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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9.

오늘의 쉼터 2011. 5. 6. 20:55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9.


 9월 15일
빌헬름이여, 이 지상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사물에 대하여
이해심도 없고 감정도 없는 인간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미칠 것만 같네.
성XX의 충직한 목사를 찾아갔을 때,
로테와 함께 내가 그 그늘에 앉았던
호두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것은 참으로 근사한 나무였네!
그 이후로 언제나 내 마음을 그지없는 기쁨으로 충만케 해 주고 있었다네!
그 나무가 있음으로 해서 목사관이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네!
그 시원스러운 나무 그늘! 그 무성하고 멋들어진 가지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먼 옛날에
나무를 심었던 성실한 목사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
학교 선생님은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면서 그 목사의 이름을 말해 주었지.
훌륭한 분이었다고 하는데,그 나무 아래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성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었네.

어제 그 호두나무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학교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였네.
베어 버리다니! 나는 미칠 것만 같네.
맨 처음에 도끼로 내려 찍은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가령 그런 나무가 늙어서 말라죽었을 경우라도
슬픔으로 몸이 까칠재질 지경인 내가,
이 일을 잠자코 보고 있어야만 하다니.

친구여,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다네!
인간의 감정이란 참 묘한 걸세.
온 마을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한 거야.
목사 부인은, 버터며 달걀이며 그 밖의 선사품이 들어오는 양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자기가 마을사람들에게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 깨닫게 될 걸세.
나무를 베게 한 장본인은 바로 그 여자거든.
새로 부임한 목사 부인은(전의 노목사는 돌아가셨네)마르고 병약한 여잔데,
그녀가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기 때문이지.
학자들 틈에 끼여서 성서 연구에 골몰하고,
한창 유행하는 도덕적 비판적 그리스도교 개혁에 참여하였으며,
라바테르의 광적인 신앙에 어깨를 으쓱거리던 끝에 건강이 몹시 나빠졌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까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대지에선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린 어리석은 여잘세.
그런 여자니까 그 호두나무를 베어 버리게 할 수 있었던 거지.

그녀의 구실인즉 이렇다네.
낙엽이 지면 뜰이 지저분해지고 잎이 무성할 때는 햇빛을 가리고
호두가 열리면 아이들이 돌을 던지니 신경에 거슬려서,
케니코트와 제믈러, 그리고 미야엘리스의 비교연구를 할 수가 없다는 걸세.
마을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노인들이 무척 불만스러운 듯하기에 나는 물어 보았네.
"여러분들은 어째서 보고만 계셨나요?"
"이 고장에선 촌장이 일단 작정을 하면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거든요"
하는 대답이었네.

그런데 한 가지 고소한 일이 생겼다네.
촌장과 목사는 그 나무를 판 돈을 둘이서 반반씩 나누어 갖기로 합의를 보았다네.
목사는 평소에 늘 묽은 수프만 끓여 주는 그 부인에게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이번 그녀의 변덕스러운 신경질의 덕을 좀 볼까 했던 거지.
그런데 그런 내막이 소득 관리소에 알려져서,
나무값은 관리소에 납입하라는 통고가 내려오게 된 걸세.
목사관의 대지 가운데 그 나무가 서 있던 땅은
아직도 관리소가 그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걸세.
결국 그 호두나무는 관리소에 의하여 경매에 부쳐지고 말았다네.
어쨌든 호두나무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네.
아아, 내가 영주라면 목사 부인이며 촌장이며 관리소를 모조리......
영주라! 영주라면 영내의 나무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을 턱이 없지!

10월 10일
로테의 검은 눈을 보기만 해도 나는 행복해지네! 그런데 못 마땅한 것은,
알베르트가 별로 행복해 뵈지 않은 일일세
---만일---나라며---이러하리라---생각했던 만큼은 말일세---
이런 줄표가 좋아서 긋고 있는 것은 아니라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일세.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겠지.

