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11.
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망설이는 사이에 8시가 됐습니다.
불만과 불쾌감은 점점 더해 갈 뿐이었는데,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을 때에야 베르테르는 모자와 단장을 집어들었습니다.
알베르트가 좀더 있다가 천천히 가라고 권했으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소리 같아서 퉁명스레 사양을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인이 등불을 들고 나오자 그것을 받아 들고 혼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를 내며 울고, 흥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였으며,
방안을 조급하게 오락가락 하더니, 마침내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11시경에 하인이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까, 그는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장화를 벗길까요, 하고 하인이 묻자 그는 순순히 그러라고 하고는,
내일 아침엔 부를 때까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12월 21일,
월요일 아침에 베르테르는 로테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책상위에서 봉해진 채 발견되었고,
그대로 로테에게 전해졌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그가 이 편지를 단편적으로 썼다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 순서에 따라 일부분씩 끊어서 삽입하기로 합니다.
결심했습니다. 로테.
나는 죽으려고 합니다. 낭만적인 과장도 없이,
냉정한 심정으로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나게 될 날 아침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이미 차가운 무덤이
불행한 사나이의 경직된 몸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가지도 당신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알지 못한 사나이였습니다.
무서운 하룻밤을 지새웠습니다만,
아아, 그것은 감사해야만 할 밤이기도 했습니다.
죽는다는 결심을 확실히 굳혀 준 밤이었으니까요.
어제 몹시 흥분하여 떨치듯이 당신과 헤어져 돌아왔는데,
그런 뒤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한꺼번에 내 마음 속에 밀려들었고,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는 존재인 내가
당신 곁에 붙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오한이 엄습합니다.
간신히 내 방으로 돌아와서 정신없이 꿇어앉았습니다.
그리고 아아, 하느님은 나에게 더없이 쓴 눈물을 최후의 위안으로 내려 주셨습니다.
갖가지 계획과 기대가 뒤를 이어 내 마음 속에서 어지럽게 설쳤으나,
마침내 죽어 버리자고 하는 한 가지 계획이 확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대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진정된 가운데서도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은 확고하게,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내가 끝까지 참고 견디다가 당신을 위하여 희생되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로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어야만 할까요?
우리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은 떠나야만 합니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갈가리 찢어진 이 가슴 속에서는 몇 번이나 어떤 생각
----당신 남편을 죽일까? 당신을, 아니, 나를?----이 미친 듯이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지난 일입니다.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 언덕 위에 올라가시거든 부디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 골짜기 길을 내가 자주 올라갔었던 일을 되새기며
건너편에 있는 내 무덤께로 눈길을 보내 주십시오.
넘어가는 저녁 햇살 속에 무심하게 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쓰기 시작했을 때는 냉정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정경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라서 어린애처럼 울고 있습니다.
10시경에 베르테르는 하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으면서, 2,3일 안으로 여행을 떠날 테니,
옷가지에 손질을 하고 짐을 꾸릴 준비를 해 두라고 일렀습니다.
또 지불할 것이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계산서를 받아오고,
빌려 준 몇 권의 책도 찾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얼마씩 원조해 온 몇몇 가난한 사람들에게
2개월분의 돈을 선불해 주도록 일렀습니다.
그는 음식을 방으로 가져오게 하여 식사를 마친 다음,
말을 타고 법무관의 집으로 갔습니다.
법무관은 부재중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상념에 잠겨서 정원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했습니다.
죽기 전에 모든 추억들을 자기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그를 조용히 내버려 둘 리 없었습니다.
그를 뒤쫓아와서 달라붙으며, 내일, 그 다음 내일,
그리고 또 하루가 더 지나면, 로테 언니 집에 가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거라면서,
그들의 어린 상상력이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이를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그 다음 내일,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하고 외친 다음,
베르테르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떠나려 했습니다.
그 때 막내동이가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언니들이 예쁜 연하장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커다란 거예요! 한 장은 아빠에게, 알베르트하고 로테 누나에게도 한 장,
그리고 베르테르 아저씨에게도 한 장, 그걸 설날 아침에 드린댔어요"
베르테르는 이 이야기에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몇 푼씩 돈을 노나 주고 아버지께 안부 전해 달라고 부탁한 다음,
그는 눈에 눈물이 글썽한 채 말을 타고 그 곳을 떠났습니다.
