은 실패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너는 이 신비를 분석하여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경험보다 더 좋은 것은 결코 없을 거다.
마치 삶이 뼈와 근육과 몸에서 나오는
전기적 자극들의 합계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이듯,
사랑은 관심과 매력과 두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점들의 합계보다 더 많은 어떤 거란다.
그리고 마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선물이듯,
사랑도 역시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갖기에 의심을 품거나 질문을 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선물로써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때때로 - 바라건대 네 삶에서 최소한 한번은 -
사랑의 선물이 활짝 핀 꽃으로 네게 다가올 것이고,
너는 그것을 붙잡고 그것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고 공유하는 꿈이다.
더 자주 사랑은 네게 다가와 너를 붙잡을 것이고,
짧은 순간동안 너를 축복하고, 그런 후엔 떠나갈 것이다.

이것이 젊은 사람에게 발생할 때,
그들은 자주 사랑을 잡으려고,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려고 시도하고,
사랑은 자유롭게 주어졌듯이 자유롭게 떠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길 거절한다.
그들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거나 떠나간 사랑의 영혼을 느낄 때,
그들은 떠나가버린 과거의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잃어버린 사랑을 되살려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은 아무 곳에도 없는 대답은 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그들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거나,
몇 가지 사소한 변화가 있어 준다면
사랑은 다시 활짝 피어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연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탓하고, 멀리 떠나 새로운 삶을 함께 시작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날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의 추억들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래서 사랑 그 자체의 신비를 조건없이 받아들일 때까지
그들은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간다.
너는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너는 그것이 네게 친절함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해야만 한다.
네겐 아무 잘못이 없단다.
단지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에 머물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만일 네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면,
너는 사랑이 다가와 네 문을 두드린다는 자부심을 느끼겠지만
네가 돌려줄 수 없는 선물에 대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한다.
우월감을 가지지 말거라.
고통을 야기시키지 말거라.
비록 우리의 삶과 길이 매우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똑같은 기쁨과 고통을 느낀단다.

만일 네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 사랑이 너희들 곁을 떠날 것을 선택한다면,
사랑을 억지로 재생시키려 하거나 사랑이 아니었다고 비난하려 하지 말거라.
그냥 그대로 떠나가게 두거라.
사랑이 떠나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너는 그것을 조만간에 깨닫게 될테지만,
그러나 시간은 그 순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네가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거라.
사랑이 너를 선택한 것이다.

네가 사랑의 신비를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사랑이 네 삶에 찾아온 때다.
너에게 온 사랑이 너의 삶을 풍부하게 가득 채우는 걸 느껴라.
그리고 손을 뻗어 사랑을 선물로 주어라.
네게 생생하게 사랑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너의 사랑을 돌려주어라.
정신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어라.
네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너를 둘러싼 세계에 사랑을 주어라.

매우 많은 연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을 단지 필요로써 이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빈 공간으로 여기고,
사랑을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에게 들어와야 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다.

처음엔 새로운 사랑의 신선한 설레임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울 것이지만,
사랑이 식어감에 따라 그들은 또 다시
사랑을 필요로써 바라보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그들은 사랑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사랑을 찾는 사람이 된다.
사랑이란 선물이며 오직 줌으로써만
성숙하게 될 수 있다는 비밀을 그들은 잊어버린다.

이것을 기억하거라.
그리고 네 마음에 항상 간직해야 한다.
사랑은 그 자신만의 시간, 때, 그리고 오고가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너는 그것을 매수하거나 마음대로 하거나 머무르도록 설득할 수 없다.
너는 단지 사랑이 찾아올 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네 마음으로부터
혹은 네 연인의 마음으로부터 떠날 것을선택한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은 항상 신비스러웠고, 앞으로도 항상 신비스러울 것이다.
너의 삶에 한 순간 사랑이 다가오는 것을 기뻐하거라.
만일 네가 마음을 계속 열고 있다면, 사랑은 언제든 다시 찾아 올 것이다.