10월 12일
오시안이 내 마음 속에서 호메로스를 밀어 내었네.
이 위대한 시인이 나를 끌어들이는 세계는 그야말로 기막힌 세계일세.
나는 피어나는 안개에 싸여 희뿌연 달빛 속에
조상들의 영혼을 꾀어 내는 비바람에 시달리며 황야를 방황한다네.
줄지어 있는 산들의 저 너머에서,
골짜기의 요란스러운 시냇물 소리와 더불어
동굴 속 망령들의신음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려 오네.
소녀의 통곡소리도 들려 오네.
그녀는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쓰러져 간 애인의 무덤,
잡초로 덮이고 이끼가 낀 네 개의 묘석 언저리에서
숨이 끊어질 듯이 탄식하고 있는 걸세.
이윽고 유랑하는 백발의 음유시인이 나타나네.
광막한 황야에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헤매다가,
아아, 마침내 이 곳에서 그 묘석을 찾아 낸 걸세.
그는 비탄에 잠긴 채 사납게 물결치는 바다 저 너머로 빠져 들어가는 저녁별을 바라보네.
그의 가슴 속에는 지나간 시대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네.
용사들의 고난에의 길을 축복해 주듯이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죄고
개선하고 돌아오는 화환으로 장식된 배에 달빛이 내리비쳤던 그 옛날의 일이 말일세!
노인의 이마에는 깊은 고뇌의 자국이 새겨져 있네.
최후에 혼자 남은 이 용사도, 지금은 기진맥진 무덤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네.
그러나 가 버린 사람들의 방황하는 망령들을 눈앞에 대하자
벅찬 기쁨이 새로이 샘솟아 올랐네.
그는 흔들거리는 풀숲, 차가운 땅을 내려다보며 절규하고 있다네.
"아름다왔던 날의 나를 아는 나그네들은 와서 물으리라,
<그 명창, 핑갈의 그 뛰어난 아
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하고, 나그네들은 내 무덤을 밟고 넘어가서,
나를 찾아 헛되이 이 지상을 헤매어 다니리라"
아아, 친구여!
나도 충성스러운 무사와 같이 칼을 빼어들고
서서히 숨이 끊어져 가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나의 영주 오시안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네.
그리하여 해방된 그 반신의 뒤를 따라 나도 가고 싶네!

10월 19일
아아, 이 공허! 무서운 공허, 그것을 나는 이 가슴 속에 느끼고 있네.
나는 자꾸만 생각한다네,
딱 한 번, 딱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이 가슴에 껴안을 수가 있다면
이 공허는 완전히 메꿔질 텐데, 하고 말일세.

 

10월26일
그렇다네, 나는 점점 더 확실히 느끼게 되네.
친구여, 한 인간의 존재 같은 건 대수로운 게 아닐세.
전혀 대수롭지 않은거야.
로테네 집에 그녀의 여자친구가 한 사람 찾아왔었네.
나는 그 옆방으로 책을 가지러 갔었는데,
책읽기가 시들해져서 펜을 들고 긁적거리기 시작했네.
두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네.
아무개가 결혼을 한다느니 아무개는 병이 들었는데 심상치 않다느니
하는 따위의 자질구레한 시중의 소문이었지.
"마른기침을 하고 볼이 홀쪽해졌는데, 때때로 까무러치기도 한 대요.
거의 가망이 없는 모양이에요"친구가 말했네.
"N씨도 많이 아프다면서요?"로테도 말했네.
"부종이 심하다나 봐요"하고 친구가 말하는 소리.
나의 상상력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불행한 사람들의 병상을 머릿속에 그렸네.
나는 생생하게 볼 수가 있었네.
그들은 삶을 등지기를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모른다네.
그들은 얼마나......빌헬름이여,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마치 전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어조로 말일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네.
로테의 의복, 알베르트의 서류, 그리고 가구류를 보았네.
그것들은 모두가 나에게는 정든 물건들일세.
잉크병까지도......나는 생각에 잠겼네.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집에 있어서 도대체 너는 뭔가?
두 사람 다 너의 친구요, 너를 존경하고 있어.
너는 때때로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너는 마음 속으로 그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네가 그들 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들은 네가 없어짐으로 해서 자기네 운명에 생겨난 공허를 언제까지 느낄 것인가?
얼마나 오래 그것을 느끼겠느냔 말일세>.

아아, 인간은 그지없이 덧없는 것이라네.
자기의 존재가 정말 확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곳,
자기의 존재를 정말 확고하게 인상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수 있는 애인의 추억이나 그 영혼 속에서조차도,
인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마련인거야,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10월 27일
이 가슴을 찢어 버리고 머리통을 부수어 버리고 싶어지네.
어째서 사람들이 서로 이토록 냉랭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말일세.
아아, 사랑도 기쁨도 우정도 즐거움도,
내가 남들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주지를 않네.
그리고 진심을 다 기울여서 남을 행복하게 해 주려 해도,
눈앞에 그림자처럼 차갑게 서 있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효능이 없네.