5시경에 집에 당도하자,
그는 하녀에게 난롯불을 잘 살펴서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습니다.
하인에게는, 아래층에 있는 책을 트렁크에 넣고,
옷가지들은 여행가방 속에다 챙겨 두라고 일렀습니다.
아마도 그 뒤에, 로테 앞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 가운데 다음 부분을 쓴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내가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 말대로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요.
아아, 로테!
그러나 오늘 한 번만 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신은 이 편지를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당신의 눈물로 이것을 적실 것입니다.
나는 단행해야만 합니다.
아아, 결심을 굳히고 나니 어쩌면 이토록 상쾌할까요.
한편 로테는 기묘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르테르와 그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에 그녀는
그와 헤어지는 일이 자기로서 얼마나 쓰라린 일이며,
베르테르도 또한 자기와 헤어지는 것을
얼마나 가슴아프게 생각할까 하는 것을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베르테르가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베르트에게 넌지시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알베르트는 이웃마을의 어니 관리 집에 볼일이 있어서,
그 날 밤은 거기서 묵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테는 혼자 있었습니다.
동생들도 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남편과 영원히 맺어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 침착성과 믿음직스러운 성품은
그녀가 착한 아내로서 평생의 행복을
그 바탕 위에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정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남편이 자기에게 있어서, 또 아이들에게 있어서
언제까지나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베르테르도 대단히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서로 알게 된 최초의 순간부터 두 사람의 마음은 아름다운 일치를 나타내었습니다.
오래 계속된 교제. 지금까지 겪어온 갖가지 일들이
그녀의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한 흥미있는 일들은 모두
그와 공감한 것이었으므로, 지금 헤어져야만 한다면
그녀의 전 존재에 다시는 메꿀 수 없는 공백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아아,베르테르와 자기가 오누이간이라면!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누군가 자기 친구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시킬 수는 없을까?
그러면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와의 사이도 다시 전처럼 될 수 있을 텐데!
로테는 자기의 여자친구들을 한 사람씩 차례차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친구나 모두 어딘가 난점이 있어서,
베르테르와 짝지어 줘도 좋을 만한 친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의식속에 분명히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베르테르를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것이
자기의 은밀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베르테르를 붙들어 둘 수는 없으며,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로테의 마음은 평소에는 경쾌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는데,
지금은 답답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가로막혔으며,
가슴은 옥죄이고, 검은 구름이 눈앞을 가리웠습니다.
어느덧 6시 반이 되었을 때, 베르테르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발소리, 자기를 찾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그녀는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로테의 가슴은 세차게 고동쳤습니다.
베르테르가 왔을 때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만날 수 없다고 따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르테르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당황한 어조로 외쳤습니다.
"약속을 어기셨군요!"
"나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요"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약속은 안 했어도 제 부탁을 좀 들어 주시면 어때요?
우리 서로간의 평화를 위해 부탁드렸던 건데"
그녀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베르테르와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두어 사람의 여자친구를 불러오도록 하녀를 보냈습니다.
베르테르는 갖고 온 두어 권의 책을 내려 놓고서,
달리 또 책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로테는 친구들이 와 주었으면 싶기도 했고, 오지 말아 주었으면 싶기도 했습니다.
하녀가 돌아와서, 두 친구가 모두 사정이 있어서 못 오겠다더라는 전갈을 했습니다.
로테는 하녀에게 옆방에서 일을 하고 있도록 이르려 하다가,
곧 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베르테르는 방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로테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서 메누엣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을 고쳐 먹고 베르테르 곁에 가서 앉았습니다.
베르테르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뭐 적당한 읽을거리가 없을까요?" 로테가 물었습니다.
베르테르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서랍 속에"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번역하신 오시안의 시가 몇 편 들어 있어요.
저는 아직 읽지 못했어요.