 

 

20. 성의 신비

지금까지 너는 아마 이미 한 여인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너는 네 몸이 거의 참을 수 없는 갈망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는,비록 너의 삶에서 그것이 가장 작은 부분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깨어있는 너의 모든 생각과 마음가짐을 규제할
여인을 갈망할 연령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갈망을 느끼는 너는 다른 젊은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건 나도 그랬고 너의 아들도 그럴 것이다.
그건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힘은 무엇인가?
무엇이 널 그렇게 갈망하도록 만들고,
너는 어떻게 해야만 그 갈망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가?
간단한 답은 없다.

성은 우리의 모든 것보다 더욱 신비스럽다.
그것은 우리의 개성보다 더 깊이,
심지어 우리의 종족보다 더 깊이 자리한
우리라는 존재의 기본적 본능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세계를 이끄는 발생상의 힘이고,
아마도 전 우주를 이끌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고와 이성의 합으로도
네가 한 여인의 몸속에 들어가는 그 첫 순간을 대신 할 수는 없다.
그 한 번의 행동으로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갑자기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너의 모든 삶이 새로이 시작된다.
너의 경계선은 변화된다.
삶에 대한 너의 지식은 변화된다.
너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깊은 어떤 것의 한 부분이 된다.
한 번쯤 너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이 입구를 지난다.
네가 경험한 그 느낌을 계속 원하게 되고,
그 열망을 채우기 위해 한 여인을 영원히 찾게 된다.

이것이 성이 혼란스러워지는 때이다.
왜냐하면 성은 실제이고,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육체적 열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열망을 가라앉힐 수 있지만,
그것은 곧 예전처럼 강하게 되살아 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열망에 의해 자신이 이끌려 사는 것을 허락한다.
그들은 그 열망이 충족될 때까지 한 여인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또 다른 여인에게로 그들의 관심을 돌린다.
왜냐하면 새로운 여인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성에 대한 육체적 흥분과 새로운 연인의 몸속에 들어갈 때 오게 되는
환희의 발견에 대한 신비한 느낌은 여자의 몸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언덕과 성적인 공유의 첫 순간에 오는 기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추구로서,
그들을 한 여인에서 다른 여인에게로 이끈다.

이러한 사랑을 하는 몇몇 사람은 단지 성적 약탈자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한 의도에서 그런 식의 사랑을 한다.
그들은 성적인 첫 발견의 황홀한 순간을 배우기 시작할 때,
뿌듯함을 느끼는 성적 경험의 완전성과 아름다움을 매우 확실히 믿어버린다.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전체와 완전한 정열의 소비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보다 적은 느낌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하려 한다.
비록 그들이 그 여인을 깊이 사랑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첫 번째의 경험에 대한 지식을 알고 난 후에는 반드시 식어버리는,
완전히 황홀하게 만드는 육체적 흥분이 없이는 그들의 사랑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변화한다.
그들은 육체적 결합의 신비를 맛보며 완전한 열광의 첫 순간을
무익하게 추구하는 데에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비록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그들은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신비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성에 대해 정신적 영원성과 신성함을 느끼고,
이러한 플라토닉한 감성들이 그들의 성적 경험에서 중심이 되길 요구한다.
그들에게 있어 여인은 신비의 창고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성적 상대자가 욕구를 채우기를 희망하고,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개인적 특성을 가진
하나의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에 그녀에게서 점차 흥미를 잃어 간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이상 순수한 정신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부류의 남자들의 성적 특질
(성행위에의 몰두, 혹은정신적 사랑의 강조)은
여성들에게도 그들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정열적인 한 순간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전부 소모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영원한 진실에다 자기 존재를
전부 소비해버릴 수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두 유형의 남자들에 있어서 그들이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성적 특질을 건강하고 신성하며
삶의 신비에 대해 칭송하는 위대한 사랑으로 보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두 유형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의 인간성과 개성을 부인한다.
그들이 각기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자의식을 제거하는 일에 모든 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여자는 궁극적으로 이 자의식 제거의 대리인이 된다.
비록 이러한 남자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고 해도 그 감사는 그 여인 자체에게가 아니라
일반적인 여자의 미와 신비에 보내는 것이다.
그들의 실질적인 감사는, 그들에게 희노애락의 지속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의 존재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잠깐동안 추구해온
환희의 감정을 찾을 수 있는 여자의 품속에 대해서이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는 실제로
그런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매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그녀가 그런 감정을 유발시키는데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녀는 부족한 상대로 간주되고 버림받는다.

