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이문구 / 관촌수필

오늘의 쉼터 2011. 5. 7. 13:05

이문구 / 관촌수필

-여요주서(與謠註序)-

드문 여행이나마 매양 다 되고 조금 일이 걸려,

싫어도 몇 군데 도청 소재지나 가면오면 하다 그치지 않을 수 없었다면,

급행마저 안 서 물색 안나던 시골 정거장의, 다시 볼일 있기도 수월찮게 여겨졌던

모습을 여짓껏 그냥 지니고 있지 않을까한다.

그런 정거장은 알 만한 집 마당보다 너르달 것 없울 앞터에서,

생전 물구경도 못해본 것 같은 조무래기들이 까마귀 발로 줄넘기나 구슬치기를 하여 시끄럽고,

천생 몇 시 차나 지나가야 해가 어떻게 됐는지 알 만한 한동네 영감이 선술 한잔 생각에

발이 안 돌아서서 논 보고 가던 삽자루를 깔고 앉아 먼산바라기하는 옆으로,

광주리 위에 널빤지를 얹고 찐고구마와 우린 감을 전 벌인 노파가 두엇,

그리고 지게와 함께 누워 졸던 짐꾼 하나쯤은 무시로 있어주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제대한 지 며칠 안 된 청년이, 반지르르하여 남의 눈 밖에 나기 십상으로 생긴

쌀개라도 한 마리 달고 와서 일없이 자전거를 저어 여남은 바퀴 돌고,

작정없이 서울로 뜨기 알맞게 해끔한 처녀 서넛이 고장난 대합실 문짝에 기대 서서

자전거 탄 사내 뒤통수를 찍어오며 시시덕거리고 있으면 한결 구색인데다,

그냥 부는 바람엔 먼지도 잇긋 않게 다져진, 부려두고 오래 묵힌 석탄더미가 저만치에 보이며,

타는 곳 복판에 십년 전보다 별로 자란 것 같지 않은 무궁화 한 그루가 시난고난하는 곁에

버릇없이 뒤트린 들충나무가 두어 그루 붙어 서고, 지붕만 이은 창고 바닥에

비료나 몇 부대 쌓여 있을 따름, 그 기둥의 '불조심' 석 자만은 여전하되

다른 구호가 보이지 않으면 더욱 제격이었다.

말감고 장 걷은 싸전처럼 흰소리하는 이 없고 벼리러 들어온 연장 한나절 것으로 구워내고

풀무 챙겨 들어간 빈 대장간모양, 둘레에 석탄재만 몇 무더기 버려진 오래 쓰고 비운 창고 같은

그 우중충한 역사 ―― 그것이 관촌부락 앞으로 사라져버린 지도 헤아려보면

어느덧 반 세대가 넘는 것 같다.

십오륙년 사이 불어난 읍내 규모와 궁합이 되어 많이 근대화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경주나 수덕사 역처럼 예스러움을 가꾸는 뜻이 깃들인 것도 아니고,

차가 닿기 바쁘게 푸짐한 춘향가가 드려오는 남원역을 본떠 풍류가 반죽되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콘크리트 시공법에 맞추어 변모했을 따름이었다.

넓게 포장된 광장 위의 노천 대합실과 화통 삶아먹은 목소리만 가득 찬 구내 방송실에,

택시 대기장 건너편의 버스 터미널,

그리고 유료 화장실,

거기에 잇대어 낸 구두세탁센터와 로타리클럽에서 서툰 솜씨로 세운 오죽잖은 시계탑.

6층 옥상 한 간판 안에 지하 이발부부터 목욕탕, 경양식, 다방이 들어선 호텔과,

다섯 군데나 비비고 들어선 다방에 열두 군데 여관 외에 아홉가지 간판을 나누어

 기진 여인숙을 거느린 큰 역으로 자라난 거였다.

그러나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그 자리에 그렇게 즐비하게 둘러 있다더라도,

그 정거장은 태깔부터가 탐탐치 않았고 역으로 어울리지도 않았다.

지착인이 밀려나고 유입인(流入人)들인 가운데를 차지하여 노박이로 굳어가는 탓만도 아니겠지만,

제바닥 것인 내가 보기에도 어설프고 썰렁한 꼴은 이루 이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거기 있었던 그 날이 그랬듯, 무시 날도 무슨 못잖게 그 역전 거리는 그 만큼 붐빌 거였다.

기다려서 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에, 그들이 어서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던 사람의

도착을 기다리는 사람이며, 기다리려고 나온 사람을 기다리다 못해 나온 사람에,

그도 저도 아닌 사람 하여, 역전거리는 그 날도 붐비어 부산하고 지저분하여 좁던 것이다.

그 날은 나도 기다려서 가려고 기다리던 무리 중의 하나가 되어

그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원래 완행은 잦아도 보통급행이란 것은 하루 두 차례밖에 없는 노선이었으므로,

일찍 나왔던 보람도 없이 차를 그냥 보내고는, 하릴없이 서너 시간 뒤에나 있다던 오후 3시 것을

예매해 놓고, 나머지 뜬 시간을 에울 마땅한 방법이 없어 그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가 나도 어쩌면 속절없이 한눈 팔던 눈으로도 뜻밖의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얼핏 장담했으니,

그것은 그 대목장이 무색하게 붐비던 역전거리에서 신용모(申龍模)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 말 못하게 변모한 내가 서슴없이 그에게 알은 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에 아직 애티가 많이 어리어 있는 덕이었지만,

여러 조상을 제 땅에 묻고 지켜온 농투성이 이들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나가는 사내답게,

오랜 세월 볕에 태우고 비바람에 쇤데다 땀으로 젓 담아온 몸이 적실하면서도,

눈자위가 애린하고 볼때기에는 젖살이 남아 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타고난 체질과 품성 덕이라고 여겼다.

코흘리개 적부터 장정이 다 되도록 이웃하여 지냈던 만큼,

나는 용모의 성질을 누구보다도 잘 알었던 것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것이 남 보매는 불나게 서둘러야 될 일임에도,

그래서 어디 부딪쳐 치를 것은 치르고 보라던 재촉이 빗발치고 성화 같아도,

당사자인 그는 언제나 내년보살했으며 해찰 부릴 것 다 부리고 찾을 것 고루 챙겨 갖추는

늑장 끝에야 슬며시 직접거려 보던 늙잖을 위인이 그였던 것이다.

매사에 물렁하고 심지 좋던 용모의 성질은 그러나 자발없고 방정맞은 것 보다

정년 낫다고만 할 수도 없었으니,

그것은 침착해서 삼가는 것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일의 얼거리나 시초를 알아서 함부로 덤비지 않았다든가,

등골이 다부지고 배짱이 알찬 값하느냐고 늑장을 부린 것이 아니라,

거지반은 앞뒤가 어두워 일의 갈피를 모르고 아울러 대책을 못 세워서 뭉기적거린 셈이었다.

가르칠 만한 집 자식이면서 중학교에서 배움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본디 어버이 체면으로 졸업장이나 얻어주자고 억지로 넣은 터였거니와,

아무리 부모의 마음이더라도 그 이상은 돈이 아깝던 모양이었다.

천성이 우둔하여 무슨 일에나 흥미가 없었고 어던 것에도 무관심이었으므로,

한 번만 귀띔해 줘도 넉넉할 것을 열 번 스므 번 가르쳐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 들을 때뿐 그 자리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신경이 무디고 됨됨이가 헐렁하니 변변치 못했던 만큼이나 그의 뒤통수에는

여러 가지 별명이 덕지덕지 더뎅이져 있었는데,

그 여러 별명 중에서 용모 자신도 뜻을 몰랐던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장부식(不識)'이 그것이었다.