기회 봐서 당신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여태껏 그런 기회가 없었고, 또 일부러 기회를 만들 수도 없었어요"
베르테르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번역한 그 원고를 꺼내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었을 때 전율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원고를 펼쳤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 괴었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물어 가는 밤하늘의 별이여,
그대 아름답게 서쪽 하늘에 반짝이며,
빛나는 얼굴을 구름 사이로 치켜들고,
그대의 언덕을 엄숙히 걸어가고 있구나.
무엇을 보고자 이 황야를 내려다 보는가?
폭풍우는 그치고,
멀리 골짜기 개울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술렁이는 물결은 바위를 희롱하고,
저녁 파리떼의 날갯소리 들에 찼도다.
아름다운 빛이여, 무엇을 찼는가?
그러나 그대는 미소 지으며 즐거운 듯 머리타락을 나부끼고 있도다.
잘 있거라, 조용한 빛이여.
나타나라! 그대 오시안의 영혼의 희한한 빛이여!
그리하여 늠름한 오시안의 빛은 나타나고,
그리운 친구들의 모습이 내 눈에 비치도다.
지난날처럼 로라 들판에 다시 모였도다.
안개기둥처럼 나타난 것은 핑갈의 모습이로다.
용사들이 그를 애워싸고, 그리고 보라!
방랑의 가인들을......
오오, 백발의 울린!
당당한 리노!
목소리 아름다운 알핀
그리고 조용히 영탄하는 미노나도 있구나!
달라져 버린 친구들이여.
젤마 산의 축제일에 봄바람이
번갈아가며 언덕의 풀을 휘어눕히듯이,
노래를 겨루던 내 친구들이여!
모습도 아름답게 미노나는 눈물젖은 눈을 내리뜨고 걸어오도다.
언덕을 불어 내리는 바람에 치렁치렁한 머리를 흩날리며,
애처로운 그 노랫소리,
용사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구나.
몇 차례인가 잘가르의 무덤을 보았으며,
몇 차례인가 불켜지지 않은 콜마의 집을 보았기 때문이로다.
콜마는 홀로 언덕 위에서, 돌아오마 기약한 잘가르를 기다리건만,
찾아오는 건 밤분이로다.
사람들이여, 들으라, 언덕 위에서 탄식하는 콜마의 목소리를.
콜마 날이 저물었도다!
폭풍우 몰아치는 이 언덕에 나는 혼자 았노라.
산에서 산으로 바람은 윙윙거리고,
골짜기 물은 바위에 철썩이고,
비 피할 오두막조차도 내게는 없구나.
달이여 구름 사이로 나와 주려무나!
밤하늘의 별들이여, 반짝여 다오!
빛을 보내어 나를 인도하라,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으로.
사냥에 지쳐 그이는 쉬고 있으리라.
활을 뉘고, 사냥개들에게 애워싸인 채.
그렇지만 안 되지,
풀 무성한 강변의 이 바위에 있겠노라고 나는 말했으니까.
울려 오는 소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그이의 목소리는 전혀 안 들리누나.
뭘 하고 있어요, 나의 잘가르, 약속을 잊으셨나요?
이게 바위요, 이게 나무랍니다.
강물도 분명히 여기 흐르고 있어요.
밤이 되면 여기 돌아오마고 약속한 당신.
아아, 어디서 길을 잃으셨나요, 나의 잘가르?
당신과 함께 달아날 작정을 했어요,
아버지도 오빠도 뿌리치고서.
우리들 집안은 서로 오랜 원수였지만,
당신과 나는 서로 적이 아니지요,
오오, 잘가르!
잠잠해 다오, 바람이여.
잠깐만이라도 조용해 다오, 물소리여, 잠시 동안만!
그러면 내 목소리가 골짜기에 울리어
찾고 있는 그이 귀에 들리게 되리니,
잘가르, 나예요!
내가 부르고 있어요! 나무와 바위가 있는 이 곳이예요!
잘가르, 사랑하는 이여! 나 여기 있어요!
어찌하여 당신은 망설이고 있나요?
아아, 달이 나왔다.
골짜기는 물에 잠겨 빛나고, 바위는 회색으로 우뚝 솟아 있도다.