그러한 남자들은 희망없는 상상의 고통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상상을 가지게 하는 여자들을 비인간화 시키며 살고 있다.
그들은 날개없는 천사처럼 맹목적으로
영원한 환희의 순간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를 계속하며 배회한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항로에 깨어진 마음과 꿈을 남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고집한다.
자신이 삶의 더 높은 상태를 추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네가 이런 남자들 중의 한 명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길 원한다.
그건 쉽지 않다.
네 성적인 첫 번째 접촉은 그것의 강력한 힘으로 너의 이성을 압도할 것이고,
그 본능의 힘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옛 속담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땅위에 발을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살도록 운명지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만족이라는
두가지 모두에 이끌리기 때문에 결코 평화스러울 순 없다.

이제 그 진실은 우리의 성적 특성에서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두가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성적 특성을 세속화 시키고
단지 육체적인 면에서만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곧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불충분하게 보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적 특성을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제거하고
그것을 영혼에서 분리시켜 정신적인 것만을 칭송하려 한다면,
우리가 날개를 얻으려고 하는 매 순간마다
철저히 땅으로 곤두박질칠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동물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우리는 정신적 부분과 육체적 부분을 함께 가진 인간이고,
그 두 부분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진정한 성의 이해는 이 두 범위를 인식하고
사랑으로 그것을 감싸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행위는 동물들이 하는 것이다.
신화적인 결합을 성취하는 건 천사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하나로 혼합하는 지점에서만
오로지 즐거운 행위인 사랑을 만들 수 있다.

이 행위를 알거라.
이 행위를 칭송하거라.
그러나 특히 이 행위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
네가 한 여인과 사랑을 나눌 때,
너는 인간 존재의 가장 신비스러운 것 중의 하나를 나누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열광을 추구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네 자신과 그녀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말거라.
육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모두를
서로에게 완전한 선물로 주는 것에 의해서만
성의 진정한 신비는 스스로를 드러낸단다.

 

21. 사랑 만들기 

나는 네게 사랑하는 행위의 지침서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하는게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너 스스로가 네 방법을 충분히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만들기를 설명하는 데는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합한 페이지의 분량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의 형태로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각각의 사람에게 있어서의 차이,
그리고 모든 연인들 사이의 차이 때문이란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들은 좋은 연인을 찾는다.
그들은 책에서 본 성행위의 기교와 자세를 통달함에 의해서
상대를 만족시키는 좋은 연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상대는 그들의 그런 행동에 경솔하게 평가를 내리고,
성적인 만족을 기준으로 자기의 연인을 측정한다.
그들은 불만족스런 성행위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그(혹은 그녀)가 불쾌한 연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는데,
그건 성행위가 한 번의 경험으로써 평가될 수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 사람에 따라, 각각의 상대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두 명의 고립된 개인 사이에서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너는 한 여인에 대해 동물적인 열정으로
격렬하게 돌진하며 날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다른 한 여인에 대해서는 부드럽게 서로를 애무하며
정신적 합일에 다가서는 행복한 황홀경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여성에게는 거리감을 느끼며
심지어 혐오감으로 네 마음이 백마일쯤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여성에 대해서는 따뜻함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네가 상상으로 느끼는 세계인 다른 왕국으로 옮겨 줄 수 없는
그런 완만한 공유감을 발견할 수도 있다.