'늘 몰라'라는 뜻임은 풀어 말할 나위도 없으련만 막상 그 임자만은 새겨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역전거리에서 뜻밖으로 십수년 만에 마주쳤던 순간에도 나는 그의 원이름보다 장부식이라는

별명부터 먼저 떠올라, 실언 직전에 마침 정신 들어

모처럼 성인이 되어 만난 자리를 부드럽게 넘길 수가 있었다.

그는 그의 얼굴빛보다 색깔이 엷다고 할 수 없을 밤색 코트덴 바지에

해묵어 바랜 하늘색 저고리를 회색 긴 소매 남방으로 받쳐입고 있었는데,

그 겉꾸림만 해도 남은 그렇게 시늉해 보려고 해도 할 줄 몰라서 못할 지경으로

어설프고도 촌스러운 행색이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자마다 다가와서 소매끝을 잡았다.

그는 벌어진 입을 못 다물며,

"워디 가서 입주래두 한잔허야 옳은디 일진이 이 지경이니 그건 아직 안되겄구……

시방 저 다방서 만날 사람이 있는디 나랑 하냥 가지." 하며

소매 잡고 있던 손으로 등을 밀었다.

나는 마다할 까닭도 없었지만,

무디고 질린 성질에 생전 서두는 법이 없던 사람이 갑갑증에 일그러진 얼굴로 설치는 게

 예사롭지 않아, 그의 변모를 좀더 여겨보기 위해서라도 동행해 볼만한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역전다방이란 곳으로 나를 밀어갔다.

다방 안은 몹시 침침했으나 바닥이 서너 칸도 안 되어 들이단짝으로 한눈에 훑을 수 있었다.

용모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아직 온 모양이었다.

내가 구석진 자리로 앉아 용모도 마주 보고 앉으며,

"어째 해필 이리 복잡헌 날 이런 디서 만나게 되니

여유 있이 왔으면 우리계두 좀 들러서 안 묵어가구……." 하고 핀잔 섞어 두런거렸다.

나는 그렇게 됐다고 변명하기보다 무엇이 그리 복잡한가를 물었다.

"죽는 늠만 죽으라는 세상인지, 이렇다 허니께 별 옴딱지가 다 속을 녂인 단 말여, 에이- 같잖어서."

그는 담배를 붙이면서 담붙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주문받으러 왔던 종업원이 그의 끓어오른 이마를 보고 지려 입을 못 떼고 우물쭈물하다

엽차만 내려놓고 돌아서자,

그는 조금만 삐끗해도 금방 날아갈 눈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찢으며 말했다.

"안마담 말여 ― 여기 보리숭님만 두 사발 들었다 놓구 갈 게 아니라 말여,

돈 받을 것두 두어 보새기 퍼오야 허잖여."

종업원이 웃음기를 못 거둔 채 돌아보며 말했다.

"저 마담 아니에요."

"마담이 아닝께 안마담이지."

"커피루 올릴까요?"

"구만 올리구 내려…… 그 왜 촌늠 설탕맛으로 마시는 거 있잖여?

웃기는, 당나귀 배 보구 빤쓰 적실 년……."

용모는 엽차를 단숨에 들이붓고 나서,

"서울은 밝은 디라 괜찮을겨.

이 구석서는 폭폭해서 못살겄다.

잘 먹구 못 먹구가 문제 아니라 열화 터져 못살겄다구.

옴싹달싹을 헐 수가 뚔단 말여." 하며

또 새 담배를 갈아 물었다.

"무슨 내용인지 나는 알어두 소용뚔남?"

내가 거듭 물어서야 그는 말머리를 꺼낼 채비로 출입문 쪽을 한 번 둘러 보았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고 가죽점퍼 차림의 중년사내가 안경알을 번쩍이며 들어서니,

용모는 얼른 엉덩이를 들썩해 보이고 나서

"인저 오너먼. 처삼춘인디 이야기는 이따 허구 앉어 있어. 오래 안 걸리니께." 하며

그 점퍼 뒤에 묻어 갔다.

그들은 나하고 서너 좌석인가 떨어진 창문 쪽의 밝은 자리를 골라 마주 앉았다.

저만치로 떼어놓고 살펴보니

용모는 무엇으로 막바지에 몰린 듯 몹시 초조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고단하고 불안한 기색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안 될 무슨 답답한 일에 얽매여 엔간히 부대끼는 기미였는데,

그의 표정이며 언동은 지난날의 장부식이가 아니었다.

이미 깎일 대로 깎여 속만 남은 듯한 인상이었다.

용모가 속에 쌓이고 뭉쳐 있던 것을 어서 하소연하고픈 마음에 열띤 눈치를 거듭 보이는데도

용모 처삼촌은 의자 등받이를 거우듬하게 버티며 점퍼 밑으로 혁대를 내놓고 앉아

고개만 연방 제껴가며 딴전을 벌였다.

"나봐 미쓰 정, 내게 즌화 온 거 뚔어?

누구 삘어오지 않았어?" 종업원들이 그렇다고 하니,

"나봐 ― 나 좀 봐 ― 공보실에서두 아무 거시기 뚔었구?

아니 대일기업으 강 사장헌티서두 전화가 뚔었다 그게여? 이상헌디.

나봐 ― 즌화는 왔는디 누구 다른 것이 잘못 받은 거 아녀? 그럴리사 뚔는디.

나봐, 거북선 있으면 한 갑 가져와."

가죽점퍼는 한바탕 수선을 피우고 난 뒤에도 용모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나는 가죽점퍼의 자세하는 투며 말투며 모두 남더러 들어달라고 부러 떠드는 허텅지거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출입문만 삐끔해도 흘끔거리고 계산석의 전화가 울릴 적마다 돌아보았으며 종업원이

오가는 대로 허벅지와 엉덩이를 집적거렸는데,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도 어림할 수 있었으니

이른바 읍내 유지의 허세라는 것이었다.

거저 먹을 것이 있을 성싶으면 이런 때는 이렇게 붙고 다른 때는 다르게 붙어 거드럭거리며

나라 것을 여투어 먹고 남의 사는 것을 알겨 먹돠,

흥정이 쉬워 소문 안 나고 실속 따져 서로 눈감아 주며 사는 상것들의 묵은 버릇이었다.

저만 못해 보인 것에게는 문장지어 구박하고,

저보다 나아 뵈던 것들에게는 영리한 개가 되어 짖어주는,

그런 부류의 족보 있는 행티를 그대로 판박이하여 뵈주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가량에도 용모가 무슨 부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되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애당초 기대할 것이 못 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용모는 무엇을 호소하길래 그토록 눈치없이 그 꼴을 하는지,

연방 등줄기를 늘여가며 침이 마르도록 주워섬기고 있었다.

다시 출입문이 여닫히다 얼른 고개를 제껴 보던 가죽점퍼가 큰 소리로 말했다.

"미쓰 정, 거기서 말여, 부군수 들어왔나 즌화 즘 ? 봐. 있으면 나 여기 있다구 허구."

이윽고 계산석 종업원이 전화를 걸더니 그에게 말했다.

"최 국장님, 지금 계시대요."

"그려, 그럼 나 시빙 떠난다구 짐깐만 기시라구 허구."

그는 일어서더니 용모를 내려다보며 이 구석까지 드리도록 큰 소리로,

"하여거나 이왕 이리 된 거, 용코 뚔어, 벌금 몇 푼 물구 말으야지."