그러나 그이 모습 보이지 않는구나.
앞장서 올 개들도 달려오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지, 나는 이 곳에 좀 더 머물러야지.
저기 저것은 누구인가?
황야에 누워 있는 저 사람은?
그이인가? 오빠인가? 말하라,
오오,정다운 이들이여! 대답이 없구나.
어찌 이리 가슴이 설레는가!
아아, 역시 죽어 있구나!
두 사람의 칼은 피에 붉게 물들었도다!
아아, 오빠, 어찌하여 나의 잘가르를 죽였나요?
아아, 자가르, 어찌하여 우리 오빠를 죽였나요?
나는 두 분을 다 같이 좋아했는데!
오빠는 이 언덕 위 수 많은 기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잘난 사람이었고,
잘가르는 싸움터에서 남들이 두려워하는 용사였지.
대답해 주세요! 내 목소리를 들어 주세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아, 그러나 대답이 없다.
영원히 대답이 없으리라! 그들의 가슴은 흙같이 차갑도다!
우뚝 솟은 바위 위에서,
바람 휘몰아치는 산꼭대기에서,
죽은 자의 영혼들이여, 말을 하라!
두렵지 않으니 말을 해 다오!
어디로 쉬러 가 버렸나요, 당신들은?
어느 산 어느 동굴에서 찾아야만 하나요?
바람 속에선 가냘픈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언덕의 폭풍우에 아무런 대답도 실려오지 않는구나.
비탄에 잠겨 나는 주저앉고, 눈물을 흘리며 아침을 기다린다.
무덤을 파는 죽은 자의 친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갈 때까지는 묻어 버리지 마라.
나의 목숨도 꿈처럼 사라지리니,
살아서 보람없는 모숨인 것을,
나는 죽은 두 사람과 함께 여기 살리라.
바위를 치며 흐르는 강물가에서.
그리하여 언덕에 밤이 와서,
사람이 황야를 가로지를 때,
내 영혼을 그 사람에 실어 두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리라.
사냥꾼은 그 소리에 무서워 떨고,
그러다 그 소리를 사랑하리라.
사랑하는 이들을 애도하는 내 목소리,
정답게 정답게 울릴 터이니.
미노나여, 오오, 이것이 그대의 노래였었지. 정
답게 볼 붉히는 토르만의 아가씨여,
우리는 콜마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을 헤매었네.
울린이 하프를 들고 나와서 알핀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알핀의 목소리는 다정하였고,
리노의 영혼은 불꽃같이 빛났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무덤 속에 잠들고,
그 목소리 젤마성에 울리는 일 없으리라.
일찍이 이 용사들 살아 있을 때,
어느 날 울린은 사냥에서 돌아와,
그들이 겨루는 노래소리 들었네.
그 노래는 다정하고 그리고 구슬프게,
제일가는 용사 로라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모라르의 영혼은 핑갈의 영혼,
그의 칼은 오스카의 칼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는 싸움터에서 쓰러졌도다.
아버지는 비탄에 잠기고,
누이동생 미노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울린이 노래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살그머니 자리를 떴다.
서쪽 하늘에 폭풍우가 닥쳐오는 것을 본 달이,
아름다운 얼굴을 재빨리 감추듯이.
비탄의 노래에 맞추어, 나는 울린과 더불어 하프를 켰도다.
바람은 자고 비는 그쳤다.
구름이 흩어져 맑게 갠 이 한낮.
해는 끊임없이 언덕을 비추고, 강물은 붉게 물든 채 골짜기를 흘러간다.
흐르는 여울물 소리, 내 귀에 정답구나.
그러나 그보다 더 정다운 저 목소리는 뭔가!
오오, 그것은 알핀의 목소리,
죽은 자를 슬퍼하여 그가 노래하고 있도다.
그 머리는 숙어지고, 눈물짓는 그 눈은 붉게 충혈됐구나.
알핀! 세상에 둘도 없는 뛰어난 가인이여!
어찌하여 침묵의 언덕 위에 혼자 았는가?