10월 27일 저녁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은 많으나,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더라도 그녀 없이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걸세.

10월 30일
나는 벌써 수백 번 그녀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려 했었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데
손을 뻗쳐 잡아서는 안 된다니, 이 안타까운 심정은 하느님만이 아실걸세.
그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충동일세.
아이들은 갖고 싶은 제 눈에 띄면 얼른 붙잡으려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11월 3일
정말이지 다시는 깨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면서,
아니, 때로는 그렇게 되리라 믿으면서 잠자리에 들기 그 몇 번이었던가!
그러나 아침이 되면 나는 다시 눈을 뜨고, 태양을 보고, 그리고 비참한 심경이 된다네,
아아, 차라리 모든 것을 날씨 탓으로 돌린다든가,
누군가 다른 사람, 또는 잘못된 계획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 견딜 수 없는 울분의 짐이 절반은 줄어 들련만!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너무나 똑똑히 알고 있네,
모든 죄가 나 혼자에게만 있다는 것을.
아니, 그건 죄라고 할 수 없지.
하지만 모든 불행의 근원이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사실일세.
전에 모든 행복의 원천이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처럼 말일세.
충만한 감정 속을 떠돌아다니면서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낙원이 뒤따르던 그 무렵의 나나 지금의 내가 다를 바 없으련만,

그 무렵의 나는 온 세계를 넘치는 사랑으로 포옹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마음이 죽어 없어져 버렸네.
이제 내 마음에서는 어떤 감동도 솟아나지를 않는 걸세.
상쾌한 눈물이 오관을 소생시키는 일도 없며,
불안으로 말미암아 이마에는 나날이 주름살이 늘어 간다네.
이 괴로움, 이것은 내 삶의 유일한 환희를 잃었기 때문일세.
성스러운 소생력, 내가 내 주위의 온갖 세계를 창조해 내었던 그 힘,
그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세! 창문 밖으로 멀리 언덕을 바라보면,
아침 햇살이 언덕 위로부터 안개 속을 뚫고 초원을 비추고 있네.
강물은 잎이 다 져 버린 버드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조용히 흐르고 있네.
마치 니스를 칠한 유화처럼 딱딱해져 버렸네.
당연히 환희를 느껴야 할 이러한 광경도
이제 내 심장으로부터 한 방울의 행복감조차도 뇌수로 빨아올려 주지 못하네.

사내 대장부가 말라 버림 샘,
물이 없는 물통처럼 하느님 앞에 서 있을 따름일세.
나는 몇 번이나 땅바닥에 엎드려 제게 눈물을 내려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었네.
마치 하늘이 황동처럼 머리 위에서 빛나고,
대지가 말라 터져 버렸을 때에 농부들이 비를 갈구하듯이.
그러나 아아, 나는 알고 있네,
우리들이 애타게 탄훤하다고해서 하느님이 비나 햇빛을 내려 주시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되돌아보면 괴롭기만 한 그 시절이 어째서 그토록 행복했던 것일까!
그것은 내가 참을성 있게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환희를
충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11월 8일
로테가 나의 무절제를 충고해 주었네.
아아, 그것도 지극히 다정스럽게!
포도주 한 잔에서 시작하여 한 병을 몽땅 비워 버리는 그런 나의 무절제를.
"그러면 안 돼요"하고 그녀는 말했네.
"제 생각도 좀 해 주세요!"
"당신을 생각하다뇨?"하고 나는 말했네.
"그런 말은 하실 필요 없어요. 생각하다뿐이겠습니까!
아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으니까요.
오늘도 나는 며칠 전에 당신이 마차에서 내렸던 바로 그곳에 앉아 있었답니다"
로테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서, 내가 더 이상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 버렸네.
친구여! 이제 나는 내가 이닌 것이나 다름없네.
그녀는 나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네.

 

 11월 15일
고맙네. 빌헬름이여!
자네의 그 염려와 친절한 충고에 사의를 표하네.
그러나 제발 안심하게나, 나는 끝내버티어 낼 테니까.
지치기는 했지만 아직 그만한 힘은 지니고 있다네.
나는 종교를 숭아하고 있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종교가 지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지팡이가 되어 주며,
병들어 쇠잔해가는 자들에게 소생의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네.