너는 한 여인에게는 훌륭한 연인이 될 수 있고,
다른 여인에게는 형편없는 연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형편없는 연인이라고 여겼던 한 여인이
다른 남성에게는 여태껏 있어 본 연인중에서 최고의 연인이 될 수도 있다.
너는 사랑의 행위에서 어떤 것이 드러나 보일지,
실제로 몸을 섞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진실을 드러내는 둘에 의해서만
창조되는 경험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발견은 많은 성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많은 성적 혼란과 비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네가 좋아하건 말건, 성의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도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 그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연인들이 있다.
그리고 서로를 정신적으로 깊이 사랑하지만
성적으로는 일치를 찾을 수 없는 연인들도 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함께 하려는 충심어린 노력은 결국
의도적이고 무미건조한 행위처럼 느껴지는 서투른 애무가 될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 리듬이 맞지 않고 시간이 맞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 중의 하나가 나쁜 연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건 단지 성적 욕구가 다소 빗나가 있다는 의미이고,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욕구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연인들은 결국은 중간에 어디론가 떨어진다.
그들은 상대와 함께 황홀경의 절멸 상태에 계속 휩쓸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끔 일치되기도 하고,
가끔은 서로 소외를 느끼는 가운데 함께 길을 만들어 나간다.
싸우고 공유하며, 그들 자신과 상대방의 정열의 조류를 느낀다.
그들이 성의 절멸상태인 무아경의 황홀감을 상상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도 서로를 위해주는
두사람 사이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친밀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때가 되면
어느 다른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더 친밀해지게 된다.
그들은 연인들만이 서로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를 본다.
그리고 사상과 지성보다 더 깊이 서로를 이해한다.
이것은 신비로운 무아경에 있는 절멸이 아닐 수도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점은 친밀감 속에서 느끼는 이러한 따스한 기쁨이
좋은 성관계가 끝나는 곳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너는 황홀경으로 시작할 수 있다.
너는 거의 정신적인 무아경의 순간들을 항상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 그렇듯이, 정열은 식기 마련이다.
그것은 성적 친밀성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절대적이고 안주할 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성적으로 뜻밖의 만남을 시작하는데,
그로 인해 친밀성의 맛을 잃게 된다.
외형적인 친근함과 일상적인 일들이
너희들의 성경험을 넘어서 형성되기 시작하고
성행위 속에 완전히 빨려들어가는 힘은 서서히 감소된다.

너는 이렇게 강렬함을 잃어버린 상대로부터 빠져나와,
네게 고결하게 다가와 강렬함을 제공할 다른 상대자를 추구할 수도 있다.
혹은 그러한 강렬함을 계속 유지하고자
네 성행위를 별난쪽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다른 것들과 똑같은 운명이다.
인생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네 성적 경험은 단계들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성의 정열이 식는 것은 그러한 단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극적인 연인들을 찾고 싶어할 것이다.
강한 성적 자극을 주는 사람은 심지어 넓은 범위의
인간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상대조차 못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지 일반적인 육체적 황홀경만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열이 식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끝을 내게 된다.
결국 상대방의 모든 것을 위한 헌신성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와 네 상대자가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면,
네 사랑은 육체적 열정으로부터 자라나기 시작해서
정열이 서서히 식기 시작하는 공간을 애정으로 모두 채우게 될 것이다.
너는 서로를 위해 네 사랑에 서로의 지식과
서로의 행복을 비는 정직한 소망을 섞는다.
그럼으로써 성적인 표현을 공유하는
강한 열정이 없는 어떤 것에서도 친밀성을 갖게 된다.
친밀감은 연인이 되는 진정한 보답이고 인간적인 만족으로서
성적 욕구의 강렬함을 결국엔 뛰어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를 갈망함으로써
새롭고 더 깊은 단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남자로서 네가 해야 할 일은
네 연인과 함께 이러한 친밀감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은 너의 성적 욕구 이전에
그녀의 성적 욕구를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성적으로 수동적이면, 그녀를 부드럽게 만족시키거라.
만약 그녀가 성적으로 주도하고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그녀의 요구를 존중해 주어라.
그녀가 육체적인 접촉에 겁먹은 여인이라면,
그러한 두려움을 진정시키려고 하거라.
만약 그녀가 거칠어서 깨물고 할퀸다면,
너의 배로 그녀의 배를 닿게 하거라.