하고는 후딱 나갔다. 용모는 어깨를 무겁게 지고 와서 내 앞자리에 주저 앉으며 씨월거렸다.

"예전버텀 처삼춘 무덤에 벌초허는 늠 뚔더라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오늘 보니 알겄구먼."

하며 내가 남긴 엽차를 마저 마시고는,

"마당 하나 사이로 십 촌 넘어간다더니 맞는 말이여,

뮁가 급허면 삘어와서 돼지 암내내난 소리를 해두 내가 아쉴 때는 말짱 헛게라구.

서루 니미룩내미룩허며 그것 하나를 안 들어주네, 드려워서 말여……."

그는 치솟았던 욱기를 못 갈앉혀 두 손 맞잡고 손가락을 꺾어 마디 소리만 왁살스럽게 내며

부쩌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디 그려?"

한참 속 타하는 중이므로 자상하게 이야기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나까지 덩달아 지루퉁해 가지고 무료하게 있기가 따분해서 한 말이었다.

"실뚔는 짓 허다 재판을 받게 됐으니 성한 사람이면 간 뒤집힐 노릇 아니 냔 말여. 내 원 참."

용모는 서슴없이 내뱉었다.

의외였다.

무슨 재판이냐고 다시 물었다.

"장난두 아니구 지랄두 아니구…… 재수 뚔으면 이렇다구."

"누구허구 다퉜남? 누가 돈을 안 갚구 떼먹담? 그럼 뭐여. 넘의 지집허구 사통헐 주변두 아니구……."

내가 줄달아 물었던 것은 그가 연방 허벅허벅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었는데,

 내 말이 다 된 뒤에야 용모는 본래의 자기 얼굴로 반죽한 다음 무게 달린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네모냥 평생 끓탕에 삶기며 찍소리 한마디 못 내본 여물주걱이야 워디서 오라면 오구

가라면 가야지 달리 숨통 댈 디 있는 중 아남?

징역을 살리면 징역을 살구 벌금을 물리면 벌금을 물으야 허구…… 그렇단 말여."

용모는 개연한 얼굴에 체념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재판에 이기면 되잖여. 지게 생겼남?"

내가 속 모르고 지껄여도 용모는 뾰족할 줄 모르던 옛가락 그대로 느리터분하게 받아주었다.

"여기가 서울인감. 이기면 얼굴 날리구 지면 재산 날리는 게 시골 재판인디,

이건 그것두 아니구 사람만 못 쓰게 버려놓겄다는 거녀.

이러니 내가 요새 내 정신으루 살었겄남.

메칠 속 끓였더니 돌아댕길 근력두 뚔어."

"다시 말허면 인권에 관한 문제다?"

"인권인지 인격인지는 배운 사람 값 허는 소리구.

이런 디서 이렇게 사는 나 같은 것들은 그냥 살게만 해줬으면 좋겄어.

남에게 못헐 노릇 않구 폐 끼치지 않을 테니 생긴 대루 살게나 해줬으면 살겄단 말여."

용모는 그러나 그 이상은 말하기가 거북한지 한동안 뜸을 들였다.

나는 용모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진드근히 기다렸다.

 여러 해 동안 재판정에 다니며 방청해 본 가늠이 있어,

내막에 따라서는 내 의견이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므로

먼저 사건의 성질부터 알아야 되겠던 것이다.

 한참 만에 용모가 입을 열었다.

"이따 재판에 하냥 가볼까? 나는 생전 츰이라서 말여……."

"세시 차표를 샀는디."

"그럼 넉넉혀. 재판 시간은 13시 0분이거던. 13시가 오후 한 시라메?

 새루 한시면 한시구 증각이면 증각이지 13시 0분은 뭐여."

"여기 재판소는 가보지 않았지만 그번에 말은 들었어."

그 곳 재판소 풍속에 대해서 용모가 더 모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들은 대로 옮겨주었다.

그것은 용모가 지레 주눅들어 가지고 법정에서 당황해 한다거나 스스로 죄인 노릇을 하지 않도록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이 곳 순회 재판소는 매주에 한 번씩 수요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1시간동안 열린다.

이웃 고을 지법지원(地法支院) 판사가 12시 완행열차를 타고 와서 재판하고

3시 보통급행을 타고 되돌아간다.

사건은 민사 형사를 가리지 않는데 대개는 즉결재판으로 시간이 간다.

검사 변호사가 입회하지 않는 것도 특징의 하나인데,

그것은 검사난 변호사가 그 곳에 상주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사건 자체가 가볍고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종류만은 강도 살인 및 통금 위반사항만 대도시와 다를 뿐,

폭행 배임 사기 횡령 절도 강간 등 구색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것으로는 첫째가 간통이고 금전 거래 관계가 그 다음이다.

이것은 그 곳에서 30년째 대서소를 하고 있는 남 모씨에게서 들은 거였다.

내 말이 끝나자,

"그러나 사람이 사람 값을 허는 디래야 말이지.

이번 일만 해두 뭣을 아는 것들이 법을 되려 우습게 여기더란 말여.

뭣이 잘못인지 모르는 나 같은 것들은 워디 가서 이 폭폭헌 사정을 호소허야 되겄나

생각 좀 해보라구. 모르는 것들은 모라서나 그렇다구 허지 뭣을 아는 것들은

빠져나갈 구녕을 아닝께 뎁세 장난을 칠라구 들더란 말여."

용모는 결김에 잔뜩 쥐고 있던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찍었다.

호두껍질 못잖던 쭈그렁 양은재떨이가 펄쩍 담뱃재를 풍기고 내려앉았으나

그는 부아가 치밀어 그것도 눈에 뵈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원 재수 뚔으면 송사리헌티 좆 물린다더니 멀쩡허니 병신 될라닝께

별 우스운 것이 다 생겨 보고리챈다 말여."

내용을 들어보니 용모로서는 열토이 터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용모는 흥분을 갈앉힌 다음 순서를 엇먹이지 않고 알아들을 만하게 늘어놓았다.

용모네가 관촌부락에서 뜬 것은 동네 앞 개펄이 논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저수지와 간척지를 잇는 수로가 그의 집을 반반으로 쪼개며 지나갔던 것이다.

집만 한 채 헐리고 말았더라도 그렇게 아주 떠나지는 않을 사람들이었으나,

앞뒤로 있던 텃논과 터앝마저 양쪽으러 갈라지면서 수로로 먹혀들어가,

관촌부락에 그대로 남아 붙박이되면 살림을 지탱해 갈 수 없이 된 형편이었다.

그들은 달리 방도가 없었으므로 준다는 보상금을 주는 대로 받고 무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허울 좋은 하눌타리로 이름만 보상금이었을 뿐, 그나마 1년이나 질질 끌며

세 차례로 나누어 받았으나 모갯돈이 들어와도 션찮은 판에 푼돈을 쥐게 된 거였다.

지악스럽고 규모가 굳기로 근동에서 으뜸 가리라던 소문대로 용모 부친은 비록

푼돈이었을망정 한푼도 녹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돈으로 잃은 만큼의 농토를 장만하려면 거기서 늘잡고 시오리는 산골로 들어가

하늘에 막힌 동네 아니면 발도 디뎌볼 수가 없었다.

보상금 자체가 시가보다 헐하게 매겨져 나온 탓이었다.

용모가 여태 트럭마저 안 들어가는 느름새로 옮겨가 부모를 게다 묻고 입때껏 전깃불조차

구경 못하며 사는 그런 연유였다.