수풀에 불어닥치는 된바람처럼,
먼 바닷가 물결소리처럼,
어찌하여 그대는 탄식하고 있는가?
알 핀리노여,
내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
내 목소리는 무덤 속에 잠든 자들을 위한 것.
그대,지금 모습도 아름답게 이 언덕에 서서,
황야의 아들들 사이에서 돋보이는구나.
그러나 그대 또한 모라르처럼 쓰러지리라.
그리하여 그대 무덤 위에는 슬퍼하는 자가 앉게 되리라.
언덕은 그대를 잊고,
그대 활은 시위도 메우지 않은 채 황야에 뉘어지리라.
오오, 모라르여,
그대 영양처럼 날쌔고 밤하늘의 물같이 맹렬하였다.
그대의 노여움은 폭풍우와 같았고,
싸우는 칼은 황야를 가로지르는 번갯불이요,
그대 목소리는 비온 뒤 골짜기 냇물의 분류,
그리고 먼산의 천둥처럼 울렸다.
수많은 전사가 그대 손에 쓰러지고,
그대 분노의 불길은 적을 불살라 버렸도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돌아왔을 때,
그토록 평온하던 그대 얼굴!
폭풍우 걷힌 뒤의 태양과도 같았고,
소리없는 밤하늘의 달과도 같았다.
그대 가슴 속, 바람 잔 호수처럼 잔잔하였다.
이제 그대 처소는 좁고, 그대 머물 곳음 빛이 없도다!
무덤의 폭은 불과 세 발짝. 일찍이 그대 그토록 거인이었건만!
이끼낀 네 개와 묘석, 그것만이 그대의 유일한 기념물.
잎 떨어진 나무 한 그루,
바람에 나부끼는 무성한 풀들이 사냥꾼에게 용사 모라르의 무덤을 가르쳐 준다.
그대를 위해 울어 줄 어머니도 없고,
사랑의 눈물을 흘려 줄 아가씨도 없다.
그대를 낳은 사람은 돌아가셨고, 모르그란의 딸도 죽었도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 머리는 늙어 백발이요, 그 눈은 눈물로 붉어졌다.
오오, 로라르여! 그는 바로 그대 아버지로다.
싸움터에서의 그대 용명을 아버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대 앞에서 원수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모라르의 공훈도 들었다.
아아, 그러나 그대 몸에 입은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구나!
울지어다, 모라르의 아버지여, 울지어다!
그러나 아들은 그 울음 소리 듣지 못하리라.
죽은 자의 잠은 깊고 베고 누운 흙베개는 얕으니,
부르는 소리에 고개 돌리는 일 없고,
부르짖는 소리에 깨어나는 일도 없으리라.
아아, 무덤 속에 아침이 와서,
잠든 자들에게 '깨어나라!'고 깨우게 될 날은 그 언제일까?
안녕, 모라르여!
숭고한 인간, 싸움터의 정복자여!
그러나 싸움터는 이제 다시는 그대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대 칼의 번득임에 어두운 숲속이 밝아지는 일도 이젠 없으리라.
그대는 대를 이을 자식 하나 남기지 않았으나,
노래로써 그대 이름이 전해지고,
후세 사람들은 그대를,
싸움터에서 쓰러진 모라르의 이야기를 전해 내려가리라.
용사들은 소리네어 슬퍼하였노라.
그러나 아르민의 목청이 터질 듯한 한숨소리가 한결 드놓았노라.
이는 아들의 죽음을 생각해서였으니,
그의 아들은 일찍이 싸움터에서 전사했노라.
갈말의 이름높은 영주 카르모르도 용사의 곁에 앉아 있었다.
'아르민이여, 어찌하여 그토록 탄식하며 흐느껴 우는고?'하고 그는 물었다.
'여기 있으면서 울 일이 뭐란 말인가?
즐거운 노랫소리가 마음을 달래 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포근한 안개와도 같으니라.
호수에서 피어올라 골짜기를 흐르고, 피어나는 꽃들을 이슬로 적시는 안개.
그러나 태양이 다시 힘차게 솟아오르면 안개는 자취없이 걷히어 간다.