그녀 쪽으로 손을 뻗어라.
그녀의 성적 본능의 방법과 리듬을 발견하거라.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을 표현하도록 하고
너와의 공유된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녀를 완전히 발휘하도록 하여라.
너의 사랑법을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도록 하거라.
완전한 공유감과 신뢰성을 기초로 한 친밀감을 구축하거라.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녀의 사랑이 날개를 펴도록 하거라.
그녀의 독특한 행위를 창조해 가거라.

이 말이 너무 수동적으로들린다면
- 마치 네 자신의 성적 욕구를 너무 많이 포기하는 듯이 -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하마, 그것은 그렇지 않단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단순한 성적 기구를 가지고 있다.
한 번 발기하고 나면, 일단 그 행위는 실질적으로 끝난거나 마찬가지다.
즉 그것은 단지 시간과 마찰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서 성은 더 복잡하다.
우리는 그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좀더 높은 질의 승락이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성적인 응답에는
더 많은 복잡함과 미묘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녀는 우리가 정서적으로 그곳에 있다는 걸 느낄 필요가 있다.

단지 그 자신의 단순한 성적 반응에만 신경을 쓰는 남자는
여인의 몸속에 육체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설사 그가 상대를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에서
아주 훌륭히 사명을 완수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가장 최고라는 의미가 있는 남자는 아닌 것이다.
그가 되고 싶어하는 최고는, 단지 성교에 있어서의 선수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단순한 성기구를 돌아다보지 않는다면,
그리고 완전히 그 여인의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연인이 되길 바랄 수없다.
그는, 사랑만들기가 받기보다는 주는 행위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고,
그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그녀가 사랑속에서 확신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 육체의 본능을 거스르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가 다른 성적 궤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우리 남자는 들끊는 정열로 급속히 발기해서
사정의 순간이 다가올때는, 마치 누군가가 갑자기 불을 켤때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다가 급히 잃었던 방향을 되찾아
자리로 돌아오는 듯이 느낀다.
여자는 천천히 흥분하기 시작하고 파도가 점점 거세지듯
절정의 꼭대기에 다다랐다가 점차로 식어간다.

그녀들은 절정을 향해 오를 때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한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른 후에는, 급격히 떨어지기 보다는
천천히 내려오면서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녀들은 우리가 사정할때 경험하는 충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갑자기 돌아눕는 남자에게 쉽게 상처를 받는다.
설사 그러한 갑작스러움이 단지 우리가
절정이 급히 식어버리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뿐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은 우리가 그 행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을 사랑했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본능을 넘어서서,
우리의 무아경의 상태를 넘어서서
그녀들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느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감정이 순간적으로 육체를 떠났다하더라도.

이것이 진정한 연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행위의 종류이다.
만약 네가 네 상대자의 만족을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너는 연인으로서 항상 부족할 것이다.
너는 네 마음속에서 훌륭한 연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몇 명의 여자들을
극도의 육체적 흥분 속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만들기의 궁극적인 비법,
즉 두 사람이 함께 함으로써
새롭게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너는 항상 진정한 연인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여기에 나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머물고 있다"고 말하는
너희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그늘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성욕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하거라.
네가 단지 많은 여자를 탐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보여질 것이다.
네가 단지 여자에게 육체적인 정념만을 방축함으로써
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운다면, 그렇게 보여질 것이다.
너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네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드러나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연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사랑만들기가 내보이는 신비스러운 인식이다.
그것은 마음의 진실에게 말한다.
너는 그 진실을 숨기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곧 그 거짓은 더 커지게 된다.
나는 네가 그런 거짓 속에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두 사람간의 진실을 알기 바란다.
서로 가깝게 느끼고 관심을 가짐으로써
거리감이 전혀 없는 것같은 그런 두 사람간의 진실을.

나는 네가 알기를 바란다.
너희들이 서로공유하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네 볼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네 팔로 안고 있는 여인의 눈을 바라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널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너는 진정한 사랑만들기를 하고 있는 거란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너는 단지 성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