느름새는 그제나 이제나 아래웃뜸 다 더듬어 열다섯 가호밖에 안 되는 강아지 이마빡만한 기슭동네였다. 워낙 외오 돌아가고 후미진 두메라 생전 쓰게 된 사람 하나 와서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고 볶는 관청 떨어지 신칙 안 받아,

그래도 성가시지 않은 점 한 가지만 보고도 그럿저럭 살 만했었다고 말하며 용모는 웃었다.

느름새는 그만큼 사람이 드문데가 기슭동네답게 도린결이 흔하고 곱은탱이가 잦아

일 년 내내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구석진 터가 널려 있었다.

따라서 오소리 너구리 족제비 살가지 따위 바닥 피물(皮物)이 많았고 수리니 보라매니

부엉이서껀 날짐승도 바글거렸다.

그 중에서도 들비둘기와 꿩은 너무 지천이어서 쳐다보는 것조차 물릴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놔두면 남아나지 않을 것이 밭농사였다.

전에는 들쥐나 참새 등쌀에 사람 차례 오는 것이 적었지만,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야생동물 보호령이 내린 이후 근년에는 꿩의 행패가 가장 심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들을 무리쳐보려고 궁리하지는 않았다.

셈판없이 올무나 덫을 한두 마리 축낸다 하여 효과가 있을 리도 없으려니와 무릇 내 남적없이

일에 묻히어 살려니 그럴 틈도 없었던 것이다.

용모의 멀쩡한 병신 노릇이 비롯된 것은 한 파수 전이었다.

나흘 전인 지난 장 아침이었다.

느름새에서는 별쭝맞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달 육장을 장마다 으레 장에 나와 해를 저물리던 것이

버릇이었으니 용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암만 바빠도 호미를 벼릅네, 낫 개재비구멍을 죄러 갑네하며,

대개는 그런 자디잔 일거리를 만들어 나갔으며,

정 볼일이 없으면 곡식금을 보러 간다든사 어리전 시세가 어떤지 알아본다는 핑계를 대었고,

하다 못해 빈 지게라도 지고 나서야 배기던 거였다.

모처럼 날씨가 풀려 응달이 녹도록 푹하기도 했지만,

똑부러지게 할 일도 없었으므로 그 날도 용모는 실없이 일어섰던 것이다.

신발 꿰는 기척에 침침한 방구석에서 콩나물 시루를 앉히던 아내가 잔뜩 부르터서 내다보지도 않고,

"저욹내 새우젓 한 보새기 안 사먹고 장을 뭐 허러 나간대유.

여물 쑬라면 쏘시개 한소끔 ?을 검불 한 젓가락이 뚔던디,

갈퀴자루 잇어서 북데기를 긁던지 고주배기나 뻐개놓던지 허지 않구."

하며 말릴 때 그대로 듣기만 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였다.

"아녀, 면에 가 누구 좀 만나보야여."

그는 부러 뻔한 거짓말까지 해가며 부득부득 사립을 나선 것였다.

길이 질어 말벗 없이 내닫더라도 여물 한 솥지기는 좋이 들여야 읍에 닿을 둥 말둥 했으므로

용모는 엉덩이가 무지근하도록 바삐 걸었다.

그는 한남송이라고, 월남 갔다 온 사내가 차린 방앗간을 저만치 내려다보며

독서릿재 마루에 막 올라서고였다.

웬 아이가 저만이나 하게 큰 벌건장끼 한 마리를 겨드랑이에 낀 채 내려가고 있었다.

꼬랑지 털이 쭉 뻗은 게 이만치에서 보기에도 금방 잡은 놈이 분명했다.

용모는 결김에 자기도 한 마리 잡아 볶아 먹으면 보되겠다고 여겼지만

그 생각은 몇 걸은 못 가서 그쳤다.

고개를 내려오면 야트막한 개량이 나가고,

겨우내 얼지 않고 흐르는 여울목이 있었으며,

발벗지 않고도 건널 수 있게 고리삭아 가는 오리나무 서너개를 걸쳐놓은 거섶이 있었다.

용모는 거섶을 지나자 쥐불 놓아 시커멓게 누운 논두렁으로 에워질러서 신작로에 이르렀다.

신작로에 들어서자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에 온 것 같았다.

한가네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발동기 소리가 숨가쁘게 들리고,

방앗간 울타리 옆 미루나무에서 가지가 휘어지게 참새떼가 다닥다닥 열려 짜그락거리고,

이고 진 장꾼들이 두서넛씩 패지어 두런 거리며 앞서가고 뒤에도 있고 했다.

방앗간 앞에는 볏섬이나 찧어 돈사려고 나왔나 싶은 느름새 조순만이와,

역시 쌀가마나 만들어 가용하려고 나왔을 뫼들이 오수길이가

웬 아이를 앞에 두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오수길이가 먼저 용모에게 알은 체를 했다.

"워디 가나?"

"심심해서 예까지 나와봤구먼."

용모는 다가가며 대꾸하자 조순만이도 얼굴을 걷으면,

"장보러 나가남?" 하고 물었다.

"아침버텀 장에 가봤자 별 볼일 있간디. 나이타에 지름이나 ?까 허구……."

하는데 옆에 있던 아이가 고개를 굽벅하여 여겨보니 느름새 웃뜸 고학성이 아들 성문이었다.

아이는 겨드랑이에 장끼를 물리고 있었다.

"웬 게냐, 니라 잡었데?" 용모가 물었다.

"으만무지루 칡넝쿨 올무를 해놨더니 오늘 아침에 가봉께 모가지가 옭혀 죽었더라너먼그려."

오가 아이 대신 그렇다고 일러주었다.

"잡었으면 앓구 있는 아버지나 볶아디리지 워디 가지구 가는겨?"

용모는 나무라는 투로 한 말에 오는,

"학셍이가 여적지 못 일어났나뵈. 워디가 워째서 못 일어난다나? 누운 지가 달포 가차이나 될 텐디."

하며 염려하였고 조는,

"원체 뚔는 살림에 약을 먹으라니 되게 째는가벼. 담뱃값을 허게 팔어오라더랴."

장끼를 어루만져가며 성문이 말로 대꾸했다.

"좀 들헌지 그저 그타령인지, 나두 자주 못 들어봐서…… 니 아빠가 팔어 오라더라 말여?"

용모가 성문이더러 물으니 녀석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나가나?" 조가 묻고, "누가 팔어봤으야지." 오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3천원 아래루는 안 팔 거유." 성문이도 어린것답잖게 흰소리를 했다.

"글세 말여, 드문 것이긴 해두 그 돈 주구 먹을 사람이 있으까……."

용모는 막연하게 중얼거리고 나서 가던 길을 다시 이었는데,

성문이가 졸래졸래 뒤따라오고 있었다.

용모는 성문이 손으로 꿩을 넘겨받아 든 것을 읍내 초입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그것은 물건을 흥정하기에는 애가 너무 어리고, 뿐만 아니라

곁에서 말마디나 거들어 다다 한푼이라도 더 받아쥐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용모는 꿩 날갯죽지를 쥐고 앞뒤로 내둘거리며 장꾼들 틈으로 들어갔다.

보자는 사람만 나서면 아무라도 붙들고 흥정하여

웬만하면 얼른 넘겨주고 아이를 일찍 들어보낼 셈이었다.

그는 하던 대로 먼저 어리전에 들렀다.

그날도 돼지새끼 염소 닭 오리부터 억지로 젖 뗀 강아지 생쥐만한 고양이새끼까지 고루 나왔는데,

용모가 그곳 먼저 찾아간 것을 꿩 임자가 있으리라고 여겨서는 아니라

장에 나오면 으레 거기서부터 돌아보았던 습관으로서였다.