그러나 종교는 누구에게나 다 그런 작용을 받지 못했고
도 앞으로도 받지 못할 사람은 수천 명도 더 될 걸세.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는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보내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만일 내가 하느님이 보내 주신 그가 아니라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자신의 곁에 매어 두시려 한다면?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말아 주게.
아무런 사심없이 하고 있는 내 말 속에
조소가 깃들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란 말일세.
내 심경을 그대로 자네에게 내보였을 뿐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잠자코 있었을 걸세.
나 자신도, 또 남들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간에 나는 말을 낭비하고 싶지않은 터이니까.
자기에게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 술잔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아들의 입술에도 쓰디쓴 것이었는데,
내가 어찌 허세를 부리며 그것이 달콤한 체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라는 자체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전율하고
과거가 번갯불처럼 어두운 미래의 심연 위에서 번쩍이며,
나를 둘러싼 만물이 멸망하고, 이 몸과 더불어 온 세계가 무너져 내리려 하는
그 무서운 순간에 내 어찌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으랴.
그 부르짖음이야말로,
자기 자신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몰린 채
힘이 다하여 걷잡을 수 없이 전락해 가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한 그 부르짖음 말일세.
그런데 내가 그런 부르짖음을 부끄러워할 것은 없지.
또한 그와 같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겠지.
하늘을 한 필의 옷감처럼 두르르 말아서 거둘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조차도 피할수 없었던 순간이니까.

11월 21일
로테는 깨닫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네.
그녀 스스로가 나와 그녀 자신을 파멸시키는 독약을 조제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것을 들이마시네.
내 몸을 파멸시키기 위해 내미는 그 독배를 비우는 걸세.
다정스러운 그녀의 그 눈매,
나를 자주, 아니, 자주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쩌다가 나를 빤히 보는 그 당정스러운 눈매.
무심결에 나타내는 내 마음을 받아들여 주는 그 호의.
그리고 나의 인고를 애처로와하는 마음이 그녀의 이마에 새겨지네.
그것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제 내가 돌아오려 할 때,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네.
"안녕히 가세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
사랑하는 베르테르!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을 붙여서 부른 것은 처음일세.
골수에까지 스며드는 말이었네.
나는 그 말을 입 속으로 수백 번이나 되풀이했지.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중얼중얼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던 중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네.
"잘 자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지.

11월 22일
나는 '로테를 저에게 맡겨 주소서!'하고 기도할 수는 없네.
그러나 가끔 그녀가 내 것인 듯한 생각이 든다네.
'그녀를 제게 주소서'하고 그도할 수는 없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것이니까.
나는 지금 스스로 괴로움을 재료로 이론유희를 하는 걸세.
이러다간, 명제와 대립명제의 끝없는 기도가 되풀이될 걸세.

11월 24일
그녀는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네.
오늘 그녀의 눈매는 내 마음 속 밑바닥까지 스며들었다네.
찾아갔더니 그녀는 혼자 있더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보았네.
여느 때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름다움과 뛰어난 정신의 밝은 빛은 보이지 않았네.
그런 것들은 모두 내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네.
그런 것보다도 훨씬 더 숭고한 괴로움에 대한 애달픈 공감이 어리어 있었네.
어째서 나는 그 발 아래 굻어 엎드리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끝없는 키스로 그에 보답하지 않았을까!
로테는 몸을 피하여 피아노 앞으로 갔네.
그런고는 피아노를 치면서 나직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렀네.
로테의 입술이 그 때처럼 매혹적으로 보였던 적은 없었네.
그 입술은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빨아들여
그 나직한 반향만을 내보내는 것 같았네.
그것을 그대로 자네에게 전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맹세했네.
'성스러운 입술이여,
하늘위 정령이 어려 있는 그 입술에 나는 결코 키스를 강요하지 않으리라'.
그러면서도 나는 결코 단념할 수가 없었네.
내 마음 알겠지?
아아, 그것이 장벽처럼 내 영혼을 가로막고 있네.
사무치는 행복을 이 몸으로 맛보고,
그러고 나서 그 죄를 씻기 위하여 파멸해 버리고 싶네 그것이 죄일까?

11월 26일
때때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네.
'네 운명은 유례가 없을 만큼 비참하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토록 괴로워한 자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 옛시인의 글을 읽으면,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네.
나는 수많은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하네!
아아, 인간이란 내가 있기 이전에도 이토록 비참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