아르민이여, 어찌하여 그대는 비탄에 잠겨 있는가?
바다에 둘러싸인 콜마의 지배자여' 비탄에 잠겨 있다고 말하는가?
옳은 말씀, 나는 탄식하고 있다.
이 비탄의 까닭은 하찮은 것이 아닐세.
카르모르여, 그대는 아들도 잃지 않았고 피어나는 딸도 잃지 않았도다.
그대 아들 콜가르, 씩씩한 젊은이는 살아 있고,
그대 달 아니라, 곷다운 아가씨도 살아 있지 않은가.
그대 집안의 가지는 무성하게 벋어 있다.
아아, 카르모르여, 그러나 이 아르민은 아르민집안의 마지막 사람이라네.
아아, 내 딸 다우라!
네 잠자리는 어둡고, 무덤 속에 잠든 네 잠은 깊다. 잠에서 깨어나
너의 그 노래, 마음 흐뭇한 그 목소리를 들려 줄 때는 어느 날인가?
일어나라, 가을바람! 어두운 황야를 휘몰아치라,
숲 속의 냇물! 울부짖으라,
폭풍우, 떡갈나무 가지에!
아아, 달이여, 갈라진 구름 사이를 누비며 방랑하라!
방랑하라 방랑하며 그대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라!
나로 하여금 상기케 하라,
내 아이들을 죽음이 앗아간 그 무서움 밤을,
씩씩한 아린달이 쓰러지고, 사랑스러운 다우라가 숨을 거둔 그 밤을.
다우라, 내 딸아,
너는 푸라 언덕에 비치는 달처럼 아름답고 내려쌓인 눈처럼 희고, 봄날의 산들바람처럼 향기로왔다.
아린 달, 내 아들아,
네 활은 강했고, 네 창은 날쌔었고, 네 눈은 파도 위의 서릿발과 같았으며,
네 방패는 폭풍우에 날뛰는 불구름과 같았다.
싸움터에서 용명을 떨친 아르마르가 찾아와 마우라에게 사랑을 구하였고,
다우라는 오래 거절하지 않았지. 친구들이 그들에게 건 기대는 아름다웠도다.
오드갈의 아들 에라트는 아르마르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지.
아르마르가 그의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에라트는 뱃사람으로 변장하고 왔다.
물결 위에 뜬 배는 아름다왔다.
그의 고수머리는 이미 희었고, 엄숙한 얼굴은 조용하였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따님이여, 저기 있는 저 바위,
그다지 멀지 않은 저 바다 가운데, 나무열매 붉게 익어 손짓하고 있는 곳,
거기서 아르마르는 기다리고 있어요, 다우라가 오기를.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건너 아르마르의 애인을 모셔 가려고 나는 왔어요'
다우라는 에라트를 따라가서, 아르마르를 불렀다.
대답하는 것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뿐.
'아르마르! 나의 임이여! 나의 임이여!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함니까? 대답해 주세요!
당신을 부르고 있는 것은 다우라예요!'
배신자 에라트는 웃으며 육지로 달아났네.
다우라는 목청껏 아버지를 부르고 오빠를 불렀다.
'아린달!
아르민! 다우라를 살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나요?'
그 목소리는 바다 건너 들려 오고,
내 아들 아린달은 사냥을 하다 말고 언덕은 내려왔다.
손에 활을 들고, 옆구리에 화살차고,
사나운 다섯 마리 검정개가 앞서거니 그를 따랐다.
뻔뻔스런 에라트는 바닷가에 있었고,
아린달은 그를 잡아 떡갈나무에 오묵달싹 못하게 친친 동여매었다.
묶인 에라트의 신음소리는 멀리멀리 바람 타고 울려 퍼졌다.
다우라를 데려오려고 아린달은 거룻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쳐나갔다.
분노한 아르마르, 바닷가로 달려와서 회색빛 깃털화살을 힘차게 내쏘았다.
바람을 가르고 화살은 날아, 네 가슴에 꽂혔구나.
오오, 아린달, 내 아들아! 배신자 에라트 대신 네가 쓰러졌구나.