따라서 실은 손에 쥐고 있던 꿩보다도 바닥에 묶여 버리적거리는 것들에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가 어리전을 한 바퀴 두러보고 쇠전(牛市場)으로 막 들어서려면 참이었다.

"그거 팔 거요?" 하는 소리가 팔꿈치를 집적했다.

얼김에 돌아보니 곤색 바지에 아무나 입는 밤색 나이론 점퍼를 입은 중년 사내였다.

아주 낯설진 않고 어디서 더러 본 듯한 것이 근처에서 가게를 보든가 음식점 주인 같은 인상이었다.

용모는 생판 모를 사람보다는 말하기도 쉽겠다고 여기며 상냥하게,

"예, 오늘 아침에 잡은 게라 토실토실허니 여간 좋잖유. 들어보슈. 아주 무거워유."

하며 꿩을 사내에게 넘겨주었다.

사내는 꿩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약으루 잡었나 뭘루 잡었어……."

중얼거렸고 용모는 재빨리,

"올무로 잡었지유. 요새 함부로 약을 놓을 수 있간유. 안심허구 자실 수 있유."

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리로 좀 나갑시다." 하며 용모는 슬쩍 밀었다.

용모는 얼결에 한길로 빠져나오다가 어리전을 무심히 돌아보고는 발걸음을 더듬었다.

여러 사람의 눈길이 모두 자시 얼굴로만 쏠려와서 엉기는 게 느낌이 예사롭지 않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찌 될 것인가를 깨닫지 못했으니,

 어쩐지 성문이를 놓친 것 같아 한길로 빠져나오자마자

돌아서서 두리번거린 다음에도 임자를 옳게 만났다는 기분일 따름이었다.

임자 한번 잘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자기보다 눈치 있어 먼저 내뺀 줄도 모르고 용모가 성문이를 찾느라고 어름거리자,

"왜 이래요. 얼굴 생각해서 점잖게 대허면 그런 줄이나 알지."

하고 사내는 용모 옆구리를 툭 쳤다.

그제서야 그가 누구란 것을 겨우 짐작했는데,

용모는 눈이 꺼지면서 땅거미가 내려 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한번 해보기나 한다고,

"왜 이러슈. 얼라 ―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꿩 임자는 따루 있단 말유."

"가면 알어요."

"아니란 말유. 이야기를 들어도 안 보구 이러시면 워치기 허유."

"점잖은 분두 그짓말허시나. 내가 첨부터 보고 있었는데……."

"얼란, 아니란 말유. 우리계 핵교 댕기는 애가 겐디,

내가 대신 팔어 준다고 잠깐 들구 있은 게구 나는 아무것두 아니란 말유."

"글세 아무것도 아니니까 가서 말해요. 가서 말허면 되잖소."

"죄 뚔는 사람이 왜 가유."

"나는 지금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죄 없는 사람 성가시게 하구 있단 말요?

이 사람이 ― 당신 장바닥에서 뼉다귀 한 번 추려볼 텨?

나잇살아니 처먹은 새끼가 말귀도 없어.

누구한테 뻗대여. 잡지 말라는 거 잡었으면 잘못한 줄이나 알았야지.

되려 어린애 핑계를 대고 뻗대여.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


용모는 두 주먹이 번갈아가며 오라붙자 얼이 빠져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천장 만장 뛰며 부인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쏠려오며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용모는 알 만한 사람이 더러 섞인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다다 얼른 남의 눈 없는 곳으로 가서 사정해 봄만 같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사내가 가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아이가 꿩 잡았다는 사실이나 신통하게 여기고

그것을 팔아 애비 담배값에 보탠다는 것만 기특하게 여긴 것뿐,

그 다음 일을 생각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더구나 쇠전이나 어리전에는 따다개꾼이 들끓어

장날이면 반드시 형사가 잠복하고 있다는 것도 미리 생각했어야 옳았다.

후회해 봤자 쓸데없었다.

그 사내를 같은 데에 있는 사람이 최 순경이라고 불렀다.

일요일이고 비번이어서 사복을 했고 어리전에 자목하고 있었던 것은

소매치기 단속을 목적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전염병이 옮아 조는 닭을 팔아치우러 나온 촌사람이 많고

그 병이 어리전에서 전염되어 각지로 퍼지며 피해가 자심하여,

축산조합에서 특별 단속을 청원해 온 바람에 우연히 파견나가 있었다는 거였다.

이것은 그네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주워모아 알게 된 거였다.

용모가 따라간 곳은 역전거리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농협과 은행 지점 옆에 자리한 파출소였다.

일요일임에도 장이 선 까닭인지 정복 순경이 둘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난로마저 신통찮아 바깥보다도 더 썰렁한 탓인지 용모는 팔꿈치가 시리거 무릎이 떨렸다.

그는 시킨 대로 최순경 책상 위에 주민등록증과 예비군 수첩을 내놓고 마주앉았다.

본적 주소 성명 생년월일 주민드록번호 직업 끝에,

"잡은 시간이 언제요?"

하고 물었다. 용모는 얼떨결에,

"아침 머구 가봤더라니께 아홉시나 됐겄지유."

라고 대답했다.

"?으로 잡았다구 했소? 무슨 덫이요?"

"그런디 그게 말유……."

"묻는 말이나 대답해요. 쥐덫은 아닐 테구 무슨 덫이냔 말요?"

"글세 그것이 안 그렇단 말유."

"뭣이 안 그려? 덫은 몇 개나 있소? 전문으로 밀렵허려구 기구까지 준비하고 말여,

 당신 악질이구먼. 그리고 이게 몇 마리째요?"

"에이 선생님두 참. 애매헌 말씀만 해쌓시네유, 안 그렇다는디두."

"당신 뵈주려구 헐 때 들어요. 그게 쉬워요. 일을 어렵게 만들 거 없어요.

야생 조류, 야생동물을 보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말여…….

어린애들두 산에다 새집을 만들어다 달아주고 하는데,

당신은 꿩만 잡은 것 두 아닐 거요. 언제 무엇무엇을 잡았으며,

무슨 방법으로 몇 마리 잡았다고 솔직히 말 않으면 재미없어.

오랫동안 집에 못 간다구. 최하 징역 유월이여."

"아이구 환장허겄네. 선생님두 아까 보셨을 거 아니유.

쬐끄만 애가 하나 안 따라왔더냔 말유.

그애는 고학셍이라구 우리계 한동네 사람 아들인디, 그애가 잡은 것을 말유……."

"그애는 당신 아들이잖여 ― ."

"어허 ― 그애는 말유……."

"이 사람 정신 못 차리는구먼. 이 따위가 있어 이거 ― 자기가 진 죄를 자기 어린 자식에게 덮어씔 참여?

뭐 이런 것두 있어…… 싸가지 없는 새끼, 야 너 좀 일어나봐. 일어나……."

소리와 함께 앉아 있던 용모는 얼굴을 천장으로 띄우면서

뒤로 나가떨어져 뒤통수를 바람벽에 이겨붙였다.

구두 뒤축이 허벅지를 찍더니 아랫배로 올라왔다가 옆구리를 제긴 다음

엉덩이를 까뭉기고 어깻죽지로 올라왔다.

논산 훈련소에서 맛보고 십몇 년 만에 받아보는 대접이었다.

"제 어린 자식에게 떠밀어? 그 친구 안 되겠는데."

"그 사람 버릇 단단히 고쳐놔야 되겠어."

거기 있던 직원들도 한마디씩 거들고 있었다.

용모가 간신히 굴신하여 의자룰 바로 놓고 앉아 최 순경이 얼굴을 풀고 말았다.

"신용모 씨, 피차 일을 쉽게 합시다. 무슨 일인지 알겠소? 죄가 있다 없다,

벌을 주고 안 주고는 차차 재판장이 법대로 할 일이고, 나는 조사만 하면 되는 사람이요.

변통머리 없이 나헌테 잘 뵐라구 헐 필요도 없구,

그렇다구 나잇값 없이 의젓잖이 그짓말할 필요도 없는 게요.

또 그짓말해 봤자 통허지두 않어. 당신 말에 속을 사람 같소?

나두 처자식이 있는 사람아라 사정이 있을 수 있구 인정두 없을 수 없는 사람인디,

다시 말허면 당신이 신사적으루 나올 적에는 나두 생각허는 바가 있을 것이다 ― 이겁니다.

왜냐. 나두 사람이더라 이것이여. 무슨 말인고 허니,

나는 죄가 있다 없다, 벌을 준다 안준다 헐 자격은 없지만서두,

죄가 커질 것을 적게 만들구 벌이 무겁게 내린 것두 어느 정도 가볍게 내릴 수 있도록

헐 수는 있는 사람이다 ― 이런 말입니다. 신용모 씨,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소?"

"예, 그러믄유. 잘 알아듣겄어유."

엉겹결에 그렇게 대답하고 난 용모는,

막상 조서가 작성되는데도 사실을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없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지 않다고 내뻗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최 순경은 중간에 이런 말을 하던 것이다.

"신용모 씨, 우리가 이런 일로 이렇게 알게 된 것은 피차 유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하루 이틀 살다 말 사람두 아니구 허나 이것두 다 인연입니다.

아까 내가 흥분헤서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긴 했지만 그거야 무슨 혐으져서 부러 헌 일이겠소.

내가 손버릇이 좀 안 좋아 그린 된 것뿐인데 살다 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는 법입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구 좋은 경험 한번 했느나라구 생각하시오.

그리고 이런 사건은 말이오,

최근 신문지상을 통해서나 라디오 테레비 보도를 보더라도

아주 엄격하게 통제하고 처벌하는 판이란 말이오.

이 사건두 당연히 구속 입건헐 것이나, 당신은 처음이라니까

당신 말을 믿기루 허구, 특별히 생각해서 즉결로 넘기는 정도로 할 테니 그런 줄이나 아시오.

생각해 보오. 이 엄동설한에 유치장 마룻바닥에서 견뎌내겠소?

당신이 재수가 좋고 운이 틔어서 나 같은 사람 만난 줄이 나 알아요."

들어보면 불리한 것은 전혀 없고 유리한 것만 있는 판이라 고맙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었으므로,

최 순경이 진술서를 넘겨주며 한 번 읽어보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을 때도

용모는 아무 말 없이 지장을 찍는 거였다.

―― 피의자 신용모는 상기 거주지에서 소낙지(小落只)의 농업에 종사하여 생계하는 자로서

전작물에 생치(生雉)의 피해가 다대하다고 인정하야 생치 구체에 부심하던 중 기구를 사용하야

포획할 것을 기도하고, 피의자 소유 맥전 우경(隅經)에 제구(蹄具)를 작설한바,

금월 3일 09시경 생치 1수를 포획한 사실이 유하고,

피의자는 일용(日用) 용전이 궁핍함을 통감하던중 본읍 장시(場市)를 기하야

불법 취득물을 경매하고 용전에 전용할 것을 기도한 사실이 유한 자로서,

야생동물 보호령을 실지하고도 고의로 왜곡 위반한…….

용모가 읽은 내용은 대강 그런 거였다.

최 순경은 저녁때가 다 되자 풀어 주면서 반드시 수요일 13시 0분까지

순회 재판소 법정으로 출두한 것을 지시했다.

용모는 풀려나오자마자 읍내에서 가볼 푸네기는 모두 찾아다녔다.

부조리 제거니 서정쇄신 이니 하고 아무리 떠들어도 돈만 쓰면 무마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은 거였다.

설령 벌금보다 돈이 더 든다더라도 법정 출두만은 면해야 되겠던 것이다.

그것은 실형이 떨어지면 법정 구속을 집행할 가능설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군데 되지도 않았지만 장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십 원 한 장 둘를 수가 없었다.

말은 그렇게 안해도 없는 것한테 어떻게 받으려고 돈을 놓겠느냐던 눈치가 분명했다.

돈이 안 되면 최순경을 만나 말이라도 좋게 해달라고 갈급하게 매달렸으나 무가내였다.

평소 안면 있는 사람이 간곡하게 붙들고 늘어지면 서류가 넘어가지 않을 성싶어

그랬던 것이지만 당장 자기네가 아쉽지 않으니 외눈 하나 잇긋하는 자가 없었다.

3년째 여름 개장국 겨울 해장국을 하던 당숙은,

안 그래도 뜯기는 것 많아 문닫히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자동차 부속 가게를 하는 이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잘한 신세를 미리 지면 나중 정말 무슨 일이 생겨 급한 때는 못 써먹게 된다는 거였다.

신문 지국장을 하는 처삼촌도 다를 것 없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마고,

재판받는 날 역전다방으로 나오면 결과를 알 것이라더니,

만나니까 오히려 용모더러 참으라고 타이르던 것이다.

"이왕 넘어간 것, 별수 뚔으니 곱게 참구 판사 앞으로 허툰 소리나 말어.

최 순경허구 나허구는 종씨간이구, 서로 그럴 처지가 아니거든.

쬐끔이라두 틀리면 피차 곤란헌 입장이니께 나를 봐서라도 벌금이나 물구 말어."

용모는 가죽점퍼와 안경알만 번쩍거리다가 부군수와 만난다며

찻값도 안내고 나간 사내의 말투를 시늉해 보이고 나서 체념한 얼굴을 했다.

처삼촌 얼굴을 봐서가 아니라 자기 앞날을 위해서 참아야 할 것 같다는 거였다.

재판에서 진술을 뒤집으면 앙갚음이 있을는지 몰라 두려운 모양이었다.

좁은 바닥에 살자면 누구하고 혐의지거나 유감을 품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 용모의 의견이었다.

용모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가 좀더 용기 있게 사실 그대로를 밝힘으로써 진실이 거짓의 힘에

은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을 용모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용모에게 충고하고 싶었다.

나 자신도 내 할말을 못하고 사는 주제에 하물며 충고일까만,

전적으러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말 수도 없었던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만고부동의 존재이긴 하지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일시적으로 거짓의 횡포에 눌리는 수난을 겪을 수도 있다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진실을 아는 자가 잠시라도 그런 자세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다까지나 위장일 뿐이며 진실 자체와는 항상 무관하다고 말하고,

진실을 아는 자가 잠시라도 그런 자세를 취해 보이는 것은 진실이 공개될 때까지

그 증거를 완전한 형태로 보전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인 것이며

그 증거의 가장 완전한 형태가 곧 양심인바, 정의가 질서를 바로잡을 때

그 증거에 의해 진실은 공인받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믿는 행위가 삶의 바탕이 될 것이라고 말한 거였다.

용모의 경우 법정에서조차 본의 아닌 허위 진술을 뒤집어엎지 않으면

삶의 기권이나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사실을 목격한 증인이 성문이 부자 외에도 방앗간에 와 있었던

조순만 오수길 두 친구나 더 있었다.