거룻배는 바위에 다다랐으나, 아른달은 거기서 쓰러져 죽었도다.
네 발 아래 네 오라비의 피는 흘렀다.
어디에다 비기랴, 원통한 너의 탄식,
아아, 내 딸 다우라!
파도는 거룻배를 쳐부수었다.
아르마르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다우라를 살려 내어 데려오든지, 아니면 스스로 죽어 버릴 결심으로.
갑자기 언덕에서 돌풍이 불고 파도는 높아졌다.
아르마르는 물결 속에 가라앉은 채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도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 위에서 내 딸이 혼자서 탄식하는 목소리,
나는 듣고 있었다.
그 외침소리는 높이 울려 이를 데 없이 슬프게 들려 왔으나,
아비는 그 딸을 구해 낼 수 없었다.
나는 밤을 지새며 바닷가에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밤새껏 그 부르짖음을 들었다.
바람은 울부짖고 비는 바위에 휘몰아쳤다.
아침이 되기 전에 목소리는 잦아들고,
바위 위 풀숲 속에 사라지는 바람처럼, 그녀의 숨결도 사라져 갔다.
슬픔에 잠긴 채 다우라는 죽고, 아르민 혼자만 남게 되었다.
싸움터의 패기를 잃어버렸고, 처녀들이 부러워하던 내 사랑은 사라졌다.
산에서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
북풍에 바닷물이 용솟음칠 때 술렁이는 바닷가게 혼자 앉아서 무서운 그 바위를 바라본다.
기우는 달 그림자 속에 나는 때때로 아이들의 영혼을 본다.
희미한 달빛 속을 그들은 짝을 지어 헤매어 다닌다"
로테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 내려서
그녀의 답답한 가슴에 배출구를 만들어 줌과 동시에 베리테르의 시 낭독을 중단시켰습니다.
베르테르는 원고를 내던지고 로테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로테는 다른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두 사람은 엄청난 감동에 젖어 있었습니다.
숭고한 사람들의 운명 속에서 자신들의 불행을 느끼고, 서로 공감하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눈물은 하나로 녹아 내렸습니다.
베르테르의 눈과 입술은 로테의 팔에 닿아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로테는 전율을 느끼며 피하려 했으나,
고통과 동정이 납처럼 무겁게 몸을 짓눌러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 뒤를 더 읽어 달라고 흐느끼면서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듣기에도 애처롭고 쓰라린 목소리였습니다.
베르테르는 몸이 떨렸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그는 원고를 주워 들고,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봄바람이여, 어찌하여 나를 깨우는가?
그대 정답게 소곤거린다. 하늘나라 물방울로 만물을 적셔 주려 하노라고.
그러나 내 조락의 때는 가까웠다.
내 잎을 불어 날릴 폭풍우는 가까웠다!
일찍이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던 그 나그네는
들판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리며 나를 찾으리라.
그러나 그는 나를 찾아 내지 못하리.
이 시가 지닌 힘이 불행한 베르테르를 짓눌렀습니다.
그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채 로테 앞에 꿇어 앉아,
그 두 손을 자기의 눈과 이마에 갖다 대었습니다.
무서운 예감이 로테의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로테는 마음이 산란해져서 베르테르의 두 손을 꽉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 대고서
슬픔을 못이기는 듯이 그에게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두 삶의 뜨거운 볼이 맞닿았습니다.
세계는 두 사람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베르테르는 두 팔로 그녀를 그러잡아 가슴에 꽉 껴안고,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뜨거운 키스로 뒤덮었습니다.
"베르테르 씨!"하고 로테는 몸을 돌리며 숨가쁜 소리로 외쳤습니다.
"베르테르 씨!"
그녀는 힘없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자기 가슴에서 밀어 내었습니다.
"베르테르 씨!"하고 그녀는 그지없이 숭고한 감정이 어린 확교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는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팔에서 풀어 놓으며 넋나간 듯이 그 앞에 쓰러져 엎드렸습니다.
그녀는 사랑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에 몸을 떨며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에요, 베르테르 씨.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
그러고서 그녀는 이 불행한 친구에게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며,
얼른 옆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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