그러나 용모는 정식 재판을 청구할 만한 주제가 아니었고 허위 진술을 뒤집어엎을 만한

배포도 없어 보였다.

용모는 그냥 맨입으로 돌려보내면 걸려서 쓰겠느냐며

역전다방 옆 간판 없는 집에서 장국밥과 소주를 샀다.

재판소는 역전거리에서 한길로 잠깐 나가다가 그전 기름창고 터에

2층 붉은 벽돌로 새로 올린 등기소 건물 한구석에 있었다.

오죽잖은 등기소 건물에 곁방살이하는 법정을 보자,

나는 실감이 안 나고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처럼 초라한 건물 구석방에서도 엄숙한 분위기로 법률이 집행되어,

 인권의 유무, 투쟁의 승패, 가문의 흥망, 남녀의 이합, 재물의 득실 등

사람의 온갖 희비애락이 결정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여러 해에 걸쳐 나의 친구나 문단 선배들이 여기서는

밝히기 무엇한 사건에 얽히어 재판소 출입이 예삿일로 되자,

나도 묻어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대소 재판정의 인상이 너무도 짙게 자리 잡고 있던 까닭이었고,

그리고 이제 그나마도 그 방청이라는 것마저도 이 핑계 저 핑계 하며 그만두게 된,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스스로 조문하는 치욕감이 오장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용모와 내가 법정에 들어섰을 때는 주제꼴이 추렷한 사람으로만 어디서 골라온 듯 꾸밈새가

대중없는 사람 스무남은 명이 앉아 있었다.

한자리에 나람히 앉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분은

즉결 피의자를 비롯해서 원고 피고 증인 방청객 등 사람마다 처지가 다를 것이 분명했다.

한복 차람의 중늙은이 둘에 나머지는 중년 사내들이었고 철공소 공원인 듯한

더벅머리 청년이 시선을 끌었다.

법정은 스무 평 남짓해 보였다.

바닥에는 국민학교 아이들 것 모양으로 세 사람씩 앉게 된 나무걸상 여섯 개가 두 줄로 놓였는데,

그 사람들만으로도 빈자리가 없었다.

언뜻 보아 다른 법정과 다르기는 검사 변호사 서기석과 증언대가 없고 모든 비품들의 규모가

작으며 간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외투와 모자를 벗고 조심스럽게 앉아서 재판장석 옆에 벌겋게 달아오른 선풍기처럼

작은 석유 난방기를 쳐다보거나, 등받이가 붉은 융단으로 덮인 재판장 의자를 올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출입문 앞자리의 입회 나온 사법 경찰관 한 사람도 피의자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용모와 나는 맨 뒷줄 가장자리에 앉았다.

누군가가 앞자리 어디서

"시간이 워치기 됐디야?" "다 돼가는디."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정리가 서류다발을 들고 나와 판사석 앞에 놓았다.

이윽고,

"기립 ― ." 소리에 모두 일어서고,

 스물다섯 위는 아닐 젊은 판사를 따라 제자리에 우루루 주저앉았다.

판사가 앉자마자 맨 위에 놓인 기록을 들여다보며 사건을 호명했다.

"방장호 씨, 강영춘 씨."

반백머리를 이맛전만 남기고 바짝 밀어붙인 60대의 한복 늙은이와

밤색 가죽점퍼에 가죽장화를 신은 40 안팎이 판사 앞으로 나왔다.

"강영춘 씨, 6개월 전 빙상호 씨로부터 한 달 기한으로 5만 원을 차용하고

현재까지 원금과 이자를 갚지 않은 게 사실입니까?"

판사가 점퍼를 보고 물었다.

"아니지요. 제가 형편이 필 때까지 기다려달라구 사정했지요.

그런디 안된다구 자꾸만 독촉을 허길래, 정 그렇다면 내가 가진 건 석탄밖에 없으니

그게라두 대신 가져갈려면 가져가라 했습니다. 안 갚는다구 헌 적은 없습니다."

"방상호 씨가 인부 시켜 석탄을 실러 가니까

깡패를 동원해서 위협하여 인부들이 위헙을 느끼고 되돌아왔다는 건 뭡니까?"

판사가 되묻고 강이 대답했다.

강은 탄광 덕대인 모양이었다.

"절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방씨가 중상모략헌 겁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디,방 영감 증말 이러면 맘에 안 들어요."

그러자 방이 허리를 굽실하고 나서 말했다.

"시방두 공갈치는 거 판사님께서 보셨지유?

일꾼들이 탄을 못 푸고 그저 왔글래 왜 그랬냐구 물으니께 뭐라구 허는고 허니,

깡패 같은 청년 여남은이서 탄데미 위로 우루루 올라가서 좋찮은 눈으로 흘겨보며

여차허면 시비를 허자구 헐 판 같더랍니다유.

게 맞으면 맞는 늠만 손해라 싶어서 그냥 왔다는 겝니다유.

그사람들두 품팔어 먹구사는 사람인디 빈 차루 올 이치가 뚔거던유."

"이 노인네 ― 똑똑히 말해요. 도대체 무슨 억화심정으루 이러는 게유?

아 그럼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디, 광부들두 자기들이 목숨을 걸구 파낸 탄을 엉뚱한 것들이

와서 덮어놓구 삽질허면, 광부도 사람인디 그냥 보구만 있겄소?

무엇이 깡패 같더란 게요. 깡패라고 마빡에 써붙였던가요? 시방 때가 어느 때요?

그러지 마슈, 그런 식으로 국민총화를 저해허지 말라구요.

또 남의 돈 쓰고 몇 달 이자 밀리기두 예사지,

요새 한국 재벌이라는 사람들두 츰에는 다 그런 고비 한두 번 안 넘겼는 줄 아슈?

그 사람들은 나라에 진 빚두 몇해씩 안 갚습니다.

서루 아는 처지에 고까짓 것 가지구 고소가 다 뭐요, 고소가…… 나 원 재수 없을라니까."

"당신은 한마디하고 다시 말을 이으려는데 강이 먼저 말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받을라구 노력허는 사람한테는 줄라고 애쓸 게 없는 겝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디…… 츰부터 가만히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탄으로 퍼가라 이겁니다. 방 영감두 법이면 단 줄 아시는 모양인디 맘대루 허시라구.

나두 이왕 이런 디까장 끌려와가며 챙피 당헐 거 다 당헌 사람이니께."

"말 조심해 ― 법정 모욕죄로 들어가고 싶어? 사과해!"

판사가 얼굴빛을 바꾸며 호통쳤다.

"예. 국민 여러분께 죄송허게 생각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강이 얼른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말이 어떻게 돼 나가는지 알고나 그러나 되는 대로 주워섬겼다.

"이 사람 돼먹지 않았어……. 피고는 15일 오후 5시까지 원고에게 원금과 이자를 갚으시오.

이자는 6개월분이오. 그리고 원고의 소송 비용 820원도 피고가 부담해요."

판사가 기록을 옆으로 치우면서 판결했다.

나는 실소를 했다. 강이 감정의 동물 소리 좋아하다가 자승자박해서보다도,

근년에 들며 먹고살 일 생긴 것치고 개나 걸이나 라디오 텔레비젼에만 나오면

으레 판박이로 국민 여러분 덕택 안 찾는 것이 없고,

국가와 민족 앞에 고개 숙여 감사한다는 말 할 줄 모르는 자가 없더니,

이제는 즉결재판소에 나온 피의자마저 그런 말을 해야만 되는 줄로 아는 꼴이 우습던 것이다.

"장국선 씨 ―."

판사는 곧 다음 사건을 불렀다. 거기에 대답하고 나온 것은,

기름때에 결어 번들거리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은 더벅머리 청년이었다.

자동차 정비공이거나 철공소 공원으로 미성년자임이 분명했다.

옷만 기름때가 더뎅이진 것이 아니라 두 손과 얼굴도 검댕을 뒤발한 폭으로

세수도 제대로 못한 꼴이었다.

꺼칠한 것이 유치장에서 하룻밤쯤 새우잠을 잔 모양이었다.

들어보니 읍내 한구석에 철공소 직원으로,

주인 담배 심부름으로 잠깐 집 앞에 나왔다가 장발로 잡히고,머리 깎이기를 거절하여

즉결로 넘어 온 거였다. 서울 같으면 장발 단속 강조기간에도 활개치고 다니기 알맞은 머리였다.

도시와 농촌의 사람 눈은 아직 평준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판사가 무슨 말끝엔가 말했다.

" 그러니까 피고인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잘 안다 이거군."

그러나 장은 목젖에 멍울 선 어조로 부드럽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어유. 그 아저씨더러 솔직히 아저씨는 이용사 자격증이 뚔으니 손대지 마시라구,

또 솔직히 질바닥에서 막깎일 수는 없으니께 놓으시라구 했더니

무턱대구 이자식 저자식 허구 막 욕을 허데유."

판사는 웃음기를 머금었으나 방청석은 굳어진 표정 그대로였다.

"언어도단의 언사로 본건 사법경찰관을 우롱하여 공무집행을 방해한 ― 방해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했는가 이야기해 봐요."

"그건 솔직히 그분이 저더러,

그렇게 똑똑허면 진작 판검사가 될 것이지 왜 철공소 직공으로 출세를 헐라구 허느냐 허구 비꽈서,

솔직히 아저씨두 그렇게 똑똑허구 쎈 분이 왜 이런 디서 이러느냐구 헌 것뿐인디유."

판사가 기록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전에 한 말이 또 있어……. 장발단속은 역사적 역행 운운하며 비방했다 ――고 되어 있는데,

이건 무슨 이야기요?"

"그건 솔직히, 그분이 저더러,

너는 잘나서 똑똑허니께 5천 년 역사상 우리나라 단발령이 내린 지가 백년이 넘는다는 것을

잘 알 거라구 허면서 비웃데유.

그래서 저두, 솔직히, 아저씨두 똑똑해서 역사를 잘 아시니께

우리나라 5천 년 역사 중 4천 9백 년 동안은 세계 최고의 장발족 국가였다는

역사적인 사실두 아시라구 헌 거예유…….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그럼 너두 상투를 틀구 갓을 쓰든지,

계룡산 미신교 믿는 사람처럼 머리를 질게 땋든지 해라,

그러면 단속허지 않겄다, 그러데유. 그래서 제가 솔직히, 그건 왜 안 깎느냐,

그건 장발이 아니라구 정해진 법이 있느냐,

허나께 그 아저씨가, 그런 사람은 종교적인 신념인 있어서 그렇다 그래유.

그래서 제가 솔직히, 나두 신념이 있으니께 머리를 못 깎겄다 헌 거예유."

"그 신념이 뭔가 말을 해봐. 어떤 신념이오?"

판사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을 붉게 적시며 물었다.

장은 순간 어름대는가 싶더니

"그것은…… 미관상 필요헐 거 같어서유……."

하고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판사가 한쪽 팔을 장에게 뻗으며 말했다.

"미관상, 미관상도 좋은데 이리 좀 와봐요. 이리 더 가까이 와봐 ―."

장이 두어 걸음 다가서자 판사는 장 왼쪽 귀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목덜미 뒷덜미를 살펴보더니

기록을 집어 옆으로 갈라놓으며 판결했다.

"미관상 신념을 위해서, 이 귀때기하고 모가지 때나 좀 벗겨. 그 꼴에 미관상 좋아하네……. "

하더니 이어 출입문 앞에 앉아 있던 경찰관더러 말했다.

"이 사람 데리고 나가 목욕시켜서 집에 보내세요."

다음 차례가 용모였다.

용모는 대답을 하고 일어서면서,

"암만 생각해 봐두 말여, 고연한 덧낼 게 아니라 내가 헌 짓이라구 뒤집어쓰는 수밖에 뚔겄다."

내게 귓속말을 하고 나갔다.

그가 움직이자 새삼 점심에 마신 술내가 물씬했다.

판사는 기록을 한눈으로 훑고 나더니,

"야생 조류나 야생 동물뿐 아니라 입산 금지와 낙엽 채취를 비롯해서 자연을 보호하자는 것이

우리 모두의 당연 과제라는 것을 알 만한 분이 왜 이런 짓 했어요?"

판사는 앞서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그만큼 위엄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용모는 거듭 읍한 뒤에도 잔뜩 지리숙어 가지고 입을 못 열고 있었다.

"꿩이 천연기념물은 아니지만 비록 참새 한 마리라도 그것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보호하자는 건데, 보호하는 사람 따로 있고 해치는 사람 따로 있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판사가 거듭 나무라서야 용모가 대답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눅이 들렀거나 겁에 질린 음성이 아니었다.

"물런 그렇지유. 그러나 말입니다. 꿩은 말입니다,

과연 현재 보호헐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두 문제란 말입니다.

보호헐 건 보호허야 마땅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실지 농작물을 망치는 해조는 으레 참새만 긴 줄 아시는데 말입니다.

꿩의 피해는 말입니다,

사실 농군에게는 말입니다,

헐씬 심각하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그냥 참고로 아시라구 말씀드리는 말입니다."

용모는 아무것도 꿀린 게 없다는 투로 원기 있게 말했다.

 술기운덕도 아닌 것 같았다.

지은 죄 없이 고개 조이고 살아온 사람이 오랜만에 켜보는 기지개와 몸짓으로 믿어야 될 성 싶었다.

판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용모룰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꿩은 잡아도 무방하다, 해조를 퇴치했다 ――이겁니까?"

"도낏자루감으로 나무를 찍을 때는 쥐고 있던 도낏자루를 기준해서 찍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뭐가 아니오?

당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등쌀에 야생 동물이 안 남아나니까 보호하자고 하는 거 아니오?"

"제가 한말씀 드리겄는디유, 제가 뭐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예. 제가 잘못한 것은 벌을 받아야 옳습니다. 예, 받겠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저도 법의 보호를 받고 싶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는지 모르겄습니다마는……."

"괜찮으니까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거 아니오?"

"예, 그러믄유. 여기는 바깥허구 달러서 여러 가지 것을 보호허는 법정이라

이런 말씀도 드릴 수 있는디 말입니다, 동물에 물격이 있으면 저두 인격이 있으니 말입니다,

저두 야생 동물 ―― 아니 그게 아니라, 야생 인간인디 말입니다…….

야생 인격이 물격보다두 거시기 허면 말입니다……. 그럴수는 뚔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용모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물은 부드러우나 추운 겨울에 얼면 굳어져 부러진다던,

어디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판사가 기록을 젖혀놓으며 판결했다.

"피의자가 개전의 정이 전혀 안 보여…… 법정에 출두하는데 술에 취해가지고 와서 횡설수설하고,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없으니까…… 이런 사람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서 본보기를 삼아야 해요.

벌금 2만 원 ―."

(『세계의 문학』1976. 12 )


Eugene Damare - Le Merle blanc op 161 (하얀 티티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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